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비석의 기원
비(碑)는 주(周)나라 황후의 능을 조성하고 묘광(墓廣)에 시신을 하관할 때 밧줄을 도르래에 걸어 안전하게 내리기 위해 전후에 설치했던 장치의 기둥인 비목(碑木)이 비의 기원이라 전한다. 비는 장례에 사용하던 비목에서 출발하여 비석으로 발달 되었고 한대(漢代)에 와서 문자를 새기게 되어 각석(刻石)이란 말로 쓰여 왔으며 비의 원래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기(禮記) 제의편(祭儀編)에는 옛날에 묘문 앞에 세워두고 제사 때에 희생(犧牲)(제사 지낼 때 바치는 소, 양, 돼지 등 짐승)을 걸던 것이라 하며 의례 토속례에는 옛날에 제후나 사대부의 집에 비를 세워두고 해 시계와 같은 용도로 (日影石)사용 되었다 하고 예기(禮記)단궁(檀弓)에는 장사 지낼 때 관의 네 모퉁이에 세워 메 다는 것으로 새끼줄을 달아 관을 내리는데 사용 하였다 한다.이렇게 쓰이던 비는 점차 그 용도를 달리하게 되었는데 진(秦)의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태산에 올라가 자기의 공적을 새겨 석비를 세우고 각석(刻石)이라고 하였는데 이 때 까지도 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또한 후한(後漢)에 이르러서는 유교 이념에 따라 후장(厚葬) (생존시에 사용하던 물품 또는 귀중품을 묻어 주는 것) 과 더불어 크게 유행하면서 수량과 양식면에서 큰 발전을 하게 되고 당(唐)대에는 비의 전형이 된 이수(이首) (뿔없는 용의머리)와 귀부(龜趺)(대좌에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는 것) 의 양식이 정형화 되었다.우리나라 에서는 언제부터 입비(立碑)가 시작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비석은 낙랑(樂浪)의 점제현 신사비(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성현리)가 85년 건립 되었고,고구려 광개토대왕 능비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신라 영일 냉수리비 503년 태종 무열왕릉비는 661년 세워지고 고려시대에 와서 탑비(塔碑)가 많이 성행하였다.
2.비석의 종류와 형태
비는 대개 비신(碑身)을 받쳐주는 대좌(臺座)와 비문을 새기는 비신과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 = 가첨석(加첨石)으로 구성되어 있다.대좌는 비신을 받치는 기석(基石)인데 그 형상에 따라 거북이의 모양을 하고 있으면 귀부(龜趺)라하고 복련(覆蓮)(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는 대좌) 안상문(眼象紋) 당초문(唐草紋) 무문 (無紋)등의 모양이 있으면 지대석(地臺石) 또는 비좌(碑座)라 한다.개석도 그 형상에 따라 용이나 이무기 모양이 있으면 이수(이首) 연꽃문양과 보주(寶珠)가 있으면 하엽(荷葉), 구름과 꽃잎 해와 달 등이 있는 것은 관석(冠石)이라 하며 팔작지붕의 가첨석이 대표적인 개석(蓋石)이다.개석이 없는 것도 있으며 비신의 상부가 둥굴게 생긴 모양이면 원수(圓首) 모서리에 각(角)을 접었으면 규수(圭首), 모서리에 각이 있으면 직수(直首)로 분류한다.비좌원수는 비신과 이수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대석과 비신 ,이수 등이 하나의 돌로 된 것을 통비(桶碑)라고 한다.비의 형태를 나타내는 말로 규수방부(圭首方趺)와 이수귀부 라는 말이 있는데 규수방부는 비수(碑首)의 각이 지고 방형의 기석(基石)을 이룬 것으로 이수귀부의 비에 비하여 신분이 낮음을 나타낸 것이다.비수(碑首) 비신(碑身) 비좌(碑座)는 천(天) 인(人) 지(地) 를 의미한다.비수에 있어 이의 형상을 조각하여 이수라고 하는데 뿔 없는 용을 말한다.비신은 비문이나 명(銘)을 새기는 곳이며 비의 정면을 비양(碑陽)이라 하고 제액(題額)(비 앞면에 쓰는 글자)을 쓰며 옛날에는 전서(篆書)를 쓴 까닭에 전액(篆額)(이수에 전서로 쓰는 글자) 이라 하였다.비의 뒷면을 비음(碑陰), 좌우 양면을 비측(碑側)이라 하며 비문이나 명(銘)을 새겼다. 비음의 글을 음기(陰記)라 한다.음기에는 찬(撰) 서(書)와 생졸(生卒) 행적 가계 건립연대 등을 기록 하였으며 문장이 길면 비의 측으로 돌아가면서 새기게 된다.
