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하여
- 정합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8‐1. 교육, 시장인가 국가인가? ‐ 대학의 자율과 타율
위에서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 대학의 봉건적 전근대적 지배 ‐ 유린 구조는 교육제도가 부정합적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교육제도의 부정합성 혹은 정합성이란 민영화 혹은 공영화의 원칙을 일관적으로 지켜나간다는 것이다.
가령 미국 같은 대학 민영화를 택하는 나라들은, 가령 국가에서 대학을 설립해도 이를 한국과 달리 민간(재단)에 맡긴다. 그러니 전대학은 철저히 민영화, 시장 경제화 된다. 미국의 대학은 중앙 정부의 지시나 감독을 전혀 받지 않는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고등교육에 대한 법적, 제도적 통제가 없다. 같은 고등교육법이라고 할지라도 미국과 한국의 고등교육법을 비교해보면 그 성격이나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은 정부가 대학 및 교육 정책을 맡아 하는 반면 미국은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대학 정책을 실시하는 철저한 대학 자율의 국가이다. 미국의 주정부나 연방 정부의 대학교육부서는 대학정책이 아니라 학사지원이 주된 목표이다.
여기에 비해 한국의 교육부(교육인적자원부)의 대학담당 부서인 대학지원국의 역할을 보면 이는 대학의 학사 지원 뿐만 아니라 대학정책까지 포함한다. 아니 후자가 대학지원국의 더 중요한 업무이다. 대학지원국 산하의 대학정책과에서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
1. 대학(산업대학, 각종학교를 포함한다.이하같다) 교육에 관한 기본 정책의 수립 2. 대학의 제도개선에 관한 사항 3. 대학(사립대학을 제외한다)의 설치·폐지 및 운영지원 4. 대학의 학생정원에 관한 사항 5. 지방소재 대학의 발전에 관한 계획의 수립·시행 6. 대학교원의 인사제도 개선 및 운영에 관한 사항 7. 고등교육의 대외개방에 관한 기본정책의 수립 8. 대학생 활동 및 취업지원에 관한 사항 9. 국립대학 병원의 운영지원 10. 그 밖에 국내 다른 과의 주관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항
이런 대학 정책들 중의 대부분을 미국에서는 개별 대학이 결정하고 그에 따라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사지원과의 업무를 봐도 이는 대부분 학사 지원이 아니라 대학 정책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 민영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를 신중히 검토해보아야 한다. 이런 전제 없이 소비자 중심의 교육이니 맞춤식의 교육이니 부르짖어 봐야 공허한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설령 그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한국의 대학들에게 이런 전적인 대학 정책의 자유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러 번의 우리나라 대학입시제도 개선의 역사를 보면 대학에게 학생모집과 입학의 자유를 주었던 경우 항상 입시부정 사건에 대학의 휘말렸기 때문이다.
8‐2. 미국 대학의 ‘평가(Accreditation)’ 제도
한국의 대학정책은 겉으로는 자율과 독립을 약속하지만 속으로는 철저히 중앙 정부의 구속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위에서 밝혔다.
이런 한국 고등 교육의 국가주의 내지 중앙지배 구조와는 달리 미국은 민간주의 내지 탈중심화(discentralized)되어 있다. 미국 연방정부 교육부(U. S. Department of Education)홈페이지의 대학국(Office of Postsecondary Education)을 조회하면 한국과 완전히 다른 현실을 직면한다, 즉 거기서는 주로 사람들이 대학교육에 접근하기 쉽게 도와주는 문제와 교육기회균등에 대한 문제가 주된 관심사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등교육의 본질과 내용에 관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에게 양질의 고등교육에 접근할 기회를 늘이는 프로그램이 미국 연방 교육부의 주된 임무이다. 고등교육 자체는 각 대학이 알아서 규정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한국 교육부의 대학지원국이 하는 일들은 미국에서는 거의 개별대학의 업무로 파악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연방 교육부의 대학 정책국(Office of Postsecondary Education ‐ Policy Initiatives)에서 하는 업무는 장학금 및 학자금 보조에 관한 것이며 또한 그와 관련한 통계 업무이다.
미국의 대학 정책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은 평가‐인정(Accreditation)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면 우리는 미국의 대학 제도의 핵심을 빨리 파악할 수 있다.
