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두의 역사산책> 명나라 때의 '골프 그림' 보는 법 2006/03/02 12:49 |
오두방정 조회 1907 추천 4 | ||
- 오두의 역사산책 -
골프의 중국 기원설에 근거한 명나라때의 골프 그림 보는 법 - 폴로와는 달랐던 우리나라 격구는 골프의 기원으로 재조명 되어야 -
오늘 디지틀 조선일보에서 인용보도한 인터내셔날 헤럴드 트리뷴지의 금년 3월 1일자의 보도 Who Invented Golf? China Takes A Swing이라는 제하의 기사 내용은 이미 지난 1월 필자가 인디펜던트지 보도에 대한 보도 내용을 <골프는 1천년 전 중국인들의 게임이었을까?>라는 제목의 시리즈 글에서 소개한 뒤에 나온 것이다. http://cafe.chosun.com/club.menu.bbs.read.screen?page_num=1&p_club_id=dreamview&p_menu_id=2&message_id=304865
* 곧 홍콩 헤리티지 박물관에서 공개된다는 명대(1368~1644) 그림. ‘가을의 연회’
지난번에 올린 필자의 글에서 이어 이번에 뉴스가 다시 된 헤럴드지에 나온 명나라 때의 '골프 그림'에 대한 배경 설명을 추가로 설명을 해둘 필요를 느꼈다. 아래의 그림이 이번에 인터내셔날 헤럴드 트리뷴지에서 인용한 사진인데 여기에는 보다 많은 중국의 골프 관련 그림들을 이해하면서 보아야 좋다. 이 그림은 황제가 치는 공이 아니라 귀부인들이 치는 츄이완이다. 이것은 골프의 기원 역사에 나오는 당나라 시기의 말타고 치는 폴로가 변형되어 지상에서 치는 것으로 변화된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이 글 아래쪽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다음의 그림은 씨안(서안)의 박물관에 있는 골프와 폴로의 기원을 설명하는 한나라 때와 당나라 시기의 그림이다. 이것은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www.ancientsites.com/aw/Post/434602 Exploring Xi’an ( Shaanxi Provincial Museum and The Fresco Art Department of the Han and Tang Dynasty, September 23, 2004)
Chinese golf, Ming Dynasty (1368-1644). This game is famous in the Royal families and very popular with the aristocracy. It is similar to golf.
시안에 있는 이 그림은 이번에 공개하는 홍콩 박물관의 그림( 이글 바로 위쪽의 인터내셔날 헤럴드 트리뷴이 인용한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아니면 진위 여부에 따라 그 반대 경로일지도 모른다.
Polo, Tang Dynasty (618-907). Polo is a palace game. The aristocracy hold the sticks and ride the horses.
바로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명나라 츄이완의 기원으로 보는 당나라 시기의 폴로 경기 형태의 격구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폴로가 중국 기원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기마병들의 훈련방식의 하나로 격구가 사용되었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중국의 골프 기원설이 폴로로 간다면 그것은 중국 기원설이 되지 못하지만, 클럽 등의 명나라 시기의 골프는 송나라 시기의 츄이완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미 앞선 글에서 축약하여 설명한 바 있지만, 골프의 중국 기원설에 대하여 잘 요약한 내용은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www.hkprogolf.com/first_stroke.htm 그 내용은 필자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의 황궁박물관(the Palace Museum in Beijing)에는 골프치는 명대의 쏸종 황제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황제가 직접 클럽을 잡고 치는 골프 그림에는 두 사람의 서 있는 경호원이 있고 한쪽에는 환관으로 보이는 캐디들이 서 있다. 네 곳의 잘 깎여진 큰 잔디밭에 열 개의 홀이 있고 모두 플래그 홀이 각각의 색갈의 깃발이 꽂혀 있다.
이 그림 외에도 중국의 그림들에는 쏸종 황제의 츄이완 게임과 유사한 그림들이 있다. 골퍼들 가운데는 어린이에서 부인들까지 다양한 남녀들이 츄이완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82년에 닝즈(Ning zhi)옹이 쓴 <츄이완: The Book of Chuiwan)에는 보다 상세한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츄이완은 송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송 휘종(1101-1125재위) 때와 진(晉)나라 황제 장종(1190-1208재위) 때는 각종 놀이들이 성행하던 때이다.
이 책에 따르면 황제들의 클럽에는 가장자리들이 금으로 둘러져 있고 옥을 새겨넣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8-900달러에 팔리는 비싼 골프클럽들은 이들에 비하면 값싼 것에 불과한 것들이 되는 셈이다.
이 책은 32장으로 되어 있는데 골프의 테크닉의 요소들과 경기 룰 등은 물론 클럽의 생산이나 그린의 관리 등에 관하여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근거로 보면 츄이완은 10가지 다른 클럽을 사용하여 골프를 쳤다. 자연의 슬로프를 이용하여 경기를 했을 뿐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평평한 잔디그라운드를 만들고 높고 낮은 위험 코스까지 포함시켜 만들어서 츄이완을 쳤다고 한다.
