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족의 '화하(華夏)' 명칭의 수수께끼
“화하족(華夏族)은 화산(華山)주변과 화수(夏水)근방에 정착하게 되면서 얻어진 이름이다.”, “실제로 문명수준이 비교적 높은 중원지역 존칭의 하나로 문화수준이 높은 지역을 하(夏)라고 하고 그러한 종족을 화(華)라 하는데 화하(華夏)를 합쳐서 중국을 칭한다.”이렇게 습관처럼 쓰게 된 칭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이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화하(華夏)’라는 명칭은 익히 알려진 중화민족의 호칭이다. 그러나 ‘화하(華夏)’라는 명칭의 유래는 무엇인지 왜 중국인을 ‘화하민족(華夏民族)’, ‘화하의 자손(華夏子孫)’으로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이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화하족(華夏族)은 한족(漢族)의 전신(前身)으로, 한대(漢代)이후에는‘한인(漢人)’, ‘당인(唐人)’이라는 호칭이 있었으며 선진시대에는 ‘화(華)’또는‘하(夏)’라고 불렀다.
‘하화(華夏)’라는 두 글자의 해석에 있어 《좌전(左傳)》, 《맹자(孟子)》에는 ‘화(華)’, ‘하(夏)’를 ‘이(夷)’와 서로 대응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예를 들면, 《좌전(左傳)》에 “변방이 하를 도모하지 않고, 夷가 중화를 어지럽히지 않는다(裔不謀夏, 夷不亂華).”라는 말이 나오고, 《맹자(孟子)》에는 “夷를 이용해 夏를 변모시킨다(用夷變夏).”라는 말이 나온다.
동한(東漢) 허신(許慎)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화는 번영이고, 하는 중국의 사람이다.(華, 榮也 ; 夏, 中國之人也)”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원래 중원을 가리키는데 ‘사방(四方)’ 혹은 ‘사이(四夷)’와 상대적인 말이다.
《시경 소아 육월서(詩經 小雅 六月序)》중, “사이(四夷)가 서로 침입해오면 중국은 쇠약해진다(四夷交侵, 中國微矣).”라는 문구가 있는데 ‘중국’을 ‘사방’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두었음을 잘 보여준다. ‘夏(하)’와 상대적인 ‘裔(상)’ 역시 먼 변경의‘사방’을 가리킨다.
장태염(掌太炎)선생은 고대 중국이 하(夏)라는 종족명과 화(華)라는 국명을 썼다고 여겼는데 하(夏)는 하수(夏水)에서, 화(華)는 화산(華山)에서 나온 말로, 통상적으로 “화하족이 화산의 주변과 화수의 변두리에 정착한 것에 기인하여 얻은 이름이다.”라고 여겼다.
갑골문에‘화(華)’는 ‘河(하: 황하)’의 가장 중요한 신 바로 다음으로 섬서(陜西) 관중(關中)지역의 화악(华岳)을 가리킨다. 이 일대는 주나라 사람이 낙읍(洛邑)을 관할하기전의 중심지역으로서, 구석기시대의 남전인(藍田人)부터 신석기시대의 앙소문화(仰韶文化), 용산문화(龙山文化)에 이르기까지 그 주위는 모두 문화유물이 집결된 지역으로서 전설 속 황제(黃帝)와 주족(周族)이 모두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므로 화산(華山)은 초기 화하문화(華夏文化)의 상징이 되었다.
전백찬(翦伯赞)은 화하가 실제로 역사상 ‘하족(夏族)’의 한 분파라고 여겼다. 역사상의 하족(夏族)은 일찍이 오늘날의 감숙(甘肃), 하남(河南), 산서(山西)일대에서 활약했는데, 후에 자연환경의 변천에 따라 하족 역시 잇따라 사방으로 옮겨갔다. 그 중 중원일부로 동천한 분파는 후에 동하(東夏) 또는 화하(華夏)라고 불렀으며, 서쪽 감숙(甘肃)으로 이동한 분파는 서하(西夏) 또는 만하(蠻夏)라고 불렀고, 원래 지역에서 계속 머무른 이들은 후에 대하(大夏)라고 불렀다. 따라서 동하는 서하와 구별되고 화하는 만하와 구별된다. 또 대하는 동하, 서하와 구별되는 칭호로 쓰였는데 이는 하족(夏族)의 미칭이자 총칭이다.
