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참 간사한 동물이다. 극락전과 강설루가 허물어져 갈 때는 욕이 튀어 나오더니 오늘은 옛 분위기가 사라졌다고, 자취없는 극락전이 그립다고 되내인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외할머니 안계신 외갓집 나들이 같다.
인각사 답사기는 여러번 올렸지만 늘 현상에만 집착 했다. 그게 지극히 정상이다. 삼국유사와 일연선사이야기가 내포되어야 무게가 있고 사격이 배가되겠지만 진정한 나의 글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참 스산하다!" 오늘은 그 한마디가 전부이다. 예전 어지러운 절집 분위기가 정리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산란하다. 바람과 시선이 넘나들던 낮은 돌담이 그립다면 욕심일까?
현재 진행형이라면 유구무언지만, 산지중정도 평지가람도 어정쩡하다. 설마 축구장을 조성하지는 않겠지? 거두절미하고 절은 절 다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극락전은 언제 중수하는지 발굴기간 등 최소한의 안내도 없다.
가람은 어떤 경우든 탐방객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구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구속인가?
조용히 둘러보고 가면 될텐데 말이 많다.
일연선사 부도도 조사전 정면에서 측면으로 옮겼다. 여기로 밖에 옮길 수 없었는가?
지대석 위 팔각 하대석, 중대석에는 동물상이 양각 되었고, 상대석에는 앙련이 피어 있다.조각되어 있다. 탑신에는 '보각국사(普覺國師) 정조지탑(靜照之塔)'이란 탑명(塔銘), 후면에는 문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두꺼우며 추녀에는 반전이 보인다. 낙수면 경사는 급하며 상륜부 장식은 꽃 같지만 무엇인지 모르겠다.
'보각국사(普覺國師) 정조지탑(靜照之塔)'이란 탑명(塔銘)
불상은 불신 주형거신광배가 하나의 돌이다. 나발에 육계는 크며 상호는 원만해 보이지만 이목구비는 명확하지 않다. 삼도가 보이고, 법의는 U자형 통견이며 승각기의 표현과 군의를 묶은 띠매듭과 띠자락이 표현되었다. 항마촉지의 수인이지만 왼손의 약함으로 미루어 약사여래불로 추정된다.
왜 나란히 모셨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상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부도비를 옮겨왔으면 좋겠다. 망실이 염려되면 부도를 부도비 옆으로 이건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동선을 잡지 못하고 갈팔질팡 결국 소맷돌을 비롯 부재에 눈길을 준 탓에 조사전 뒤로 부도비로 향했다.
인각선사 부도비. "본래 인각사에서 동쪽으로 2㎞ 지점에 세워졌으나 도굴배의 만행으로 쓰러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이곳으로 옮겨 보물로 지정하였다. 탑비의 재질은 점판암이며, 행간을 음각으로 구획하고 글자를 새겨 넣었다." 부도도 비각 주위로 옮겨오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믿는다.
보각국사 정조지침 비문
보각국사비명
"고려국(高麗國) 의흥(義興) 화산(華山) 조계종(曹溪宗) 인각사(麟角寺) 가지산하(迦智山下) 보각국존비普 覺國尊碑)와 아울러 서서(序序) 원(元)나라 세조(世祖)로부터 조열태부(朝列太夫)와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의 직(職)을 받았고, 본조(本 朝)로부터 정헌대부(正憲大夫) 밀직사(密直司) 좌승지(左承旨) 국학(國學) 대사성(大司成) 문한(文翰) 시 강(侍講) 학사(學士)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고(知制誥) 지판도사(知版圖司) 사세자(事世子) 우유선(右諭善) 대부(大夫)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등직(等職)을 역임한 신(臣) 민지(閔漬)가 왕명(王命) 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죽허(竹虛)는 교칙(敎勅)에 의하여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 子)하여 새기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지우(至愚)인 중생으로써 대각(大覺)인 세존(世 尊)과 비교하면 소괴( 壞)보다 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한 생각을 돌이켜 전미개오(轉迷開悟)하면 곧 본 각(本覺)인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가섭(迦葉)이 미소(微笑)함으로부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천 (西天)에서 중국에 온 이후, 법등(法燈)과 법등(法燈)이 상속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러 온 것은, 모두 이것에 의한 것이다. 스승이 그의 마음을 전(傳)함에, 제자(弟子)는 그 골수(骨髓)를 얻었다.