츄이완은 3타로 나뉘어 쳤다. 1타는 베이스에서 친 후 한 타가 끝난 그 자리에서 그 다음 볼을 쳤던 것도 현재의 골프와 유사하다. 근간의 연구들에 의하면 14세기부터 유럽 지역에서 골프가 나타난 것은 13세기의 몽골제국의 영향으로 보인다.
18홀을 기본으로 하는 스코틀랜드 기원의 현재의 골프가 중국의 츄이완이 그 조상인지 더 연구가 뒤따라야 하지만, 현재 방식의 골프는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 근처에서 시작된 것이다.
영국의 골프 백과사전에는 1319년에 스코틀랜드에서 골프가 나타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때의 골프는 군대에서도 애용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래서 1457년에는 제임스 2세 왕정 의회에서는 일상적인 활 쏘기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골프에 너무 미치는 상황을 막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금지령은 실패했다. 그렇게 막을 수도 없이 골프가 너무나 유행한 결과 스코틀랜드는 군사력이 저하되어 결국 영국에 합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프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세계에 확대되어 갔고 아메리카는 물론 호주 인도 및 아프리카로 뻗어가 오늘날 전세계에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골프가 진정으로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했는지에 대하여서는 논쟁을 거듭해 왔다.
스코틀랜드의 골프발생 전설에 따르면 한 어부가 스코틀랜드 동해안에서 집으로 가던 중 모래 사구(dunes) 언덕을 지나는 잔디 땅을 밟고 가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해변에 뜬 나무가지를 줏어서는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놓여 있는 작고 둥근 돌맹이들을 치면서 걸어갔고, 그 돌맹이들 가운데 하나가 토끼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골프가 탄생된 배경이라는 것이다.
18홀이 결정된 배경에는 사냥꾼이나 어부들이 추운 겨울 골프를 하러 나갈 때 18온스 나가는 위스키를 한 병 들고 나가 마셨는데, 한 홀마다 한 온스씩 마셔서 18온스 모두 마시면 게임이 끝나서 그렇게 18홀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스코틀랜드의 골프 기원설에서 역사학계에서는 '토끼 굴 망가트리기' 같은 전설은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학자들은 골프 기원을 로마제국의 귀족들의 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파가니카(paganica)로 불리운 볼 게임은 굽은 나무 작대기를 사용하고 깃털을 두른 가죽으로 만든 볼을 사용했는데 훗날 벨기에, 룩셈부르그 등으로 확대되고 프랑스 남부나 덴마크 사람들의 놀이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골프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공을 작대기로 쳐서 구멍에 넣는' 게임은 어디에나 있다고들 한다. 그런 가운데 중국의 츄이완은 골프의 기원이 되었을지에 대하여 당나라의 폴로 경기와 연관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당나라 때의 폴로 경기는 750미터 x 600미터 넓이의 구장에서 경기를 했고 말탄 선수들이 긴 막대기로 빨리 달리면서 공을 쳤다. 당나라 쏸종 황제(1426-1435 재위)는 폴로를 진작시켰는데 그 자신 궁녀들과 함께 이 경기를 했다.
그러나 결국 황제의 후궁들이 말을 타지 못하여 말타지 않는 폴로 경기를 하게 되어 사람이 직접 땅 위에서 달리면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누가 가장 높이 그리고 가장 멀리 공을 치게 되는가로 경기 룰이 달라지게 되었다. 상하이에 있는 한 시립 박물관에 의하면 이러한 당대의 스포츠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 후 당나라 중기에는 귀부인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잔디에 여러개의 구멍을 파고 경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송나라 때에 츄이완이라는 형태의 골프 경기로 발전하여 크게 흥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츄이완의 흥행은 원나라 명나라 때까지 이어졌고 원나라 자주(zaju)극에 등장하는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당신은 날 츄이완과 궁시(활쏘기)에 가서 누가 잘하나 한번 시합해보시렵니까?"
명대의 완일 황제 기간(1573-1619 재위) 주루징(Zhou Lujing)은 <츄이완> 책을 새로 편집했다. 거기에 첨부하기를 "내가 젊은 시절 여러 도시를 다녀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츄이완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그 당시 중국의 많은 도성에서 단순히 오락게임으로 츄이완을 즐겼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상업적으로까지 발전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츄이완은 오늘날 골프와 유사하지만, 중국에서 계속 발전하지는 못했다. 중국의 스포츠와 게임에 대하여 쓴 구민탕이라는 저자는 그의 책에서 츄이완이 명나라 때 쇠퇴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츄이완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로 '코스의 빈약'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코스 문제가 아니라 명나라 황제들이 육체적인 힘이 가해지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의 약화로 더 이상 츄이완이 발전하지 못하게 된 것이 더 큰 이유라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중국의 격구가 말을 타지 못하는 궁중 여성들의 경기로 변화되면서 점차 룰이 바뀌어 간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 송나라 때의 츄이완 형식에서 여러 개의 홀이나 깃발, 여러가지 클럽, 슬로프까지 있는 험난한 코스나 관리된 잔디 그라운드까지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의 츄이완이 징기시칸의 유럽 진출로 인하여 츄이완은 스코틀랜드까지 확대되고 추운 겨울 그라운드에서 마신 위스키 온스와 관련하여 18홀로 결정되어 오늘날의 세계적인 골프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골프의 기원은 중국이라는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동북아 고대 사회에서 말 타고 '스틱'을 휘둘러 작은 공을 몰고 가는 시합인 격구(擊毬)에서 시작되었다. 격구는 고려시대 때에 뚜렷한 기록이 있지만, 삼국시대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격구는 무술 단련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여 장(丈)치기, 봉구(俸球), 봉희(俸戱), 타구(打毬), 격구희(擊毬戱), 격봉(擊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졌다.
