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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6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사도 14,5-18
복 음 : 요한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워싱턴 주의 어느 식당 주인과 직원으로 있는 요리사가 다투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즉, 커피를 어디에다 마셔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요리사는 찻잔에, 식당 주인은 아무 데나 마셔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분명 별것도 아니었는데, 서로 언성이 높아졌고
식당 주인은 이 요리사를 죽이겠다면서 총을 들고나와 발사했습니다.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은 안타깝게도 한 명을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총을 식당 주인이 들고 있었으니
요리사가 죽었을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식당 주인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발에 의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식당 주인의 사망 원인은 심장병이었습니다.
극도의 분노와 더불어 격렬한 움직임까지 더해져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몸을 크게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고생할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은 쉽지, 화가 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화가 날 때 주위를 딴 곳으로 돌리고,
가능한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 분노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움,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를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할 확률이 높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행복은 ‘사랑’에서만 시작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셨고
당신이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사랑하시고, 사랑 가득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약 사랑한다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또 싫어하는 것만 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를 제시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금방 들통납니다.
여기에서 '계명과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지 않고서는 그분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나 규칙이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전제됩니다.
그러기에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
곧 마음으로 결속된 바를 사랑으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첫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그렇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행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이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4,21 참조).
이미 그이 안에 거처를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당신의 어좌로 삼으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이 안에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안에’(εν)서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성령으로 일치를 이루어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내주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삼위의 사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표시는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1요한 4,16)
그러기에 만일 지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고,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구글’은 검색엔진입니다. 궁금한 것을 입력하면 정보를 알려줍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서 운전합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유튜브를 이용해서 영상물을 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구글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글의 운영방식이 비대면 사회에 최적화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글의 경영 마인드가 ‘사용자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는 수익의 50%를 영상물을 올린 사용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사용자를, 고객을 수익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고객의 만족을 넘어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기업은 어려운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감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8년 전의 일인데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납니다.
여행 갔다가 신발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습니다.
신발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사무실로 가지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서비스센터로 갔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습니다.
신발을 다 고친 다음에는 택배로 신발을 보내왔습니다.
사용자 중심의 회사였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회사였습니다.
그 신발회사의 이름은 ‘칸투칸’이었습니다.
저는 칸투칸 신발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누가 신발을 산다고 하면 당연히 칸투칸을 추천했습니다.
본당에서 미사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사시간에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입니다.
장례가 나면 연령회장님은 두 가지를 고려해서 미사시간을 부탁하였습니다.
요즘은 화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화장하는 시간을 고려합니다.
선산으로 고인을 모시는 경우는 선산까지 가는 거리를 고려합니다.
보통은 오전 7시나 10시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새벽 5시에 할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장지가 멀기 때문에 유족들이 일찍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하기 위해서는 저도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전례봉사자, 성가대도 일찍 나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모두가 양해를 해서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용자 중심으로,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분이 2,000년 전에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먹고, 우리와 같이 마시고, 우리와 같이 웃고 우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워 들판을 거닌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객 감동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규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아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작용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만 보았던 진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과 지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나와 아버지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 안에서 모든 악습과 욕정을 태워 버리시고
그들을 당신의 깨끗하고 합당한 성전이 되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의 마음속에 오시어 그 안에 사신다.
이 말씀은 그분이 당신 친구라고 부르신 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시며,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이다.”(24절) 하신다.
이 말씀을 하신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드님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외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그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그것들은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는 위에서 오는 빛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의 권위를 따르게 되었다. 즉,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이 말씀은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라는 말은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한다.’라는 의미이다.
