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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1:25-28
머리를 들라
(눅 21:25, 개역)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눅 21:26, 개역)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눅 21:27, 개역)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눅 21:28, 개역)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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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다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인생이란
사적인 감정에 휩싸여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으로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세상 끝날에서 볼 때는
이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끝이요, 마지막 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상의 요란함은
마지막 때의 안목으로 봤을 때,
하늘의 요란함이
그대로 전달된 결과입니다.
즉 땅이란
그 자체로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일어난 일의 여파가
그대로 땅으로 전달됩니다.
하지만 이미 악마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인간에게는
이런 사실이 그대로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고요함을 원합니다.
사는 환경이 평화롭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출발해서 하늘에 닿는 듯하면서도
곧장 익숙한 땅으로 되돌아오는 사고방식으로
하늘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이란 그저 땅을 감싸고 있는
동네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은
바로 이 점을 뒤엎습니다.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을 거쳐서
다시 하늘로 돌아감으로서
땅이란 그저 하늘의 내막을 담아내는
무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단지 무대의 소품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내용의 자신을 싫어합니다.
세상이 자기 원대로
움직여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모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현재란
단지 과거의 경험 가운데서
현재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유리하게 만드는 조건으로만
동원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무수한 과거 경험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치 않는 과거는
마치 경험하지 않았던 것처럼 간주해버리고 삭제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필요없다고 내버린
그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연결은
사람이 자기에게만 주의집중 할 경우에는
알려지지 않고
감추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겁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이해하는 그 하나님상을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뒤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반대로 알고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자기 관심으로 인하여
정작 하나님께서 관심두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중요시 않는 인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구태여 고개 들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늘에게 벌어진 전쟁은
지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사적인 모든 일생사가
마치 ‘없는 것’처럼,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간주하게 만듭니다.
로마서 4:4-8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때 말씀에서 보면,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이 세상의 중심이 될 만한 일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정체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2:7-9에 보면,
“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고개를 처들고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먼저 파악해야지만
지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실상이
밝혀집니다.
사람이란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를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자기에게 유리한 과거들만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재를 보는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고개를 처들고
예수님의 구름타고 오심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11-15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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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백성들로 하여금
고개를 들고
땅에서부터 하늘 쪽으로 시선을 바꾸시려는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뱀을 여기저기서 발생시켜서 물려죽고 혹은 아프게 했습니다.
당연히 이미 죽은 자들이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땅을 미워할 수 없는 식입니다.
즉 자아는
땅의 것으로만 장식되어있습니다.
땅의 일부가 되고
땅의 부분이 되어져 있습니다.
땅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땅을 미워하는 경우란
오로지 자기가 자신을 미워하는
그 경우 뿐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평소의 삶이란
고개를 하늘을 향하여 들고 싶지 않는 투로
산다는 말이 됩니다.
고개를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악마는 자꾸만 고개를 낮추는 식으로
사태를 유발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하늘과 통하는 지상의 장소를
마련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입니다.
성도에게는 정기적으로
흠없는 어린양이 죽어나갑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그런 식으로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성소가 벌어진다는 것은
하늘이 벌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9:8에 보면,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통하는 길이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으면서 가리키는 바,
“예수님은 저기 계시네요!”
성령 안에 있는 자만이
이 세상이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주로서 등장해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극 무대인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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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강-눅21장 25-28(머리를 들라)120507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1장 25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3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1:25-28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세상에 좀 냉정할 필요가 있거든요. 감정에 흔들려도 안 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사적인 감정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을 주님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할 일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할 일에 너무 매진해 버리면 정작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이 땅에서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소외되어버립니다. 남의 일처럼 되어버려요. 예수님의 일이 남의 일이 되지 않으려면 내 일이 우선, 나 중심 우선으로 가면 안 되고 ‘나는 지금 일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순간에 예수님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이것을 보시면 되겠지요.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현실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는 일이 현실을 만들어 가는지를 냉철하게 생각해 보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울고불고 한다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일이 아닌가, 고민하고 걱정한다는 것도 냉철한 예수님의 현실관 앞에서는 어린애 칭얼대는 것 밖에는 아니지요.