흔히 격구를 서양의 폴로로 오인할 수가 있으나 격구가 훨씬 더 구체적인 뛰어난 기마병의 마술의 하나로 출발하였다. 격구 때에 사용하는 스틱을 장시(杖匙)라고 했는데 공은 나무로 만든 목구(木毬)를 사용하여 상대방의 골문 안으로 쳐넣는 방식이었다.
고려 초기부터 격구가 유행했떤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전통이 고려초기에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태조 원년(937) 9월에 상주성을 지키던 아자개(阿字蓋)가 투항하는 환영식 연습을 격구장에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18대 의종(毅宗)은 격구 좋아한 격구팬이기도 했다. 고려 무신정권시대 때는 격구장 건설로 민심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격구는 무사들의 기예로 완전히 자리잡혀 있었다. 조선시대는 그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가 직접 격구를 했다는 기록이 용비어천가 44장에 나오기까지 한다.
“놀음놀이의 방울공이시매, 말 위에서 이어 치시나. 이군의 편수인 공치기의 선수만이 기뻐한 거이외다. 군명에 의한 방울공이어늘 말 곁에 비껴 막으시니, 구규의 사람들이 다 놀란 것이외다”
이러한 격구는 세종 때인 1425년 3월 구장(毬場)을 훈련원(訓練院)에 두어 기마술을 훈련시키는 병마조교(兵馬調敎)에 중요한 시합으로 발전시켰다. 격구는 세종 9년(1427) 3월에 무과시험의 초시, 복시에 과목으로 포함시켰다.
광해군 2년(1629)년에는 격구가 무과시험 과목에서 탈락했고 정묘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마장의 급격한 감소로 인하여 마상무예가 축소되고 더불어 격구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명과 청에 말의 조공은 격구 쇠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정조 14년(1790) ‘무예도보통지’에서는 격구가 이십사반무예(二十四般武藝)의 하나로 되살아난다. 이것은 격구와 함께 마상무예의 부활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정조의 탈중화의식은 격구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격구는 1800년 정조시대를 마감함으로써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시대 격구는 말타고 경기를 하는 격구와 말을 타지 않고 치는 보행격구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그 당시 격구 시합의 방법은 오늘날 하키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특히 기녀들이 가무를 하여 오늘날 치어리더 역할 까지 했으니 가히 스포츠 세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문화적 분위기는 비슷했다.
이러한 격구는 주로 궁중의 대궐 앞에서 이루어졌는데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면 어전에 나가 재배(再拜)하고 상을 받았다고 하니 마치 서양의 흑기사들의 싸움이 왕 앞의 시합장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격구하는 사람의 의상은 대단히 화려한 장식과 의복을 했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나온다. 정조 때의 기록인 무예보통지에 따르면 격구할 때 입는 옷은 홍철릭을 걸치고 종립이라는 모자까지 썼다.
격구장의 크기는 폭이 50미터에 길이는 2백미터이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격구의 기본 동작은 여덟가지로 비이, 할흉, 방미, 배지, 지피, 도돌방울, 구울방울, 수양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장시로 공을 치거나 공을 몰고가는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오늘날 하키의 모든 기술들이 망라된 감이 있다.
우리나라 격구가 일본으로 건너가 타구(打毬)라는 이름으로 유행했는데 흰옷과 붉은 옷 상의를 입고 각각 4명씩 한 조가 되어 경기를 했다. <경국대전>과 <세종실록>에는 격구의 스코어 기준이 나와 있을 정도다.