그분은 지혜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사랑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과 함께 온전히 깨닫게 되며
아들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힘겹고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는 것,
참으로 멋진 기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활발했던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그리고 수난과 죽음의 시기에 이어진 영광스런 부활과 승천의 시기가 지나가자
이윽고 사도들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사도들이 보여준 모습은 놀랍게도 활기차고 신명나던 공생활 기간
예수님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또 다른 예수님처럼 보였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죽었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백약이 무효이던 불치병 환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리스트라에 도착해 설교를 시작했는데,
마침 거기에는 태어날 때부터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 한 명이 앉아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를 유심히, 그리고 측은히 바라본 바오로 사도가 그에게 외쳤습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사도행전 14장 10절)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평생토록 누워있거나 겨우겨우 일어나 앉아있던 그였는데,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엄청난 광경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군중은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르나바를 제우스 신으로, 바오로를 헤르메스 신으로 여기고
두 사람 앞에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까지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그리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며 외쳤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4장 15절)
보십시오.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에게는 우리와 차별화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극한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그저 종이요 도구일 뿐, 기적을 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겸손하고 명료한 신원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고,
나와 함께 길을 걸으시며, 내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하신다는
뚜렷한 주님 현존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분의 능력이 내 손을 통해 발휘되고 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결과가 놀라운 치유 활동이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활발하고 역동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대는
예수님 공생활 기간과 사도 시대로 이제 종료되었습니다.
따라서 괜히 어설프게, 어줍잖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환자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시오!’ 라고 외치다가는 큰코다칠 우려가 다분합니다.
이제 기적은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 기적은 예수님이나 사도시대 기적과는 사뭇 그 유형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외적인 기적보다는 내적인 기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안 되는 그를
기꺼이 용서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기적입니다.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 결핍과 한계로 인해 힘겹고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는 것, 참으로 멋진 기적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로 어처구니없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
너무나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비장한 자리에서도 아직은 미덥지 못했을 당신 제자들인데도
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잘 지키리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라고 부르신 두 분,
즉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의 도우심은 초대교회 현실에서
공동생활 양식과 이를 전하는 선교활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는다거나
믿는 이들을 형제처럼 받아들이는 공동생활 양식은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을 능가하는 성령의 기운으로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박해자였던 바오로를 번개와 벼락으로 돌려세우셨고,
십 년 넘은 숙고 끝에 예수는 메시아이시라는 부활 신앙을 확신시켜 주셨으며,
바르나바를 시켜 사도단과 안티오키아 공동체 신자들에게 신원을 보증함으로써
근신 중에 있던 사울을 사도요 선교사로 세우신 것도 모두 성령의 이끄심이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그는 20여 년간 로마제국에 복음을 전했으며
끝내 그의 사후 2백여 년 만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으로 하여금
국교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그 첫 번째 선교여행 중에 겪은 일들 가운데
대표적인 장면 하나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코니온에서는 박해를 받아 쫓겨나더니(사도 14,5)
리스트라에서는 앉은뱅이를 고쳐준 영웅으로 칭송을 받기도 했으나(사도 14,11),
이코니온에서부터 쫓아온 유다인 박해자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사도 14,19).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것만큼이나 극적이었던 이 과정을
다 지켜본 티모테오가 성소를 느껴서 첫 제자로 자원한 일도
성령께서 바오로의 선교활동에 개입하신
커다란 도우심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사도 16,1-4; 2티모 3,11).
이렇듯 초대교회 시절에 부활의 사기지은으로 맹렬하게 활약하셨던 성령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모든 인류의 조상이며 특히 유다인들의 직계 선조인 노아가
의롭고 흠 없이 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창세 6,9).
그리고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이
고향 칼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탈출하게 하신 바 있었는데(창세 12,1),
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이 하느님께 맞서고자 세운
바벨탑이 상징하는 우상 숭배 문명을 탈출한 것이었고
성령께서 아브라함에게도 노아에게 주어진 같은 신앙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10대손인 아브라함의 족보를 따지자면
그는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으로서
특히 그 4대손인 에베르의 큰 아들 펠렉의 6대손이었는데,
에베르의 작은 아들인 욕탄은 자손들과 함께 바벨탑의 동쪽으로 가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까지 가서 살았습니다(창세 10,30).
노아의 또 다른 아들인 함의 후손들이
하느님 신앙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물들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천하장사로 교만해진 니므롯이 바벨탑을 세운 것과 비교해 보면,
셈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과 욕탄이 각각 서방과 동방으로 나뉘어
노아의 유훈대로 만방에 흩어져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전파한 것은
역시 성령께서 이끄신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를 두고 창세기에서는,
“에베르에게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펠렉이요 그 동생의 이름은 욕탄이다.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창세 10,25)고 기록해 놓은 이유가
바로 이 하느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대홍수 이후에 노아는 제일 먼저 하느님께 제사를 바쳤습니다(창세 8,20).
