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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빵”에 대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2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하나인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모자람’과 ‘충만함’의 대조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곧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깨우치시고자 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이는 필요한 것이 '빵'이며, 그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곧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십니다.
그것은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사실은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누구에게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찾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빵’을 주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보았지만, 그도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부자 어른이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모자람’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충만함’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가난하면서도 지니고 있는, 무능하면서도 전능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십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곧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요한 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외로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요한 6,15)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당신 생명의 충만함을, 당신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입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소용없는 것을 소중히 쓰시는>
빵의 기적 얘기는 네 복음서에 다 나오는 얘깁니다.
그런데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조금 더 다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공관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공관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역할을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필립보와 안드레아 사도가 특별히 거명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안드레아 사도의 언급입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아이를 등장시키고, 안드레아 사도는 다른 곳에서처럼 사람을 주님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복음 다른 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시키지요.
그렇지만 안드레아 사도는 반신반의하는 거 같습니다.
이 작은 아이의 이 적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 이 적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고 묻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겠다고 생각했으면 아예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자기 생각에 인간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주님께 가면 어떤 가능성과 소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나 소용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아이를 데려온 것입니다.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처럼 반신반의의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반신반의의 우리 믿음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 것입니다.
반신반의란 적어도 완전 불신보다는 반만큼 믿은 것이기 때문이고,
인간에게는 완전 불신이지만 주님께는 믿음을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보면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고 그래서 믿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뭣이든 소용이 있기에 하느님께는 믿음을 둘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창조하실 수 있으시기에
주님께서는 안드레아와 아이를 빵의 기적의 협력자와 도구로 삼으시고,
인간의 눈에는 소용없을 그 적은 빵과 고기를 아주 소중하게 쓰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소용없을 것이 하느님께는 소용이 있고 소중합니다.
그래서 아무것 없이 창조하실 수 있고 인간의 아무 도움 없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나든 남이든 인간의 협력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능력이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여기 아이와 엄마가 있습니다.
혼자서 요리를 다 할 수 있는데 자녀에게 요리를 가르치려고 이것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엄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사랑을 아이가 배우고 사랑 실천의 기쁨을 아이가 알게 되도록
혼자서 해도 되는데 아이와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데, 오늘 우리의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가진 것 없어도 빵의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믿게 하시기보다
가진 것 없어도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시고 당신 사랑을 더 느끼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진 것 없고 소용없는 저희를 소중하다고 하시고 당신 사랑과 은총의 도구와 협력자로 쓰시는 주님, 오늘 특별히 감사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기적을 낳는 사람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느끼려면 그만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시길 바랍니다.
열왕기를 보면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시종에게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2열왕 4,42-44).
믿음에 따르는 기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러한 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보잘것없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는 너무 부족해!’라는 생각을 접고, “나누어 주어라” 는 말씀만을 기억할 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게 하려고(탈출 4,2-5),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마태 11,4-6), 또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마르 16,20)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반으로 당신의 능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비로운 것을 아무리 많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적의 체험은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더 큰 신비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다져진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입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기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성모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하느님을, 성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복음을 보면 필립보는 빵을 살 돈을 걱정했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자기 생각으로 바라보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계신 주님을 간과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계산을 먼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비로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리빵 다섯 개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찼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모두를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아도 내놓을 수 없다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적어도 전체는 항상 부분보다 많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부분은 모두보다는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한 아이가 건네준 빵과 물고기를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많든 적든, 크든, 작던, 상관없습니다.
주어진 모두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모두를 전적으로 하늘에 맡기면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듯이 주님께서는 생명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가끔 로또복권 구매하시나요?
언젠가 40대의 젊은이는 1등에 당첨이 되어 상금이 23억 원이나 되었는데 세금을 제외하고 18억 원을 수령했습니다.
그런데 흥청망청 다 쓰고 5년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로또 당첨자 3명 중 1명은 5년 내 파산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외국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 알콜 중독, 마약, 도박 등 행복보다는 불행한 삶을 사는 이가 더 많습니다.
저도 로또복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는데 당첨이 안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헛배가 부르면 안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2코린 9,6) 하고 말합니다.
은총을 심는 이는 은총을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둡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것이라도” 하고 사랑을 담아 내놓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기적을 낳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와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빵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또 배고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빵을 먹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능력을 지니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각자 삶의 자리에서 나눔의 기적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더더욱 미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성체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으로 살찌우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영성체 할 때마다 사랑의 실천을 다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급하게 주님의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며 기적을 쫓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살아 삶의 터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살려면 반응하라>
오늘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많은 숫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양인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히 감사로 아버지께 당신의 존재를 어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감사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가르는 시발점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절로 가지게 된 것을 잃어가기 때문에 짜증만 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을 믿는 우리는 다 잃어도 모든 것을 받은 것이기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게 됩니다.
