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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5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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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울 엄니는 도둑년이었다
유현덕 추천 2 조회 665 23.04.05 12:23 댓글 4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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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3.04.05 12:41

    첫댓글 내어린시절보다 더 힘드셨을.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아프네요~
    지금이라도 자식들이 굶주림을 모르니 다행이지만
    결핍을 모르는 아이들은 어디에서 성취감을 찾을 수 있을까요?

  • 작성자 23.04.05 18:08

    제 어머니 인생에 비하면
    저는 참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굶주림을 모르고 사는 아이들도
    나름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더라구요.^^
    다들 자기가 사는 시대가 가장 힘들다고 여기나 봅니다.

  • 23.04.05 12:47

    참으로 어머님께서 한 많은 시집살이를 하셨네요.
    왜 예전 시댁은 부자든 가난하든 며느리를 그리 일꾼 취급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작성자 23.04.05 18:10

    내 어머니는 시집살이 때보다
    시부모 돌아가신 이후에 더 힘든 인생을 살았답니다.
    많던 재산 탈탈 털어먹고 먼저 세상 떠난
    남편 대신 덤터기를 온전히 쓰고 험난한 길을 걸어야했지요.
    엄마 인생에 비하면 저는 천국에서 사네요.ㅎ

  • 23.04.05 13:02

    저의 어머니 시집올적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어머니는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와 고생이 심하셨기에

    무남독녀로 귀하게만 자라셨으니 얼마나 고달팠을까 생각했답니다

  • 작성자 23.04.05 18:12

    제 어머니가 시집 오기 전에 그랬답니다.
    이맘 때쯤 먹을 게 없어서 칡뿌리 캐먹으며 살았다고 하더군요.
    소나무 껍질도 벗겨 보리쌀과 함께 죽써먹구,,

    님의 어머님도 제 어머니만큼 고달픈 시집살이를 하신 듯하네요.
    요즘은 시어머니가 눈치보는 며느리살이로 바꼈으니 참,ㅎ

  • 23.04.05 13:03

    아이구~ 재미져라 단숨에 읽었어요
    메누리는 살짝 못한집에서 데꼬 와야 한다는 말 아마도 님의 글속의 할머니처럼 괴롭히고 무시해서 쾌감 느끼려고 그랬나봐요
    글속에서 다들 그나마 이해가 되는데 어머니 남편이라는 남자분
    진짜 너무 하셨네요
    님은 외탁하셨다니 참 다행입니다^^

  • 작성자 23.04.05 18:14

    몸부림 님이 재미지다니 다행이어유.^^
    울 엄니는 살짝 못산 집이 아니라 너무 못산 집이라서
    혼수가 부실했다고 할머니가 더 친정을 무시했다네요.

    아버지 얘기는 계속 이어지겠지만
    제가 생각해도 이것뿐 아닌 많은 것에서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피붙이에겐 모질면서도 친구들이나 술집 여자들한테는
    천하의 호인 소리 듣는 한편 호구였겠지요.
    제가 외탁을 해서 머리가 큰 편이라 다행입니다.
    머리만 크지 든 것은 없지만서두,,^^

  • 23.04.05 13:08

    어머니 남편은 아버지 아닌가요 무심하시네 우리네 엄니들 고달픈 삶이지요

  • 작성자 23.04.05 18:16

    네, 선인장 님
    울 엄니 남편이 제 친아버지 맞어유.^^
    큰누이와 막내 고모가 말해준 것에 의하면
    아버지가 가족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남자였다고 하네요.ㅎ

  • 23.04.06 07:48

    참 가슴 아픈 이야기 입니다.
    예전 어르신 들은 왜 그렇게 내 식구(며느리)를 박대 했을까요.
    유현덕님 어머님의 아픔이 가슴으로 전해져 먹먹해 집니다.
    다행히 동네 할머님의 용기있는 사이다 발언으로 인해 어머님께서 괴로운 핍박에서 해방 되실 수 있으셨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 입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 작성자 23.04.05 18:57


    울 엄니는 당신의 시집살이에 대해 거의 말씀을 안 하셨답니다.
    제가 성인이 되어 물었을 때도 마지 못해 몇 마디 하시곤 했지요.