카인의 후예들이 죄를 저질러(창세 6,5-6) 대홍수를 자초했으므로 속죄를 해야 했고,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시고자 자신들을 살려주신 데 대해 감사도 드려야 했으며,
대홍수가 그친 후에 하느님께서는 무지개로써 노아의 후손들을 축복하시며
번영의 계약 표징으로 삼으시겠다(창세 9,9-17)고 하셨으므로,
이때부터 노아와 그 후손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내면서
여기서 알아낸 하느님의 뜻을 살펴 살아가는 경천(敬天)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으로 가 자리를 잡은 욕탄과 그 자손들은
이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문명을 세웠으니,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고조선 문명(신용하)입니다.
조상 노아의 예에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사람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 중에 으뜸이었으므로,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공력을 들여서 쌓은 제단이
크고 무거운 돌로 쌓은 고인돌이었습니다.
제사의 전통과 고인돌 유적은 한민족이 아브라함과 비슷하거나
조금 이른 시대부터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이끄심에 충실하고자 애를 썼음을 알려주는 역사의 흔적이요,
한민족이 신성에 뿌리내린 문화를 간직하도록
성령께서 이끄신 경천 사상의 발자취인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합작으로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에서 이루신 바를 기준으로 삼도록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세상에 현존하시고,
성령께서는 이 기준이 보편적으로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서 뿌리내리고 꽃피우며 열매 맺도록 이끄십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의 복음 부분은 분량이 길지 않은 편이지만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구약 시대를 성부의 시대라 하지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은 그들을 돌보시며, 백성은 당신만을 섬기게 하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성자의 시대라 합니다.
그때는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께서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셨습니다.
성부의 시대와 성자의 시대를 칼로 베듯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구약 역사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계약이 나왔고,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성자를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가셔서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시지요.
성부, 성자는 사랑 역시 독자적일 수 없습니다.
육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까지 얻는다니,
게다가 성부, 성자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니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다시 없을 엄청난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얹어 주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예수님께서 성령까지 언급하시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모두를 제자들에게(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곧이어 다가올 성령의 시대는 교회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떠나신 후 세상에 남을 제자들을 지켜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실현할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실 성령,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주시고 기억하게 해 주실 성령을 소개하십니다.
그러니 "한처음에" 세상이 창조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단 한시도 하느님의 현존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모든 피조물, 전 인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어지는 보살핌 속에 기나긴 세월을 대대손손 이어온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리스트라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을 듣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한 앉은뱅이를 치유하자
군중이 그들을 신으로 여겨 제물까지 바치려 한 소동이지요.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사도 14,11)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듣고 싶어하셨을 신앙고백입니까!!!
물론 "육화, 강생"의 신학적 개념과 "사람 모습"이란 말의 미묘한 차이를 볼 때
똑같은 표현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치유 기적 한 번으로
신의 현존을 고백하는 이방인들의 열린 마음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사도 14,15)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그동안 그들이 섬겨온 것들의 헛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사도 14,16)는 것,
그러나 "양식과 마음의 기쁨"(사도 14,17 참조)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그동안 리스트라 사람들이 얻은 일용할 양식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우신 자연의 질서를 통해 왔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면서 누렸던 마음의 기쁨은
실상 성령의 현존이었다는 것을 설파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느님도 성령도 몰랐지만,
당신 이름도 모르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이 대목은,
후일 아테네 설교(사도 17,16-34 참조)에서 드러나듯,
이방인 선교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오셨기에 더욱 친숙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도 얻고 성령도 누리는 겁니다.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들과는 친한데 아버지는 어렵고 성령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무지하고 우매한 우리로서는 어느 한 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부족한 채로 예수님께 드리는 불완전하고 보잘것없고 초라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삼위 하느님과 함께 살게 해 준답니다.
렙톤 두 닢어치도 못 되는 가난한 사랑을 보시고
삼위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더 기뻐하시며 함께 달려오시니,
이 사랑은 정말 한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존재를 걸 만하고 일생을 걸 만한 배팅이 아닌가요?
이 사랑의 초대에 흔쾌히 응답하여
그 사랑의 큰 은혜를 누리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