돌이나 쇠붙이에 새기는 글을 금석문 (金石文)이라한다.
3. 비의 건립기준
비의 건립기준은 품계에 따라 비의 크기와 종류를 구별하며 5품 이상은 귀부이수의 비로 5품 이하는 비좌원수의 갈(碣)의 형태로 구별 하였고 이는 당나라의 제도를 도입해서 우리나라의 국가 사회의제도로 정착된 것이다.가례원류(家禮源流ㅡ 1711년)에 의하면 형태와 크기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였다.
4.비의 분류
비와 갈(碣)은 형태와 사용에 있어 구분이 있다.
그 모양이 편편한 사각이면 (四角柱)비라 하고 둥근것은 갈(碣)이다.비는 가첨석이 있는 것으로서 비갈과 구분한다.비는 가첨석인 개석의 모양과 대좌의 모양으로 신분을 구분하였다.비와 갈(碣)은 묘주(墓主)의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형상 높이 문장의 내용에 큰 차이가 있었다.
벼슬이 없을 때는 학생으로 제액(題額) (비 앞면에 쓰는 글자) 을 새긴다.
○묘표(墓標)ㅡ비문의 내용 중 명(銘)이 없는 것을 묘표라 하며 봉분 앞이나 옆에 세우며 비의 앞면에 관직 본관 이름(휘)등을 기록하고 뒷면에 음기를 기록한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묘갈(墓碣)ㅡ봉분 앞이나 옆에 세우며 가첨석을 얹지 않고 위가 둥그스럼하게 만든 작은 비를 말하며 이를 원수(圓首)라 하고 비신에 제액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음기가 있어 판단하기가 쉽다. 명(銘)과 묘갈명 묘갈병서가 있는 경우도 있다.
○묘지(墓誌)ㅡ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 졸 , 행적 묘소의 방향 등을 적어 봉분 앞에 묻는데 보통 돌이나 자기(磁器)가 있고 봉분의 형태가 없어져도 누구의 묘소인지를 알 수 있도록 매장할 때 묻어준다. 묘지(墓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묘지명이라 한다.
○신도비(神道碑)ㅡ종2품 이상을 지낸 관원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 100보 이내 동남쪽 길옆에 세우던 비석으로 제액(題額)과 음기를 새긴다.
○유허비(遺墟碑)ㅡ선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알리거나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유허비, 유지비, 구기비, 기적비, 사적비 등이 있다.
○송덕비(頌德碑)ㅡ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비를 말하며 선정비, 영세불망비. 기공비, 순절비, 충열비,관개비,정충단비,대첩비,순교비,전승기적비,등이있다.
○묘정비(廟庭碑)ㅡ서원 앞에 세우는 비로 건립취지와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을 새긴다.
○순수비(巡狩碑)ㅡ왕의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로 신라 진흥왕이 세운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적성비, 척경비 등이 있다.
○하마비(下馬碑)ㅡ종묘, 궁궐, 향교, 서원 등의 앞에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한다. (大小人下馬)라는 글이 적혀있다.왕이나 고관 성현의 출생지나 묘 앞에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다.
○척화비(斥和碑)ㅡ고종8년(1871)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비이다. 이외에도 공적비,열녀비,효자비,기념비,문학비,묘비(墓碑), 묘비(廟碑), 능비(陵碑), 탑비, 타루비등 여러 종류가 있다.
[출처] 비석의 종류와 형식|작성자 곡주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