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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1서의 말씀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르타는 마치 떼를 쓰듯이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 11,27)
그렇게 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요한 11,40)
오늘 독서에서도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1요한 4,1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한 가족>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이 옛날에는 성녀 마르타의 축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는 마르타의 동생과 오빠는 성인으로 공경받지 못했다는 말이고, 마르타만이 가족들을 대표하는 성녀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세 분을 성인으로 같이 기념하는 새로운 전례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고 과거에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을 이제 제대로 조명하는 의미가 있을 텐데, 제 생각에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을 사랑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저는 이순희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를 높이 삽니다
부부가 같이 하느님께 나아간 경우이니 말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대단히 훌륭하지만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에게 귀감이 되지요.
그렇지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 사랑은 갇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갇히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사랑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기 사랑에 갇히고, 기껏해야 가족 사랑에 갇혀 더 이상 사랑이 확장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세상 서로 사랑하다가 같이 사랑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이것을 심하게 얘기하면, 고양이를 사랑하며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처럼 슬픈 사랑입니다.
인간이 되어서 그래 고양이나 사랑하며 살다가 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인생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되어서 하느님 사랑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신앙생활입니까?
이는 천국에 가려 하지 않고 기껏 이 세상에서 복되게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슬픈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주 얘기합니다.
연인들의 풋사랑은 서로를 보지만 부부의 익은 사랑은 같이 한곳을 바라본다고.
그런데 부부의 사랑이 같이 한곳을 바라보긴 하지만 그 한곳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식일 수도 있지요.
이번 행진자 중에 딸이 출산하여 첫 손주를 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딸이 출산하러 가는 날 행진에 참여하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출산하는 딸 옆에 있지 않은 비정한 엄마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잘 갔다가 오라고 한 남편이 있어 자녀도 같이 사랑하고 주님도 같이 사랑하는 것을 동시에 실현한 성숙한 부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교회는 오늘 한 가족의 축일을 통해 한 가족의 거룩한 삶에서 자극도 받고 본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에겐 성녀 클라라의 가족이 이 거룩한 가족의 본보기이지요.
세 자매가 클라라의 수녀가 되었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수녀가 되었으며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성녀 또는 복녀가 된 거룩한 가족이니 말입니다.
한 가족이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은 욕심을 내도 좋을 욕심일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해야 하느냐?’,
‘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 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굳이 낫게 해 달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또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 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은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살아야 할까?>
한국의 유명한 가수, 작곡가, 연극 창시자 김민기 선생이 2024년 7월 21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민기씨는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요 히트곡이자 찬가가 된 노래 '아침이슬'의 작곡가입니다.
김민기씨는 '아침이슬' 외에도 ‘상록수’ 등을 작곡하였지만, 그의 노래는 나오는 대로 금지곡이 되었고 옥살이까지 해야 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공장에서 일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야학당을 만들어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다 학전이라는 극장을 만들어 ‘지하철 1호선’ 등으로 황정민, 설경구 등의 연기자, 윤도현 등의 가수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의 영결식에는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각계각층의 유명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나도 저래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던데 그게 아니라 사람은 죽어서 사람을 남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세계 4대 성인으로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 예수를 말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물론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책을 쓰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제자 집단을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책보다 오래 남는 게 사람들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라는 세 남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남매로서 하나의 제자 공동체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시는 은혜를 베풀었고, 마리아가 향유로 당신 죽음을 준비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마르타의 호의도 다 받아들이셨고, 그러나 물질적인 봉사보다는 당신께 머무는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왜 이들에게만 그리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사실 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보다 그 사랑해주는 이들이 여럿일 때 더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함께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당신도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의 공동체에 당신 이름이 새겨질 때 한 사람에게 새겨지는 것보다 더 오래 남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타니아 세 남매의 집에서 자주 쉬셨고 에너지를 회복하셨습니다.
저도 사람들을 만날 때 지치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여러 명을 만날 때는 마치 기도를 할 때처럼 힘을 얻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 안에서 주님의 성령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이라는 세 과학자가 실험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 둘을 잠깐 만나 눈을 마주치게 하고 따로 어두운 방에 들어가게 하고는 한 사람에게만 빛을 비춥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의 뇌파에도 그 반짝이는 빛을 감지하는 지에 대한 실험입니다.
