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운(鄭世雲)은 광주(光州) 장택현(長澤縣)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을 따라서 원(元)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으며, 벼슬을 거듭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의 공로를 기려 1등 공신으로 삼았고 김용(金鏞)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김남득(金南得)이 홀적(忽赤, 코르치) 중랑장(中郞將) 정곡(鄭谷)에게 매를 쳐서 욕보이자 정곡의 동료인 권석화(權石和) 등이 왕에게 호소하였다. 정세운과 김용이 김남득과 친하였으므로 왕에게 부탁하여 권석화 등에게 매를 치고 해도(海島)로 유배 보냈다. 또 김용과 함께 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임군보(任君輔)를 총애하는 것을 시기하여 참소하고 거짓으로 왕의 교지를 전하여 제주(濟州)로 유배 보냈다. 〈이후〉 군부판서(軍簿判書)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역임하였고 기철(奇轍)을 처형한 공로를 기려 1등 공신이 되었다.
〈공민왕〉 8년(1359)에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로 삼았다. 〈정세운이〉 황주(黃州)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적이 서경에 들어가 땔나무를 쌓고 성(城)을 수리하여 진격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이니 원컨대 놀라게 하거나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전임되었는데, 왜적이 양광도(楊廣道)를 침략하자 경성(京城)에 계엄을 내리고 백관들로 하여금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간관(諫官)들이 왕궁(王宮)에 나아가 사직하니 정세운이 말하기를, “간관이 종군한다는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한 일이니 나라의 체통이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명령하여 종군을 면하게 하였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하자 왕이 복주(福州)로 피난 갔는데, 정세운이 추밀 겸 응양군상장군(樞密 兼 鷹揚軍上將軍)으로 호종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렴했으며 밤낮으로 걱정하고 분개하면서 적을 소탕하여 경성을 회복하겠다고 자임하니 왕도 역시 의지하고 믿었다. 정세운이 여러 번 청하기를, “빨리 애통하다는 교서(敎書)를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사신을 보내어 여러 도(道)의 군사들을 독려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마침내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교서를 내리기를,
“천하가 안정되면 재상(宰相)에게 뜻을 두고 천하가 위태로우면 장수에게 뜻을 둔다고 하였다. 오로지 시세(時勢)의 경중(輕重)이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태조(太祖)께서 일찍이 창업(創業)을 하시고 역대의 성군들이 〈왕위를〉 서로 계승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과인에 이르러 안일에 빠져 군사의 일을 폐하고 강구하지 않았으므로 홍건적의 침범이 일어나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종묘사직을 생각할 때마다 애통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제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군사를 합하여 적을 치려고 하니, 이에 정세운에게 절월(節鉞)을 주니 가서 군사를 독려하며 명령을 듣는 자에게 상을 주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벌을 주도록 하라. 각처의 군관과 군인이 감히 고의로 통제를 어기거나 위계를 뛰어넘어 보고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軍法)으로 처리할 것을 허락한다.
아아! 출정하는 군사를 군율로 통제하는 것은 나라가 마땅히 먼저 할 바이며, 나라를 위해 집을 잊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오직 너희 군사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살필지어다.”라고 하였다.
정세운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분연히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매우 한미하여 나와 같은 사람이 재상(宰相)이 되었으니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죽령(竹嶺) 이남에 사는 사람으로서 어가를 따라간 자는 양식을 주지 말고 모두 종군하게 한다는 논의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어찌 그리 하지 않는가? 이러한 기강으로 어찌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숙(柳淑)에게 말하기를, “나는 내일 출정할 것이니, 공은 가서 군사를 검열하시오.”라고 하니 유숙이 말하기를, “여러 군사가 이미 죽령(竹嶺)의 대원(大院)에 이르렀소.”라고 하였다. 정세운이 말하기를, “군사가 만약 기일을 넘기면 공도 역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자 유숙이 즉시 가서 군사를 독촉하였다. 또 김용(金鏞)에게 말하기를, “지금 두 분의 재상께서 이와 같이 적을 구경만 하니 누가 본받지 않겠소? 만약 적을 섬멸하지 못하면 비록 산골에 도망하여 숨더라도 어찌 살 수 있을 것이며, 어찌 나라를 구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수시중(守侍中) 이암(李嵒)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난입하여 임금과 신하들이 피난을 떠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삼한(三韓)의 수치입니다. 그러나 공이 먼저 대의(大義)를 선창하여 부월(斧鉞)을 잡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사직(社稷)이 다시 안정되고 왕업(王業)이 중흥하는 것은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오직 공께서는 힘을 다해주십시오.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이 개선하여 돌아오기만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정세운이 출정하려 하니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승진시켰는데, 그 지위가 2상(相)과 3재(宰)의 사이에 있었다.