옛날 한국영화에 아슬아슬한 장면이 상당히 많지요. 특히 옛날 공산당 나오는 영화를 강제로 많이 봤는데 거기 보면 북한에서 기차로 피난 오는 도중에 북한군이 검문을 하지요. 그때 애가 울면 안 되는 대목이 있어요. 또 숲을 헤치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인민군이 길목길목 다 지키고 있는 판이니 조용하게 와야 되거든요. 그때 철없는 애가 칭얼거리지요. 그런 순간에 영화 보는 관객들은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물론 그런 장면을 보기 위해서 돈 주고 들어왔겠지만. ‘울면 안 되는데, 여기서 애가 울면 다 들통 나는데, 안되는데, 다 잡히고 마는데, 안 돼, 울면 안 돼!’ 애 입을 억지로 틀어막지요.
애가 뭘 알겠습니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뭘 알겠습니까? 그냥 배고파서 또는 몸이 불편해서 칭얼거리고 울지요. 애들은 냉정하지를 못해요. 세상을 냉철하게 보지를 못해요. 자기 몸 좀 불편하다고 징징거리는 것만 할 줄 알았지 지금 아빠 엄마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아빠 엄마가 위기에 처하면 자기도 위기라는 것을, 그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요. 꼭 우리 같아요. 예수님의 설교는 막장 설교입니다. 갈 데까지 가는 설교에요. 그 중간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막장 설교에요.
우리는 오히려 막장을 겁내고 있어요. 맨 날 칭얼대기만 하고. 예수님이 막장 설교 앞에서 이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지혜를 예수님한테 배워야 돼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어제 청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로마서 4장에 보면 다윗에게 이야기하기를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복은 대단하다.’고 되어 있지요.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이냐고 하지요. 그 말씀을 제가 던지면서, 그 청도의 용정골짜기까지 오신 분들에게 그랬어요. ‘우리 오늘 아무것도 안 한 겁니다. 우리들만의 약속입니다.’ 그 때 젊은 사람 둘만 웃었어요. 다른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이 땅에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우리가 아무것도 안한 것이 드러나야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진짜 값없이 줬다는 것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막장설교고 사도바울이 막장설교 한 겁니다. 우리는 조금만 일이 있으면 칭얼대고 징징대고 난리가 나요. 세상 곧 끝날 것처럼 몸부림치면서 반발하는데 주님께서는 말합니다. ‘너 무슨 일 있나? 내가 보기에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 일도 없는데 우리는 어린애처럼 평생 칭얼대기만 하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감도 못 잡으면서 자기가 만든 자기세계에 가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일설에 의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김밥천국 집을 만들어서 퍼뜨렸다고 하는데 우리는 김밥천국 집에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을 해서 밥 먹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김밥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천국입니다. 분명히 해야 돼요.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로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막장 설교, 끝장설교, 끝 날에 와서 되돌아보시면서 날리시는 멘트들, 예수님 본인이 끝 날에서 서서 되돌아보면서 ‘무슨 일 있어? 집안에 무슨 일 있어? 내가 보기에 아무 일 없네.’ 예수님 자신의 마지막 때를 미리 앞당겨 보여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모순점이 있는데요,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아주 위험한 곳이에요. 실컷 이 세상이 위험한 곳이고 지옥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순간순간마다 언급 하시면서 절대로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이 둘 다 이해가 돼야 됩니다. ‘이 세상은 위험한 곳입니다, 여러분!’ 그 다음에 ‘절대로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위험하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 본문 말씀대로, 오늘 설교 제목대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게 하기 위해서 위험한 일을 만들어주니 이 세상 살면서 온 순간순간 위험한 일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위험을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위험한 일을 안 만나면 우리가 고개를 안 들기 때문에 그래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위험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주님께서는 끝장설교를 우리보고 하시는 겁니다. ‘위험하지? 무섭지? 겁나지? 놀랍지? 그런데 괜찮거든! 고개만 들면 하늘을 보면.’ 전혀 위험한 것조차 우리가 고개를 들도록 하기 위해서, 쉭쉭, 자전거 바람집어 넣듯이 하는 거예요.
위험한 일이 안 일어나면 그저 뱀처럼 땅에 고개 처박고 땅의 냄새만 맡으면서 가는 우리에게 쉭, 쉭 바람 집어넣어서 다시 고개를 들게 만드니까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끝장설교로 봐서는 얼마나 좋은 세상이에요?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된다면 우리는 고개 들일도 없을 겁니다. 고개 들지 않으면 우리는 뭔가 했다고 여기고 뭔가 엄청난 일을 벌였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만의 약속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값없이 우리는 죄 용서를 받고 의인되었습니다.