“미국에 있어서의 평가
미합중국은 연방 교육부나 미국에서의 고등교육기관을 감독하는 하나의 국가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권력기관이 없다. 각 주정부는 교육에 대한 다양한 정도의 감독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고등교육 기관들은 상당한 독립성과 자율과 더불어 작용하도록 허락되어 있다. 그런 결과로서 미국의 교육 기관들은 그들의 교육프로그램의 질과 성격에 있어서 대폭적으로 차이가 날 수 있다.
질의 기초적인 수준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합중국에서 하나의 비정부적이고 수평적인, 교육기관과 그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평가‐인정의 실행이 일어난다. 지역적이거나 국가적인 범위의 사설 교육 단체들은 건전한 교육 프로그램의 질을 반영하는 기준들을 채택했으며, 기관들이나 그 프로그램들이 질의 기본적인 수준에서 작용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기관들이나 그 프로그램들을 평가하기 위한 절차와 방법을 개발했다”.
위의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 대학 사회에 필수적인 평가‐인정(Accreditation)개념은 대학교 위의 상부 기관, 예를 들면 교육청이나 교육부 등이 아니라 하나의 비정부적(non‐governmental)이며 각 대학교와 동등한 수준의 단체에 의한 민간적인 평가(peer evaluation)라는 점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과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국 대학의 서열(랭킹)이다. 미국 고등교육의 본질인 민영화, 자율화는 이처럼 정부의 통제, 감독 대신에 비정부적인 차원의 평가‐인정 이라는 독특한 전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 대학들은 평가‐인정(Accreditation) 결과가 기준 미달일 경우에는 대학 설립 허가를 취소당할 수도 있다. 그만큼 대학의 평가라는 개념은 엄격하다, 따라서 미국 대학사회에서 ‘평가‐인정(Accreditation)’은 신설대학이나 취약한 대학들에게는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검열 제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학은 철저한 시장 메카니즘의 감시를 받게 되고 교수 임용 부정 같은 사건이 나타나기 힘들다. 미국 대학의 총장은 대학의 발전을 위해 인사와 승진, 학위수여, 교육과정 그리고 입학허가 등에 관한 막강한 권한을 휘두른다. 그러나 한국의 파렴치 총장, 이사장과는 달리 미국 대학의 총장은 학교 공금을 횡령한다든지 착복 혹은 부정입학 등의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 대학의 이사회(board of trustee, board of regents)는 총장을 선출하고 그의 권한과 책무 수행을 감시한다.
미국의 공립대의 경우 이사중의 절반이상을 주지사가 임명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관선이사가 이사회를 감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대학의 총장들은 매달 주지사에게 그 대학의 재정 상태에 대해 보고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학 사회에서는 한국의 경우처럼 재정 불투명과 공금 유용 및 횡령 등의 재단비리는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러니 거기서 학과 전임 교수들의 자의적인 결정이나 횡포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교수들 마저 모두 레벨에 따라 몸값(연봉)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어서 완전히 시장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한국에서처럼 정실인사나 자기사람 심기 혹은 편한 사람, 말 잘 듣는 사람, 멍청한 사람 심기 같은 이기주의 인사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이처럼 시장의 질서는 민간 조직 내에서 조직의 목적과 이념을 위한 질서 복종, 그리고 충성을 무섭게 요구한다. 그러니 미국 대학에서 한국처럼 전임교수가 봉건 영주적인 지위를 누릴 수는 없다.
반대로 독일은(유럽 대륙) 전대학이 공영화 국립화 되어 있다. 물론 소수의 사립대학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고려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교육문제에서 국가와 시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시스템이다. 미국에서 사립대학에 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것처럼 시장에 국가의 요소들이 약간 가미될 수는 있지만 미국 대학교육 영역은 근본적으로 시장주의를 택한다. 우리가 대학 교육의 기본 구조를 생각할 때, 그 결정은 양자택일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 “대학 민영화” 혹은 “교육에 시장원리의 도입”이라는 말들이 자주 들리는데, 이는 대학의 시장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기본 조건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현행의 국가주의 틀 안에서 그런 실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시장주의 대학 제도를 하자는 말에 선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론적으로 이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교육에서 시장주의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가주의의 틀, 즉 법과 제도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 한국의 고등교육법을 거의 폐지하고 정부차원의 대학의 정책을 전부 개별 대학에 양도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고등교육법과 미국의 고등교육법을 한 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학제도의 요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 고등교육법 제5, 6조를 보면 얼마나 대학의 운영과 대학의 정책이 정부의 감독과 통제 하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고등교육법
(…)
제5조(지도·감독) 학교는 교육부장관의 지도·감독을 받는다.제6조(학교규칙) ①학교의 장(학교를 설립하는 경우에는 당해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를 말한다)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학교규칙(이하"학칙"이라 한다)을 제정 또는 개정할 수 있다.②학교의 장이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학칙을 제정 또는 개정한 때에는 이를 지체 없이 교육부장관에게 보고하여야 한다.③학칙의 기재사항, 제정 및 개정절차, 보고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이는 다시 말해 고등교육이 철두철미 중앙지배적(centralized)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governmental) 통제되어짐을 말한다.
