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민순혜
여느 때처럼 이른 아침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집을 나섰다. 동네 스포츠센터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5분여 거리로 가까운 데도 날씨가 쌀쌀해지자 손이 시렸다. 나는 시린 손을 비비면서 급히 스포츠센터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신발을 갈아신고있던 회원 한 명이 내 손을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갑을 끼고 다니세요.” 본래 그의 말투였지만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못 들은 척 지나가려는데 그는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재차 힘주어 말했다. “요즘에는 맨손으로 다니시면 손 시렵죠.” 나는 그날 운동하는 내내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운동을 마치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하니 그의 말도 맞는 듯했다.
내 서랍 속에는 보온용 장갑이 색상에 맞춰 종류마다 있다. 전년에 산 것도 뜯지 않은 포장이 그대로인 채 몇 개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운동 갈 때뿐만 아니라 대부분 맨손으로 다녔다. 장갑을 들고 다니는 것도 번거롭지만 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는 것도 번거로워서였다. 그렇다 보니 겨울이면 항상 손이 빨갛게 언 채 다니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사실 겨울이면 지인들한테 장갑 선물도 많이 받았다. 나는 운전을 하지 않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가 많다. 그러니 추운 겨울날 내가 맨손으로 걷고 있으면 가까운 지인들이 보온용 장갑을 예쁜 포장지에 싸서 가방에 슬며시 넣어주기도 했다. 몇 해전 중국 청도(QingDao)항에서 중국인 지인이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와 건네주던 털장갑도 매번 꺼내 보기만 할 뿐이다.
나는 서랍에서 보온용 장갑을 꺼내 운동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평소에는 스마트 폰으로 거리에서도 자주 스냅사진을 찍는다. 그렇기에 장갑 착용이 거추장스럽기도 했지만 매일 아침 스포츠센터로 운동하러 갈 때는 사진 찍을 일도 없다. 그런데도 우매함이라고 할까,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많은 장갑을 놓아둔 채 추위에 떨었다. 나는 어쩌면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이처럼 뻔한 일을 두고도 귀찮다던가, 아니면 다음에 해야지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처럼 나 자신을 방관한 적은 없는지, 나 스스로 변명이라는 것조차도 모른 채 게으름을 정당화시킨 것은 없는지 오래된 책장을 되짚어 넘기듯이 지난 일을 돌이켜 보았다.
그 중에도 가장 잊히지 않고 지금도 아쉬움이 있다면 어릴 적부터 품고 있던 화가로서의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 화가이셨던 담임 선생님의 지도로 처음 그림을 접할 때까지 나는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담임 선생님은 그림에 재능이 있는 반 친구 몇 명을 따로 모아놓고 방과 후 그림 그리기를 지도해주셨다. 가정 형편상 미술을 계속할 수 없었던 나를 제외하고는 그때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모두 미대에 진학했고 지금은 각자 그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나는 그 친구들을 보면서 늘 마음속으로만 그림 세계를 꿈꾸다가 사회에 나오자 바로 미술학원 일반인강좌에 등록했다. 하지만 내가 꿈꾸던 그림은 더 이상은 그려지지 않았다. 학원 선생님 말씀이 영재도 계속 계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후 나는 미술학원을 그만두었지만 아무래도 미련이 남아 틈나는 대로 미술 전시회를 찾아 다녔다. 대전에 있는 갤러리는 물론이고 서울 종로구 인사동, 북촌 갤러리는 단골로 다닐 정도였다. 그런 어느 날 갤러리에서 관람객으로 자주 뵙던 지인이 그림을 그리면 잘 그릴 거 같다면서 구경만 다니지 말고 그림을 직접 그려보라고 권유를 했다. 그리고 화백인 친구분을 소개해주셨다. 그 화백은 문화센터에서 일반인을 위한 미술 강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림 그리기를 배울 수 있었다. 화백님도 미래가 보인다며 열심히 그리라고 용기를 주시곤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수강을 미루었다. 처음에는 한 달, 두 달 미뤘다. 그러다가 한두 해가 지나도 화백님은 늘 그 자리에 계셔서 더욱 마음이 놓였는지도 모른다. 혹 거리를 오가면서 뵙기라도 하면 “그림은 언제 그릴 건가?” 라고 말씀하시며 빙긋이 웃으셨다. 10여 년이 지나도 상황은 변하지 않기에 기회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때 다시 시작하리라고 거듭 다짐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 기회는 더 오지 않았다. 내 재능을 아껴 주시던 화백님께서 몇 년 전 갑자기 작고하셨기에 이젠 그 화백님께 배울 수가 없어서였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때 그 화백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이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보온용 장갑을 스포츠가방 안에 넣으면서 문득 그 생각을 했다. 이 좋은 장갑도 옷장 안 서랍 속에만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 말이다.
―『시에문학』봄호 (2018년)
* 대전 출생. 2010 계간『시에』로 등단. 첫수필집『내마음의 첼로』
첫댓글 공감하는 부분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아침 이 글을 대하니 자화상을 보는것 같아
실소를 금할수 없습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비 오니까 좀 서늘 하죠?
불 지핀 장작불을 바라보며 차 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네요^^
즐건마음으로
읽고 갑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