제가 몸에서 촌충이 나온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평택장에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약을 파는 아저씨가 저를 부르더니 약을 하나 먹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있으니 엉덩이가 간지러웠습니다.
다시 나오라고 해서 팬티를 내려보라고 했는데 이내 길고 흰 촌충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발로 밟았는데 그 안에 새끼들이 수없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내 몸에 저렇게 많은 벌레가 살며 피를 빨아 먹고 있었는데도 왜 난 저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본래 혼자 살아남으려 하는 자는 더 큰 존재에게 발각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본인이 잡아먹힙니다.
진화론은 이와 같습니다.
반응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의 세상을 지배하는 신은 파괴의 신입니다.
영화 ‘더 사일런스’(2019)에 외계 종족들이 쳐들어왔는데 그것들은 눈은 없지만, 청각이 발달하여 있습니다.
소리를 내면 바로 죽임을 당합니다.
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수들을 많이 본 박효진 장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사형수들은 결국엔 똑같이 두려움에 떨거나 오줌을 지렸다고 합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고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SBS 꼬꼬무 37화에서 ‘임신 거부증’에 걸린 한 엄마가 신생아 둘을 냉동실에 넣어 죽인 사건이 나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엄마는 임신을 거부하였고 태아들도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길쭉하게 늘여 배가 많이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마치 기생충처럼 어머니 뱃속에 머물다 나왔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두 영아를 살해하였습니다.
사실 한 몸에 기생충도 있을 수 있고 태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은 하나는 엄마가 주는 모든 것에 반응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는 하늘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믿는 하늘은 더 사일런스에 나오는 외계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아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미소 짓고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자기도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진짜 소멸의 세상에서 생성의 세상으로 넘어오는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처럼 감사의 반응을 실현할 도구는 십일조입니다.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러나 소멸의 법칙에 속한 자가 됩니다.
이 버튼은 그냥 반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기가 처음에 엄마, 아빠라고 했을 때 부모는 그동안 한 모든 고생을 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140년이 지났는데도 몸이 전혀 썩지 않고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남아있고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모님께 순종하여 그러한 생명을 지금도 얻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순종도 없습니다.
이런 현대의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주님께 반응하는 이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려면 반응하십시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빵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빵의 기적’을,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자비”로 해석하고 그렇게 기록했는데,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신 일로 해석하고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군중은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고, ‘메시아를 찾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거나 믿고 싶어서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뭔가 새로운 기적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따라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려고 따라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군중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군중이었는데, 전반적으로 ‘믿음의 방향’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심으로써 바로 그 ‘믿음의 방향’을 바로잡기를 바라셨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려고 의도적으로 실행하신 기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작정하셨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군중의 배고픔과는 상관없이.
2)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에서 중요한 말은 ‘어디에서’입니다.
‘어떻게’나 ‘무엇으로’ 라고 묻지 않으시고, ‘어디에서’ 라고 물으신 것도 의도적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정답은 “주님에게서”입니다.
주님에게서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 은총을 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필립보 사도에게만 물으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이야기에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필립보, 베드로, 안드레아 사도는 모두 ‘벳사이다’ 출신으로서 같은 고향 사람들이었고(요한 1,44),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벳사이다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세 사도가 뭔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은 “저 군중을 모두 먹이는 것은, 저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제자들이 ‘이백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는 빵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면 당연히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뒤의 51절에 있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라는 말씀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으로’ 드러내신 ‘계시’이고, ‘빵의 기적’은 ‘표징으로’ 드러내신 ‘계시’입니다.
3)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긴 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라는 말에서 ‘그 예언자’는 모세가 예고했던 예언자인데(신명 18,15), 당시 사람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빵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자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약속했던 ‘그 예언자’ 라고, 즉 메시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쁜 지도자’를 버리고 ‘좋은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군중을 탓할 수만은 없지만, 예수님을 세속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의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주신 주님을 믿어야 한다.”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생명의 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받아먹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 성체성사적 삶>
“주님, 당신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은혜로 채워주소서.”