이에 비해 1965년 제정된 미국의 고등교육법은 기존적으로 인적 자원을 강화하고 학생들에게 재정적 보조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교육공화국』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지금껏 교육부장관들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미국식 대학 시스템의 장점만 보았지 그것이 작동하는 기본조건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한 숱한 문제가 직ᆞ간접으로 교육 문제와 얽혀 있음을 상기하면 우리가 어떤 교육 철학을 취해야 할 지가 분명해 진다.
즉 한국의 법과 제도가 이미 교육의 국가주의를 지시하고 있다. 남은 문제는 이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여 명실상부한 국가주의, 평등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교육 : 시장이냐, 국가냐? (2003/10/10) 최근 이 나라에 점점 침체와 불안의 징후가 만연하고 있다. 실업자와 자살자가 그리고 신용불량자가 엄청 늘어간다. 기업과 자본은 국가를 이탈한다. 한창 일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나라를 떠나고 싶어한다. 조국에 대해 희망과 애착을 가지고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여 이를 발전시키겠다는 열정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기회만 주어지면 이 땅을 떠날 것이다. 한국은 과연 이토록 저주받은 땅인가? 이런 한국 혐오 내지 절망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흔히 말하는 강성노조, 지나친 경제 규제, 북한의 핵 위협, 미국과의 마찰,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 지나친 사교육비 등이 한국적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종양이 다름 아닌 교육 문제이다. 이는 사교육 문제와 학벌주의 그리고 입시위주의 교육을 포괄한다. 해방 후 거의 60년 간 엘리트 선발을 위한 입시위주의 교육만을 꾸준히 시행한 결과 이 사회는 독자적 사유능력, 실천능력 없는 순응주의자, 기회주의자만을 대량 배출해왔다. 위에서 말한 여러 사회 문제들 그 자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결국 잘못된 교육이 잘못된 인간을 길렀고 그들이 사회를 망친 것이다. 한국에는 교육이 없다! 그 대신 각종 시험이 있을 뿐! 이 나라에는 선생도 학생도 없다, 오직 시험과 수험생이 있을 뿐. 교사나 학생이나, 학교나 학원이나 모두 시험의 도구이며 시험의 노예이다. 이제 우리는 교육과정과 유리된 각종 시험을 모두 철폐해야 한다, 즉 단기간에 실시되는 획일적, 대량적 각종 시험은 모두 폐지되어야 한다. 시험과 평가의 권리를 각개의 교사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평준화가 서울과 지방간의 학력차를 심화시키고 사교육을 부채질한다고 한다. 물론 평준화에 문제가 있다, 즉 학생들이 학교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학교재정은 부담하지 않으면서도 획일적으로 진학을 결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폐단이다. 이런 행정 편의적인 평준화가 아니라 전 교육을 국가가 재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평준화는 더욱 보충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자유가 없는 평등이란 한갖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일 뿐이다. 평등의 목적은 자유이다. 정부는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배분하고 국민은 각자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자유롭게 진급할 학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평소 주장하는 전대학 국립화 혹은 무상교육을 실시할 때에는 많은 돈이 든다. 그러나 가령 그 돈이 10조 라고 하더라도 이 돈을 교육에 투자하면 그 5배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의 사교육비는 그런 무상교육비를 몇 배 이상 만회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사교육비는 자본의 낭비이며 중복 투자일 뿐이다. 교육을 민간부분의 일 즉 서비스업으로 파악하는 것은 겉으로는 소비자 중심의 자유로운 교육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교육이 철저히 자본과 시장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고 자본주의적 계급질서를 강화시킨다. 시장이 교육을 지배한다면 사교육은 더 강화될 것이 뻔하다. 사교육은 이제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었다. 이 암세포가 더 비대하면 대한민국이라는 중병 환자는 드디어 사망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의 어떤 특정한 계층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이 행복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공영화가 조속히 이루어 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