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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華嚴經)에 대한 이해>
‘화엄(華嚴)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 Ganda-vyuha이다.
Ganda란 잡화(雜華, 온갖 꽃)라는 뜻이고,
vyuha란 엄식(嚴飾)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화엄이란 ‘가지가지의 꽃으로 장엄(莊嚴)
또는 장식(裝飾)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잡화엄’이란 말이고,
잡화엄식(雜華嚴飾)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갖가지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곧 화엄이다.
그래서 <화엄경>을 <잡화경>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꽃이란 한 때 피었다가
금방 시드는 그러한 꽃이 아니라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공덕을 꽃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화(華)’가 부처님의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꽃에 비유한 것이라면, 엄(嚴)이라 함은 꾸민다는 뜻이다.
그러한 ‘화엄(華嚴)’은 영원히 지지 않는 꽃, 아름다운 꽃,
청정하고 올바르고 덕스러운 보살의 행을 비유한다.
즉, 꽃으로 꾸민다 함은 보살의 행위가 완성되고 충족돼
진리에 합치함을 뜻한다.
또한 ‘화엄(華嚴)’은 불법의 광대무변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화엄법문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만법을 조화 통일’한다는 것이다.
분파적인 분열을 극복해 총체적인 하나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
이는 불교사상의 보편적인 가치의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화엄경(華嚴經)의 원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대방광불(大方廣佛)이라고 하는 부처님에 대해서 설하고 있음이다.
<화엄경>과 함께 대승경전의 대표적 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이
법(法)을 설하는 경전임을 경명에 나타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흔히 <법화경>을 법을 설하는 경이고
<화엄경>은 부처를 설하는 경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용수는 난봉을 피우다가 불문(佛門)에 귀의했으나
오만 방자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자 대룡(大龍)보살이
그를 바다로 데려가 대승의 이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길,
그리고 태어남도 없고 죽어감도 없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우치게 만든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때, 즉 용수(龍樹, Nagarjuna)보살이 대룡(大龍)보살을 따라
용궁으로 들어갔다가, 용궁의 여러 경전들 중
한 본(本)만을 지상으로 가져와 전한 것이
지금의 <화엄경>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화엄경>의 일부가
용수에 의해 씌어졌을 것이란 말이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바다 속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바다 속에 용궁이 있을 리도 없다.
다만 이것은 상징하는 하나의 설화에 불과하다.
특히 대승 경전엔 무수한 바다가 많이 나온다.
그 바다들은 넓다, 무한하다,
모두를 포용한다는 대승의 이념을 상징한다.
그 바다의 중심이 용궁이라 하겠다.
따라서 <화엄경>은 대승불법의 대해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경전이란 뜻이 내포돼 있다.
<화엄경> 속에 포함된 방대한 교의는 무궁무진해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라하여 <화엄경>은
경ㆍ율ㆍ론 삼장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화엄경>은 인류가 낳은 최대 걸작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의 주불은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불이다.
비로자나불은 항상 여러 가지 몸, 여러 가지 명호,
여러 가지 삶의 방편을 나타내어 잠시도 쉬지 않고 진리를 설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분이다.
그러나 <화엄경> 안에서의 비로자나불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석가모니불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자마자
비로자나불과 일체를 이루게 됐으며, 그 깨달음의 세계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들에게
비로자나불의 무량한 광명에 의지해 설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에 의해서 정화되고 장엄돼 있는 세계는
특별한 부처님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의미한다는 큰 특징을 갖는다.
이 세계 속에 있는 우리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에게 예배하고
귀의 순종함으로써, 부처님의 지혜 속에서 현실계의 상황을
스스로의 눈에도 비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보살행(菩薩行)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는 형체가 없는 비로자나불이 보살들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형체 있는 것으로 화현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며,
최고의 깨달음으로 향하는 보살행이,
깨달음 그 자체인 비로자나불에게로 돌아가는 길인 것이다.
1. 화엄경의 의미
「대(大)란, 부처며 마음자리 자체가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하고 공간적으로는 없는 데 없이 시방의 모든 곳에 두루 하다는 뜻이다.
여기 서 ‘대(大)’란 단순힌 크다는 뜻만이 아니라
‘완전한’, ‘크고 위해한’ 그런 뜻으로서 대방광이란 뜻이기도 하다.
방(方)이란, 진리인 부처의 됨됨이가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되며,
법도(法道)가 된다. 법도인 까닭에 언제 어디서나 질서가 정연해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광(廣)이란, 깨달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로서 모든 것을 널리 포함해
그 범주 속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대방광(大方廣)’을 탄허 스님은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대(大) ― 체(體) ― 법신(法身)
방(方) ― 상(相) ― 보신(報身)
광(廣) ― 용(用) ― 화신(化身)
불(佛)이란, 깨달음을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하고 있다.
지혜의 환한 빛으로 번뇌에 겹겹이 쌓인 어둠을 밝힌다.
인생도 우주 삼라만상도 이 빛 속에서 밝아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화(華)란, 위대하고 기준이 되며, 더없이 넓은 부처님 세계를
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마음속에 갖추고 있는 모든 능력의 씨앗을
한껏 꽃피운 것이라는 뜻이다.
엄(嚴)이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부처의 꽃으로 장엄했다는 뜻이다.
사람들만 장엄한 것이 아니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심지어 날아다니는 작은 먼지 하나까지도 한 결 같이
그 아름다운 부처의 꽃으로 장엄했다는 말이다.
경(經)이란, 부처의 꽃으로 아름답게 장엄한 세계를 잘 표현하는
그릇이며 도구다. 그 그릇은 종이와 먹으로 됐으되
종이와 먹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 다 표현했다.
그래서 이름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 한다.
2. 화엄경의 성립
<화엄경>은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해 단순히 화엄사상의
소의경전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불신사상(佛身思想)과
보살사상(菩薩思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연기사상(緣起思想),
정토사상(淨土思想), 선사상(禪思想) 등이 고루 설해지고 있다.