    도둑년이란 할머니 잔소리를 단번에 제압한 동네 할머니를
    어머니가 오래 기억한 것을 보면 그만큼 시원했기 때문일 테지요.

    엄니는 친정을 향한 죄스런 마음을 표현하곤 했는데
    외삼촌이 유독 가슴에 걸리는 모양이더라구요.

  • 23.04.05 14:13

    엄니~응원합니다...🌸 🌸🌸

  • 작성자 23.04.05 18:19

    저도 피케티 님을 응원할게요. 짝짝짝!^^

  • 23.04.05 14:23

    여자의 일생
    한많고 짓밟힌 인생
    며느리는 가족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밥한술 먹여주고
    법적 구속된 노비고 종살이였죠
    거기다 남편이라는 남자는 밤에까지 못살게 굴었으니
    그 인생살이가 어떠했을지ㅠ.ㅠ

    울 아부지 형제들은
    혼자서 여자 일생 몇씩 한맺히게 했답니다

  • 작성자 23.04.05 18:20

    불행한 여자가 울 엄니 말고 또 있군요.^^
    엄니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울 아버지가
    무척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었다고 고모가 말해주더군요.

    아부지가 무책임한 가장으론 금메달 감이긴 했어도
    여러 여자를 한맺히게는 안 했나 보더라구요.
    엄니 말로는 여자들한테 엄청 인심 썼다는,,ㅎ

  • 23.04.05 14:50

    그래요
    외 할아버지 외 할머니 외삼촌 이모 등
    외가 유전자 30% 받는다 했어요

    옛날 여자들은 왜 그렇게 같은 여자를
    못살게 구는지? 시가와 군대는 한풀이,같은 구조인것 같아요 독하게 당할수록
    더 독하게 사람으로는 못 할짓!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얼마나 친정이 그리웠을지 낮에 일 할 때는 잊는다해도
    기나긴 밤에는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 많이 흘리셨을듯;;;;

    아들 3형제 막내 며눌아기 저는(친정에서도 막내)
    철딱서니 없었고 하고 싶은대로 살았어요
    시댁 갈 때도 짧은 치마 입고
    말씨도 시집 막내 딸 같이 크크

    그런데 말입니다
    확실히 친정빽 있어야 되겠다는것
    제일 큰 형님네 건축업 성공 하셨지만
    욕 받이 되셨고
    둘째 형님네는 궁합 안좋아 다툼 많아
    아들 편 만 들은 어머니, 자연히 형님도 쌍수 들어 고부간 사이 안 좋았지요
    원인은 친정이 조금 밑진다고 생각하셔
    돈 쓴다고 스트레스를 우우

    저는 뭘하던 터치 안하셨어요
    믿는다는 것이지요
    정신이 똑바로 박힌 며늘 아기다
    판단 하시었을까요? 하하하
    실상은 그렇지도 않고 형님네 부지런함에
    죽어도 못따라 갈 천성을 지녔는데...

    고생만 하시고
    허리 한번 못 편
    부모님 삶에 머리 숙여야지요

  • 작성자 23.04.05 18:23

    댓글만 읽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똑부러지게 야물딱진 공작새 님이셔유.^^

    제가 외탁이어서 머리가 좋은 편인지 공부는 좀 잘했답니다.
    외삼촌이 4남4녀를 두셨는데 전부 공부를 잘해서 잘 살고 있지요.
    은퇴한 목사님도 있고 중견업체 사장도 있고, 그냥저냥 사는 이도 있고,,