이로부터 혜일(慧日)을 우연(虞淵)에서 회전(廻轉)하여 그 신광(神光)을 상역(桑域)에 비추게 한 분은 오 직 우리 보각국존(普覺國尊)뿐이라 할 것이다. 국존(國尊)의 휘는 견명(見明)이요, 자는 회연(晦然)이었으 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속성은 김씨(金氏)요, 경주(慶州) 장산군(章山郡)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언필(彦弼)이니, 벼슬은 하지 않고 교사(敎師)로써만 일생(一生)을 살았으므로, 죽은 후에 좌복사직 (左僕射職)을 추증(追贈)받았고,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으로 봉(封)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태양이 방(房)안에 들어와 그 빛이 복부(腹部)에 비추기를 사흘 밤을 계속하는 태몽(胎 夢)을 꾸고 임신하여 태화(泰和) 병인년(丙寅年) 6월 신유일(辛酉日)에 탄생하였다. 날 적부터 준매(俊邁) 하여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풍준(豊準)한 몸매에 입은 방구(方口)이며, 걸음은 우행(牛行)이고, 살핌은 호시(虎視)와 같았다.
어릴 적부터 세진(世塵)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 나이 즉 년보(年甫)가 9살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 로 가서 취학(就學)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총명함이 비길 자가 없었다. 유시(有時)에는 밤이 새도록 마치 말뚝처럼 위좌(危坐)하고있으므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흥정(興 定) 기묘년(己卯年)에 진전사(陳田寺)의 대웅장로(大雄長老)를 은사(恩師)로 하여 득도(得度)한 다음 구족 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방(禪房)으로 다니면서 참선하여 명성(名聲)이 점점 높아져서 당시 사람 들이 추대하여 구산(九山) 중(中) 사선(四選)의 수장(首長)으로 삼았다.
정해년(丁亥年) 겨울 선불장(選佛 場)에 나아가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包山) 보당암(寶幢庵)에 주 석하면서 마음에 간절히 선관(禪觀)을 닦았다. 병신년(丙申年) 가을에 병란(兵亂)이 있어 스님께서 피(避) 할 곳을 찾고자 하여 곧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념(念)하면서 감응(感應)을 기약하였더니, 홀연히 벽간(壁間)으로부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하여 이르시기를 무주난약(無住蘭若)에 주석(住錫) 하라고 계시하였다. 그 다음해 여름 다시 이 포산(包山) 묘문암(妙門庵)에 거주(居住)하였으니, 암자 북쪽 에 난약(蘭若)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무주(無住)이므로, 곧 전일(前日)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기별(記 )함 을 깨닫게 되었다.
이 암자(庵子)에 주석하면서 항상 생계(生界)가 불멸(不滅)하고, 불계(佛界)가 부증(不 增)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참구(參究)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금일(今日)에야 비로소 삼계(三界)가 환몽(幻夢)임을 알고 보니, 진대지(盡大地)가 섬호(纖豪)만치도 장 애(障애)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비수(批授)받았으며, 병오년(丙午年)에는 이어 선사(禪師)의 법계 를 받았다. 기유년(己酉年)에 정상국(鄭相國)인 안(晏)이 남해(南海)에 있는 사제(私第)를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정림사(定林寺)라 이름하고, 스님을 청(請)하여 주지로 추대하였으며, 기미년(己未年)에 이르러 대 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중통(中統) 신유년(辛酉年)에 왕명을 받들어 개경(開京)으로 가서 선월사 (禪月社)에 주석하면서 개당(開堂)하고 목우화상(牧牛和尙) 지눌(知訥)의 법통을 요사(遙嗣)하였다. 지원 (至元) 원년(元年) 가을에 이르러 여러 차례 남환(南還)을 요청받고, 오어사(吾魚社)에 우거(寓居)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인홍사(仁弘社) 주지 만회(萬恢)가 일연(一然)에게 주석(主席)을 넘겨 주었는데, 학려 (學侶)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무진년(戊辰年) 여름 왕명(王命)에 의하여 이름이 높은 선사(禪師)와 강사 (講師)등 1백 명을 초청하여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운해사(雲海寺)에 개설하 고, 스님을 청(請)하여 주맹(主盟)으로 모시고, 낮에는 금문(金文)을 독송하고 밤에는 종취(宗趣)를 담론 (談論)하니, 제가(諸家)들이 의심하던 바를 스님께서 모두 해박하게 부석(剖釋)하였으니,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유연하여 핵심적(核心的)인 뜻이 귀에 속속 들어와서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았다.