이는 처음부터 <화엄경>이 하나의 경전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각 품(品)들이 별도의 경전으로 성립 유통되다가
대승불교 초기에 하나의 경전으로 집대성됐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이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에 의해 편찬됐는지
문헌상 정확한 근거는 나와 있지 않다.
<화엄경> 중 산스크리트어 본으로 된 건
입법계품(入法界品)과 십지품(十地品)만 있다.
이 두 품은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화엄경>의 가장 오래된 모양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래 <십지경(十地經)>은 단독 경전으로 존재했었다.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은 중관철학을 확립한 용수 이전에
성립된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그리고 <화엄경>은 십지품과 입법계품이 따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다른 품이 부가 돼 합쳐졌다고 본다.
그리하여 먼저 34품의 <화엄경>이 성립된 것은 4세기 중엽쯤에
중앙아시아 고탄(Khotan-지금의 호탄/Hotan/和田/허텐)
우전국(于闐國)에서 집대성되고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은 인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경전으로서
다수의 개별경전을 대승이라는 사상아래 일종의 문집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화엄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십지품과 입법계품과 같은 것은 산스크리트 원전이 있으나
집대성돼 편찬된 것은 ‘중앙아시아’ 우전국으로 본다.
즉, 입법계품이나 십지품은 인도 문화권에서 성립됐다고 보지만
그 외 다른 부분은 다른 지역에서 성립됐을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현재의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가면 대단한 불교유적이 있다.
옛날 코탄(현 호탄/和田)은 엄청난 불교사원이 많이 있었던 곳인데,
당나라시대 현장(玄奘) 법사도 인도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이곳 코탄을 지나갔다.
여기에서 4세기 중엽까지 <화엄경>이 편찬돼 그것이
실크로드를 지나 돈황ㆍ옥문을 거쳐 장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의 편찬은 각각의 품별로 대단히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4세기에 우전국에서 하나의 경전으로
집대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불교학자들은 나름대로 <화엄경> 성립시기를 말하고 있는데,
<화엄경>이 부분적으로 성립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AD 1~2세기경으로 보이고, 여러 품이 각기 만들어져
4세기 이르러 집대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이 <화엄경>은 처음부터 현재와 같이 방대한 체계로
만들어진 경전이 아니라 각 품이 단독 경전으로
독립적으로 발전하다가 사상을 같이 하는 여러 단독 경전을 모아
집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만든 시기는 대체로 4세기경으로 보고 있으며,
만든 장소는 서역의 우전국(于闐國-지금의 호탄)으로 보고 있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 보살은 인도에서 <화엄경>을 크게
유통시켰으며, 주석도 했다.
※우전국(于闐國)---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의 남서쪽 오아시스 지역,
지금의 중국 신장ㆍ위구르 자치구 화전(和田-허텐-호탄-옛 고탄)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
3. 화엄경의 성립배경
대승불교 시대에 <화엄경>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교리적 당위성은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게 됐다.
초기불교, 부파불교에서 새로운 대승운동으로 이어진
불교사상의 흐름 속에서 제반사상을 일관된 맥락으로
융합해 통일을 이룬 것이 <화엄경>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대승불교가 흥기하던 시대에 각기 탄생된
여러 경전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일심사상(一心思想), 법계연기(法界緣起), 보현행원(普賢行願)의
사상이 담긴 경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존엄한 인간성에 들어가 보면
차별은 있을 수 없고 동일(同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 됨과 개성을 말하는 ‘원융문(圓融門)과 항포문(行布門)’은
조화로운 삶을 나타내는 화엄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존의 세계를 이루는 오늘날
화해와 상생의 시대에 사상적 근거와 대안이 될 것이다.
※원융문(圓融門)과 항포문(行布門)---<화엄경>의 육상(六相) 가운데
총상(總相) 동상(同相) 성상(成相)의 3상은 같은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이를 원융문(圓融門)이라 하고, 별상(別相) 이상(異相) 괴상(壞相)을 항포문(行布門)이라 한다.
원융문은 평등문이고 항포문은 차별문이다.
그런데 무차별의 원융문은 차별을 나타내는 항포문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항포 자체가 분명하면서도 항포가 곧 원융이 된다.
여기에 전체와 부분, 하나와 무량이 무애한 무진법계(無盡法界)의
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4. 화엄경의 구분
<화엄경>은 세 종류의 한문 번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 <60 화엄>---<60 화엄경>은 가장 오래된 <화엄경>으로
여산 혜원(廬山慧遠)의 제자 지법령(支法領)이 서역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원전을 구입해 서기 418년경 중국으로 가져온 것을 동진(東晋)에서
불타발타라(覺賢, Buddha-bhadra, 359~429)가 중심이 돼
418년에 번역을 시작해 422년에 완료했다.
<60권 화엄경>은 7처 8회 34품, 60권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60 화엄>이라 한다.
이를 구화엄(舊華嚴), 진경(晉經), 진본(晉本)
혹은 진역(晉譯)이라고도 하며, 구역(舊譯)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7처는 설법의 장소를 말하고,
8회는 회좌(會座)의 수효이며, 34품은 경전 내용의 장(章) 또는
절(節)의 수효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품(品)'은 같은 내용끼리 한데 묶어놓은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요즈음의 장(章)과 같다고 하겠다.
대체로 양이 많을 때에는 품(品)이라고 하고
글의 길이가 짧을 때에는 분(分)이라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는 글의 내용에 따라
품(品)으로 구분 지었고,
<금강경>같이 단순한 경전에서는 분(分)으로 나누어 놓았다.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가겨온 지법령(支法領)은
월지국(月支國) 사람으로서 그의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역지방 우전국(于전國) 동남쪽 깊은 산 속에 많은
대승경전이 비밀주머니 속에 숨겨져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산스크리트어로 된 <화엄경> 3만 6천 게(偈)를 찾아
장안으로 가지고 왔으나 그것을 번역할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마침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만나, 그 인연으로 번역작업이
이루어지게 됐다고 한다.