(시편 145,16)
오늘 두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던 중 퍼뜩 떠오른 강론 주제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성체성사적 삶”이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비단 가톨릭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희망이요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세 초 유럽의 혼란은 종말처럼 생각되었고, 이어 유럽을 암흑의 혼돈에서 구한 것이 가톨릭교회요, 성 베네딕도 아빠스를 사부로 모신 성 베네딕도 수도회였습니다.
오늘날은 중세 초의 유럽처럼 전 세계가 흡사 길과 희망을 잃은듯한 혼란한 시기 같습니다.
이제는 성소자의 위기와 더불어 교회 지도자 부족의 위기라는 극심한 인재난을 겪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유망한 후배들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 처음부더 잘 성장되어야 좋은 목재와 같은 인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흡사 거목들 즐비한 심산유곡이 아니라 잡목 우거진 야산같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과연 디지털 문명, 인공지능이 우리의 미래와 희망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감이 듭니다.
다시 한번 가톨릭교회가 온 세계와 온 인류의 길과 희망이 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여기서 빛처럼 떠오르는 교회요 성체성사적 삶이었습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
(가톨릭교리서 1324)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온 세계, 온 인류의 공동 자산이 된 성체성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희망과 길을, 중심과 의미를 잃고 혼란을 겪는 작금의 시기에 혜성처럼 떠오르는 가톡릭교회의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에 대한 답도 성체성사적 삶이 줍니다.
“하루를 마치며 되돌아 본다.
나는 오늘 나로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다산>
바로 참 나로 깨어 살게 하는 것이, 참 나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삶이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논어의 공자>
이 모두를 일거에 충족시켜 주는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이요, 더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자녀답게’의 삶입니다.
지난 과학잡지 뉴턴 7월호 표지에 한 말마디가 마음에 꽂혔습니다.
이제부터 매달 나오는 과학잡지를 대강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제는 “곡선의 신비, 우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곡선이 넘쳐난다. 우주와 자연은 다양한 곡선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 한반도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곡선의 산능선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세계 어느 곳에도 이런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산능선들이 없습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적 삶의 은총이, 파스카 신비의 삶의 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곡선인생을 살게 합니다.
죽어 경직된 꼰대의 직선인생이 아니라, 서사가 있는 굴곡인생, 자유로우면서도 유연하고 신축성 좋은, 살아 있어 부드러운 곡선인생입니다.
바로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청춘, 멋진 곡선인생의 모범이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바로 오늘은 현임 교황이 제정한 가톨릭교회의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연중 제17주일 가톨릭교회의 양대 신문의 1면 톱기사에 이어 몇면에 상세히 보도할 정도로 교회와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세인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1인가구와 노인' 문제에 관한 시사적 주제에 내용이었습니다.
“1인 가구는 외롭다.
통계청 집계 2022년 1인 가구 34.5%, 혼밥 혼술은 쉬운데 홀로 신앙은 어렵네요!
1인 가구 급증하는데 교회 관심은 제자리, 1인 가구 위한 사목에도 관심가져야.
1인 가구는 말한다 ‘공동체가 필요해!”
<가톨릭평화신문>
1인 가구 시대에 날로 절실해지는 교회 공동체성이요,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성체성사적 삶임을 절감합니다.
교회공동체와 성체성사는 하나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공동체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의 공동체성을 능가할 선물은 없습니다.
현 혼란기에 인류에 주신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성체성사, 이 거룩한 미사잔치이자 제사입니다.
또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하여 시급히 부각되는 노인문제입니다.
“노인들 소외되지 않도록 찾아나서는 교회돼야, 노인 요양 사목 관심 필요하다”란 제하에 현실 문제가 가톨릭신문 몇면에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담화문도 구구절절 아름답고 참 깊었습니다.
지면상 인용하여 소개 드리지 못함이 유감입니다만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교회 문헌보다 아름답고 깊고, 풍요하고 정확한 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양대 문제의 절박한 현실에 자랑스럽게도 성체성사의 공동체성이, 성체성사적 삶이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됩니다.
바로 이런 현실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의 5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성체성사적 삶에 빛나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 엘리사의 기적은 이의 전조일 뿐 파스카 예수님의 성찬례에는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첫째, 봉헌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결정적인 요소가 봉헌입니다.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기쁨, 봉헌의 기적... 끝이 없습니다.
믿는 이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봉헌의 삶입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빛나는 상징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봉헌에 이은 파스카 예수님의 결정적 봉헌이 짧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회의하는 안드레아의 반응에 관계없이 봉헌의 진수를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
착한목자 예수님께서 광야여정 중 배고프고 고단한 5천여명 인생들에게 시편 23장처럼 푸른 풀밭에 앉히시고 배불리 먹이십니다.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오아시스와 같은 쉼터, 샘터, 배움터가 되는 교회공동체 미사를 상징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눠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합니다.