    반면 외가를 무시했던 친가 쪽은 환갑 전에 죽거나
    다들 비리비리하게 사네요.ㅎ

  • 23.04.05 15:33

    지금이야 이렇게 까지
    가슴아픈 시집살이는 없겠지요
    예전엔 어릴때부터 친정어머님께
    순종교육을 받아서 불평등함에 맞서지를 못한듯요
    어머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요~~ㅠㅠ
    신식교육을 받았다는 저희 시어머니
    아들이 설거지만 해도
    못마땅해 하시는 표정!
    저는 그냥 못본척합니다

  • 작성자 23.04.05 18:24

    요즘 세상은 시어머니가 되레 며느리 눈치를 본답니다.
    울 엄니는 살아 계실 적 저한테 늘 당부했지요.
    각시한테 잘해라. 그저 각시 말 들으면 떡 얻어 먹는다.
    그랬음에도 저는 귓등으로 흘리고 아내 속을 많이도 썩혔네요.ㅎ

  • 23.04.05 15:36

    60년이 넘은 이야기군요.
    그땐 그랬을 겁니다.

    가난을 이유로 딸 가진 부모는 시집 보내는 걸 서둘렀었죠.
    평생 친정 나들이 한번 못하고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는 와중에 태어난 게 우리지 싶습니다.



  • 작성자 23.04.05 18:26

    60년이 아닌 거의 80년 전 이야기랍니다.^^
    신랑 얼굴도 보지 않고 중매로 시집 와서
    평생 한 남자를 바라보며 살았던 여성들이 많았지요.

    왜 고생하는 여자들을 따뜻하게 배려한 남자들이 많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바뀐 세상이 너무 좋은 요즘입니다.ㅎ

  • 23.04.05 15:50

    잘못되도 한참 잘못됬죠
    며느리를 가정부 부리듯 하는 양심없는 행동에 화도 나고 마음도 아프고 죄인취급을 받아야했으니 억울하셨을거에요
    옛날엔 이런일들이 많았지요

  • 작성자 23.04.05 18:27

    공감합니다.
    제 어머니가 88세에 돌아가셨는데 말년에는 늘 한탄하셨지요.
    모진 세상 견디고 나서 이 좋은 세상을 살 만하니 떠날 때가 되었다구요.

    남편 잘못 만나 평생 황소처럼 고생만 하다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저 한스럽기만 합니다.ㅠㅠ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23.04.05 18:29

    제 과거를 조금 아시는 분이군요.^^
    유명 작가의 작품처럼 읽힌다는 것은 과대평가입니다.

    저는 평생 노동자로 살아온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게 감성이 있다한다면 술과 시읽기를 좋아해서일 겁니다.

    어머니, 누이, 아내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죄인입니다.
    일기 쓰듯이 이런 글쓰기로 그 빚을 갚는다 생각하네요.
    들쑥날쑥이겠지만 계속 이어지니 가끔 응원해주세요.ㅎ

  • 23.04.05 16:59

    다 ~~~~그래여

  • 작성자 23.04.05 18:30

    네~~ ^^

  • 23.04.05 17:27

    쌀 한 말 하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국민학교 5학년쯤 되었을까?
    추석 무렵이지 싶어요
    오십리 외갓집으로 쌀 팔러 외동딸래미
    신문지에다가 거금 싸 들고 혼자 버스를 탓어요
    그날따라 명절 무렵이라고 사람들이 제법 붐볐어요 어찌어찌해서 외갓집 옥산엘 다 와서 허겁지겁 내렸는데 뭔가 허전해서 보니
    신문지에 싼 돈 뭉치를 빠트렸었나 봐요

    아마도 그때 당시 쌀 두어말 값은 될거같아요
    징징거리며 울며 불며 외갓집에가서 ......

    외숙모도 외삼춘도 날 달래느라 애를 먹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외갓집에 논 농사를 지었거던요
    엄마 몫으로 7마지기가 엄니 몫이라는것도 ...

