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1921 ~ 1968)
시인. 본관은 김해.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지주였던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43년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교원생활도 하였으며 연극운동도 했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년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하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는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뒤 미군통역생활도 하고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으나,
1956년 이후부터는 시작과 번역에만 전념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은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 藝術部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뒤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임호권(林虎權)·양병식(梁炳植)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이때의 시들은 〈공자의 생활난〉(1945)·〈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1947)·〈아메리카타임지〉
(1947)·〈웃음〉(1948)·〈이 蝨〉(1947)·〈토끼〉(1949) 등이 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으나, 서구사조를
뒤쫓는 일시적이고 시사적인 유행성에 탐닉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전진로를 개척하려고 하였다
는 점에서 서구취향의 모더니스트의 자기극복과정을 보여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 《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 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수록된
대표적 작품들은 〈달나라의 장난〉(1953)·〈헬리콥터〉(1955)·〈병풍〉(1956)·〈눈〉(1957)·
〈폭포〉(1957) 등을 꼽을 수 있다.
1950년대의 지적 번민 속에서 성숙해온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의 4월의거이며, 여기서 그는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위한 혁명에서 시적
열정을 얻는다.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는 그로 하여금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이때의 대표작품으로 〈푸른 하늘을〉(1960)·〈후란넬저고리〉(1963)·〈강가에서〉(1964)·
〈거대(巨大)한 뿌리〉(1964)·〈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엔 카운터지(誌)〉(1966)·
〈풀〉(1968)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며
현실참여의 생경하지 않은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1958년 제1회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죽은 뒤 출판된 시집으로는 《거대한 뿌리》(1974)·《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와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퓨리턴의 초상》 등이 있다.
저서·역서로는 《20세기 문학평론》(柳玲·蘇斗永共著, 1953)·《카뮈의 사상과 문학》
(金鵬九共譯, 1958)·《현대문학의 영역》(Tate, A. 原著, 李相沃共譯, 1962) 등이 있다.
******2000년 9월의 문화인물 : 김수영 *****************
-선정배경
문화관광부는 1960년대 대표적 시인이며, 치열한 저항정신과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金洙暎 : 1921∼1968) 선생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김수영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현대시의 영역에서 시의 현대성을 가장 적극적이고
날카롭게 탐구한 시인이다. 그의 초기 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난해한 성향을 띠었으나, 4·19를 경험하면서 자유의 이념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 그리고 소시민적인 비애를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들을 발표했다.
김수영은 정치현실에 대한 문학의 실천적 책무를 강조하는 문학 경향을 선도한 시인
으로, 그리고 닫힌 사회와 맞섰던 비판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김수영의 시가 한국현대시에 미친 가장 결정적인 기여는 시와 삶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은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드러
내고 그 안에서 설움과 절망, 그리고 자유의 꿈을 노래하였다.
이러한 <시와 삶의 일치>라는 김수영 시의 중요한 성과는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
하는 문학 경향과 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시언어의 영역에서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노력이
시를 통해 동시에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 시인>인 김수영은 단순히 이념적인
차원이 아닌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실천하는 진정한 전위적 시인이었다.
1968년 그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시와 그의 문학적 표현들은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되었으며 '자유'는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문화관광부는 김수영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관련단체와 협조하여
연제백일장(9. 23, 부산 연제문화원), 김수영 문학평론 발간(9월중, 민음사) 등의 기념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생애 및 업적
김수영(金洙暎 : 1921∼1968), 1960년대 대표적 시인, 치열한 저항정신과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활약한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이다.
그는 한국 현대시의 영역에서 시의 현대성을 가장 적극적이고 날카롭게 탐구한 시인
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초기 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난해한 성향을 띄었다. 그러나 4·19를 경험하면서 그의 시는 자유의 이념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 그리고 소시민적인 비애를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들을 발표했다.
김수영의 시대는 혼란과 궁핍과 억압의 시대였다. 그는 식민지의 땅에 태어나 해방
직후의 이념적 혼란을 겪었고,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들며 6·25를 겪었다.
4·19를 통해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대면하려 했지만, 5·16 이후 다시 시작된 정치적
억압은 자유의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그의 싸움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을 궁핍과
방황과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문학적 투지로 자신의 문학공간을
넓혀 나갔다.
