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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새해 첫 주에 내가 사는 곳 인근에 있는 퍼시픽 팰리세이드에서 산불이 났다. 오십여 년 전에 미국 동부의 뉴욕주 북부지방 시러큐스에 있는 뉴욕주립대학으로 유학 왔던 나는 수련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부모님과 형제들이 정착하여 살고 계시던 도시인 로스앤젤레스로 직장을 잡았다. 이 도시는 살기 편하고, 경치 좋고, 다인종이 함께해서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남쪽 캘리포니아주(州)에 있다.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라 영하로 내려가는 추운 날이 거의 없고, 대신 여름, 가을철에는 인간의 체온과 비슷한 38도 정도로 기온이 올라가는 더운 날이 많다. 습하지 않기 때문에 불쾌지수는 그리 높지 않다.
다인종의 나라인 미국의 대표적 도시라서 그런지, 동양인을 홀대하지 않는다. 동양인이 많아 좋지만, 단점도 있다. 인종 차별을 피하고 사회정의 실현 정책의 일관으로 많은 주립 대학은 비례제 입학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다 보니,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통의 학생들에게 할당된 수와 동양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수가 비슷하여도, 고등 교육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동양계에는 많으므로, 명석한 동양 학생들끼리 서로 경쟁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원하는 곳에 입학이 어렵다. 비례제도에 쓰는 자료는 인구조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퍼시픽 팰리세이드는 태평양이 서쪽에, 산타모니카 산맥이 동쪽에서 안고 있는 형태이다. 경부고속도로의 2.5배 이상의 장거리인 1번 하이웨이가 남쪽 샌디에이고 시작점에서부터, 북쪽 샌프란시스코까지 이 지역을 관통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하루 날 잡아서, 드라이브도 하고 계획 없던 피크닉을 해변에 머물면서 즐길 수 있다. 모국의 동해안을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곳도 많이 있다.
퍼시픽 팰리세이드 집들이 전소되기 전에는 태평양 해변을 따라 주택가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건축업자들이 산을 깎아서 개발한 산 동네에도 마을이 있었다. 거부들은 해변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큰 저택을 짓고, 자기 개인 소유의 해변을 갖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이다. 이 해변 곳곳에는 여러 에스닉 푸드를 만드는 레스토랑이 있어서, 서민들은 갑부들의 호화판 환경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등산, 수영 이외에도 원조 게티 뮤지엄에 들려서 귀한 미술품을 관람하거나, 근방 말리부에 있는 페퍼다인 대학에서 세미나에 참석할 수도 있는 멋진 동네이다. 울산이나 강릉항처럼 어선이 정박하여 서로 싱싱한 해물을 건네는 풍경은 볼 수 없다. 바닷가이지만 생선 냄새는 없고, 미역 냄새만 있다면, 조금 이상한 표현일까? 퍼시픽이라는 말은 피스(peace:평화)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고, 팰리세이드란 옛날 말뚝을 박아서 울타리를 만들어 경계를 짓는다는 뜻이다.
이곳에 산불이 났다. 덥고 건조한 광풍이 불어서 불은 미친 듯이 퍼졌다. 삽시간에 동네가 타들어 가고 불똥은 80킬로미터, 100킬로미터 멀리까지도 날아가서 새로운 불을 지폈다. 집과 비즈니스 건물들은 형체를 잃고 땅에 잿더미가 되어 주저앉았다. 나는 이 산타모니카 산의 다른 편 쪽에 살고 있는데, 불이 내가 사는 쪽에 도달하려면 두 개의 계곡을 넘어야 한다.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던 산불로 12,300개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사상자도 있는데, 이 와중에 도둑질하다가 잡힌 사람들도 30명이 넘는다고 한다.
바람으로 불똥이 멀리까지도 튈 위험이 있어서,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산등성이 위로 뭉게뭉게 올라올 때, 방위군과 소방대원, 경찰이 대피 명령을 전달하였다. 시간적, 정신적인 준비 없이 여권과 랩탑 컴퓨터, 전화만 들고 단벌 신사로 집을 나섰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차를 운전해서 일단 집을 떠났다.
우리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 불에 타서는 안 될 ‘귀중품’이 무엇일지 순간 생각해야 했다. 아니, 그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아이들 어렸을 때의 기록들,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남편과 친구들이 보내 주었던 편지, 100년도 넘은 외할머니와 부모님의 퇴색한 흑백 사진들이 우선 뇌리를 스쳤다. 많은 미술 작품과 사진들은 액자 안에 감금되어 있는 형편이어서 아픈 마음을 그들과 함께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몇 개의 액자들을 내려서 갖고 오려고 모아 놓다가, 그 또한 부질 없다 싶어서 모두 두고, 떠났다.
비행기로 2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뉴멕시코주(州)의 딸네로 갔다. 손주들과 닷새를 함께 했다. 어수선하고 힘들었던 때였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기회를 선물로 받았다. 엘에이 여러 기관과 관공서에서는 응급상황에 맞추어서 계획했던 행사를 과감히 취소하고 재조정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엘에이 한인의 날 행사도 연기되었다. 함께 하는 마음으로, 리더십을 갖고 결정을 해 주는 분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염려하지 않았다. 염려나 걱정은 미래의 것이고, 나는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뉴멕시코에 있는 코스트코에 가서 허드레 갈아입을 옷도 샀다. 이 ‘화마 탈출’ 기간 동안 친지들은 걱정 말고, 용기 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영리단체인 한국어 진흥재단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미국 중부에 살고 계시는 이사님은 매일 성서 구절 한 개 또는 두 개씩을 보내 주시었다. 뽑힌 구절들은 주로 마음과 영혼을 믿음 안에서 강하게, 담대하게 하면 세상은 전능하신 분이 모두 정리하신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구교 신자이고 그 친구는 신교 신자이다.
산불은 우리 쪽의 산까지 퍼지지 않았다. ‘아, 정말 행운의 신이 우리와 함께했어! 우린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산불로 과거의 흔적을, 조상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의 희망 담긴 메시지 일부 또는 모두를 잃은 사람들이 있다. 물건은 사면 되고, 집은 다시 지으면 된다. 귀가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은 평화로워 보였다. 언제 그런 환난이 있었느냐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나에게 진정한 귀중품은 과연 무엇이었나? 진주,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 아니었다. 훌륭히 만들어진 양복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과거로 자꾸 돌아가게 하는 부모님에 대한 추억, 그분들의 사진들, 아이들과 함께했던 행복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던 순간들을 엮은 물건들, 환자들이 준 물건들이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는 글로 쓴 것들-일기, 편지, 증명서 같은 것들은 모두 온라인 기구를 이용해서 저장하려 한다. 사진들도 스캔해서 같은 방법으로 저장하면 되겠다. 그리고 한군데에 모아 두면 된다. 세면도구 넣을 만한 가방이면 소장이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가! 아니면 공중에 있는 구름(iCloud)에 저장하여도 된다.
뒤돌아보지 말자.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미국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
한국어 진흥재단 이사장
미주 중앙일보 ‘오픈 업’ 칼럼니스트
재외동포재단 문학상, 재미수필 신인상, 미주 가톨릭문학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