오늘날 골프의 홀컵이라 할 구문(球門)으로 구(球)를 쳐낸 자는 15점을 주고, 구문 옆으로 지나가게 한 자는 10점을 주되, 자세를 갖춘 자라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골프의 그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다만 점수가 나면 북을 두드리고 실패하면 징을 쳤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렇게 보면 골프는 본래는 우리나라 삼국시대로부터 발전해 온 격구가 그 본래의 기원 스포츠였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격구에서는 아예 마상격구와 보행격구로 나뉘어져 보행격구가 골프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비하여 중국에서는 말을 탈 수 없는 궁궐의 여인들의 경기로 변화되어 지상의 게임으로 변화되어 간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골프가 크게 세계인들의 시선을 받은 것은 박세리 때부터이다. 박세리의 등장은 최경주와 같은 남자 선수들도 있지만, 여성 골프 세계에서 LPGA 세계 랭킹 2위로 등장한 위성미 선수까지 우리나라 여성 골프가 세계적인 히트를 치는 이유는 혹여 동양의 궁궐 여인들의 '골프' 실력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아니 삼국시대 이래 격구를 해오면서 오늘날 골프와 유사한 조선시대의 보행격구까지 했던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면 여자선수들 이상 최경주를 비롯한 남자선수들도 분명 새로운 두각을 드러낼 날이 올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역사대국이다. 그만큼 국력이 신장될수록 과거 역사 속의 경험과 전통 속에 숨어 전해져 온 실력이 드러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특히 서양의 폴로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힘이 있었던 무예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격구는 오늘날 골프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03/02/06 오두방정)
|
|
그럼 여쭙겠습니다.
대장금의 이영애등...햇빛에 태우지만 않으면 신비허게도...속살이 오히려 라틴계 백인 여인들보다도 새하얀 한국인들은...서양인이라 분류가 됄까여...?
뭔래의 황부인들 피부는...동남아 적부인들보다 밝은 색임은 환단고기에 나옵니다.
몽골로이드들중...북방계일수록 피부가 흼은...현재의 몽골 도시여인들과 한국 도시여인들의 피부색을 비교해도 확연해 집니다.
햇빛에 태우지만 않는다면...서양여자들보더 어떤 땐 더 햐얀게 북방 몽골로이드 여인들의 피부입니다.
민황후가 백인이라면...
그의 가족친지들도 백인여야 정상인데...
기록사진에 나오는 민씨 남자들의 얼굴이 백인이던가여...?
홍진영님이 언급하신 그 환단고기의 배경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코카서스 산맥과 아랄해 주변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시나요?
그건 서역조선 주장하시는 선생님들의 일방적 주장이시지여...
환국이 코카서스 중심이라면...환국 동서 2만리인데...유럽에서 파미르까지입니다...
그럼, 배달국과 단군조선이 신천지를 개척할 새 땅은 어디...?
그 반대인 겁니다...환국은 천해의 동쪽...즉 천산이 있는 과거 거대했던 알알해와 신장성 보해...더 크겐 고비사막의 천해(북해)를 낀 동쪽이 환국이니...
정확히 현 동 시베리아와 몽골과 중원 인도까지가 환국인 것이고... 알타이 서쪽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정도가 아사달 신천지의 고조선이라 하겠습니다.
이게 한반도로 이전됨은...구함말기에 이쪽 사람들이 대거 한반도 인근으로 몰렸단 반증같습니다.
짜리몽땅...열등한 동아시아인(한국인)...재미있습니다. 고대의 3대 거인족에 대한 내용을 한번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그리고 변변한 기록조차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유럽 백인들"...그들과 단지 외모적으로 닮고 싶어하는 일본인의 모습이 위 댓글에서 너무나 느껴집니다. 고대의 전세계 "놀란만 할 유적"의 유골표본들은 대부분 몽골로이드에 견주어지는 것들과 지금까지도 소위 "머리"를 써야하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동아시아인(특히 한/중/일)의 우월성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각종 과학기술(영화,인터넷,TV,라디오, 각종 가전제품품, 자동차,항공기,원자력발전, 지도제작기술 등등...) 한국,일본에서 사용되는 독일법제(판덱텐체계), 복식부기 회계시스템, 그리고 연일 방송에서 울려퍼지는 서양악기와 음악들.. 이것은 다 서양에서 가져온 지식들이지 결코 동아시아에서 나온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한 것중에서 동아시아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있다면 있다면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을...(조선이하 대부분의 우리 역사를) 아예 우리와는 관계없는 "백인"들의 역사로 가져가고 싶어하는 모습과 노력이...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우리와는 다른 누군가들은 아주 좋아할 현상이겠습니다. 그네들의 입맛에 맞게 한국인 스스로가 아주 잘 요리하고 있으니...
제가 한가지 질문을 단져보겠습니다 반만년 찬란한 문화와 거북선, 첨성대, 금속문자등 뛰어난 과학기술을 보유했다는 동아시아의 조선이 그렇게 짧은 기간안에 양이 취급하는 서양인들에게 그리 쉽게 정복당하고 문화적인 침략을 당했을까요?
그리고 조선사신이나 박지원같은 북학파가 동도서기론을 주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선보다 못한 양이들한테 뭘 배울게 있다고 서양기술을 배우자는 소리가 나올까요?
조공까지 받고 대국임을 자처하던 중국조선이 말이죠? 그리고 황후까지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국방은 어찌했길래 일제와 양이들에게 그리 쉽사리 깨질수가 있습니까? 이게 바로 대국 조선의 모습인가요?