스님께서 인홍사(仁弘社)에 주석한지 11년만에 이 절이 창건한지 이미 오래되어 전당(殿堂)이 퇴락할 뿐 아니라, 또 추애(湫隘) 즉 지반이 내려 앉고, 너무 비좁아서 중수(重修)하거나, 신건(新建)하여 회곽(灰廓) 하게 확장하고 조정(朝廷)에 주청하여 인홍사(仁弘社)를 고쳐 인흥사(仁興寺)라 이름하고, 어필(御筆)로 제액(題額)을 하사 받았으며, 또 포산(包山)의 동족 기슭에 있는 용천사(涌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 社)로 개칭하였다. 충렬왕이 즉조(卽祚)한지 4년 정축(丁丑)에는 임금이 운문사(雲門寺) 주지(住持)로 추 대하여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께서는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날로 깊 어져 다음과 같은 찬시(讚詩)를 지어 보냈다.
밀전(密傳)함에 어찌 구의(衣)를 필요하랴? 금지(金地)서 서로 만남 기이(奇異)할 뿐일새 연공(連公)도 왕청(王請) 받아 궐내(闕內)로 갔거늘 스님은 어찌 백운(白雲)만 그리십니까?
신사년(辛巳年) 여름 왕(王)이 동정(東征)으로 인하여 동도(東都)로 행차하여 스님께 부행(赴行)하기를 청하여 주중(駐中)에서 법문을 듣고 크게 존경심(尊敬心)을 일으켜 불일사(佛日社)에서 결사(結社)하게된 그 결사문(結社文)에 제압(題押)하여 불일사(佛日社)에 보관토록 하였다.
다음에 가을 근시(近侍) 장조윤 김군(金 )을 보내서 조서(詔書)를 가지고 궐하(闕下)를 맞이하여 대전 (大殿)에서 선법문(禪法門)을 청해 듣고 용안(龍顔)에 기꺼움이 가득하였다. 이어 왕명(王命)으로 유사(有 司)에게 시켜 광명사내(廣明寺內)에 원관(阮館)을 짓게 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입원(入院)케 한 날 밥중에 어떤 사람이 방장실(方丈室) 밖에 서서 이르기를 "저 왔습니다."라고 하므로, 세 번이나 문을 열고 살펴보았 으나 아무도 없었다.
겨울 12월에는 충렬왕이 수레를 타고 친히 스님을 방문(訪問)하여 법문을 들었다. 다 음해 봄 임금께서 군신(群臣)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선왕(先王)들은 모두 석문(釋門) 중(中)에 덕이 높은 스 님을 왕사(王師)로 모시고, 또 더 큰 스님은 국사(國師)로 추대하였거늘, 부덕(否德)만이 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가(可)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은 도(道)가 높고 덕(德)이 커서 모든 국민이 함께 숭앙(崇仰)하거늘 어찌 과인(寡人)이 스님의 자택(慈澤)을 크게 입었음이랴! 마땅히 모든 국민들과함께 존숭하리라 하였다.
스님은 평소에 경련(京 輦)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노모(老母)를 곁에서 모시기 위해 구산(舊山)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비는 그 사의(辭意)가 심(甚)히 간절하여 임금께서 거듭 그 뜻을 어기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윤허(允許)하시 고 근시좌랑(近侍佐郞) 황수명(黃守命)에 명(命)해서 귀산(歸山)을 호행(護行)하여 영친(寧親)토록 하였으 니, 조야(朝野)가 모두 출가자(出家子)로써 희유(希有)한 효심(孝心)이라고 친찬이 자자하였다.
그 다음해 에 노모(老母)께서 96세로 별세(別世)하였다. 그 해에 바로 조정(朝廷)에서는 인각사(麟角寺)로써 스님의 하안지지(下安之地)로 삼고, 근시(近侍) 김용일(金龍 )에게 명(命)하여 절을 수즙(修葺)케하고 또 토지(土地) 백여경(百餘頃)을 헌납하여 상주(常住)를 갖추도록 하였다. 스님께서 이 절에서 구산문(九山門)의 도회(都會)를 개설하니 총림(叢林)이 성황(盛況)이 근고(近古)에 비길데 없었다.