자유와 민주를 표방한 4·19의 정치적 이념과 김수영의 문학적 성취는 떼어놓을 수
없는 상관성을 가진다. 그래서 정치현실에 대한 문학의 실천적 책무를 강조하는 문학
경향을 선도한 시인으로, 그리고 닫힌 사회와 맞섰던 비판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김수영의 문학사적 업적은 단순히 그가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를 썼다는
문제에 한정될 수 없다.
김수영의 시가 그 이후의 한국현대시에 미친 가장 결정적인 기여의 하나는 시와 삶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가 나날의 일상적 생활의 공간 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 쓰여진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 생각은 그로 하여금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을 거절하고 기존의 서정시의 관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감한
실험을 하게 만들었다. 김수영은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설움과 절망, 그리고 자유의 꿈을 노래했으며, 이러한 시인 의식이 새로운 시형식을 열게
만들었다.
<시와 삶의 일치>라는 김수영 시의 중요한 성과는 시의 정신과 형식의 두 가지 방향
모두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로부터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문학 경향과
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시언어의 영역에서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노력이 동시에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수영을 <자유의 시인>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이념적인
차원의 지칭이 아니라,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실천하는 진정한 전위적 시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8년 그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시와 그의 문학적 표현들은 해방
이후의 한국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 김수영에 의해서
자유는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지금도 낯선 문학적 모험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준열한 정신의 척도로 남아 있다.
김수영의 대표시들
■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制壓(제압)하는
노고지리가 自由(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시인)의 말은 修訂(수정)되어야 한다.
自由(자유)를 위해서
飛翔(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自由(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革命(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강가에서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사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번 새벽에 한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샤쓰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같다가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
속돼간다 속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 6. 7>
■巨大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以北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一五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四年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强者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女史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一八九三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會員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無斷通行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내시, 外國人의 종놈, 宮吏들 뿐이었다 그리고
深夜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闊步하고 나선다는 이런 奇異한 慣習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天下를 호령한 閔妃는 한번도 장안外出을 하지 못했다고......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光化門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億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女史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와
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統一도 中立도 개좆이다
隱密도 深奧도 學究도 體面도 因習도 治安局
으로 가라 東洋拓殖會社, 日本領事館,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이 모든 無數한 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怪奇映畵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지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시 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 2. 3>
■참음은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十분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
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 하고
奇蹟을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1963. 12. 21>
■하…… 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敵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敵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惡漢이 아니다
그들은 善良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民主主義者를 假裝하고
자기들이 良民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選良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會社員이라고도 하고
電車를 타고 自動車를 타고
料理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雜談하고
同精하고 眞摯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原稿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海邊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散步도 하고
映畵館에도 가고
愛嬌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戰線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延禧高地도 아니다
우리들의 戰線은 地圖冊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職場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洞里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焦土作戰이나
[건 힐의 昊齒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歡談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土木工事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市場에 가서 비린 생선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戀愛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
授業을 할 때도 退勤時에도
싸일렌소리에 時計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있다
民主主義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民主主義式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民主主義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다……
아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 그래 ……
응응…… 응 …… 뭐?
아 그래 …… 그래 그래.
<1960. 4. 3>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 10. 5>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이 시의 구조와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의 변형 반복으로
되어 있다. 반복을 통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점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반복은 시의 내용과 형식에서 각각 의미의 선명성과 외형적 운율을 확보해 준다. 아울러 눈과
기침(가래)의 대조를 통한 상징적 의미의 해석은 이 시를 이해하는 데 열쇠를 제공해 준다.