참으로 실망스럽네요.
영국을 위시로 한 유럽의 산업혁명과 이를 기반으로 한 대량생산체제, 물류의 급증 등을 통한 사회전분야의 발전...근대의 유럽(서양)문영의 발전상을 모른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문명의 시발점과 기반은 분명 "백인"들의 공이 아주 크겠지요...하지만 이게 다라고 여겨집니다...전 과학계에 몸담고 있기에..위에서 언급하신 원자력, 전자 등의 예를 든다면, 1900~1980까지는 분명 서양(미+유럽)의 압도적 우세였다면, 그 이후엔 한/중/일의 기술발전 기여도가 훨씬 더 컸음을 잘 알게 됩니다...종사자수는 오히려 "백인"들이 더 많고, 백그라운드도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데도 말이지요..
처음에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시작하는것이 훨씬 더 어려운겁니다. 지금 원소기호나 각종 과학이론,수학이론의 공준등은 서양에서 이미 그 터를 닦아놓은겁니다. 우리나라 과학도들이 기초수학이나 기초과학분야에서 취약한 이유는 기초과학이 정말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기초과학보다는 쉬운 응용과학에서 빛을 보고 있지요.
전기를 발견하고 전자기 유도이론까지 완성한 페러데이,쿨롱의 법칙을 발견란 쿨롱, 상대성 이론의 창시자 아인슈타인,직류를 만들어낸 에디슨, 교류이론과 무선전화를 만들어내고 수많은 전기관련 특허를 낸 전기전자계의 거두 테슬라도 중앙아시아(크로아티아)의 백인이었고요. 과학인명사전 보면 상당수가 거의다 백인입니다. 물론 계중에 일본인같은 동아시인도 있지만 그 뿌리는 서양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것이고 공부도 미국에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에요.핵물리학계의 최고천재로 평가받는 이휘소 박사도 미국에서 공부한 분입니다
수많은 과학책 이론이나 수학 공준, 단위등에 그것을 창시한 이의 이름을 따서 이론명을 만듭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인의 이름이 들어가있는 현대 과학이론을 본적 있으세요? 저는 한번도 본적 없습니다.
양키들이 과학에 눈을 뜨는건...
이집트로 간 몽골로이드 파라오들...그리스로간 훈족(혼혈로마인)들...훈족에 쫒겨 동방에서 로마로 들어간 게르만 혼혈족...
영국을 지배한 바이킹(노르만) 몽골로이드혼혈...알타이에서 이주해 유럽을 지배한 돌궐(괵크투루크=서고구려)...
전 유라시아를 지배한 몽골 진기스한이 전해준 중원의 문물...이것 때문입니다.
몰르셨나 봅니다...?
동양이 기초과학 모두를 가르처 준 거고...
서양인들은 근세에...동양에서 전수받은 그 기초기술을 바탕으로 실용적 발명(응용)품들만 쏟아낸것일 뿐입니다.
종교도 매 한가지...
맞는 말씀이지만...너무 극단적인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그리고 현대문명의 기반은 분명 "백인"들의 공이 크다고 말씀드렸지만, 언급하긴 3대 과학인명사전 같은 곳에 아무리 백인들이 많이 올라와 있어도, 실제 발전에 기여를 하는 "소위 Impact factor"가 강한 결과를 내는 과학자의 대부분은 동아시아인입니다.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기반이 잘 갖추어진 미국에서 공부하는 소수의 동아시아인들이 동등한 백인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뽐내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 과학계도...아직은 서양의 입김이 세지요...수식이나 이론의 명칭부여에 동양인이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그러나, 사실 많이 있답니다~~ 한국인도 많이 있어요~~~ 요근래에는 아주 폭팔적으로 동양인들의 역량발휘가 과감하게 나타나고 있지요...방해하는 세력이 강하게 저항하긴 하지만...
그러니 그 월등한 실력을 뽑낸다는 동아시아인이 만들어낸 알만한 과학이론이나 수학적 공준등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주세요. 그냥 추상적으로 실력을 뽑낸다 하시면 그것이 사실인지 그냥 추켜세워주는 말인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달라구요? 혹시 과학계 종사자 분이신가요? 그럼 최근의 MIT이론이나 5축 초끈이론 같은 것들..그리고 나노물질의 에너지 변환 등등등 너무나 많은 예들이 있는데요....교과서로도 나온 것들이 있고, 간단한 방법으로 특허검색같은 것 해보셔도 금방 아실텐데요...저널을 보셔도 아실테고.........
