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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7,1-11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주님의 집 대문에 서서 이 말씀을 외쳐라.
“주님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서는 유다의 모든 주민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3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4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5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6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8 그런데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9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10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11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2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마태 13,25)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아니,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잠들어버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한편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와 형제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밀이라는 자가 가라지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가라지가 꼭 밀 가운데 섞여 있는데, 그 가라지들을 우리가 뽑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잘 솎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까 합니다.
지금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밀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라지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지입니다.
자기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밀이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고 생각하고 솎아내려는 사람이 실은 가라지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끝이 좋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곡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만나야 합니다.
농사 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 12,19)
하나를 거둘지 둘을 거둘지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몫입니다.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 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혈기왕성했던 나머지 이리 충돌 저리 충돌, 사방으로 다니면서 좌충우돌하곤 했습니다.
돌아보니 참 부끄럽습니다.
나 자신의 심각한 결핍이나 죄 앞에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이웃의 작은 실수나 부족함 앞에는 엄청나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 주님께서 나를 무한한 인내로 참고 또 참아주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히 이웃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냈어야 마땅한데...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우리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인내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수천 년간 거듭되어온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반역에도 또다시 자비를 베푸시고, 새 계약을 맺으시며,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이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 속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 없는 나무는 즉시 톱을 들고 나가 바로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
(마태 13, 29-30)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 모순되고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종들처럼 생각합니다.
“저 악한 인간들을 지금 당장 모조리 쓸어버릴까요?”
인간의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최종 심판자이신 주님의 역할을 인간이 직접 수행해버리려는 유혹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깊은 침묵 속에 계시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신께서 직접 정한 계획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님 홀로 한 인간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의 권리를 지니고 계십니다.
악의 세력들에 대한 최종적인 단죄와 보복은 주님께 맡겨드릴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계획과 섭리, 주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원수는 종종 우리를 찾아와 우리 마음의 밭에다가도 가라지를 뿌려놓고 갑니다.
공동체를 좀먹게 하는 불평불만의 가라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이단의 가라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심의 가라지...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다양한 가라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때, 주님의 뜻, 주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다려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아직은 모릅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1)
여기서 ‘하늘나라’는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서 건설되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 또는 교회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이 세상에, 또는 교회에 왜 악인들과 의인들이 섞여 있는지를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멸망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신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에제 33,11).
2)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라는 말은 “사람들이 방심하고 있는 동안에” 라는 뜻일 수도 있고, 그냥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악’의 기원과 활동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즉 ‘신비’ 속에 숨어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비유를 생각하면, 악마는 교회 안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말에서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마태 26,40ㄴ-41)
죄를 지은 다음에 악마가 유혹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악마 핑계를 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유혹한 악마는 하느님께서 따로 엄하게 심판하시겠지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은 사람 자신도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불가항력에 끌려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서 모두 함께 믿고 함께 회개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함께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악마의 유혹과 압박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오는 박해와 고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신앙을 아예 잃어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면서 끝까지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남 탓’ 하지 말고, 우선 먼저 ‘나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3)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는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 7,1-2)
어떤 형제가 악인이 아닌데도 함부로 악인이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그 형제의 구원이 막히는 것은 아닌데, 그를 판단하고 단죄한 내 죄만 커지게 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는 용서의 권한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ㄴ-23)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또는 교회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신 말씀들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대행할 수 있도록 사목 직무와 권한을 ‘위임’해 주신 말씀들입니다.
사도들은(교회는) 아무나 마음대로 심판하고 단죄해도 되는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직무와 그 직무 수행에 필요한 권한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오직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4)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혹시 진짜 악인이라고 해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라.”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라는 말씀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은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악인이라도 회개해서 의인이 될 수 있고, 의인이라도 타락해서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될지는 ‘지금은’ 모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밀이냐 가라지냐?” - 평화 공존의 사랑과 지혜>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시편 84;5)
오늘도 계속되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가라지의 비유로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예수님은 역시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십니다.
죽어서 시작되는 하늘 나라의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가라지의 신비는 악의 신비입니다.
