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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이 만든 복잡한 사회 구조다. 땅 아래로 뻗어 나간 뿌리가 나무에서 만나듯, 사회의 뿌리를 찾고 찾아가 보면, 결국 우리라는 인류의 큰 나무에서 만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에 뿌리내린 우리는 직간접으로 사회의 연결고리 안에 끼어 있다. 이번 참사를 통해 랜딩기어를 전개하지 못한 것은 안전에 무관심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킨다. 동시에 갑작스럽게 속수무책으로 안전사고에 희생당하는 우리가 불쌍하기도 하다. 영상과 사진으로 그 참혹한 참사 현장을 보고 또 본다. 그 현장에 가 있는 듯 가슴이 메어 온다. 오래전, 그날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 식구는 방 세 칸, 마루와 옥상이 있는 아주 소박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작은형과 나는 그중에 작은 방 하나를 공유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 책상 옆에 형 책상이 사이좋게 나란히 있었다. 2살 많은 형은 밤늦게까지 공부했지만, 밤 11시가 되면 오른손 엄지와 장지에 모나미 볼펜을 올려놓고 돌리면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형과 내가 좋아하는 한 노래가 있었다. 물론 형은 그 노래를 녹음해 둔 카세트 맨 처음 목록에 기록해 두었다. 사이먼 가핑컬의 ‘험한 세상 다리 되어’ 전주 부분이 피아노 반주로 흘러나온다. 이불을 덮고 막 잠이 들려는 나는 형처럼 신경을 곤두세워 그 노래를 감상했다. 노래 제목은 거센 물살을 건너게 하는 다리지만, 잔잔한 물결의 느낌은 무엇 때문인가? 먼 행성에서 하루 만에 질주해 온 햇살의 다리를 쭉 펼 수 있도록 피아노 연주가 고요하게 흘러나온다. 그 곡이 끝나면, 너무 아쉬워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형, 카세트로 다시 한번 들어 보자” 그러면, 형은 돌리던 볼펜을 내려놓고 검지로 카세트 플레이 버튼을 탁 눌렀다. 가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용히 썰려 나가는 물결 속으로 나는 빠져들어 가고 눈을 뜨면 평온한 아침 언저리에 밀려 나와 있었다. 그렇게 함께 같은 방에서 살면서 음악을 좋아했던 우리는 형제애가 좋았었다.
같이 산다는 것은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고등학생이 된 형은 책을 많이 읽었다. 만화책이 대부분이었지만. 만화책 보는 것이 금지된 시절. 형은 어머니가 철제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시면 쏜살같이 장롱 아래로 만화책을 던져 숨겼다. 내가 그 장소를 알고 있었다. 행동이 길수록 의심은 그림자로 남는 법. 하락하고 있는 형의 성적표를 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으셨다. 의심의 여지를 풀기 위해 어머니는 나에게 접근하셨다. 형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소상히 말하면, 아이스크림은 물론 운동화까지 사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어머니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나는 형의 그 비밀스러운 일과 숨겨 놓은 장소를 알려 주고 말았다. 그다음 날,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신다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구석구석 방을 쓰는 척하시다가 장롱 아래에 빗자루를 쑥 집어넣으셨다. 그리고 물고기 낚듯이 하나씩 어머니의 그물에 걸려든 만화책들이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 앞에서 고개 숙인 형. 그리고 저녁 늦게 나는 아이스바를 빨고 있었다.
어느덧, 형은 대학교에 가고 나는 20대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다른 언어, 음식, 사는 방법, 그리고 친구도 없는 낯선 땅에서 추억은 노을과 함께 선명히 붉어졌다. 힘들 때, 그리워할 것이 없었다면 나는 더 외로웠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거친 생활을 살았던 날들. 형이 대학교를 빨리 마치고 속히 미국에 와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석양에 낯설게 담아 하루의 페이지를 넘겨 보냈다. 그만큼 형과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세월은 흐르는 법. 형은 대학교를 마치고 드디어 미국으로 왔다. 초라한 이민 형편을 보면서 형은 그랬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다시 뭉쳤다.“ 내 마음의 영웅답게 형은 위로와 격려로 디아스포라의 불면에 시달리는 나를 희망으로 채워 주었다.
9월 첫 토요일 아침, 형과 나는 냉장고를 부엌으로 옮겼다. 그날의 날씨를 잊지 못한다. 늦더위가 기성을 부리던 날이어서 우리는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하얀 냉장고를 들어 옮겼다. 그 일을 마치고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삐삐가 울렸다. 쿠퍼 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형이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간호사의 목소리는 너무 차분해서 예감이 좋지 않았다. 병원 4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가운을 벗으며 나오는 다른 방문자가 중환자실 문을 열고 나왔다. 열린 문틈으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하얀 붕대를 머리에 감고 누워 있는 형의 얼굴. 머리에 달린 호수와 입과 목을 통과해 기도로 연결된 호수, 팔과 심장에 연결된 각종 기계와 핏줄로 주입되는 각종 수액이 보였다. 움직임이라고는 깊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눈알의 작은 흔들림 뿐. 형은 아침에 보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음주 운전자가 질주하면서 형 차를 박았다고 한다.
사고 난 형의 차는 차체 구조 자체가 비틀려져 있었다. 그 사고는 형의 인생을 장애로 비틀어 놓았다. 형과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은 안타까운 한탄으로 변해 버렸다. 음주 운전자를 처벌하는 법이 없었던 그런 시절을 탓할 기운도 없었다. 이번 제주항공 참사를 통해 사랑하는 분을 잃고 울 힘조차 없을 유가족들은 새해를 어떻게 견뎌야 할까? 2025년 새해 창공을 향해 랜딩기어를 접고 비상해야 할 텐데, 가슴에 묻어 버린 랜딩기어로 길고 긴 한 해를 어떻게 비행해야 할까? 착륙하는 비행기 너머로 새해는 여전히 그날처럼 떠 오르고 있다. 그날을 품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 거센 물살을 건너는 다리(Bridge)가 되어 살아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