    다 옛날 얘기지요
    그렇게 부잣집이라면 왜 현덕님이랑 누님이 그 고생을 했어요?

    에공
    어머님은 이래저래 몸 고생 마음고생만 하셨군요

    지나간 옛일 다들 가슴아픈 사연 들이지요
    그때만 해도~~
    들쳐내기 쉽지않는 이야기
    잘 읽었어요^^~

  • 작성자 23.04.05 18:32

    쌀 한 말에서 아득한 옛기억이 생각나셨나 보군요.
    어머니가 훔친 쌀은 한 말이 아니라 석 되였답니다.

    그리고 부잣집 자식인 누이와 제가 고생하며 산 것은 운명이라 생각한답니다.
    아버지가 요술을 부렸거나 제가 복에 겨워 엄살을 떨며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네요.

    그래선지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늘 가슴에 새기며 사네요.ㅎ

  • 23.04.05 17:45

    눈물 나는 가난한 이야기가
    새삼 내 가슴을 울립니다.

    저 역시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흙수저 아니 똥수저로 태어났습니다.

    지구온난화로 계절이 앞당겨지다보니
    제가 중학교 때(1970~1972)보다 한 달 이상 앞당겨진 것 같습니다.

    중3때 3박 4일 수학여행길, 3등 완행열차를 수원역에서 저녁 때인지 밤엔지 올라타
    밤새도록 달려 경주역(새벽 6시 경)에 내리니
    역 근처 배과수원의 배꽃이 환하게 우리를 맞이하던 날이 1972년 5월 8일이었는데

    오산의 배과수원 배꽃이 벌서 활짝 피어있습니다(오늘 보니까요).

    우리가 소싯적엔 쌀을 고사하고 보리쌀마저 떨어져 가던 시절은 양력 5~6월을 보릿고개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쑥은 한창 자라서 우리들 고픈 배를 쑥으로 채우며 살았지요.

    가난한 집에서는 밀가루에 쑥을 반죽하여 쪄 먹는 쑥개떡, 쑥버무리.
    조금 잘 산다는 집은 쌀가루에 쑥을 섞어 쪄 먹는 쑥버무리(전라도나 경상도에선 쑥털털이라고도 하더군요).
    부잣집에선 찹쌀밥을 쪄서 쑥과 섞어 떡 매로 쳐서 콩고물을 묻혀 먹던 쑥인절미 등이 있었지요.

  • 23.04.05 17:42

    대한민국 어딜 가나 흔하디 흔한 쑥은 생명력 또한 강인합니다.


    그래, 쑥쑥 자라거라
    ---------------쑥 예찬론 · 1

    --------------------------------- 박 민 순

    히로시마 원폭原爆 투하 잿더미
    체르노빌 원전原電 폭발 피폭에도
    제일 먼저 내밀었다는 얼굴
    강인한 생명, 쑥의 힘으로
    힘든 보릿고개 넘기신 우리 부모님

    해쑥으로 차려진 밥상
    해쑥이 자라는 들판은 봄 향기로 가득
    맛과 향이 비슷한
    쑥갓, 쑥부쟁이와는 사촌지간
    이파리가 비슷한
    들국화, 구절초와는 팔촌 간

    대한민국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쑥이라는 이름 그대로 쑥쑥 자라는 쑥

    쑥 연기로
    꿀벌을 진정 시켜 벌통을 관리하고
    여름날엔 모기를 쫓고
    여인들은 여성병을 치료하고

    쑥떡, 쑥국, 쑥밥, 쑥전, 쑥튀김, 쑥차로 입이
    쑥뜸, 쑥찜질, 쑥물 반신욕으로 몸이 즐겁다
    7년 묵은 병은 3년 묵은 쑥으로 다스린다
    개똥쑥은 면역력, 피로 해소, 항암에 좋다
    쑥은 최고의 건강식.