번문란(範文瀾)은 화하(華夏)라는 명칭의 가장 기본적 함의는 역시 문화에 있다고 여겼다. 문화수준이 높은 주례(周禮)지역은 하(夏)가 되고 그 사람이나 종족은 화(華)로 칭하며 화하(華夏)를 합쳐 중국을 칭한다는 것이다. 문화수준이 낮거나 주례(周禮)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종족에 대해서는 그 방위에 따라서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이라 하였다. 진한(秦漢)시기, 각 민족마다 그 문화의 교류가 상당히 빈번하였다.
‘중국’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서 화하문화 역시 잇따라 발전되고 확대되었는데 화하문화를 받아들인 종족은 대개 화하족의 범주에 포함시켜 결국은 화하가 중화민족의 칭호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이징(柳詒徵)선생은 《중국문화사(中国文化史)》에서, 중화민족의 구성은 다원화 발전의 한 과정으로, 설령 중화민족 중 가장 많은 인구와 역사를 가진 한족(漢族)을 예로 들어봐도 “그 혈통은 섞인 것으로, 순수한 단일 종족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수천 년에 흡수 동화한 타 종족은 매우 많다.”고 지적하였다. 중화민족의 형성은 실로 풍부한 역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풍천유(馮天瑜)는 중화민족의 조상을 대개 화하(華夏), 동이(東夷), 묘만(苗蠻)의 3대 집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동이(東夷)집단의 활동지역은 대략 오늘날의 산동(山東), 하남(河南) 동남쪽과 안휘(安徽) 중부 일대 즉,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산동용산문화(山東龍山文化)와 청련강문화(靑蓮崗文化)의 강북(江北)유형 분포지역이다. 전설 속 태고(太皋), 소고(少皋), 태양을 쏜 후예(后羿) 및 황제와 악전고투를 치른 치우(蚩尤)가 모두 이 집단에 속한다.
*묘만(苗蛮)집단은 주로 지금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대계문화(大溪文化), 굴가령문화(屈家岭文化) 분포지역, 동부의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 양저문화(良渚文化)가 이곳에 속하고 유명한 복희(伏羲), 여와(女娃) 및 삼묘(三苗), 축융씨(祝融氏)가 모두 이 집단에 속한다.
*화하(華夏)집단은 황토고원에서 흥기하여 이 후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들어와 중국의 중부, 북부 일부지역으로 흩어졌는데 대략 지금의 앙소문화(仰昭文化), 하남용산문화(河南龍山文化) 분포지역과 같다. 화하집단은 황제(黃帝)와 염제(炎帝) 두 갈래가 위주가 된다.
이 3대 집단 간에는 화목하게 지내던 평화로운 시기도 있었고 격렬한 전쟁의 시기도 있었다. 후에 황제(黃帝)가 염제부락을 합병하고 다른 부락들을 통일시켰다. 황제(黃帝)는 중화민족이 공동으로 제사를 올리는 선조가 되었고 화하집단 역시 연이은 승리로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여 오랫동안 중화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하화(華夏)’라는 명칭이 원래 종성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화하족’이 실제로 가리키는 것은 문화적으로 공통된 전통을 형성하고 혈연적으로 하나로 융합된 황하중류지역에 거주하는 고대 중국의 각 민족에 대한 통칭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이 융합된 이후의 산물인 것이다. ‘화하’라는 명칭은 혈통보다는 문화적으로 묶인 집단의 개념 쪽이 훨씬 더 강하다.
화하집단 및 기타 민족을 대표하는 한족(漢族)이 중화민족이라는 대가족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 인구의 방대함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비교적 잘 발달된 문명과 문화 때문이라 하겠다. 중국의 역사 발전과정 중, 중원지역의 농업, 경제 문화의 발전은 주변 소수민족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우세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의 민족 ‘대융합’ 과정에서 한(漢)민족의 문화는 강력한 전파력과 친화력으로써 늘 주변 소수민족에게 영향을 끼쳤고, 소수민족이 중원으로 유입될 시기에 그 권력을 장악하던 소수민족의 통치계층 역시 최후에는 어쩔 수 없이 한(漢)문화를 수용하여 “야만적인 정복자가 최후에는 피정복자의 문명에 굴복당하는”식의 역사적 장면을 거듭 출현시켰다. 동시에 하화문화도 끊임없이 주변 문화로부터 장점을 취하여, “하(夏)”, “이(夷)” 변화의 부단한 상호 조화로부터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드넓은 면모를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