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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베스트셀러 트렌드, 고독(孤獨) [나홀로 시대 살아가기]
ysoo 추천 0 조회 28 16.07.03 10: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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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나홀로 시대 살아가기]

떠나라, 장터에서 향하라, 바람 찬 광야로


베스트셀러 트렌드, 孤獨




고독하다는 건, 현대인이 고독하다는 건 혼자 있고 싶다는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겠다. 촘촘하게 잘 짜여 있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굴러가지만, 생각을 허용치 않을 정도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감옥 같은 일상에서, 그 삶을 물들이고 있는 경쟁 혹은 싸움에서, 질시 혹은 분노로 가득한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그런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위축돼 있는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 진짜 고독이 필요하겠다.

당신은 진짜 고독의 힘을 아는가.

로드 매퀸이 읊조리듯 부른 노래 중에 ‘고독은 나의 집’이 있다.

“고독은 나의 집,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네….”

노래를 듣다 보면 고독으로 힘이 붙은 음유시인의 향기가 난다. 고독의 집에서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힘을 얻고, 인연을 긍정하는 힘을 얻은 자의 그리움 같은 것!


그렇게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 ‘나’를 만나는 시간으로 힘이 붙은 사람은 고독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고독하고 싶다고 투정하는 건 고독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함께 살기 싫다는 것이고,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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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 도망가고 싶은 未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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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상처가 많아서 의외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내가 아는 것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아무래도 고단한 세상살이 때문 같다.

“공부 좀 해라…” “엄마 친구 딸은…”

“그렇게 놀다간…” “점수가 이게 뭐냐…”

이렇게 우리는 어릴 적부터 숱하게 비교당하고, 평가당했다. 그렇게 ‘지적질’당하는 사이 상처 입은 자존감이 회복될 틈도 없이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내던져져 열정만큼 다치고 꿈만큼 짓밟히고 나면, 남는 것은 후회와 체념, 쌓이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게다가 엄청난 성공을 일군 또래의 인생들을 보고 또 보다 보면 힘이 쭉 빠진다. 이름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나’의 인생이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평생 고용이 사라진 시대 아닌가. 3포 세대, 7포 세대를 거쳐 마침내 n포 세대에 이른 시대의 핵심은 ‘미생(未生)’이다. 기업은 미생으로 굴러가면서 얄밉게도 미생을 완생으로 만들어주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에 미생으로 살다 보면 밟히게 돼 있다. 내가 속한 조직은 내 꿈을 실현할 장이 아니라 내 의욕을 꺾고 내 길을 막고 서 있는 장애물이다. 그러니 도망가고 싶다, 차라리 혼자 있고 싶다는 노래가 일상의 독백이 된 것이다.


그럼 점에서 현대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이다. 기술의 ‘끝판왕’이긴 하나 숨이 막히고, 스스로 완벽을 주장하는 만큼 인간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은 위압적인 구조다. 빠져나올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생존의 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미생들에게는 그만큼 위협적이어서 그렇게 목숨 부지하고 사는 것도 다행이라 믿게 만드는 이상한 틀이다.


현대의 갑은 그 미궁의 염라대왕 격인 미노타우로스며, 현대의 을은 그 미궁에 갇힌 제물이다. 그러니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사람의 고독은 고독이라기보다 두려움 혹은 막막함이고, 미노타우로스의 고독은 고립이겠다.


문제가 있는 곳엔 답이 있다. 문제에 짓눌려 답을 찾지 못할 뿐. 이 미궁을 벗어나야 하는 우리 속에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풀며 스스로 미궁으로 걸어 들어온 영웅 테세우스가 있다.

무엇이 테세우스가 쥔 아리아드네의 실일까. 나는 그 실마리가 ‘고독’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미움이라는 놈이 찾아와 분노의 불을 지피며 당신을 고통의 화택(火宅)으로 만들 때, 물이 끓듯 화가 끓고 기름이 끓듯 속이 들끓을 때 어떻게 하는가. 불편하고 역겨운 사람과 상황을 그저 꾹, 참고 견디는가, 아니면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며 맞서 싸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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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대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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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만의 공간으로, 나만의 동굴로, 침묵으로 도망간다.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만나면 만날수록 오해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불신만 부풀어 오른다. 만나서 풀리지 않을 때, 만날수록 얽히기만 할 때는 ‘대범’을 가장하고 만나는 것보다는 그릇의 작음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대와 평판으로부터, 윤리와 의무로부터, 사람과 소문으로부터, 심지어 사랑으로부터도. 완전히 혼자가 돼 마침내 내가 나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 그 시간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그 고독의 시간은 홀로 코카서스 산 절벽을 견디는 프로메테우스의 시간이다.