  • 작성자 23.04.05 18:35

    긴 댓글이군요.
    그것도 두 개씩이나,,^^
    아주 오래전 일을 디테일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그만큼 가슴에 깊이 새겨진 추억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쌓여서 좋은 시의 자양분이 되었을 걸로 보네요.
    민순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상을 응원합니다.
    시도 잘 읽었어요.ㅎ

  • 23.04.05 18:47

    찔레꽃 필때는 딸네집에 가지마라 는 속담이 있을만큼
    봄 철이면 대부분의 집에서는 늘 먹을것이 모자랐지요
    제 기억으론 7,80 명 국민학교 한학급에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을만큼.... ..
    방앗간 집 이나 동네 이장님 아이들.......
    어머님의 가슴깊이 맺히셨을 아픈 상처들...... 이해할것 같습니다~~
    여둥생 에게 건네받은 쌀자루를 메고가시며 눈물을 훔치셨을 오라버니의
    그 마음은 또 어떠셨을지......
    모진 세월을 살아내신 그어른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작성자 23.04.05 19:04

    찔레꽃 필 때 딸네집에 가지마라는 속담을 오늘 배웠습니다.^^
    제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어도 보릿고개를 경험하지는 못했네요.

    울 엄니가 밤낮으로 황소처럼 품을 팔아서
    꽁보리밥이나 감자, 고구마라도 먹게 했지
    저를 굶기지는 않았답니다.

    외삼촌 이야기는 조만간 쓸 생각입니다.ㅎ

  • 23.04.05 21:38

    어이구 어머니 인생도 순탄치
    못하셧군요. 무심한 아버지
    땜에 더 많이 눈물짓고 사신거
    같습니다.

    있어면서 가졋어면서 더 인색하고 고약한 인심엿던 집안에서
    엄마하고 현덕님 무진장하게
    고생하셧을듯 합니다.

  • 작성자 23.04.05 22:53

    병치료 때문에 경황없고 힘드실 텐데 여기까지 댓글 방문을 하셨군요.
    어머니 고생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태어나기 훨씬 전인 어머니 신혼 때 이야기입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좀 인색했던 모양이에요.

    조부모님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산 말아 먹기 전까지는
    비교적 풍족해서 어머니도 돈 걱정 없이 사셨답니다.

  • 23.04.06 00:06

    가슴이 먹먹합니다 어찌 그 세월을 사셨을까요 손님 대접을 그리하다니 다 워낙 없이 살던 시대였으니까요 현덕님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 작성자 23.04.06 12:13

    울 엄니는 그 고생하고도 88살을 사셨습니다.
    또 병치레 거의 하지 않고 편하게 가셨습니다.
    제 친구 엄니는 환갑 막 지나고 세상 떠나셨는데
    아버지부터 자식들까지 온 가족이 어머니를 왕비 모시듯 했었지요.
    편하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닌가 보더라구요.ㅎ

  • 23.04.06 06:56

    어머님이 고생많이 하셨네요~~
    전 4년전 돌아가신 고생하신 어머니 이야기를 막내여동생이 책으로 내겠다고 시작하고 끝맺지 못한 화일을 읽고 있어요~~
    저희 어머닌 가난한 시골집에 시집와 내리 딸낳다가 뒤늦게 아들낳은 이야기며 저희 6남매 서울로 학교보내고 억척스럽게 살아내신 삶을 구술해 놓으셨지요~~
    그때 어머님 고생담을 이제와 눈물로 읽는답니다~~

  • 작성자 23.04.06 12:15

    어머니의 일생을 책으로 남겨 후손들이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래도 구술이라도 남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는 오직 가슴에만 기록했기에 더 많이 대화 하고 그럴 걸 후회가 되지요.
    제가 유명한 청개구리였거든요.ㅎ

  • 23.04.06 08:26

    눈물을 참느라
    목이 아픕니다.
    ㅠㅠ

  • 작성자 23.04.06 12:16

    눈물 공감도 맑은 눈이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페이지 님의 고운 공감을 환영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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