교회 와서 분산 떨지 마세요. 요란스럽게 하지 맙시다. 어제강의하면서……, 우리교회 교인들을 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 이해하니까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꼭 이슬람여성들 같다고 했어요. 얼마나 수줍은지 입 막고 코 막고 눈만 내놓고 조용하게 왔다가 조용하게 간다고 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조용한 하늘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을 아주 요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기절하리니” 얼마나 놀랬으면 기절 하겠습니까, 얼마나 놀랬으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와이 미? 왜 저에게, 이럴 수가!’ 얼마나 실망스러웠으면 기절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이 땅이 기절할 정도로 요란스러운 것은 예수님이 끝장설교에 의하면 하늘나라가 요란스럽기 때문에 땅에서 요란스럽다는 겁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감 잡으면 그 하늘의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땅에서 받아서 같은 성질의 영적 싸움이 이 땅에서 벌어지기에 이 땅이 이렇게 요란스럽게 된 거예요. 그래서 영적인 눈을 갖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이 있을만한 곳이 못 된다는 거예요.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잡채도 해주고 탕수육도 해주고 맛있는 것 해줬지만 결국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구나. 예수님 좋아하는 팬도 여럿 있었지만 결국 다 떨치고 하늘나라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런 것 때문에 이 세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영원히 안식할 곳이 못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알게 되면 그 사람도 역시 예수님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고 있는 그 나라에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나그네로 살게 되면서. 나그네로 산다는 말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이 땅의 사람들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에서 일이 터졌기 때문에 그 터진 일의 결과가 우두두 쏟아져서 이 지상도 하늘의 요란스러움과 마찬가지로 요란한 전쟁터로 변해버린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26절 끝에 보면“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라고 하는데 이 하늘의 권능들, 파도가 치고 세상이 요란한 이것은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기 위한 무대장치입니다. 연출된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연출시킨 겁니다. 옛날에는 영화 처음 나올 때 흑백영화였다가 그 다음에 칼라로 나왔지요. 그 뒤에 음성이 좋아졌다가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입체영화(3D)에요. 3D에서 더 나가면 4D, 5D, 이런 것이 있답니다.
냄새도 나고 앉은 의자가 흔들리는 이 두 가지를 더해서 5D라고 한다는데 이 세상이 흔들리는 것은 5D 영화관이에요. 뭘 상징하려고 하느냐하면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하늘의 권능으로서 오는 것을 보기 위한 사전의 짜인 무대장치의 한 모퉁이의 아파트에 지금 살고 있습니다. 농사도 짓고 터 잡고 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이 끝장설교입니다. 끝에서 봤을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자꾸 중간, 중간, 코앞의 돌부리 그것만 보지 말고 이 땅의 모든 것을 경과했던 그 주님이 뒤돌아보면서 ‘세상은 이렇다.’고 알려주는 그 끝장설교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빠져 있습니다.
끝장설교니까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기 위해서는 이 세상은 흔들려야 됩니다. 이 세상이 흔들리기 때문에 주식산 사람, 펀드 넣은 사람이나 애를 먹지요. 언제 빠질지? 기독교 신자인지는 모르겠는데 솔로몬 떠들어대다가 그 솔로몬의 지혜는 어디로 가 버렸습니까? 어디 갔어? 그 많던 솔로몬 다 어디 갔어! 다 깨져버렸어요. 기절할 지경이에요. 폐점 위기에 놓인 저축은행에 5천만 원 이상 넣어놓은 사람들 지금 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저축은행 업계가 무너진 것은 주께서 구름타고 오는 것을 쉭, 쉭, 하고 바람 넣어서 고개를 들고 좀 보라는 말이지요. 중국으로 밀항이나 할 생각하지 말고 고개를 들고 보라는 말이지요. 중국 가 봐야 중국도 요란스러워요.