복음은 이어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라며 간략히 악의 정체인 가라지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악의 신비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매사 사건이나 병들 역시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삶의 신비, 죽음의 신비, 병의 신비, 사건의 신비라 뭉뚱거려 지칭할 만 합니다.
그러니 신비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원인을 찾다 보면 더욱 심연의 늪에 빠질 뿐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원인을 해명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이 처방입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 묻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답은 그대로 예수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바로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공존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밀과 가라지를 분별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처리하기도 난망합니다.
“공존의 사랑과 지혜, 밀이냐 가라지냐?”,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사람의 판단은 얼마나 불확실한지요?
과연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볼 수 있겠는지요?
가라지인 줄로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내눈에 가라지이지 타인의 눈엔, 하느님의 눈엔 밀일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 삶의 현실에서 바뀔수도 있습니다.
밀같은 존재가 가라지로 타락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은 존재도 개관천선의 은총으로 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발본색원, 과연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을런지요?
인류의 혁명과 전쟁사가 불가능함을 입증합니다.
도저히 악순환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의 괴물과 싸우다 보면 나도 괴물이 됩니다.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묘연할 뿐입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하는 악의 현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인터넷이나 신문을 들여다 보면 온통 가라지밭 같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데, 진리의 승리를 말하지만 악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역사는 조금씩 진보한다 하지만, 현재 갈수록 악화되는 지구의 현실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문명의 야만시대라는 역설의 현실입니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정말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 대해 회의하실까 생각도 듭니다.
우리 자신만 봐도 악의 존재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마음밭입니다.
말 그대로 밀과 가라지가,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이 혼재하는 마음밭입니다.
순수한 천사도 순수한 악마도 없는 이 둘이 함께 하는 인간 존재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악의 실체도 모호할 뿐 아니라 실제 뽑을 수는 없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선과 악에 대하여'라는 글이 깊은 통찰을 줍니다.
“내 그대 안의 선에 대하여 말할 순 있으나
악에 대해선 말할 수 없구나
악이란 무엇인가
다만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 외에?
실로 선이 굶주릴 때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먹이를 찾고
목마를 때면 죽은 강물이라도 마시는 법”
어찌보면 선의 결핍이 악일 수 있고, 치유받아야 할 선이 악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독종 가라지라도 깊이 잘 들여다 보면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눈에는 가엾은 중생일뿐이겠습니다.
그러니 악의 신비를 궁구하기보다는 부단히 선을, 사랑을 체험하고 쌓아가는 것이 악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악으로 상징되는 가라지를 뽑는다고 해결될까요?
뽑을수록 숱하게 생겨나는 가라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뽑아도 계속 돋아나는 가라지 같은 잡초들, 제초제를 뿌리면 밀도 땅도 죽습니다.
가라지들 없는 순수한 밀같은 선의 현실이 가능할까요.
아예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악의 가라지들 속에 단련되는 선의 밀들입니다.
제거가 아닌, 함께 공존의 균형과 조화가 답입니다.
이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양방의 처방이 아닌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한방의 경우를 닮았습니다.
선과 악의, 밀과 가라지 세력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우리의 영적수행입니다.
농사를 짓는 밭의 이치만 봐도 이해가 됩니다.
채소밭을 그대로 놔두면 잡초밭이 됩니다.
그러나 채소들을 잘 가꿔 왕성해지면 잡초들도 점차 약화되어 힘을 못씁니다.
그러니 밀의 선한 세력을 강화하고 가라지 악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수행이 필수입니다.
순수한 선의 밀만의 세상이라면 영적전쟁도, 영적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은 무기력과 무의욕으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문제는 가라지 세력의 제거가 아닌, 적절한 상태에서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실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보십시오.
누가 밀이고 가라지인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밀로 보이다가 가라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내재한 선의 모습이 드러날 때는 밀인데 내재한 악이 드러날 때는 가라지입니다.
그러니 평화공존이 답입니다.
최종의 판단은,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으로 대변되는 주인의 말씀이 답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져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은 끝까지 밀에로의 가능성을 믿으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일체의 판단은 유보한 채 하느님을 닮아 공존의 사랑과 지혜로, 지극한 관용, 인내, 연민, 이해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하늘 나라 비전을 사는 길이자 가라지 악의 세력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겠습니다.