<60권 화엄경>을 번역한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는 중국 사람이 아니다.
인도 사람인지 아니면 중앙아시아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그가 중국에 와서 번역을 했는데, 그때 함께 번역한 중국 사람이
지엄(智嚴, 602~668)이었다.
<법화경>을 번역한 구마라습(鳩摩羅什, Kuma Rajiva, 344~412)도
같이 동참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이 <60권 화엄경>을 많이 읽는다.
• <80 화엄>---<80 화엄경>은 당(唐)나라시대인 695년~699년에
실차난타(實叉難陀, 喜學, 652~710)가 번역한 것이다.
당의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대승불교에 깊이 귀의해 불법을 널리 폈는데,
<60 화엄>의 미비함을 알고 이를 보완하려고 고심하던 중
서역 우전국(于전國)에 범본(梵本)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본과 사람을 모셔오게 했다.
그래서 4만 5천 게송 <화엄경> 범본을 가지고 와서 번역한 사람이 실차난타이다.
불심이 깊었던 측천무후는 번역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80 화엄>의 서문을 직접 쓰기까지 했다.
측천무후는 정치적으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마는 불교 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
중국 화엄종의 제3조 현수 법장(賢首法藏)도 그 번역에 참여했다고 한다.
당나라 때에 번역됐다고 해서 당경(唐經), 당본(唐本),
또는 신경(新經)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80 화엄경>을 가지고 신행의 근본으로 삼으며,
우리나라 전통 강원(講院)에서 교재로 채택하고 있다.
<80 화엄경>이 설해진 장소는 모두 일곱 장소(7처)이다.
지상의 세 곳과 하늘의 네 곳이다.
설법을 한 횟수는 모두 아홉 번(9회)이며,
총 품수는 39품(혹은 40품)이고, 80권이므로 <80 화엄>이라 한다.
• <40 화엄>---<40 화엄경>은 <60 화엄경>이나 <80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을 따로 떼서 번역한 부분 경이다.
남인도 오다국(烏茶)의 사자왕(獅子王)이 당 덕종(德宗)에게
친히 써서 보내 온 산스크리트어본을 <80 화엄>이 번역된 후
100여년쯤 후인 795~798년에 우전국(于闐国) 출신 반야(般若, 푸라주나/Prajna)
삼장(三藏)이 장안의 숭복사에서 번역했다.
이에는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청량 징관(淸凉澄觀)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1품 40권으로, 입법계품 단역본(單譯本)이므로,
<화엄경>의 일부분이라 하겠다.
이 <40권 화엄>에는 앞의 <60 화엄>과 <80 화엄>에는 없는
다른 내용의 일부가 첨가돼 있으니, 이것이 보현보살의
10가지 큰 원을 설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다.
5. 화엄경의 구성
<화엄경>의 주불 비로자나부처님은 직접 설법을 하지 않고
미간(眉間)과 백호(白毫) 등 신체 각 부위에서 광명(光明)만을
놓고 있으며, 다른 여러 보살들이 부처님을 대신해 법을 설하고 있다.
다만 심왕보살문아승지품(心王菩薩問阿僧祗品)과 불소상광명공덕품(佛所像光明功德品)은
보살들이 질문을 하고,
부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형식이다.
<화엄경>의 구성은, 삼주인과(三周因果)라 해서,
제1회의 6품 경은 비로자나자의 성불(成佛)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제2회부터 제8회까지의 32품 경은 보살의 성불과정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제9회의 2품 중 마지막의 <40 화엄>에 있는 보현행원품은
<화엄경>의 최종 결론이며 불교 전반에 대한 결론으로서
보살행을 제시하고 있다.
<80 화엄경>의 구성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80 화엄경>이 설해진 장소는 일곱 장소이다.
지상의 세 곳과 하늘의 네 곳이다.
설법을 한 횟수는 모두 아홉 번이며 총 품수는 39품(혹은 40)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7처 9회 39품(40품)이라고 한다.
대개는 7처 9회 39품이라고 하는데, 「보현행원품」이 언제부터인가
따로 떼 내어 별개로 유통해오고 있는데, 이를 포함하면 40품이 된다.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을 끝내시고 마가다국의
니련선하(尼連禪河) 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납월 8일 샛별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이 환하게 열려 정각을 이루셨다.
그리하여 그 동안에 가졌던 온갖 의문이 풀리고
우리들의 인생과 마음의 진실과 삼라만상과 우주의 실상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자리를 금강보좌(金剛寶座)라고도 하고
보리도량(菩提道場)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난 뒤 가장 먼저
<화엄경>을 3, 7일 동안 설했다고 전통적으로 교상판석을 했다.
그러므로 깨달은 그 보리도량에서 온 우주에
진리 당체로 변만해 있는 비로자나(毘盧자那) 부처님의
성불(成佛)을 그린 것이 제1회이다.
제1회에 설한 것이 여섯 품이다.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세계성취품」,
「화장세계품」. 「비로자나품」으로, <화엄경>의 서론에 해당된다.
제2회는 보리도량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보광명전에서 설한 여섯 품이다.
이 제2회 설법에서부터 제8회 설법까지는
보살이 성불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제2회 설법의 각 품 이름은 「여래명호품」, 「사성제품」. 「광명각품」,
「보살문명품」, 「정행품」, 「현수품」으로 보살이 성불해 가는
대승 52위 중 가장 기초단계인 십신(十信)에 해당되는 법문이다.
제3회부터는 하늘로 법회 장소가 옮아간다.
먼저 욕계 6천의 제2천인 도리천궁(忉利天宮)에 올라가서
한 설법은 여섯 품이다. 「승수미산정품」, 「수미정상게찬품」,
「십주품」, 「범행품」, 「초발심공덕품」, 「명법품」의 여섯으로,
대승 52위 중 십신 다음의 수행 단계인 십주(十住)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제4회 설법은 욕계 6천의 제3천인 야마천궁(夜摩天宮)에서 설한 것으로,
「승야마천궁품」, 「야마궁중게찬품」, 「십행품」, 「십무진장품」의 네 품이다.