제1연은 읽는 이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면서 첫 구절이 시작된다. '눈은 살아 있다.' 그것도 떨어지는
눈이 아닌 '떨어진' 눈이요,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 1연만 가지고 눈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가 전통적으로 느껴온 '눈'의 서정적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곧, 눈을 살아 있는 존재, 순수한 생명적 존재로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제2연은 설상가상이다. 갑자기 '기침을 하자'니, 그것도 눈에 대고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고 젊은 시인에게 권유한다. 이 웬 권유인가? 그러나 잠시 살펴 보면 곧 실마리가
풀린다. 곧, 우리는 '눈'과 '기침'의 대비를 발견할 수 있다. '눈 위에 대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라'는
말로 볼 때, 젊은 시인은 평소 마음 놓고 기침을 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침은 다른
상징적 의미가 있을 것이요, 눈 또한 그럴 것이다. 그렇다. '기침'은 우리가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가지게 된 소시민성, 불순한 일상성, 속물성을 뜻하며, '기침을 하자'는 것은 그것들을 토해 내자는
의미이다. 그 반대 편의 눈은 순수성, 비속물성, 영원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제3연은 제1연의 반복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눈은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잊어버린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일상에 더럽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죽음을 초월한
순수하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이 있는 자에게만 눈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제4연은 제2연의 되풀이다. 기침을 하다 보면 '가래'가 나온다. 가장 순수해야 할 젊은 시인은
이미 가래가 가득하다. 곧 소시민성, 불순한 일상성, 속물성이 가득한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
불순한 것들을 속시원히 내뱉자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눈의 순수성, 비속물성, 영원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더러운 일상성을 씻어
내라는 권유를 하고 있다. 눈과 기침(가래)의 대비를 통한 고도의 상징적 수법과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돋보인다. 눈을 제재로 하여 순수한 삶에의 의지를 표현한 주지시이다.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都會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라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機 壁畵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運命과 使命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數千年前의 聖人과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꽃잎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革命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1967. 5. 2>
**김수영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나의 시에 대한 사유(思惟)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족탑을 생각해 볼 때, 시의 탐침(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시작상(詩作上)으로는 그러한
명석(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는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이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의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 ----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 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미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 ----속칭 <시평>이나 <시론>을 쓰게 된 것은 ----ㅡ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의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시를 논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제1의적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大地)의 은폐> 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엇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엘리엇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시이 음악」의 끝머리에서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라는 말로 <의미>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을 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적(侵攻的)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정예화(精銳化) ----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
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睡眠)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도,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 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起點)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이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 ----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이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과격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또한 국민들이 그들의<보수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간극(間隙)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 설사 그 사람이 다만 기인(奇人)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 얼간이들이 자유당 때하고만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이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 커녕 막걸리를 먹으로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 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서방측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군거(群居)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종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지적(知的) 일치를 시민들
에게 강요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아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에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1968.4>
*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이다.
**김수영의 시비는
북한산 국립공원 안에 호젓이 서 있다. 도봉산 매표소에서 1Km 정도 오르면 보이는 시비에는 시인의
초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의 대표시 <풀>이 새겨져 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시 <풀> 중에서-
시인은 이 시를 완성한 보름 후에 귀가 도중 좌석버스에 치여 숨을 거두었다. 죽음의 운명이 그를 무덤으로
앗아갔지만 역사의 운명은 그를 영원히 살아 숨쉬게 했다.그러기에 고통받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표현한 이 시는 산을 오르내리는 이들에게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찾아가는길: 지하철 1호선 의정부행 또는 북의정부행을 타고 도봉산역에서 내려 북한산국립공원쪽으로
나가면 됨.
** 보다 더 많은 자료를 보실려면
http://my.dreamwiz.com/28blue/home.htm 로 가 보셔요.
내일 시몰이 하시는 날이군요.
얼마전 못가는 분풀이로 자료를 찾아 읽어본 것들입니다.
혼자보고 두기에 아까워서 자료실이 올려두었다가
다시 올려봅니다.
제겐 너무 어려운 김수영 시인을, 시를 이해해 보려고
아직도 노력 중입니다. *^^*
전향드림
첫댓글 한때 생활을 위해, 등록금을 위해 팽이끈 대신 곤도라 밧줄 매던 그 시절. 김수영 시인의 "달나라의 장난"을 베껴 쓴 종이를 지갑에 넣고 다니며 외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정성껏 올려주신 자료에 아울러 지난 기억 되뇌이며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어,,,1987년 봄 도봉산 에 김수영 옛집에 간적이 있어요 거기에 시비가 있었는데 그게 언제 국립공원이 되었지요? 밤꽃냄새가 진동하던 때 였는데 ,,,너무 오래된 기억인가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