200억 돈 빼내서 거기 가 봐야 또 마찬가지에요. 고개를 들면 거기에 뭐가 있는가, 주님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모든 성도가 예수님처럼 끝장 설교를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님이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스데반집사님의 설교내용이 그겁니다. ‘어, 예수님이 저기 계시네?’ 그거예요. 설교 내용이 별게 아니지요. ‘어, 예수님 저기 계시네?’ 하니까 유대인들이 ‘죽은 예수를 왜 찾느냐?’ 그렇게 나온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 손으로 작살내서 이미 죽었는데 죽은 예수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한 거예요. 스데반 집사님은 ‘하늘을 보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님이 ‘여러분은 안보여요? 저는 보이는데요. 저기 계시네.’ 저기 계신다고 하다가 맞아 죽었어요. 스데반집사가 할 수 있는 끝장 설교에요. 저 앞에서는 저축은행 부도나서 돈 찾으려고 번호표 받고 있는데 ‘하나님이 물어내라. 이 돈이 어떤 돈인데!’ 하고 있는데 스데반 집사님은 바람이 쉭쉭 들어가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면서 ‘주님이 저기 계시네. 누구야, 주님이 없다는 자가 누구야?’ 왜 주님이 안 계신 것처럼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느냐, 그 말입니다.
설교 다시 해보겠습니다. 신앙은 좀 냉철할 필요가 있고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스데반 집사 이런 분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가 디뎠던 땅과 우리가 봤던 그 하늘아래 우리처럼 같이 기거했으면서 그분들은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좀 볼 필요가 있어요. 그 분들은 아주 냉정하게 살아갔습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방주 안에 노아가족이 들어갔잖아요. 만약에 방주 밖에 카메라장치를 해놓고 안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방주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몸부림치는 지를 한 번 다큐로 찍었으면 아마존의 눈물 이상일지 싶어요.
그들은 땅만 바라보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줄 몰랐습니다. 봐야 늘 상 봤던 그 하늘이 조용하거든요. 노아는 생각했어요. ‘하늘은 조용한 것이 아니다. 하늘은 악마와 그리고 미카엘이라는 천사와의 전쟁이 있었다.’ 이미 그 하늘 자체가 우당탕탕 요란스러워요. 하늘의 요란스러움이 땅으로 번지는 징조가 있었고 이미 땅은 악마가 접수했고 하늘에서는 문을 열어서 악마에 속한 모든 자를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옛날에는 물로서 앞으로는 불로서 멸망케 한 거예요. 성령바람 와서 고개를 들어야 이것을 알지요.
고개를 들어야 안다고요. 땅에서 땅을 분석해서 하늘을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어제 강의중에 로마서 1장을 언급했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 아들에 대해서 복음이라고 이야기 했을까? 하나님이라고 하면 길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엎어져도 하나님 자빠져도 하나님, 다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하면 많은 사람이 올 것을 가지고, 실제로 지금도 교회에서 많은 숫자가 다 하나님 찾아서 다 온 사람들인데, 왜 사도바울은 복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이라고 규정짓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 이야기 하는 것과 구태여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일을 복음이라고 언급했을 때 분명하게 숫자가 확연히 차이가 나거든요. 하나님 같으면 이것은 인간이 양심상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고 한다면 저는 뭐고 나는 뭐냐, 이렇게 되어서 우리는 잘 믿기지가 않아요. 사도바울은 왜 자꾸 하나님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아들을 고집하고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하고 쑤셔 넣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늘(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땅에서 자기만 쳐다보면서 그것으로부터 출발했던 개념이에요. 땅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늘을 거치는 척 하면서 도로 땅으로 내려온 거예요. 노아홍수 때 멸망당한 사람들과 똑같은 겁니다.
땅에서, 자기처지에서 출발하다 보니까 이 세상이 비가 많이 와서 멸망한다는 아이디어는 자기 살던 현장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아이디어에요. 삼성그룹의 회장이 사장 모아서 회의하면서 ‘21세기 대비해서 새로운 제품 개발하라.’ 했는데 어떤 이사가 손들고 질문 있습니다. ‘장차 불로서 심판받는데 신제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러면 그냥 잘리지요. 그때 회장이 뭐라고 합니까? 지금 이 땅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고 인간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서 연구해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의 지혜를 총 집합해도 거기서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하늘에 우당탕탕,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 지상에서는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지요.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할 때 ‘뱀아, 너는 너 먹을 거나 먹어라.’ 이렇게 했겠지요. 마귀가 뱀에게 들어가서 인간을 선악과 쪽으로 솔솔 몰아넣은 겁니다. 따먹어, 따먹어! 마귀가 뱀 속에 안 들어가면 뱀은 그냥 벌레나 잡아먹는 뱀이에요. 마귀가 들어가니까 하늘에서 일어난 싸움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지상의 존재로 영원히 굳히기 위해서 몰아넣는 겁니다.