이 품들의 내용은 십행(十行)에 해당한다.
제5회 설법은 욕계 6천의 제4천인 도솔천궁(兜率天宮)에서
「승도솔천궁품」, 「도솔궁중게찬품」, 「십회향품」의 세 품을 설했다.
이는 십회향(十廻向)에 해당된다.
이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면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하늘이다.
제6회 법회는 욕계 6천의 제6천인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에서
설한 것으로 「십지품」한 품뿐이다.
타화자재천은 욕계 6천 중 가장 높은 하늘이다.
이 「십지품」은 이름 그대로 보살의 수행 과정 중에서
거의 성불 가까이에 이른 십지(十地)를 설명하고 있는
매우 수준 높은 품으로 범어로 된 원문이 전하기도 한다.
<화엄경>이 대경(大經)으로 결집되기 이전에는
<십지경>이라고 불리며 독립된 경전으로서 체제를 잘 갖추고
유통하고 있었다.
제7회부터는 법회 장소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서,
다시 보광명전에서 설했다.
「십정품」, 「십통품」, 「십인품」,「 아승지품」, 「여래수량품」,
「보살주처품」, 「불부사의법품」, 「여래십신상해품」,
「여래수호광명공덕품」, 「보현행품」, 「여래출현품」의 11품을 설했다.
이 품들은 성불에 거의 다 이르러 간 등각(等覺)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다.
제8회 법회도 역시 보광명전에서 「이세간품」 한 품을 설했는데,
보살의 수행 계위 중 마지막 단계인 묘각(妙覺)에 해당되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2회, 7회, 8회, 모두 세 번을 보광명전에서 설했다.
이상 2회부터 8회의 설법까지는 보살이 성불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대승 52위에 하나하나 배대(配對)를 시킬 수 있으며
전체 <화엄경>의 본론이라 하겠다.
마지막 9회 설법 장소는 <금강경>과 <능엄경>이 설해진 급고독원(給孤獨園)이다.
급고독원은 바로 사위국(코살라국;舍衛國)의 서다림 숲에 있는 기원정사이다.
거기서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과「보현행원품」)이 설해졌다.
이 품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라는 한 평범한 인간이
성불해 가는 과정을 설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중생(衆生)이
성불하는 과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마지막 9회 설법은 <화엄경> 결론으로 볼 수 있다.
곧 결론은 결국 보현행원이다.
보현행원을 찬양하면서 <화엄>경이 끝난다.
이로써 <화엄경> 80권은 부처(佛)와 보살(菩薩)과 중생(衆生)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성불하는 진실만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화엄경>을 완전무결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일승원교(一乘圓敎)라 한다.
<화엄경>의 구성을 요약하면,
제1회의 여섯 품은 비로자나부처님의 성불과정을,
제2회에서 8회까지 서른 두 품은 보살의 성불과정을 표현했으며,
제9회의 두 품은 선재동자를 등장시켜 평범한 중생이
점차로 수행해서 성불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보현행원품은 <화엄경>의 최종결론으로
불교 수행자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보현보살의 삶은 우리가 고통을 소멸하고 행복에 이르는 바로 그 길이다.
불교를 만난 진정한 의미는 자신이 먼저 행복해지고,
타인도 행복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다.
그것이 <화엄경>의 결론이다.
6. 화엄경의 요체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설하신 경전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그 팔만대장경을 총별(總別)로 나누면 화엄경은 총경(總經)이고,
그 이외의 경은 별경(別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은 총경의 내용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경(經)ㆍ율(律)ㆍ론(論)의 총합이라 하겠다.
그래서 일체경교에서는 화엄경이 가장 으뜸이라고 한다.
범부가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과정의 삼현십지(三賢十地)와
불법의 신(信)ㆍ해(解)ㆍ행(行)ㆍ증(證)과 사법계ㆍ십법계ㆍ
육상원융ㆍ십현문 등 대승에서 가장 심오하고 광대무변한
가르침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엄경>만 알면 다른 경전은 다 아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화엄경>의 초점을 알면 바로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알게 되는 것이고, 부처님이 일생동안 설하신
내용의 초점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화엄경>의 초점은 바로 신ㆍ해ㆍ행ㆍ증(信解行證)이라는 네 가지이다.
믿고, 알고, 행하고, 증득(=깨달음)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을 이루는
네 기둥이요, 그것은 곧 불법의 기둥이 되기도 한다.
• 신(信)은 인간이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부처님의 세계를 보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고
신심을 내게 하는 부분으로서 제1회의 6품 경이 그것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원만하고 청정한 과보가 잘 나타나 있다.
• 해(解)는 결과를 보고 환희심과 신심이 나면,
그 결과의 원인을 수행하고 결과를 얻으려는 수승한 이해가
나게 되는 부분이다.
제2회에서부터 제7회의 마지막 여래출현품까지 31품의 경이다.
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의 50단계의 인행(因行)을 닦아서
부처님의 결과를 이루는 일을 보여준다.
• 행(行)은 수행하는 길과 방법을 잘 알고 그 방법에 의지해 나아가면,
수행이 모두 원만성취 되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것이 제8회의 이세간품(離世間品) 1품이다.
여러 단계의 수행하는 방법에 근거해 2천 가지의 원인을 닦아서
수행이 성취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증(證)은 선재동자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님의 만행만덕(萬行萬德)을 성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제9회의 입법계품(入法界品) 1품이다.
선재동자가 53인의 선지식을 찾아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52단계의 성불과정을 올라가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화엄경>의 대의를 「통만법 명일심(通萬法 明一心)」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한마음을 밝히면 모든 법과 통한다, 만법을 통괄하고 아울러서
일체의 인간세계가 일심일 뿐임을 드러내 밝힌다.
밖으로 천만 사물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안으로
나의 본래마음을 밝힌다는 뜻이다.
만법이란 일체 현상, 곧 우주 만유를 가리킨다.