왕이 우달적(亏達赤, 우다치) 권천우(權天祐)를 보내어 의복과 술을 하사하자 정세운이 부쳐 아뢰기를, “여러 장수들 가운데 적을 잡았다고 보고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먼저 상을 의논하지 마십시오. 신은 비록 적을 잡았더라도 감히 자주 보고하여 역기(驛騎)를 번거롭게 하지 않겠으며 큰 전투를 치른 후에 장계를 갖추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서경사람 고경(高敬)이 군영 앞에 와서 말하기를, “서경부의 민(民)들 가운데 적으로부터 탈출한 자가 무려 1만 명이나 되니 장수를 보내어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정세운이 크게 기뻐하며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순(李珣)을 보내어 가서 그들을 위로하게 하고 경성으로 가도록 독려하였다.
〈공민왕〉 11년(1362)에 정세운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경성(京城)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물러나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적을 평정하자 대장군 김한귀(金漢貴)과 중랑장(中郞將) 김경(金景)을 보내어 승리를 알리는 글[露布]을 받들고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게 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일찍이 세상을 구제할 마음을 품으시고 널리 인재[俊彦]를 구하셨는데, 〈신은〉 군무를 맡으라는 명령을 삼가 받들고서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흥하고 쇠함은 운수에 달렸고 다스리고 어지러움은 다함이 없으며, 민(民)을 편안하게 하는 요점은 적을 막는 것이 〈가장〉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왕(太王)이 빈(邠)의 땅을 떠난 것은 적인(狄人)의 침략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고, 명황(明皇)이 촉(蜀)으로 행차한 것은 갈구(猲狗)의 침략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미(赤眉)를 소탕하여 유씨(劉氏)의 한(漢)이 중흥하고 황건적(黃巾賊)을 쳐부수어 조조(曹操)의 위(魏)가 정통을 계승한 것은 모두 오직 시운(時運)이었으며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에 천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적을 만났는데, 그 방자하고 독하기를 논하자면 승냥이나 범이라도 그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이 군사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역시 손무(孫武)나 오기(吳起)라고 하더라도 막기 어려웠을 것이니, 나날이 방자해져서 세상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이미 천하를 횡행하다가 멀리 와서 우리나라로 곧 들어오니 마침내 크게 떨쳤습니다. 성난 칼끝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풍문만 듣고도 모두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백만의 정예병이 갑자기 도성(都城)에 주둔하니 수많은 민들이 길바닥에서 흩어져 떠돌게 되었습니다. 아아!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것보다 심한 고통을 받았고 하물며 〈전하께서도〉 수레를 타고 멀리 떠나시니 실로 장수와 재상들이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드디어 구름처럼 모인 군사들을 일으켜 개미떼 같이 모여든 오랑캐를 공격하였는데, 사졸들은 물이 쏟아지는 것과 같은 기세를 탔으니 적에게 나아가기가 어찌 어려웠겠습니까? 완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혼백이 쪼개지는 대나무처럼 칼을 맞고 갑자기 흩어져버렸습니다. 천하에서 제압할 수 없었던 자들을 제압하였고 온 세상도 벨 수 없었던 자들을 베어버리니, 〈적들은〉 솥 안에 든 물고기와 그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토끼였습니다. 전단(田單)의 어느 기이한 책략을 무엇 하러 본받겠습니까? 제갈량(諸葛亮)의 8진(陣)이라야 스승으로 삼을 만합니다. 눈을 밟고 성(城)에 들어간 이소(李愬)가 채주(蔡州)의 땅을 취하였으며, 물을 등지고 진(陣)을 친 한신(韓信)이 조벽(趙壁)의 깃발을 빼앗았는데, 사건은 비록 같지 않으나 의로운 점에서는 진실로 같습니다. 지난 기해년(己亥年, 1359)에 군사를 모아 일찍이 조선(朝鮮)에서 적을 소탕하고 재차 적의 강력한 침략을 이겨낸 것은 모두 신 등의 공적이 아니라 이 모두가 삼가 전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하늘이 내리셨고 성스러움과 공경함은 나날이 올라갔습니다. 아름다운 풍속이 멀리까지 전파되어 3대(三代)의 예악(禮樂)을 따랐으며, 문덕(文德)을 널리 펼치시니 두 섬돌에서 문무(文武)의 춤을 추었습니다. 불효자[梟獍]를 길들이고 하찮은 자[犬羊]들을 복종시킨 것은 성스러운 교화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고 또한 모두 지극한 인덕에 국한됩니다. 자연의 이치는 막혔다가 다시 통하는 법이니 이것이야말로 중흥할 때이고 진실로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신 등이 감히 다투어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을 떨쳐서 조정을 맑고 밝게 하여 손뼉 치는 정성을 펼치지 않겠습니까? 행재소(行在所)를 우두커니 멀리서 바라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김한귀에게 황금(黃金) 25량과 비단 2필을, 김경에게 비단 2필을 하사하였고 곧 내첨사(內詹事) 이대두리(李大豆里)를 보내어 정세운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하였으며, 태후(太后)와 공주(公主) 역시 의복과 술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에 안우(安祐) 등에게 살해되니 홍언박(洪彦博)이 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총병(摠兵)이 출정할 때 말과 태도가 매우 오만하였으니 그것은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으며, 또 〈왕을〉 호종하고 〈경성을〉 수복한 공로를 추록(追錄)하여 모두 1등 공신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