오늘날 악마가 맨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 보지 말고 그냥 신제품이나 개발하자. 오늘 우리가 이것 때문에 모인거야. 신제품 개발! 하늘의 불같은 것은 기독교에서나 주장하는 망상이고 우리의 관심사는 신제품 개발이야.’ 이게 고개를 들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기들끼리의 합의된 의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왜 사도바울이 고집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중심의 하늘나라영역이 이 지면에 쳐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밀려오게 되면 하늘나라 전쟁에서 쫓겨난 적이 지금 어디 가 있느냐하면 인간들과 함께 이 지상에 있거든요. 그러면 전쟁은 끝나지 않은 거예요.
하늘나라가 이 지상에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밀려오게 되면 시편 110편이 말씀처럼 ‘주께서 내 주에게 너의 원수가 발등상 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있으라.’ 다시 말해서 ‘너는 네 원수를 작살내는 역할과 사명을 띠고 이 지상에서 아기예수로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무리 되면 구름타고 오실 거예요. 그게 마무리되면 주께서 주답게 주의 모양새로 이 지상에 구름타고 오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지금 당장 때 거리도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위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고개를 들라’ 그 말은 땅에서부터 하늘나라 올라 가는척 하다가 도로 내려오지 말고, 거기는 하늘나라 전쟁 개념도 없기에, 하늘에서 계신 분이 이 땅을 거쳐서 다시 하늘로 간 그 경로, 그 절차, 그 통로를 네가 찾아보라는 말이지요.
‘안 찾아봐? 그러면 네가 기절할 만큼 위험한, 절망스럽고 아슬아슬한 사태로 이 세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흔들리는 사태를 자꾸 일으켜서, 나로 하여금 아무 일도 안했는데 마치 큰 일한 것처럼 느껴지고 무슨 일을 해도 의미 없는데 마치 이 땅에 살면서 고생한 것이 있는 양, 나에게 무슨 의미가 되는 것처럼 착각들을 하시는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의 끝장설교에 의해서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구름타고 오신다, 하늘의 영역이 땅에 밀릴 때 인간들은 아무도 그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오해만 했던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야기하지 다른 루트나 매체를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은 이미 마귀한테 장악당한채로의 마음이기에 ‘예수님, 당신이 나한테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하는 이득과 유용성, 자기문제해결하려 하다 보니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이해 못하니 예수님을 가지고 쓸데없는 존재로 본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무리 하늘나라가 밀려와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도 우리는 애당초 그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소용없는 것이 아니냐, 못 알아듣는다면 해봐야 소용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들을 하실 겁니다. 여기서 지난시간에 본 24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지요.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지상에 여러 가지 장소나 공간이 있지만 중요한 자리가 딱 한군데 있습니다. 거기가 예루살렘이고 거기가 왜 중요한가, 성전, 성소가 거기 있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유일한 합법한 증거가 뭐냐, 제사제도가 이루어지는 특정한 장소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게 중요한지를 모르지요. 어제 강의한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그 강의 장소가 산골짜기에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면서 용성이라는 곳을 거쳐서 갔는데 그곳에 보니 삼림이 아주 울창해요. 자 그러면, 용성 거쳐 왔습니다. 거기에 나무가 울창합니다. 그 가지에는 나무 잎들이 있습니다. 지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목사님이 용성 거쳐 오면서 그 마을에 나무가 있는 것을 보셨을 텐데 그 나무의 이파리 숫자가 몇 개던가요?’라고 물었을 때 제가 뭐라고 답변합니까? 생각해 보세요. 용성을 거쳐 왔다는 것은 이미 과거입니다. 그런데 과거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잎사귀가 한 70개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이미 과거에 경험한 거예요.
과거에 경험을 했더라도 내 과거에는 나뭇잎사귀의 숫자는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의 사적인 과거라 하는 것은 자기가 현재 필요한 것, 나에게 도움 되는 것만 기억하고 전체 과거는 다 놓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목사님, 용성의 그 나뭇가지가 몇 개입니까?’ 개뿔도 모르는 게 아는 척 하면서 ‘76개!’ 하니까 그 나무주인에게 물으니 ‘79개’라 해요. ‘79개인데 왜 당신은 76개라 하는데!’ 하면 ‘관심도 없는 거 아무렇게나 답한 건데.’ 그래요. 관심이 없는 거예요, 관심이!