우주의 모든 차별 현상을 꿰뚫어서 그 이치를 막힘없이 알아서,
안으로 평등하고 청정한 성품을 찾는다는 말이다.
만법을 응용해 일심을 밝히기도 하고, 일심을 깨달아
만법을 건설하기도 하는 경지로서 대원정각(大圓正覺)의
경지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명시성정각(先明始成正覺) 후현보현행원(後顯普賢行願)」을
<화엄경>의 대지(大旨)라고도 한다.
선명시성정각(先明始成正覺)하고,
먼저 시성정각, 부처님이 비로소 정각 이루는데 대한 뜻을 밝히고,
즉 깨달음의 이치를 밝히고,
후현보현행원(後顯普賢行願),
그 다음에 보현행원을 드러내는 일을 밝히는,
이것이 <화엄경> 대의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보현행원품은 <화엄경>을 읽는 사람들도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가려면
열 가지 덕목을 실천하라고 권하는 부분이다.
그것이 저 유명한 보현의 십대행원(十代行願)이다.
그런데 기존 <화엄경> 번역에 대해 초기불교 연구 권위자인
전재성 박사는 오류투성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꽃인 <화엄경>의 한글 번역본이
한역본에만 의존한 이중 번역이라 잘못된 것이 비일비재하다.
이로 인해 심각한 교리상의 왜곡이나 명상수행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라며,
<화엄경>의 핵심사상이 담긴 산스크리트어 원본
<십지경(十地經)>을 한글로 번역한 <십지경-오리지널 화엄경>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발간을 펴냈다.
인도에서 <십지경>이 만들어진 뒤 중앙아시아에서 확대돼
방대한 <화엄경>으로 성립됐다. <십지경>은 <화엄경>
가운데 입법계품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산스크리트 원본이
남아 있으며, 불교의 심오한 명상수행의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7. 화엄경의 주요 사상
<화엄경>은 매우 방대한 경전이며, 대승경전이 갖는
웅대한 세계관의 기본형인데, 그 사상이 매우 심오하고 다양해서
그 회통적인 철학성은 동양사상 속에서 하나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나 초심자가 처음 읽을 경우,
이 경전이 대체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무수히 많은 보살과 부처가 등장하는가 하면
소설이라 하기엔 허무맹랑한 단편적인 이야기이고,
그렇다고 논설이라 하기엔 전혀 논리정연하지 않다.
마치 꿈같고, 환상 같아서 잡히는 데가 없다.
이와 같이 <화엄경>의 설법은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려는 배려가 거의 무시된 채
오직 깨달음의 세계를 깨달음 그대로 말해 갈 따름이다.
더구나 부처님의 깨달음은 자아관념을 초극한 세계이다.
그런데 자아관념에 매여 있는 범부중생으로서는
자아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연화장세계(連華藏世界)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엄경>에서 설하는 연화장세계는 현상계와 본체,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해 끝없이 전개하는 역동적인 큰 생명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화엄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대교(大敎) 혹은 원교(圓敎)라 한다.
그래서 <화엄경>을 <원경(圓經)>이라고도 하며,
화엄종을 원종(圓宗)이라 하기도 한다.
근본불교의 중심과제가 고(苦)의 원인을 규명해
그 고(苦)에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면,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인간 석가모니부처님에 대비되는
법신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는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으로서
영원불멸의 부처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해답으로
깨달음[覺]과 실천행[行]을 보살의 가장 큰 원행(願行)으로 제시하고 있다.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가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普賢行願)으로 설명된다.
그리하여 <화엄경>의 핵심은 보현행(普賢行-보살행)과
일심사상(一心思想), 그리고 사사무애(事事無礙)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겠다.
그리고 <화엄경>은 단순히 화엄사상의 소의경전 역할뿐만 아니라
불신사상(佛身思想)과 보살사상(菩薩思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연기사상(緣起思想), 정토사상(淨土思想), 선사상(禪思想) 등이
고루 설해지고 있는데, 이는 <화엄경>이 처음부터 하나의 경전으로
설해진 것이 아니라 각 품들이 별도경전으로 성립 유통되다가
대승불교 초기에 하나의 경전으로 집대성됐기 때문이다.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것이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이다.
일즉일체(一卽一切)의 기초 위에 있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 표현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중중무진으로 연기된 법계는 십현연기(十玄緣起),
육상원융(六相圓融), 상입상즉(相入相卽) 등의 성질을 가지고 연기돼 있다.
① 법계연기(法界緣起)---법계, 곧 우주만유를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화엄교학의 근본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화엄세계는 법계연기의 세계라고 보고 있다.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는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인이 되고 연이 돼,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을 말한다.
사법계(四法界), 십현연기(十玄緣起), 육상원융(六相圓融),
중중무진(重重無盡), 상입상즉(相入相卽-서로가 걸림 없이 통함) 등은
이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사상의 골자이다.
<화엄경>에 일관돼 있는 유심설(唯心說)에 근거해 성립된 법계연기는
우주만유의 모든 사물과 사상(事象)이 모두 인연 따라
자재롭게 서로 얽혀 의지하면서 한없이 교류하고 융합해
생겨나고 있음을 말한다.
만유(萬有-삼라만상)를 모두 동일한 수평선 위에 두고 볼 때에는
중생과 불(佛),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 등과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하던 것도 실제는 모두 동등한 것이며,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어서 만유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걸림이 없다.
이것을 사사무애(事事無碍)라 하는데, 법계란 이 사사무애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런 세계의 존재방식이 법계연기이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가이아(Gaia)가설이 곧 법계연기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하겠다.
※무진연기(無盡緣起)---우주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해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法界) 무진연기(無盡緣起)라 한다.
②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화엄경>의 중요 명제이며, 기본 교의이다.
한 알의 쌀을 보고 사회전체, 우주전체의 일들을 알아낸다는 뜻도 있다.
쌀의 생산과정, 유통과정, 식량으로서의 쌀의 역할 등이
한 알의 쌀 속에 다 담겨 있다는 말이다.