현대물리(뉴턴의 고전물리와는 다른)의 한축인 양자역학의 선도적 발전과 실제 산업화에 기여하고 있는 과학자의 80%가 한/중/일 연구자들입니다...비록 연구에 몸담고 있는 기관은 어쩔 수 없이 Great USA에 있는 경우가 많지만 말입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류의 전 역사를 하나의 "영화"라고 보았을때, 비록 수천년이상 문명도 제대로 없고 노예와 진배없이 살아왔어도 마지막 순간(약 200~300년)에 엄청난 기회를 획득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요근래까지만 바라보았을땐 분명 "백인"들이 승리한 영화라고 보여집니다...마지막 승부가 항상 중요하니까요...그러나 영화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특히"한국인들이 기상하고 있습니다...전 멀지 않은 미래에 원래의 동양/서양의 관계로 복귀할 것이라고...제 분야의 모습만 바라보고서도 강하게 느껴지고 있답니다.
전 남조선도 그렇지만... 북조선에 더 기대를 겁니다.
왜놈 혼혈이 훨 덜하기 땜...
홍진영님 박통과 이휘소 박사가 거의 동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신적 있으신가요?
당시에 이휘소 박사때문에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만들 수준까지 와있었습니다.물론 외국에서 배워온것이지만요.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읽어보세요. 사실에 기반한 논픽션 수준의 책입니다
옛날에 다 봤습니다.
친일파 다까끼 마사오도...민족자주국방을 위해 죽음을 자초하며 핵개발을 했는데...
자칭 그를 계승했단 다마네기(두한이)는 고걸 다 미국에 바치고...미사일개발 포기각서 쓰고...대통령 임명 눈도장을 받고 처질러 왔고...
고 가지에서 피어난 현재의 집권당 정치 양아치들이..오사까 튀기로 의심가는 이를 청와대에 앉히고...
썩은 곰팡이 내음을 뿔뿔 피우며...이 나라 이민족을 죄 말아먹는 꼴을 보자니...
당분간은 남조선엔 기대할게 없단 겁니다.
홍진영님 역시 박통에 대한 생각은 좌익꼴통들의 생각을 보는듯하네요. 박통은 도요타 다이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지요. 박통때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기간산업이 300개가 넘는다는것 알고는 있으신가요. 박통이 이루어낸 업적을 도로포장공사쯤으로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김정일 세습독재 체제에 충성이라도 할분에게 그런 소리 백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요. 박통을 제대로 모르시면 자료좀 더 찾아보고 오시지요.
박통은 도요타다이쥬처럼 일본천황 분묘에다 90도로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고 신한일 어업협정으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게도 하지않았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그리고 보수측에서도 현 이명박 정권을 안좋게 보는 사람도 많다라는 것도 알아두시죠.
아숩지만...현재까지의 대한민국 지도자 중...
가장 민족자주를...비리근절을 부르지졌던 지도자가 ...다까끼 마사오란 일본명 일본군관인 박정희란 아니러니함...
이게 현 남조선의 인물부재란 이란 겁니다.
인물은 대중이 키우는 것이니...남조선 대중들의 가치관도...아직까진 다소 모자란다 여겨지고여...
노전대통령과 김전대통령이 벌인 독도해역 중간수역 만들기 삽질은 이미 제가 수시로 침을 뱃던 대목입니다.
그걸 반대당인 현 이명박씨가 까놓고 완수하려 하고 있으니...
겡상도당,전라민국...이라 서로 싸우는 두 세력들의 수장들도...지지자들 생각관 무관하게...별 수 없이 그 뿌리는 친일에 심각하게 배여있단 비통함입니다.
도요타다이쥬와 놈현이 만든 일본과의 독도공유에 침을 뱉었다(뱃던이 아니에요)고 하면서 갱상도 운운하는건 또 뭡니까? 지역감정 일으키시려고 작정하셨나요!! 갱상도 운운하는 것보니 님은 전라민국 출신이신가요?
도요타다이쥬가 북한에게 5조원의 엄청난 뇌물을 갖다 바치면서 북한이 핵무장 하여 남한을 위협하게 도와주고 북한이 연평도해전을 일으켜서 우리 국군 장병이 전사할때도 연평도를 찾아가기는 커녕 월드컵 경기장에서 축구나 쳐보던 국방에는 관심도 없던 놈이지요. 님의 그 어설픈 정치적 식견으로 게시판에 분란이나 일으키지 마시고요
좌익측 논객 대변인인 진중권이 도요타다이쥬 이전에는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없었고 박정희 대통령때 전라도가 정책적으로 차별받은적 없다고 기사인터뷰까지 했어요.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갱상도 운운이나 하면서 망국적 발언이나 일삼는 홍진영님은 반성좀 하시죠
벌거벗은 그리스 벽화 백인들이 옷과 병장기를 걸치게 되는 로마시기로 올 쯤이...훈족이 그리스 로마를 휘젓던 땝니다.
누가 그들에게 옷과 말안장을 주었는진 뻔한 겁니다.
서양의 나팔(동양의 나발)이 전해진 거란 자주적인 발상은 왜 못 하실까여...?
서양의 바이얼린...몽골의 마두금이 전해진 거란 자주적 발상은 왜 못 하실까여...?
서양의 키타...고구려 벽화의 그 악공들이 타던 비파가 전해진 것이란 상식적 발상은 왜 못 하시는 걸까여...?