제우스의 벼락에서, 혹은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씨를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죄로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 절벽에 묶였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죄를 물은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심연이 아득한 절체절명의 절벽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그런 그에게 제우스의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간을 겨냥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뜯긴다. 하루 종일 뜯긴 간은 밤새 다시 살아나고, 싱싱해진 간은 다음 날 또 독수리의 먹이가 된다. 프로메테우스는 3000년을 그렇게 지냈단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아니라 3000년 동안의 고독이다.


고대 예언자들은 짐승들의 간을 보고 점을 쳤다. 모두모두 연결돼 있는 세상에서 공동체에,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를 알리는 징조가 간 속에 있었다. 그만큼 간은 영혼의 장기였다. 그 간을 내준다는 것은 생명을 내준다는 것이겠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자기를 던져 불을 전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아는 자’라는 뜻이다. 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지 몰랐을 리 없다. 그 대가가 3000년 동안의 고독이었으니. 그럼에도 그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에게 불을 전한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자기와 닮은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고 알고,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였다는 뜻이겠다. 인간 대부분은 자신을 보지 않고 자기 바깥 세상만 본다. 바깥 세상에 끌려만 다니니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일상이고,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으니 자존감이 생길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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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하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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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스트셀러의 공통점은 ‘고독’이다. [YES24]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불이었다. 생명의 불이었다. 불은 생명이었다. 신화를 사랑하는 독일 시인 구스타프 슈바브가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땅에 하늘의 씨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 하늘의 씨를 보살피기 위해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의 불씨를 훔쳐 인간에게 주고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코카서스 산의 절벽을 고독하게 견뎠다.


사랑하는 자는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다.

독수리에게 매일 당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독수리에게 쪼이고 먹힌 간이 매일 밤 부활해 그에게 힘을 준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밤, 그의 고독이고 고독의 힘이다. 자기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빌지 않고 구걸하지 않고 제우스를 탓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도 않는다.


남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한순간, 어느 한 시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 탓하고 비난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성격이 된 사람들이 있다. 제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미련과 억울함이 그를 휘어감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미련에 시달리는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한탄 아니면 남 탓을 하는 것이다.


고독할 줄 모르는 그는 외로움에도 시달린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그 사람에게 기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눅 든 하인·하녀들이거나 폭탄 같은 그와 싸우지도 못하고 그를 버리지 못하는 착한 가족들밖에 없다.

문제는 그가 그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프로메테우스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한탄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는다. 고독이 ‘나’의 집인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시선 위에 세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줄 알지만,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애석해하지 않으며 자기 길을 갈 줄 안다.

남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존중하고 축복해줄 줄 알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존재 자체를 사랑할 줄 알고 축복할 줄 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니체는 델포이 격언의 “너 자신을 알라”를 들어 그리스인들의 가장 큰 긍지는 자기 자신의 탐색과 탐구라고 했다.

니체가 안타까워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탐구하고 탐색하기 위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권한 것이 바로 ‘고독’이다.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독파리떼에 물려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달아나라.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하찮은 자들과 가엾은 자들을 너무 가까이에 두고 있다.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앙갚음에서 벗어나라! 저들이 네게 일삼는 것은 앙갚음뿐이니.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파리채가 되는 것, 그것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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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광야로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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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은 광야다. 광야는 시끌벅적한 곳이 아니라 사나운 곳이고 위험한 곳이며 무엇보다 고독한 곳이다. 고독한 광야와 대비되는 시끌벅적한 곳은 장터다.

니체에 따르면 장터는 “성대하게 차려입고 요란을 떠는 어릿광대로 가득”한 곳이다. 그 장터에서는 ‘자기성찰’이라는 위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창조하려 하는 자는 거센 바람이 부는 광야의 고독 속으로 홀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을 아끼지 않고 실적이 미미하면 폐기처분하는 사회,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 모두들 돈 버는 기계로 내모나 제대로 돈도 벌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겐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니체의 광야, 성자의 동굴이 필요하다.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울고 싶으면 울어야 한다.


고독이 ‘나’의 집이 된 사람, 고독 속에서 편안해진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기 삶을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자기 존재가, 누군가가 자리를 허락해줘야 자리가 생기는 하인이나 하녀가 아님을 안다. 나는 나이며 나인 채로 좋은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굳이 의식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는 안다. 늘 자기 문제로 골똘한 그들도 의외로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그런 그들이 한 마디, 두 마디 한 것을 마음에 품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겠다.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굴러가는 세상을 극복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단순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화장 지우고 넥타이 푸는 시간을 늘리고,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시간을 늘리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시간을 늘려보자.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시간,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은 공간을 허락해야 한다. 내 답답함을, 내 외로움을, 내 상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삶의 실타래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도록! 그 실타래야말로 미궁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실마리다.