놀랍게도 거리에 상관없이 잠깐 마주친 두 사람은 한 사람에게만 빛을 비추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 성 베네딕토 등은 많은 말씀을 하신 분들이지만, 정작 그들을 알게 되는 이유는 그 수도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 살아계시기 위해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영향을 받아 믿음이 증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남길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거룩하게 살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사람들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그들 안에서 오래 살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의 힘은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1)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테살 4,13-14)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1코린 15,20-22)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다는 부활 신앙에서부터 시작된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나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때문에 큰 슬픔과 허무와 절망에 빠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인데, 신앙인이라면 부활 신앙으로 그 슬픔과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만 해당되는 일이고, 예수님의 재림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재림’과 ‘종말’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테살 4,15-17)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니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에는 ‘에녹’이(창세 5,24), 열왕기 하권에는 ‘엘리야’ 예언자가(2열왕 2,11)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도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라는 말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3)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마르타의 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믿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안 믿었지만(마태 22,23), 일반 유대인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종말이 되면 모두 다 부활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마르타가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믿음을 표현한 것은 아직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또는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는 말씀은 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요한 5,21-22.)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부활시킬 것인지 멸망시킬 것인지의 권한을 당신이 가지고 계신다는 분명한 선언(계시)입니다.
부활을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활 자체가 곧 영원한 생명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은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한 일이고(묵시 20,12-15), 그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들만 그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루카 20,35).
신앙생활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고,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요한 5,25).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환대의 사랑 - “환대의 사람, 환대의 집”>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시편 34,2)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유익합니다.
“타인이 나의 거울이 되듯 나 또한 타안의 거울이 된다.
‘나는 얼마나 맑고 깨끗한 거울인가?'”
<다산>
날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사랑을 새로이 할수록 맑고 깨끗한 마음의 거울일 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의 환대의 사랑, 환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겠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배워 본받고, 좋지 않은 점은 나 자신을 바로 잡는 거울로 삼는다.”
<논어>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제 자신을 비춰보고 배우는 공동체 형제들의 거울입니다.
사실 만나는 모든 이들 하나하나가 저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매일 주님의 거울인 미사 얼굴에 자신을 비춰보는 우리들입니다.
또 어제 과학잡지 뉴톤 8월호에서 “지능이란 무엇인가?”에서 읽은 저명한 학자의 인텨뷰 결론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실패에는 좋은 실패와 나쁜 실패가 있다.
나쁜 실패는 누군가가 이미 경험한 실패이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나쁜 실패를 할 확률이 낮아진다.
그런 다음 경험하는 실패는 좋은 실패다.
결국은 좋은 실패가 중요하다.”
매사 모두에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수행생활에 충실할수록 나쁜 실패는 줄어들고 있다하면 좋은 실패들일 것이며, 이는 내적성장과 성숙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 후 교황님의 강론 주제가 멋졌습니다.
“음미하십시오.
날마다 하느님의 기적들을!(Savour, God’s everday miracles!)”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기적을 음미하며, 맛보며 사는 삶이 참 멋집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오늘 화답송 후렴도 잘 어울립니다.
우선 그 시작이 매일 미사때 주님을 맛보는 것입니다.
주님 맛으로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세 남매의 이름을 따서 저희 요셉 수도원 피정집 하나는 마리아의 집이라 부르고, 하나는 라자로의 집이라 부르며, 봉사자 집은 마르타의 집이라 부릅니다.
오늘 세남매를 동시에 기념일로 지내기 올해로 4번째입니다.
그전에는 이 날은 마르타의 기념일로만 지냈습니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각별한 배려의 사랑을, 결단을 깨닫습니다.
2016년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켰고, 어제는 제4회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지냈는데, 역시 현임 교황님의 배려의 결단임을 봅니다.
당시 교황님의 가르침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님은 순례자요 손님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여행중인 주님을 환대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두 대조되는 태도로 봐서는 안되고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일치와 조화에서 체득되는 태도로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봉사와 사랑의 활동은 주된 원천에서 결코 떼어낼수 없습니다.
주된 원천이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형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향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 관상이라면 무익하고 불완전합니다.”
교황님의 환대, 그리고 관상과 활동에 대한 명쾌한 설명입니다.
환대의 사랑은 관상과 활동으로 표현되는 상호보완의 관계요 환대의 우선 순위는 말씀의 경청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그러하듯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님간의 관계도 두 성인처럼 상호보완관계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관상과 활동, 우선순위의 문제이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산山과 강江’이란 제 자작시가 있습니다.
역시 이 시는 '성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저의 신원을 보여줍니다.
“밖으로는 한결같은 정주의 불암산山,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한결같이 맑게 흐르는 강江, 성 프란치스코”
전번 방문했던 한의원 아들이 둘있는데 큰 아들은 산山, 작은 아들은 강江이라 하기에 기막힌 이름이란 격찬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환대하는 미사의 구조도 말씀전례에 이은 성찬전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의 주님 환대가 적극적이요 빛을 발합니다.