동국 조선의 장수 이순신은 그리도 질투하고..그 공을 무시하면서...
서역 명(무굴)의 오합지졸장 이여송이에겐 찬미가를 불러대던 선조임금을 보는 심정입니다.안타깝습니다.
전 원래 역사에의 관심은 많으나, 경험과 지식은 부족한...그러나 항상 배우고 싶어하는 한명의 과학 종사자입니다. 이곳엔 틈날 때마다 들어와서, 여러 글들을 감명깊게 그리고 사색하며 읽어보곤 합니다. 여러 선생님들 특히 홍진영선생님, 김홍필선생님, 김재만선생님 등의 글들은 가치관 차이를 떠나서 상호 보완적으로 너무나 유익하고 주옥같은 글들이라고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답니다. 전 그저 "눈팅"회원으로써 항상 배움의 마음으로 게시판을 바라볼 뿐(사실 글쓸 조그마한 역량도 없습니다)이었는데...위 댓글에 대해서는 본의 아니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과분하신 칭찬 감사합니다...그리고,적절한 타이밍의 참 주옥같으신 지적 참 감사합니다...김선생님...
제가 과학 문학 이걸로 들어가면 약간 말을 더듬대거든여...^. .^
저도 사실 과거 대륙조선사에 지대한 관심이 없었지만 최근에 중앙아시아 트루판 지역이나 카자흐스탄에서 일어나는 심상치않은 변화를 보고 이것이 조선사와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요즘 조선사를 다시 보게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선이 우리가 반도조선사 입장에 배워왔던 것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라는 겁니다.
진정한 역사를 알고싶으시려면 반도조선사 탈피뿐만 아니라 그 조선사가 동아시아의 황인들의 얘기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아두셔야합니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좋은 말씀이세요...다만, 저는 위에서 언급하신 "짜리몽땅...열등"과 같은.....우리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듯한 말씀에 대응코자, 원치 않는 글들을 나열하게 되었습니다...분명 여러 가능성들이 있겠지요..조선사가..말씀처럼 아예 우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지도...다만 그래도...우리는..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전세계적으로도 우수한 능력을 발휘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절대 열등하지 않은 대한민국사람입니다....
조선중기 이후부턴...이미 카자흐스탄은 이조선관 거리가 먼 서역입니다.
타타르청...서안과 북경중심의 청구조선의 개념에선,,,대청이 카자흐스탄 같습니다...아스타나가 대청의 발생 수도 였을 수 있어 보입니다.
동방의 환국에서 신천지로 이주한 배달환국의 단군조선 개국지인 아사달이 곧,카자흐스탄 아스타나라 전 예상합니다.
두 선생님 잘 주무십시오.
저두요. 괜한 어설픈 댓글이나 단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암튼 항상 좋은 글들...학생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키하고 비슷하네요... 미국에서는 얼음위에서 하는 아이스하키가 더 유명하죠... 기원이 이것이 아닐까요?
공이나 스틱만 같지...전혀 다릅니다...하키는...서로 반대편의 상대방 골문으로 넣는 경기고...
골프는...같은 구녕에 느긋하게 정원을 누비며 담소하며 하는 귀족스포츠입니다.
이호근님.. 흠.. 그냥 모든 분야에서.. 우리 역사를 뒤집는 증거가(반도사관) 하나이상씩 발견되고 발표되었다고 생각하면 조금더 간단하게 받아들일수 있을 텐데요. -0-;;
그리고, 제 혼자만의 생각인데.. 순수백인은 없어요. 단지 외모만 그렇게 보일뿐이지. 다같은 백인일지라도 뿌리가 다른거 같아요. 같은 유럽국가라도 황인을 기원으로 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어떤국가는 조금더 아프리카에 가깝다거나, 혹은 출처불분명한.. 붉은 피부톤의 색감을 가진 인종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구요.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붉은 피부톤의 피부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나요. 단지, 백인이 더 눈에 띄일뿐이져.
이호근/실제로, 도서관가면.. 역사와는 상관없는 많은 분야에서, 유라시아나, 중국대륙의 우리역사를 뒷받침하는 책들이 한두권 꼽혀 있어요. 그 머시다냐, 태극기 관련된 책을 찾다, 보게된책인데, 심지어 미술분야에서도..
한국학 책에서였는데, 우리나라문화심리학자가 그러더군요. 한국인의 근간엔 '신명'이 흐르고 있다더군요. 무속이란 이름만 사라졌지. 그 현상이 다름이름으로 일어난다고 나름의 논리를 제시하던데, 제 개인적으로 고개가 끄덕 거려지더군요, 서양학자들도 그래요. 한국인은 과학적으로 설명할수없는 기질을 가졌다구요,
그냥 역사말구.. 이것저것 간접적으로 연관된 책만 찾아보셔두, 충분히 의아함을 느낄건디
역사적 증거나 기록으로보면 혼란스러울때가 많은데. 사소한걸로 추적하는게 더 합리적일듯 하네요. 아무튼 서양과 동양은 서로가 서로에게 열려 있었던, 한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지 않았나.. 단지 그 구심점이. 우리나라역사냐, 혹은 서양의 이스라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단체냐.. 진실공방의 승자를 위한 뭐, 사상전쟁 그런 것이 아닐까요.
