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달구지
전 성 희
내 고향인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가 달구지를 보았다. 중앙박물관을 관람하고 오정 때의 허기짐을 채우려고 블럭으로 쌓은 담을 따라 돌아서니 일본식으로 지어진 음식점에서 내걸은 글자 모둠이 달구지였다.
어릴 적에 일식으로 지어진 집에서 살았던 나는 건물의 구조만으로도 가슴이 저렸고 어려웠던 시절에 수레나 구르마라고 부르던 바퀴가 달린 달구지를 연상케하니 내 마음은 세월의 징검다리를 덜커덕 덜커덕거리며 유년의 골목길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삼륜차가 생기기 전 우리는 짐을 실어서 나르는 수단으로 달구지와 지게를 사용하였다. 지게는 달구지보다 늦게 없어졌는데 서울역 앞에는 어둡고 남루한 옷차림의 지게꾼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정경을 오래도록 빚어내었다. 보통 달구지에는 비교적 덩치가 크고 많은 분량이 실렸지만 작은 부스러기 짐은 지게에 얹어 등에 지고 날랐다. 리어카라고 불리던 손수레가 뒤늦게 생겼는데 장사꾼들이 팔 물건들을 실고 다녔다. 해삼장사가 해삼 멍게에 새콤달콤한 초장을 곁들이고 옷핀을 펴서 찍어 먹는 도구로 구색을 맞추어 이 골목 저 골목을 소리치며 끌고 다니던 손수레도 고달프고 정겨운 시절의 유물이다.
덕흥리 고분이나 안악3호분 쌍영총 무용총 각저총 등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달구지는 쓰임과 신분에 따라 모양과 장식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달구지는 말이 끌면 마차요 소가 끌면 우차로 사람이 직접 끌 수도 있었다. 짐이 실리면 짐차요 가마방을 만들어 사람이 타면 인력거로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소보다 가격이 비싸고 귀했으니 말할 것도 없지만 옛날에는 시골에서 소도 큰 재산이었다. 도시에서도 소를 부릴 여유가 있다면 안간힘을 써서 수레를 끌어서 입에 풀칠을 하지 않았으리라. 우리 옆집에 살던 연순이네는 인현시장에서 쌀 상회를 하고 있었는데 연순이네 가게 마당에는 늘 달구지가 있었다. 작업복이 따로 없던 시대에 군복 차림을 한 수레꾼들이 쌀가마가 산 높이만큼 실린 트럭이 도착을 하면 하차를 도우며 일거리를 얻으려고 뙤약볕에 모여 있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도 인력거꾼 김첨지의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그렸다.
무엇이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도 음양은 있게 마련이어서 헐벗고 굶주림에 진저리를 치는 군중들이 있는가 하면 번화한 골목에는 인력거들이 손님들을 기다리며 줄을 지어 있는 낭만적인 도시의 밤 풍경도 흑백영상 속에 남아있다.
서울에서 하층민들이 호구지책으로 허리와 팔다리 힘으로 끌던 달구지는 경운기가 보급될 때까지 농촌에서 재산목록으로 비중이 컸다. 내가 결혼하여 청주의 서부지역인 소래울에 살게 되면서 용달차에 밀려나 사라진 달구지를 보았을 때의 반가움은 소실적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마을 안 40여 호 농가에는 두어 집 달구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집은 우리 집 소를 얻어다 쓰던 달구지였다. 남의 집으로 가서 일을 해 주고 품을 벌어오던 우리 외양간의 늙은 소를 소죽을 끓일 손이 부족하다고 장날 장으로 내가자 소가 없는 집의 달구지는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농지를 갈거나 쓰리고 볏짝과 보리짝 콩깍지와 두엄 등을 나를 때면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차가 있는 집에게 어렵사리 부탁을 하여 마무리하곤 했다. 그 시절 소와 달구지 주인은 자주 술 한 잔 내라하고 뒷밭을 부치겠다고 하여도 거절을 할 수 없었다.
고구려 문화 탐방길에 나섰다가 들어 갈 수 없어서 신발에 정만 담아 온 집안의 5호묘 5호분의 널방 벽화에는 수레바퀴신과 부젓가락을 망치로 두드리는 대장장이신이 그려져 있어 먼 거리를 가도 바퀴가 상하지 않는 수레바퀴의 비밀은 쇠테에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단다. 수레바퀴는 중심축에 살을 끼우고 살 끝에 둥그런 모양의 조각을 연결하고 쇠로 만든 테두리를 입혀서 완성하는데 청남대 작은 연못가에 덩그마니 전시되어 향수를 자아내고 있다.
수레는 고구려인들이 화려한 외출을 할 때 필수품이기도 하였지만 교통 통신 수송의 수단이 되어 거침없이 대륙으로 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를 거름으로 쓰는데 서울에서는 한 줌에 한 푼이나 하니 이 무슨 까닭일까. 중국에 재산이 풍족한 것은 물자를 골고루 유통시켰기 때문이요. 사방이 수천 리 밖에 되지 않는 나라가 가난한 것은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라고 적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민들의 전용물이 되었던 수레는 막강한 수송량을 해결할 수 있어서 수레제작은 현재의 자동차 산업과 같은 최첨단 기술산업이었다고 한다.
오십 년대 초 서울은 일제 치하의 설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쟁이 휩쓸면서 할퀴고 지나간 민중의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났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의 그리움이 배어있는 달구지에 올라앉아 얼큰하게 끓여서 놋대접에 담아 내 놓은 육개장을 맛있게 먹으며 감회에 젖었다. 진달래꽃 그리움도 쪽빛 서러움도 모르던 나이에 눈에 비쳐진 애련한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첫댓글 머물다 갑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달구지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감상 잘했습니다
아주 어릴때...딱...한번...달구지를 타본적이 있었는데...^^ 글...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