현재 주의집중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 내가 아는 과거 말고 많은 과거가 있었지만 그것은 다 지금 나에게 소용없다고 치고 다 삭제해버린 나의 과거였어요. 그러나 주님의 끝장설교에 의하면 그 과거는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주의 주되심을 위해서 필요했던 과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의 주되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도 않은 과거라 해서 머릿속에, 기억 속에 남겨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징징거리지요. 어린애가 6.25를 알겠습니까, 피난을 알겠습니까? 그냥 배고프고 젖 먹고 싶어서 징징거리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모습, 우리 모습이에요. 그 와중에 인민군에게 안 들키고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합시다. 어린애가 커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엄마, 북한에서 피난 내려올 때 내가 징징거려서 도움 됐지?’ 그러고 있어요.
‘너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 너는 너의 과거만 생각하는 거야. 그때 네가 징징거릴 때 네 입 막는다고 애 먹었다. 들켜서 죽을까 싶어서. 그래서 살려놓으니까 뭐, 네가 징징거려서 그 도움으로 살았다고? 너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값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식구라는 이유 때문에, 같이 섞여서 같이 오다 보니 온 거예요, 북한에서. 탈북하려면 힘드니까 그때 미리 당겨서 온 거예요. 이 모든 과거를 예수님만이 아시는 이유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무대장치를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제발 징징거리지 말라는 말이지요. 과거가 수많은 과거가 있어요. 심지어 우리가 내뱉은 말로 인해서 상처받고 함부로 취중에 한 말로 인해서 가슴앓이를 해서 마음에 상처가 되어서 자기를 파괴시킨 그 동창생, 먼 친척이 지금쯤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있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번 보자. 만나면 죽인다.’ 그런데 현재 나에게 관심 없는 것은 우리는 다 잊어버려요. 치매현상이 벌써 온 거예요. 벌써 우리는 필요치 않는 것은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나에게 도움 안 된다 싶으면 다 잊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아무리 잊고자 해도, 그리고 너희가 무심코 무관심하게 넘겨도 기어이 내가 주목하는 장소는 뭐냐,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아까 우리가 읽었던 교독문(84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그 다음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것이 죄 많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에게 성사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성전 안에서 흠 없는 어린양이 매일같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의 자리가 벌어진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나그네고 내 중심으로 살지만 고개를 들고 다시 한 번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하늘이 열린 그 지점 그 성소 지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어린양을 잡는, 내 대신 흠 없는 양이 죽어나가는 그 지점, 성소에서 그것이 벌어지면 곧 하늘나라가 벌어진 겁니다.
감추었던 하늘나라는 성소에서 그 실체가 드러남으로써 하늘나라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성소를 공간적 성소로 본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곧 기도하는 집이다. 그딴 성전 다 허물어버리고 진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전 새로 짓겠다. 그게 부활한 예수 내 몸이다.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 내 몸이 바로 성전이다.’ 예수님의 성전이 되고 난 뒤에는 ‘그 예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세상에 천 년 만 년 사는 것보다 그 한 날이 더 좋고 이 땅 왕궁에서 청와대에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성전문지기로 사는 것이 좋사오니 …….’ 요새는 아파트 경비원 자리도 힘들어요. 어쨌든 ‘성전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것이 주님의 끝장설교입니다, 끝장설교! 끝 날까지 가보고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는 설교에요.
스데반 집사가 이런 일을 완성하신 분이 주님임을 알기 때문에 ‘이상하다. 주님 저기 계신데 왜 없다고 하지? 보이는데. 안보여요? 계시네. 안 계신다고요? 계시는데!’ 이러니까 돌에 맞아 죽었지요.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신앙이 좀 냉정하고 냉철해 지세요. 사적인 감정에 엮이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것 신경도 안 씁니다. 우리가 울고불고 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값없이 구원받은 것인데 울든 웃든 아예 상관 안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벌였고 앞으로 뭘 타고 오시는가, 어떤 모양새로 오시는가,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만들기 전에 이런 것이 하나의 흔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 봐요. ‘그때가 좋았다. 그 때가 좋았다.’ 광야보다 그때가 더 좋겠지요. 광야가 좋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 내가 지금 데리고 가고 있잖아.’ ‘그래도 애굽이 좋아요.’ ‘어허이, 내가 데리고 간다니까?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널 구원하신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데려다 줄게.’ ‘싫어요. 우리는 애굽이 좋아요.’ 얼마나 칭얼대로 징징거리는지 주님께서 쥐어박았어요. 그것이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예수님께서 쥐어 박으시면서도 고개를 들게 하시네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네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영생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영생을 어떻게 받느냐 하면 어떤 사건이 벌어져야 되고 그 사건은 너희들이 칭얼댔기 때문에,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자 한 것 때문에 유입된 새로운 사건이 개입이 일어나야 되고 그 사건은 애굽이 아니라, 우리가 습관적으로 알고 있던 우리가 선택한 과거, 내가 유리한 것만 기억하는 일방적인 나의 사적인 과거가 알 수 없는 새로운,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로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뭐냐, 놋 뱀을 드는 겁니다.
