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강화(江華)는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이며 고구려 때 혈구군(穴口郡), 신라 때는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하고 한주(漢州: 廣州)에 예속시켰다. 940년(고려 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현으로 개편되었고, 1232년(고종 11) 몽골의 침입으로 고종이 천도하여 약 40년간 사실상 수도 역할을 하였으며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618년(광해군 10) 부윤(府尹)으로 승격되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인조가 몽진(蒙塵)을 하려고 하였다. 1906년(광무 10)에 강화군이 되었다. 1995년 경기도에 속하였다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1886)·신미양요(辛未洋擾, 1871)·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1875)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성씨의 역사
강화김씨는 계통을 달리하는 3파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계통은, 경순왕 김부(金傅)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의 7세손 김성(金晟)이다. 고려 명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지면서 그를 일세조로 하는 개성파(開城派)이다. 두 번째 계통은 영분공 김명종의 18세손 김광(金光)으로 조선 때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堤學)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고 평안남도 숙천(肅川)에 적거(謫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여 숙천파(肅川派)의 계통을 이었다. 세 번째 계통은 김광의 증손으로 조선에서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내고 1542년(중종 37)에 의주(義州)로 돌아 온 김송학(金松鶴)을 일세조로 하는 용천파(龍川派)이다. 그 후 후손들이 김성이 봉군되어 있는 하음(강화)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개성파(開城派), 용천파(龍川派), 숙천파(肅川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개성파에서 개성파와 연안파(延安派)로 각각 나뉘어졌다.
주요 세거지
황해도 개성시 남안동
황해도 개풍군 남면 율응리
황해도 도 개풍군 남면 후석리
황해도 연백군 송봉면 운계리
평안남도 안주군 운곡면 용천리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내동
평안남도 안주군 운곡면 용복리
평안남도 안주군 숙천면 송저리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 노중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강화김씨는 1,392가구 총 4,44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