불교적인 인간관은 단순히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를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에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나 이외의 백 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백 명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나에게 있어서 백사람이
모두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
곧 나 자신이 백 명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은 이러함을 한 티끌 속에 일체의 세계가 들어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③ 일미진즉(一味塵卽) 무한세계--- 하나의 작은 미세한 것 중에
무한한 세계가 다 들어가는 것이 일즉다(一卽多)이다.
그것을 의상(義湘) 대사는 <화엄경 법성게(法性偈)>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
중생 입장에서 본다면 작은 한 먼지는 어디까지나 먼지이고
커다란 세계는 어디까지나 커다란 세계이다.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즉다(一卽多)의 경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보리(菩提)를 구하는 화엄세계에서는 미세한 세계가
곧 큰 세계이며, 큰 세계가 즉 미세한 세계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소세계가 대세계이며, 대세계가 소세계이고,
광대한 세계는 협소한 세계이며, 오염된 세계도 깨끗한 세계이며,
깨끗한 세계도 오염된 세계라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먼지와 같은 세계는 무한한 세계를 포함한다.
또 시간적으로 말한다면 한 생각(一念)에 무한한 시간 일체의 시간이 들어간다.
또는 일념 속에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전부가 구비된다는 말이다.
④ 해인삼매(海印三昧)---부처님 눈으로 보면 이 한순간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조명돼 온다.
흔히 영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두가 비춰온다는 뜻이다.
중생의 눈으로 본다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 눈이 아니면 안 보인다.
부처님 입장이라는 것은 어떤 입장인가. 그것을 해인삼매(海印三昧)라 표현한다.
큰 바다와 같은 크고 깊은 삼매라는 뜻인데,
이것은 절대무(絶對無)의 세계다.
절대무의 세계에서 그것은 비칠 수밖에 없다.
왜 비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절대무의 세계는
마치 거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반영하지만 거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거울 자체는 어디까지나 청정하다.
진짜 해인삼매란 부처님의 삼매라야 한다.
부처님 삼매란 무엇인가. 일체 아집이 없어진 삼매,
자기의 견해가 없어진 삼매다.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보는 일이 없어진 모습이기 때문에 거울과 같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비춰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순간의 생각 속에 과거도 미래도 보이게 된다.
맑은 곳에 비춰지는 것이다. 깊은 선정에 들어가면
미래와 과거가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영원한 지금’이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 하지만
영원을 반영해 주는 지금이다. 옛 선사의 말을 빌리면
'지금 여기 나타나는 것'이다.
⑤ 유심사상(唯心思想)---<화엄경>에 나오는 말들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삼계는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그것은 다만 마음이 만든 것이다.
(三界虛妄 但是一心作)”.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다. 여러 가지 오음(五陰)을 그리고
일체의 세계 속에 법으로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님 또한 그러하다. 부처님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모든 부처님은 모두를 이미 알고 있다. 일체는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고.
만일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는 진정한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훌륭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은 모든 다양한 세계를 묘사해 낼 수 있다.
마음처럼 부처님도 같다. 부처님처럼 중생도 마찬가지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일체 어떤 것이라도 만들어 낼 수 가 있다.
이것을 유심소조(維心所造)라 한다. 이 의미는 마음작용에 따라
어떤 식으로라도 자기 세계라는 것은 바꿔질 수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화엄사상을 우리나라 불교에 적용시켜
우리나라 불교로 하여금 회통불교를 지향하게 기반을 다진 분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효 대사는 <화엄경>에서 일심(一心)을 주목했다.
마음이 근본이고 근원이며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설파 했으며,
원효 사상을 요약해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요익케 하라고 했다.
그리고 끝으로 화엄경의 대의는,
“선명시성정각(先明 始成正覺) 하고 -
먼저 시성정각 깨달음의 이치를 밝히고,
후현보현행원(後現 普賢行願) -
뒤에는 보현행원을 드러내는 일이다.”라고 했다.
먼저 깨달음을 이룬 뒤에는 보현생-보살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보현행이 화엄경의 결론이자 불교의 결론이라 하겠다.
8. 화엄경을 대하는 태도
경전을 볼 때에는 항상 그 이면(裏面)의 뜻을 헤아려 봐야 한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 깨달음의 내용을 즐기고 점검하고 검토하던 소위 깨닫고 나서
21일 간의 마음 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 경이와 즐거움을 3. 7. 21일간 설하신 것이 <화엄경>이라 한다.
그래서 그 의미를 잘 새겨봐야 한다.
깨닫고 난 뒤 21일간은 부처님께서 아직 보리도량에 계실 때이다.
기원정사는 물론 녹야원에서 가서 다섯 비구를 만나기도 전에 설하신 것이다.
서다림(逝多林)에서 설한 것으로 돼 있고,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다 나오고 사리불이나 목건련이니 하면서
온갖 제자들이 다 나온다. <화엄경>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실라벌성(室羅筏城)의 서다림(逝多林) 급고독원 (給孤獨園)에 있는
화려하게 장엄된 누각에서 보살마하살 5천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이름은 보현보살마하살(普賢菩薩摩訶薩)과
문수사리(文殊師利) 보살마하살을 상수(上首)로 해서,
지혜승지(智慧勝智)보살ㆍ무착승지(無著勝智)보살… 」
이렇게 시작된다.
헌데 여기 나오는 제자들은 부처님이 성도 후 여러 해가 지나서
제자가 됐는데, 그리하여 아직 오비구도 만나기 전인데,
어떻게 여기에 등장을 하느냐,
그러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따라서 우리들의 세속적인 상식을 가지고 전후를 따지면
<화엄경>은 아예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엄경>은 뜻으로 읽어야 한다.
<화엄경>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은 그 속에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해야지 액면 그대로만 따지면 하나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다.
특히 대승경전의 경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500년 내지 600년이 지난 뒤에 완성된 것이고,
부처님이나 불법을 확장하고 미화했기 때문에
과장된 내용이나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다.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져서는 이해가 안 된다.