다음 날 을유일(乙酉日) 새벽 일찍이 일어나 목욕(沐浴)하고 단정히 앉아 대중(大衆)에 이르기를 내가 오늘 떠나려 하는데 혹시 중일(重日)이 아닌지? 하고 물었다. 시자(侍者) 가 대답하되 중일(重日)은 아닙니다. 그러면 좋다 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법고(法鼓)를 치게 하고 스님께서 는 선법당(善法堂) 앞에 이르러 선상(禪床)에 걸터앉아 인보(印寶)를 봉함하여 장선별감(掌選別監)인 김성 고(金成固) 명(命)하여 다시 거듭 봉필(封畢)하고 천사(天使)가 오거든 노승(老僧)의 말후사(末後事)를 알 리라 하였다.
어떤 스님이 국존(國尊)의 앞에 나타나 묻기를 "석존(釋尊)께서는 학림(鶴林)에서 열받에 드 셨고, 화상(和尙)은 인령(麟嶺)에서 입적(入寂)하시니 그 상거(相去)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나이다." 하 니 스님께서 주장자를 잡고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상거(相去)가 얼마냐?"고 반문하였다. 나외여 이르되
또 어떤 스님이 화상(和尙)에게 묻기를 "스님은 세상(世上)에 살아 있는 것이 마치 세상(世上)에 없는 것과 같으며, 몸을 보되 또한 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더 오래도록 세상에 살아 계시면서 대법륜(大法輪)을 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이 세상에 있거나, 저 세상에 있거나 가는 곳마다 불사(佛事)를 하고 있느니라."하였다.
이와 같이 문답(問答)이 끝난 다음 스님께서 모든 선덕(禪德)에게 이르시되, "날마다 공부하는 경지(境地)를 보고 가라. 가려운 통양지 (痛痒之)<有念〉와 가렵지 않은 불통양지(不痛痒之)<無念〉가 모호하여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고는 주 장자(柱杖子)를 들어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이 곧 통양(痛痒)이라." 하고 또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이것은 불통저(不痛底)라."하며 세 번째 내리치고는 "이것은 통지(痛之)냐? 불통지(不痛之)냐? 시험삼아 자세히 살펴보라." 하고는 법상에서 내려와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가서 조그마한 선상(禪床)에 앉아서 담 소(談笑)함이 평소와 같았다.
잠시 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조용히 입적(入寂)하시니, 오색(五色) 광명(光明)이 방장실(方丈室) 뒤쪽으로 일어났는데, 곧기가 당간(幢竿)과 같고, 그 단엄하고 욱욱(煜煜)함 은 불꽃과 같으며 화염상(火炎上)에는 백운(白雲)이 일산(日傘)과 같이 덮인 속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떠 나갔다. 때는 가을 늦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10월 신유일(辛酉日)에 탑을 인각사의 동쪽 산등성이에 세웠는데, 세수는 84세이고, 법랍은 71세였다. 스님은 사람 됨됨이가 말할 때에는 농담하는 일이 없고, 천성(天性)은 가식(假飾)하는 일이 없 다. 항상 진정(眞情)으로 사람을 대하고, 많은 대중(大衆)과 같이 있으나, 마치 홀로 있는 것과 같이 조용하 였다. 국존(國尊)의 위치에 있으나, 항상 자신(自身)을 낮추었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으로부터 수학(受 學)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통달(通達)하였다.
이미 도(道)를 깨닫고는 온실(穩實)하고 자유자재하여 무애변재(無애辯才)를 갖추어 고인(古人)들의 기 연어구(機緣語句)가 반근(盤根)과 착절(錯節)처럼 얽히고 설키며, 와선(渦旋)과 파험(波險)같이 복잡한 부 분을 해박하게 결척(抉剔)하여 막힌 부분을 소통(疏通)케 함으로서 마치 거울처럼 훤하게 보게 하여 주시 니, 그 회회언(恢恢焉)하며 유인유여(遊忍有餘)한 솜씨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참선하는 여가(餘 暇)에는 다시 장경을 열람하여 제가(諸家)의 장소(章소)를 연구하고, 곁으로 유서(儒書)를 섭렵하는 한편, 백가제서(百家諸書)를 겸수(兼修)하여 곳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되 그 연마한 묘용(妙用)이 종횡 무애하 였다.