놋 뱀을 들어 올리듯이 인자도 죽었다가 부활한 모습, 그 모습을 놋 뱀을 들고 쳐다보는 양상으로 ‘주님 어디 갔지? 돌아가신 주님 어디 갔지?’ 하고 주님 가신 곳으로 고개를 쳐들 수 있도록 사건을 유발시켜 줬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존재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이 끝장설교의 완성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준비하신 거예요. 인자가 이 땅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믿는 자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놀라운 것이 주어집니다. 수백억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것, 대단한 명품, 그것은 바로 영생이었습니다. “영생이 있으리라.”
고개만 들어라, 쉭, 고개를 들어라, 영생을 보게 되면 주님이 거기 계시지요. 그렇다면 돌멩이가 날아오지요. 돌멩이가 날아온다고 해서 사적으로 아프다고 해서 냉철한 주님 계심이 거짓이 되는 것, 환상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돌멩이가 날아오는 이것은 흔들리는 무대장치고 나는 그 무대 위에 섰고 그 선채로 우리는 주님이 저기 계신 것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고, 그렇다면 나는 무대장치의 한 소품으로 이 땅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존재입니다. 이런 소품은 히브리서 9장에 봐도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옛날 성소의 구조가 나와 있어요. “성령이 이로써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아직 옛날에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커튼만 있었는데 커튼 뒤로 길이 나지 않았어요. 지금 동영상 보고 있는 분들은 이 커튼 뒤로 뭐가 있는지 궁금할 거예요. 한 번 열어볼까요? 이 뒤 열면 팔공산 나오고 영생이나 하늘나라 안 나와요. 왜, 우리는 성소가 아니거든요. 진짜 성소는 휘장이 찢어지면 곧장 하늘이 보이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 가신 곳이 보이는데 그 곳으로 주님께서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저축은행에 저금했다가 날렸다는 그런 문제, 이 땅에서 일방적인 과거, 현재, 일방적인 나의 희망만 챙겨가서 살던 우리에게 깡그리 그것을 다 무시하고, 그야말로 인간 모독이지요, 다 무시하고 한쪽으로 냉철하게 치워놓습니다.
‘그래, 고생 많이 했지? 알았다. 그 입 다물라.’ 하고 치워버립니다. 그렇게 해놓고 예수님의 자기의 끝장설교를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밀어놓을 때 주의할 것은 인간들이 가짜 천국열쇠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열리지도 않는 열쇠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열리지 않는 코드, 밝혀지지 않는 진리의 암호, 삐삐삐, 눌렀는데 안 열려요. 노아 때는 방주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 방주라는 존재자체가 비 올 때 같으면 서로 들어가려고 난리칠 겁니다. 비가 오지 않는 곳에서 방주는 인기가 없습니다. 교회는 인기가 없어야 돼요. 따라서 교회들이 없어야 됩니다.
슬슬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만, 정말 자기중심의 과거만 쥐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미래를 건설하는 사람한테는 이 교회는 인기가 없어야 됩니다. 사람이 너무 완벽하고 잘나고 돈 많고 인간성 좋고 거기다가 믿음 있기 없기? 있기 없기?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주판 몇 단이고 컴퓨터가 몇 급입니까? 스데반집사님한테는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가 달리기 몇 초 달립니까?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집사님은 정말 바보 같아요. 모든 부부가 자식을 짝사랑하는데 그 자식 짝사랑이 영원한 짝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돌려받지도 못할 사랑인데 부모는 계속 자식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사랑은 짝사랑이 아닙니다. 주께서 부어주신 사랑입니다. 세상 잔소리, 그 유창한 설교, 그런 것은 다 듣기 싫어요.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끝장설교, 끝장설교, 우리는 그것만 듣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