지금 이 대목도 그런 것이다.
9.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
이 두 경전이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불경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금강경>과 함께 대승삼부경(三部經)을 이루고 있다.
<화엄경>을 해가 동편으로 떠오를 때 걸린 최고봉에 비유한다면,
<법화경>은 해가 서편으로 질 때 걸린 최고봉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대승불교 최고 경전의 하나인 <법화경(法華經)>이 법(法)을 설하는 경전이라면,
<화엄경(華嚴經)>은 곧 부처님 세계를 설하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고,
대승경전의 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야는 공관(空觀)의 시작이고, 화엄은 공관의 끝이라고 할 만큼
<화엄경>은 반야계 경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화엄경>과 <법화경>, 이 두 경전이 한마디로 무엇을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화엄경>은 부처님을 말하고 있다. '대방광불(大方廣佛)'이란 곧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다.
<법화경>은 무엇을 설하고 있느냐 하면,
'묘법(妙法)'이라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묘법연화경>에서 묘법이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하는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의 불(佛)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다.
예로부터 <화엄경>을 불(佛)을 말하는 경, <법화경>은 법(法)을 말하는 경이라고 구분해 왔다.
<화엄경>은 우주 삼계가 모두 일심(一心)의 발현이며,
일체중생이 모두 한마음 속에서 한마음을 의지해
한마음[일심(一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법화경>은 모든 수행은 성불이 목적이고,
모든 강이 바다에 모이듯이 결국은 부처 하나로 집결된다.
[귀일(歸一)]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화엄경>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하고,
<법화경>은 일승(一乘) 불교사상을 설했다.
<화엄경>의 보현행원품과 <법화경>의 보문품은 방대한 경을
요약 축소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다.
<화엄경>은 한자로 20여만 자, <법화경>은 7만여 자가 된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란 일체생명의 에너지,
즉 생명력이고, 교(敎)는 가르침을 말하니,
이는 곧 일체중생의 생활이 바로 불교임을 말한다.
우주는 커다란 학교요, 중생은 부처를 향해 나아가는 학생이다.
학생은 많고 학교도 다양하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 만생이 모두 불교에 속해 있으니, 이러 함을 바로
<화엄경>과 <법화경>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이 각기 있고, 두 경전을 모두 존중하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화엄경>을 존숭하고, 일본은 <법화경>을 매우 존중한다.
화엄 10찰이라 해서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거대 사찰은
대개 화엄사상을 지향하는데 비해, 일본에서 소위 고승이라 칭하는
신란(新鸞)과 니치렌(日蓮) 등은 모두 철저하게 법화사상을 지향했다.
특히 ‘잡화엄(雜華嚴)’이라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모두를 아우르는 사상적 기반을 <화엄경>에서 찾고 있으며,
화엄사상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분이 원효(元曉) 대사와 의상(義湘) 대사이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깨달음과 그 내용을 그대로 표명하고 있는
대승경전 중에서도 교학적 사상적으로 불교의 핵심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고 본다.
<화엄경>에서는 “자아를 초월한 자기, 자기본성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아는 것이다. 다시 또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세계의 실상을 실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여기에 <화엄경>의 본뜻이 있고, 한없이 웅대한 세계가
이 경에 있음이라 평가되고 있다.
<화엄경>은 불교를 연기론에서 보는 최고의 경전이다.
연기론은 ‘무엇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연기이고 아무것도 없으면 연기를 할 수 없다.
업(業)이 있기에 고통이 있다. 무명(無明)이 있기에
생로병사가 일어난다 하는 것이 연기론의 입장이다.
<아함경>에서 구사론(俱舍論)이 나오고,
그것이 발전해서 유식론(唯識論)이 된다.
그것이 또 한 단계 발전한 것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일즉다(一卽多)의 입장이 발전해서
중도(中道)사상으로 발전하고,
그리하여 불교는 유의 입장에서도 중도이고
무의 입장에서도 중도로 결정짓는다.
<화엄경>의 이러한 내용을 요약하면,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만약에 사람이 부처 성품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그 법계의 성품이란 곧 내 한마음에서 이루어지느니라.”
모든 근원은 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화엄경>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화장세계(華藏世界)’라는 것은 평등해 차별이 없으나
이 세상(利土)의 유(類)가 생각할 수 없이 많은 하나하나가
자재해 어지럽지 않고 편안하게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근본불교의 중심과제가 고(苦)의 원인을 규명해
그 고(苦)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비되는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하는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으로서
영원불멸의 부처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데
대한 해답으로 깨달음[覺]과 실천행[行]을 보살의
가장 큰 원행(願行)으로 제시하고 있다.
<법화경>은 불교를 실상론(實相論)에서 보는 최고의 경전이다.
실상론은 공(空)을 전제로 한다. 공을 전제로 하는 경은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 가운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의미는
물체 가운데 비어 있다. 빈 것 그 자체가 물질이다 하는 뜻으로
<반야심경>의 원리다.
이것이 한 단계 발전하면 <법화경>이 된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開) 보임(示)을 목적으로 편찬된 경전이다.
따라서 다른 경에서는 보살만이 성불하고 다른 자는 구제에서 빠져 있는데,
<법화경>에서는 악인이나 여인까지도 성불이 가능하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회삼귀일(會三歸一), 일불승(一佛乘),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말한 경전으로 불교경전 중 가장 넓은 지역에 유포돼 많은 민족들에게 애호되며,
가장 깊이 지자(智者)에 의해 교학적 사상적으로
조직 정리됨으로써 천태종과 법상종의 소의(所依)경전이기도 한다.
<법화경>은 <화엄경>과 반대로 ‘다즉일(多卽一)’의 입장이다.
이 우주의 가득한 모든 중생이 세계의 하나에 귀의한다.
하나란 부처님의 본성이다.
따라서 <법화경>의 요지는,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
모든 법은 본래 그대로가 부처님의 열반의 모습이다.