이에 대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좋은 도움을 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선의 밀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속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너희는 이땅에 영원히 살게 하겠다.”
부단한 회심의 여정을 통해 우리 길과 행실을 바로 잡아 가는 것이 가라지 악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요 하늘 나라를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 <관자>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일을 잘 모르면 옛날을 비춰보고,
미래를 알지 못하면 과거를 살펴보라.”
현실적 삶의 지혜를 위한 필수 공부가 역사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사람 안에는 기어코 가라지를 뽑아내고자 하는 폭력성, 잔인성, 배탁성으로 요약되는 괴물이, 악마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라지가 가라지를 뽑는 괴이한 현상입니다.
가라지 세력의 괴물과 악마를 길들이기 위해, 순치하기 위해 참된 교육이, 부단한 금욕수행과 덕의 수행이, 준법 정신의 앙양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하는 수행들이, 전례기도 은총이,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가라지 악의 세력을 견제하며 공존의 사랑과 지혜, 균형과 조화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옵니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 힘차게 나아가리이다.”
(시편 84;6,8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매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일꾼입니다.
베짱이는 놀면서 시간 나면 일하는 한량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오면 개미는 여름에 모아둔 먹이를 먹으며 겨울을 보냅니다.
그런데 베짱이는 추운 겨울이 오면 먹을 것이 없어서 개미에게 구걸하며 겨울을 보냅니다.
과학자들이 일개미를 연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개미 중에도 30%는 아주 열심히 일하고, 30%는 대충 일하고, 30%는 다른 일개미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걸 망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만 모아서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3 : 3 : 3’의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세상에도 비슷합니다.
인재들이 모인 대학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들 자기가 속했던 고등학교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모인 대학에서는 모두가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중에서도 30%는 열심히 하고, 30%는 대충 하고, 30%는 포기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도전 골든 벨’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모여서 문제를 맞히는 프로입니다.
학생들은 하얀 보드 판에 문제의 정답을 적습니다.
정답을 적은 학생은 남고, 오답을 적은 학생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 진행자는 탈락자들을 위해서 ‘패자 부활전’을 합니다.
탈락자들에게 문제를 내서 맞히면 다시 골든 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패자 부활전에서 돌아온 학생이 마지막 문제를 맞히면서 우승하는 때도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패자 부활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골든 벨’에 참석하는 학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는 문제를 내십니다.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셔서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을 믿고 따르면 누구나 구원의 골든 벨을 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자라면 열매를 맺고 양식이 되기 때문에 잘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라도 열매를 맺지 않기에 뽑아야 합니다.
밀에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가라지를 뽑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 때까지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붙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것이 절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밀의 열매는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면 된다고 하십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책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쁜 것 같지만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잔잔한 파도는 유능한 항해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험한 파도를 겪어야만 유능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남루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비록 원수가 뿌린 가라지 때문에 힘든 삶을 지낼 수밖에 없지만>
자기 비하 개그로 유명한 정치인이 있습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가 미국 상원의원을 준비하던 시절, 경쟁자는 유세장에서 링컨을 향해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다.”
이 말에 화내거나, 자기 역시 상대에 대한 비난의 말을 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링컨은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저에게 두 얼굴이 있다면, 중요한 이 자리에 굳이 못생긴 얼굴을 하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평소 못생긴 외모로 놀림을 당해오던 그였기에 좌중은 폭소했고, 이런 그의 대응은 큰 호감을 샀고 결국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이렇게 상대를 대했던 링컨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누구보다 탄탄한 자존감에 어떤 말에도, 심지어 자기를 비난하는 말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자존감이라는 것이 뜻대로 높아지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선택하는 방법은 다른 이의 비난에 비난으로 맞대응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그 순간에는 적절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금세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센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비난을 충분히 이겨낼 정도로의 커다란 힘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보십시오.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을 때, 종들은 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끝까지 기다리면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끝까지 버티어 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원수가 뿌린 가라지 때문에 힘든 삶을 지낼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 심판 때에 가려내시는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그때 가장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할 때만이 진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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