무려 50년 동안 닦은 법도(法道)가 고매하여 있는곳마다 서로 다투어 경모(景慕)하였다. 그리하여 많 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스님의 당하(堂下)를 참방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비록 저마다 괴걸(魁 傑)이라 자부(自負)하던 자라도, 다만 스님의 유방여윤(遺芳餘潤) 곧 법문을 들으면, 모두 심취(心醉)하여 망연자실(茫然自失)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님을 봉양하는 지극한 효심(孝心)은 목주(睦州) 진존숙(陳 尊宿)의 가풍을 흠모한 것이다. 자호(自號)를 목암(睦庵)이라 하였고, 나이 모기(摹期)에 이르러서도 총명 은 조금도 쇠퇴하지 아니하여 학인을 가르침에 조금도 권태를 느끼지 아니하였으니, 지덕(至德)과 진자(眞 慈)를 갖춘 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이와 같으랴!
처음 용일(龍일)이 인각사를 중수하라는 명을 받고 오는 도중 마산역리(馬山驛吏)의 꿈에 어떤 사람이 나 타나 말하기를, "내일 천사(天使)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의 주처(住處)를 보수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과연 지나갔으니, 스님의 덕행(德行)이 이미 사람들을 이롭게 한 것으로 관 (觀)하건대, 김용일(金龍일)의 꿈이 허황되지 않음을 알겠도다. 그 나머지 이적(異跡)과 기몽(奇夢)이 매우 많으나 어괴(語怪)하다고 여길까 염려되어 이들은 모두 생략하는 바이다. 저서는 語錄2권·偈頌雜著3권이 있고, 그 편수(編修)한 바로는 重編曺洞五位2권·祖派圖2권·大藏須知錄3권·諸乘法數7권·祖庭事苑30권·禪門 拈頌事苑30권 등 백여권(百餘卷)이 세상에 유행(流行)하고 있다.
문인(門人) 운문사(雲門寺) 주지(住持) 대 선사(大禪師) 청분(淸분)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엮어 임금께 진문(秦聞)하였다. 행장을 전해 받은 임금께 서 저로 하여금 비문을 지으라고 명(命)하시었으나, 신(臣)은 학식(學識)이 황천(荒淺)하여 스님의 지극(至 極)한 도덕을 제대로 드날릴 수 없어 미정미정 미루어 수년(數年)이 지났지만, 문도의 간청이 계속될 뿐 아 니라, 왕명(王命) 또한 끝까지 거역하기 어려워서 부득이(不得已) 하여 삼가 비문을 짓고 송명(頌銘) 하여 가로되
서천(西天)에서 깃발을 높이 세우고, 대천세계(大千世界) 두루한 장광설(長廣舌)이여! 제법(諸法) 중(中)에 으뜸인 심인법(心印法)이여 이심전심(以心傳心) 비밀(秘密)히 단전(單傳)하였네!
축건(竺乾)엔 이십팔숙(二十八宿) 별과 같으며 중하(中夏)엔 오조(五祖)까지 전(傳)하였으니 시간(時間)은 전후(前後)이나 사람은 같아 법등(法燈)의 그 광명(光明)은 상접(相接)하였다.
육조(六祖)의 가풍(家風)이신 조계일파(曺溪一派)가 동쪽나라 부상(扶桑)에 유입(流入)한 이후(以後) 혁혁(赫赫)한 지일성천(智日性天)에 떠오르니 우리 스님 그 광명(光明) 융창(隆昌)시켰네!
불타(佛陀)께서 열반(涅槃)한 말법세상(末法世上)에 각박(刻薄)한 세상인심(世上人心) 흉악(凶惡)만 하니 덕(德) 높으신 지인(至人)이 있지 않으면 불쌍한 중생(衆生)들 의지(依支)할 곳 없다.
국존(國尊)께서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한 것은 서원(誓願)코 모든 중생(衆生) 구(求)함이었네! 학문(學問)은 깊고 깊어 백가(百家)에 정통(精通) 천차(千差)의 방편(方便)으로 제도(濟度)했도다.
남김없이 섭렵(涉獵)한 제자(諸子) 백가(百家)의 현묘(玄妙)한 그 진리(眞理)를 탐구하여서 반근착절(盤根錯節) 그 의심(疑心) 풀어주시니 밝은 거울 비추듯 명석(明晳)하도다.