첫번째 댓글에 대해서 조금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내부적으 섞이고 섞여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수 없는, 마치 한중일이 섞이고 섞여 족보가 혼란스러운 것처럼.. 얽히고 섞인 거겠죠. 그런데, 가끔 tv에서 백인을 관찰하다보면 묘한 느낌을 받을때가 있는데요, 과학이 발달할 정도로 이성적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나, 뭐랄까, 마음이 둔감하다고 해야되나, 내면이 부족하다고 해야되나, 조금더 본질에 대해 파고들자면 스스로 내면의 성찰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나.. 그런 의구심이 들어요. 서양사회의 구성원에서 예체능쪽의 활약하는 분들은 동양과의 직간접적인 연관성이 분명히 있을거 생각 됩니다.
분명 우리가 배워온것이 폐쇄적인 역사가 아닌, 아주 광범위한 영역에서 굉장히 열린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을 제 나름대로 조심스레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면에서, 역사같은거 몰라도, 그냥 열심히 가슴을 열고 편견없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이 자체만으로 더 열리고 광범위한 활동에 대한 잠재력이 아닐런지요.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이런 의미에서, 이명박 가카가 정말로 싫습니다...-_-;
제가 한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 글은 아주 유익!! 이런 사소함(?).. 서양사회의 주류백인(?)의 타고난 무신경함, 안다해도, 추상적인 마음을 해부할수도 없는 비물질. 동양인과 같은 내면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안다하더라도 더 느낄수 없는 이상. 이성적으로 밖에 볼수 없다면.. 우리 동양사회에 필요한건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 동아시아의 역사분란이 종식되면, 본격적으로 따라잡을듯, 그런데.. 그 역사분란이 너무 어마어마한거라.. 분열이 안되면 다행..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 현재 요만큼만 분열된것도 그나마 대단한거 같다는, 서양중심세력이 방해하는건 분명한거 같구요.
동양사회의 장점인, 한순간 느끼고 이해하며 소통하는 능력이 어떤 계기가 되면 발현될건데, 서양의 물질관에 의해 가로 막혀 있는듯하구요.. 흠, 그런 의미에서.. 일본정부가 참 많이 거슬리네요. 러시아도 걸리적 거리구, 동아시아의 분열과 통합은 서양중심세력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할수 있겠네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건.. 모르는게 넘 많아서구요. 추상적으로 적을수 밖에 없는것도 지식이 모자라서 그러니 양해 바라구요. 그냥.. 이것저것 눈팅.. 흥미가는거 한두권식 읽다보니, 아는 영역이 아닌 '느끼는 영역'에서 이렇게 느껴지더군요. 좀더 알고 싶은데.. 이해와 노력부족으로..;;
그냥..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역사는 세계사에 가까우며, 그리고 종교(사상)이며, 그리고 영적인(철학) 것이며, 그리고 과학적인(혹은 비과학적) 또한 우주적인 것이며, 그리고 사람에 대해 설명한다.'라고 느끼네요. 분명 역사에 대해 보고 있는데, 불분명하게 영적인 것이, 혹은 과학,비과학, 그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기 위해선 역사하나만을 위한 시각으로는 모든 것을 밝혀낼수 없다 느껴집니다.
본것 많아서.. 오만단어로 아는척하며 쓴 쥐뿔도 모르는 개인적인.. 생각..;
동서양 삼국은 빨리 통일해야 합니다. 서양세력이 동양을 분열시키고 쉽게 가지고 놀기 위해서 divide&Conquer전략으로
동양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국이었던 동양을 한국,일본,중국,대만,베트남등등 수많은 나라로
2차대전 이후에 갈기갈기 찢어놓은 겁니다. 저희 아버지때만 하더라도 만주까지 자유롭게 장사하러 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만주는 커녕 북경만 갈려도 비자니 뭐니 엄청난 구속과 중간에서 삥뜯기등 이동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면서
각기 지역에서 나와바리 정권 만들어서 조폭행세하는 넘들이 너무 많아요,,
차라리 국가를 하나로 통일해서 나와바리 한놈한테만 삥뜯기는게 더 낫습니다.
결국 동양의 역사조작은 서양세력이, 아니 사실은 유돼지자본이 그 핵심이겠죠,,,야들이 동양을 영원히 찢어놓고
쉽게 관리하기 위해서 동양을 수십개의 나라로 갈라놓고, 극 나라에 하나의 동양역사를 수십개의 조작역사로
각기 따로 가르쳐서 세뇌시켜서...영원히 과거에 동양이 하나의 대국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입니다.
그래야 동양이 뭉쳐서 서양에 대항하지 못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