마르타 덕분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참 기막힌 복음의 진리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으로 평생 화두로 삼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설파하신 후, 주님은 “너는 이것을 믿느냐?”물으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마르타는 참으로 멋진 신앙고백으로 주님을 환대함으로 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영원히 우리의 주님 고백으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환대의 우선순위는 말씀의 경청이자 신앙고백임을 깨닫습니다.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는 주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이들 삼남매가 살던 베타니아의 집은 주님이 피곤할 때 마다 수시로 마음 편히 머물렀던 ‘환대의 집’ 같습니다.
환대의 사랑에 환대의 사람들인 삼남매요, 환대의 집인 베타니아 집이요 이들을 닮은 우리 성베네딕회 요셉수도원입니다.
요셉 수도원뿐 아니라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필수 덕목이 환대입니다.
정주와 환대의 영성은 한쌍을 이룹니다.
규칙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러낼 것이며 특히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성규 53,1-2)
그러니 수도원을 방문하는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 나그네들에 대한 환대의 사랑, 환대의 영성은 베네딕도회 영성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는 환대의 사람들인 수도자들이요, 위로와 치유가 일어나는 환대의 집, 주님의 집, 평화의 집인 수도원은 흡사 세상 광야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는 흡사 ‘사랑의 찬가’같습니다.
짧은 말씀 안에 무려 사랑이란 말마디가 18회 나옵니다.
새삼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사랑 예찬의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듯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의 요한 사도야말로 주님을 가장 닮은 '사랑의 대가'이자 '사랑의 달인'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환대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주님은 환대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환대하시며, 우리 역시 마음을 활짝 열어 말씀과 성체로 오시는 주님을 환대의 사랑으로 맞이하는,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시편 34,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문자 보냈습니다.
자동차 키가 안 보인다고 합니다.
분명히 차를 타고 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키가 없다고 합니다.
제게 키가 하나 더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사무장님이 자동차 키를 가져왔습니다.
교우분이 길에 떨어져 있는 자동차 키를 주워서 사무실에 맡겼다고 합니다.
키를 하나 복사해야 했는데, 찾아서 다행입니다.
저도 좋은 일을 했습니다.
공항에서 여권과 핸드폰 그리고 항공권을 주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10분 정도 있으니 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왔습니다.
저는 제가 보관하고 있던 여권과 핸드폰 그리고 항공권을 보여주며 본인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맞는다고 하면서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저도 기분 좋게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생명이 머물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하느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는 사람입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겨자씨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였던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꽃동네를 시작한 오웅진 신부님입니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환경미화원에게 따뜻한 국물을 나눠주는 포장마차 주인입니다.
헌혈증을 모아서 수혈이 필요한 아이에게 전달한 국밥집 주인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겨자씨’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리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나라입니다.
문학적인 상상력을 뛰어넘는 나라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외장 하드에는 수백 편의 영화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나라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정보를 검색하기도 하고, 은행 업무를 보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하고, 사진을 보내기도 합니다.
스마트 폰은 작지만 접속하기만 하면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해 줍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머물며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나라에 머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스마트 폰으로 접속하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기도로 하느님 나라에 접속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과 나눔이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로 접속하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주님의 섭리>
어느 형제님은 반드시 회사에 출근한 뒤에 회사 화장실에 들러 대변을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대요.
“나는 똥을 싸면서 돈을 번다.”
틀린 말이 아니죠?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산다면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겠다 싶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회사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봉인데도 늘 즐겁게 생활하십니다.
사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아니 분명히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그 형평성은 자기 마음에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보상을 받으면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이 세상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하나를 베풀면, 상대방도 하나를 줘야 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10개를 줘도 하나도 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큰 이득을 얻었다면서 좋아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히려 주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너무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삶은 길게 잡아봐야 100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자기가 베푼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사랑이 하느님 나라에 보물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입니다.
100년 동안 사랑만 베풀었다고 하느님께서 바보같이 살았다고 하실까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나라에 가야 진정한 공평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예수님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누이며 마리아의 자매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오셔서 쉴 수 있는 곳이었지요.
그만큼 예수님과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과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만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지요.
다른 사람은 다 살리면서, 사랑하는 오빠에게 무관심했던 예수님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르타는 자기의 신앙을 강하게 고백합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이라는 믿음을 표현하지요.
그 결과 오빠를 살리시는 주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합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일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주님의 섭리를 그때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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