둘째, 나눔의 삶입니다.
봉헌의 기적이 나눔을 통해 실현됩니다.
어린 아이가 먹을 것 모두를 봉헌한 사실에 부끄러움과 동시에 감동한 군중들은 이어 혼신을 다해 정성껏 하늘 축복을 갈망하며 이 모두를 손에 들고 감사로 봉헌하는 예수님께 감동하여 각자 꼬불쳐 숨겨 둔 먹을 것을 모두 비워 나눕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 하니 봉헌의 기적은 바로 나눔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누지 않아서, 분배정의가 실현되지 않아서입니다.
하느님 탓인 천재가 아니라 인간의 탓인 인재이나 바로 탐욕과 무지로 인한 독점과 자원의 남용 때문입니다.
사람 죽이는 전쟁을 위한 무기 생산으로 쓰이는 돈만 고루게 나눈다면 식량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나 언제 이럴 때가 올런지요?
바로 성체성사적 삶이 이런 깨달음을 깊이하며 각자 나눔의 실천의 삶에 매진하게 합니다.
정말 가톨릭교회를 믿는 정치지도자들이 공정과 정의의 사람들이 되어 이런 나눔의 삶을 정책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베네딕도 16세의 교황의 결단에 버금가는, 노령으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임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칭송도 자자합니다.
권력 독점이 아니라 때가 됐을 때 겸손이 권력을 내려놓고 아름답게 떠남으로 나눔의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59세 해리스 부통령을 지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 세대에게 횃불을 넘기는 것”이란 말도 멋졌습니다.
오랜만에 검은 먹장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을 본 느낌에 마음도 상쾌했습니다.
셋째, 일치의 삶입니다.
치유와 구원의 일치, 화해와 평화의 온전한 일치는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에서 가능합니다.
봉헌의 삶, 나눔의 삶에 이은 순리적 현실입니다.
봉헌과 나눔의 사랑이 일치의 삶을 견고히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멋진 권고와 고백이 참 아름답고 깊으며,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은총이 이런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금과옥조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이 깊고 아름다운 진리 말씀입니다.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은혜로운 다양성의 아름다운 일치의 삶인지요!
이 모두를 깨달아 살게 해주는 성체성사적 삶의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아름다운 성체성사적 삶을 충실히 잘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시편 145,1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성당이나 사찰에 다니는 것이고, 미신은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 때문에 변했기 때문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메뉴를 선택합니다.
커피, 콜라, 물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자판기가 돈을 먹고,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짜증을 냅니다.
자판기를 흔들기도 하고, 자판기를 발로 차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는데, 힘든 일이 생기면,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다가오면,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물질의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표징이 생깁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는 걸까요?
그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 그분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 그분이 중풍병자를 걷게 하신 것, 그분이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신 것을 믿는 걸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도 믿음이 아닌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빵을 많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믿음은 아닙니다.
사회복지와 믿음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사회복지는 공동선의 실현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고백한 ‘사도신경’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신경을 같이 외워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계심을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아멘”
나의 믿음이 ‘무엇 때문에’라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힘>
언젠가 뉴스에서 본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2020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주에 살던 70대 노인이 자기 반려견과 함께 호숫가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속에서 악어가 나타나 반려견을 물고 다시 호수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노인은 본능적으로 호숫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어의 입을 벌려서 반려견을 구해냈습니다.
사실 악어의 치악력, 치아의 악력 즉 무는 힘은 엄청납니다.
사자, 호랑이, 곰, 하마 등을 제치고 모든 동물 중에서 제일 강력합니다.
그런데 팔 힘만으로 악어의 입을 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어떤 분일까요?
평소 몸 관리를 잘한 보디빌더일까요?
아니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저 강아지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 노인에게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히려 도망가는 데 급급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 ‘사랑하는 마음’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자동차에 깔린 자녀를 보고서 자동차를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도 뉴스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랑의 힘이 별것 아닌가요?
주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때인데도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인해 영적으로는 충만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배고픔으로 힘든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보리 빵은 당시 가난한 이들이 먹는 아주 싼 음식이었고, ‘물고기’로 번역된 그리스 말도 조그만 물고기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가엾이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주님의 사랑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주님을 통해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기에만 급급하면서 열매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활동을 우리의 사랑 없음으로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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