성불한 그 모습 그대로이며, 만약에 불자들이 이것을 실행하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와 우주가 그대로 열반상이고
부처님의 세상이므로 내가 실천하면 곧 부처요,
실천하지 않으면 곧 지옥 중생일 뿐이란 말이다.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원융무애(圓融無礙)이고,
<법화경>의 핵심사상은 회삼귀일(會三歸一)이다.
<화엄경>의 이치는 온 우주가 부처님의 깨달음 아래 다 녹아들어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경지이다. 하나 속에 여럿이,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모든 존재가 모두를 서로 비쳐주는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달린 구슬방울과 같다는 것,
그것이 원융무애이다.
<법화경>에서는 다시 회삼귀일(會三歸一)로,
그 하나로 돌아가게 만드신 것이니,
모든 법이 본래부터 적멸해 모든 존재를 위해 끝없는 원력으로
일대사인연을 이어가시는 여래의 경지에 다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끝이며, <화엄경>의 처음과 연결된다.
「“어떤 분이 물었다. 이 스님에게 가면 <금강경>이 최고라 하고,
저 스님에게 가면 <천수경>을 지송하라고 하고,
또 다른 스님에게 가면 <법화경> 사경이 제일이라 하는데,
모두 다 할 수도 없고, 그 중 한 가지만 하려면 도대체 무얼 해야 합니까?”
사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불교는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모든 강물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러므로 자칫 하면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제 깜냥대로 이해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우(愚)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천수경>이 비타민 A라고 한다면, <금강경>은 비타민 C,
<법화경>은 비타민 D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마음과 하나 되는 가르침,
<금강경>은 아상(我相)을 없애는 가르침,
<법화경>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입장과 상황을 잘 생각해서 그에 맞는 가르침을
선택해 꾸준히 공부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필자는 단연코 <화엄경>을 권한다.
<화엄경>이야말로 종합비타민 같은 경전이다.
<화엄경>의 엑기스라 할 수 있는 「용수 보살 약찬게」만 놓고 보더라도,
삼신불(三身佛)로부터 시작해서 문수, 보현, 관음, 미륵보살은
물론 수많은 보살과 성문, 그리고 39위(位) 신중에 이르기까지
사부대중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또한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들 중에는 비구, 비구니는 물론
심지어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렴족왕 내지는
사창가 여인인 바수밀과 이교도들까지 포함돼 있다.
이 세상에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는 없다.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면 그뿐이다.」 - 월호 스님
<화엄경>은 부처님 자내증(自內證)의 세계,
깨달음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화엄경>의 구성을 보면, 처음 부처님의 자내증(自內證) 경계가 펼쳐진다.
이어서 중생이 청정한 신심으로 발심하여 보리심에 의한 보살도가 전개되고,
구경에 수행으로 도달한 깨달음의 세계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전 과정이 선지식을 두루 역참(歷參) 편역(遍歷)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의 해탈여정으로 다시 한 번 펼쳐지는 것이다.
10. 끝으로 <화엄경>에 대한 찬탄이다.
<화엄경>을 찬탄한 글에는
<대방광불화엄경 왕복서 (大方廣佛華嚴經 往復序)>라는 글이 있다.
중국 당나라시대 청량(淸凉 澄觀, 738~839) 국사가
오대산에 주석하면서 <화엄경> 연구를 깊이 했고,
<화엄경소(華嚴經疏)>라고도 불리는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를 편찬하면서
그 서문에 <화엄경>의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그 첫 구절이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로 시작하기 때문에
통칭 <왕복서>라고 부른다.
이 글과 쌍벽을 이루는 서문으로는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서문인 함허(涵虛得通, 1376~1433) 스님의 <일물서(一物序)>가 있다.
선(禪)의 기운이 빛나는 <일물서>는 그 시작이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로 됐기 때문에 통칭 <일물서>라고 한다.
함허 스님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우리나라 스님으로
깨달음의 안목이나 글도 뛰어난 분이다.
<왕복서>나 <일물서>는 모두 뛰어난 글이지만 <왕복서>를 더 명문으로 친다.
<왕복서>는 불교 최고의 안목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법계의 내용이 이러한데,
<화엄경>은 그 깊고 오묘한 이치를 이렇게 밝혔다’고 하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안목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이 세상을 누가 무엇을 통해서 표현했는지,
그를 통해서 우리 중생들에게 깨우쳐 준 것은 무엇인지 하는
깊은 내용들이 샅샅이 밝혀져 있다.
그러한 내용들은 모두 <화엄경> 안에 숨어있는 내용들이다.
<화엄경>이 경전이다 보니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왕복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딱 부러지게 집어서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 <왕복서>에 화엄경을 평하기를,
「부열현미(剖裂玄微)하고, 소확심경(昭廓心境)하며,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철과해인(徹果該因)하며,
왕양충융(汪洋冲融)하고 광대실비자(廣大悉備者)는
기유대방광불화엄경언(其唯大方廣佛華嚴經焉)」이라 했다.
유현하고 미묘한 내용을 분석하고 나누었으며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었으며,
이치를 다 드러내고 본성을 다 표현해
결과에 사무치고 원인을 갖추었으며,
깊고 넓고 가득해 넘치며 심원하고 융성하고
넓고 커서 모두 다 갖춘 것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열현미(剖裂玄微)라,
아무리 미세한 것도, 다 낱낱이 분석하고 나누었다.
얼마나 미세하게 나누었는지 숨이 막힐 정도가 <화엄경>이다.
어떤 미세한 설명도 <화엄경>의 설명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소확심경(昭廓心境)이라, 마음과 경계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 세상을 둘로 나누면 우리 주관적인 마음과 마음 이외의 모든 것 경계이다.
법계라고 하면 그것이 다 포함되지만 또 세분화해서
둘로 나누어 보자면 우리 마음하고 경계이다. 그것 밖에 없다.
전부 내 마음이든지 아니면 경계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 관계를 너무나도 자세하게 잘 쪼게 놨다.
정말 환하게 비추어서 설명해 놓은 것이 <화엄경>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