선림(禪林)에선 그 조령(朝令) 호소(虎嘯)와 같고 교해(敎海)에는 그 변재(辯才) 용음(龍吟)과 같네! 갑자기 일어나는 구름과 같이 학인(學人)들은 침침( )히 모여 들도다.
고해(苦海) 중생(衆生) 모두를 구제(救濟)하시니 빛나는 그 공덕(功德)은 영원(永遠)하리라. 오십년간(五十年間) 온 국민(國民)의 추앙(推仰)을 받아 국존(國尊)으로 불교위상(佛敎位相) 크게 높혔네!
임금께서 정성껏 법(法)을 청(請)하니 백성(百姓)들도 모두가 뜻이 같도다. 여러 차례 청(請)하여 국존(國尊)이 되니 높고 높은 그 도덕(道德) 국중(國中)에 제일(第一) 개발(開發)한 귀(貴)한 보물(寶物) 높이 쳐들고 자항(慈航)으로 고해(苦海) 중생(衆生) 건지시도다.
방황하는 궁자(窮子) 고향을 찾게 하니 미(迷)한 길 어찌 다시 걸어가리요!
고요한 한 밤중 방장실(方丈室) 뒤쪽에 떨어진 별의 크기 한 자나 되고 웅장(雄壯)한 큰 법당(法堂)이 무너지시니 오고 감에 자유(自由)한 스님의 경지(境地)! 진공(眞空)이랑 그 공(空)은 공(空)이 아니고 묘유(妙有)라는 그 유(有)는 유(有)가 아닐세 자취와 명상(名相) 모두 없어지고야 영원(永遠)한 열반상(涅槃床)에 오를 수 있네!
박촉(迫促)하신 왕명(王命)은 갈수록 지엄(至嚴) 신하(臣下)된 입장에서 피(避)할 길 없어 마지못해 구모필(龜毛筆) 손에 잡고서 무형(無形)의 몰자비문(沒字碑文) 쓰게 되었다.
괴겁(壞劫)의 맹화(猛火)가 대천계(大千界)를 태워 산하대지(山河大地) 모두가 소진(消盡)하여도 위대(偉大)한 이 비석(碑石)만 홀로 남아서 이 비문(碑文)도 영원(永遠)히 남아지어다.
원정(元貞) 원년(元年) 을미(乙未) 8월(月) 일(日)에 문인(門人) 사문(沙門) 죽허(竹虛)가 왕명(王命)을
이문재 시인이 그랬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라고...
인각사 산령각은 혼자 바라보기가 억울한 그림이다.
극락전 앞에 있었던 삼층 석탑, 화사석과 상륜이 멸실된 팔각원당형당형 석등 부재가 가건물 곁에 있다. 기존 부재를 활용하여 복원되길 간절히 바란다.
미륵당 석불도 그자리에 있었지만 발굴로, 어수선한 탓에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겨울이라 더 그런가?
미륵당 불상은 "부피감 있는 얼굴, 평행계단식 옷주름선, 양감있는 가슴 표현 등의 조각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불상은 인각사의 창건 연대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착의는 양어깨가 마멸되어 분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배면까지 세심하게 새긴 법의의 주름, 즉 배면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를 빠져 나와 정면 가슴을 사선으로 그리며 올라가 그 끝자락이 왼쪽 어깨에 길게 드리워지고 있는데서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착의법을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릎은 전면(前面)이 파손되어 무릎에 새겨진 주름은 파악할 수 없고 불신에 비해 무릎이 높은 편이나 비례감은 상실하지 않았다. 수인은 왼손의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조형상(造形上) 촉지인(觸地印)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때문인지 부도도 옮겼다. 새로 조성한 일연선사 부도비
"처음부터 이 자리에 놓였던 것은 아니며 산기슭에 있었다가 최근 현 위치로 옮겨졌다. 각 부도 몸체에 주인공의 당호가 새겨져 있는데, 부도를 바라보아 왼쪽으로부터 ‘취진당법환대사지탑(就眞堂法還大師之塔)’, ‘연월당계훈대사지탑(燕月堂桂薰大師之塔)’, ‘청진당법장대사지탑(淸眞堂法藏大師之塔)’의 차례로 놓여 있다."
즐겁던 한 시절 자취 없이 가버리고
스산한 인각사에서 중심을 잃지 않은 조사전.명부전
세상 어느 곳이든 어른이 있어야 한다.
스산함마져 그립고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도록......
2008.12.12
*인용 부분은 인각사 홈페지서 가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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