시간이 없다고 한다. 우선 TV 보는 시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반으로, 그 이상으로 줄여보자. 의외로 ‘나’를 위한 시간이 있다.

무엇보다도 산책할 시간을 만들어보자.

가까운 공원을 걸어도 좋고 이방인의 심정으로 골목길을 걸어도 좋다. 산책이 좋은 것은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생각이 많다. 생각에 끌려다니고, 논리에 끌려다니고, 편견에 끌려다니는 것이 지성인 줄 안다.

아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건 자기 편견의 감옥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 머리를 비워야 몸에 힘이 생기고 머리를 비울 줄 알아야 머리도 힘이 생긴다.



이 주 향


● 1964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이화여대 석·박사(철학)

● 한국니체학회 이사, 동아일보 2기 독자위원

● 現 수원대 인문대 철학교수

● 저서 : ‘사랑이, 내게로 왔다’ ‘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 ‘현대 언어·심리철학의 쟁점들’ 등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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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고명섭


자신이 포세이돈의 아들이라 믿으며 자란 테세우스는 사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의 아들이었다. 테세우스는 자신이 포세이돈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시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와도 먼 친척관계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테세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를 만나러 가기 위해 아테네로 여행을 떠나고 많은 괴물, 악당들을 물리치며 아테네로 향한다. 이 책의 다른 주인공인 미노타우로스의 탄생 과정도 흥미있게 다루고 있다. 한때 그리스 신화가 굉장한 인기였었는데 그 때로 돌아가 그리스 신화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아테네에 도착한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의 먹잇감이 되어 크레타로 향하게 된다.

미노타우로스는 머리는 황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이었다. 그를 낳은 크레타의 왕과 왕비는 빠져나오기 힘든 미궁을 만들어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버린다.

그런 괴물로 비춰지는 미노타우로스를 없애기 위해 테세우스가 자발적으로 크레타로 가게 된 것이다.

미궁의 안으로 들어가게 된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실타래와 칼을 가지고 가게 되는데 실타래가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는 열쇠 였다.


끝이 없어 보이는 암흑속을 헤메는 테세우스는 혼자서 철학적인 생각에 빠져든다. 두려움에 빠져든 테세우스는 미궁 속에서 밀폐감이 커질 수록 무력감도 커졌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다.

죽음이 영원으로 가는 깊은 잠이라면 우리는 잠이 듦과 동시에 모든 것이 정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죽는다는 생각 까지도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다. 미궁은 죽음의 공포로 정작 죽음은 진짜로 죽기 전까지는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아는 것이 커질수록 죽음의 공포는 커진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진시황도 죽음이 두려워 불로초를 찾고 자신의 무덤에 수 많은 군인들을 만들어서 세운 것이 아닐까.


미궁을 헤맨 끝에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만나고 반인반수인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미노타우로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람을 먹으면서 그리움도 함께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노스 왕이 한 잘못을 자신이 받는 것을 고통스러워 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조금이나마 연민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해치우고 미궁을 빠져나간다.


미궁을 헤매는 테세우스의 모습을 보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삶과 같은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삶이라는 미궁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 예스 24




다이달로스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을 가지고 탈출한 미궁은 다이달로스라는 아주 솜씨 좋은 명장(名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수없이 꾸불꾸불한 복도와 굴곡을 가진 건물로서, 그것들은 서로 통해서 시작되는 곳이나 끝나는 곳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마이안드로스 강이 바다로 가는 도중에 굴곡하여, 때로는 앞으로 흐르다가 때로는 뒤로 역류하는 것과 같았다.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을 위해 이 미궁을 만들었는데, 후에 왕의 총애를 잃어 탑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그의 감옥으로부터 도망할 궁리를 했으나 해로로는 탈출할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왕은 모든 배를 엄중히 감시하여, 세밀한 검열을 하지 않고서는 하나도 출범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미노스는 육지와 바다를 지배할 수가 있으나, 공중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길을 택해 보겠다.'

 하고 다이달로스는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어린 아들 이카로스를 위하여 날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조그마한 깃털을 합치고, 점점 큰 것을 덧붙여서 날개의 표면이 점점 커져 갔다.

큰 털은 실로 잡아매고 작은 털은 밀초로 붙였다. 그리고 전체를 새의 날개처럼 가볍게 구부렸다. 아들 이카로스는 곁에 서서 바라보면서, 때로는 바람에 불려서 날아간 털을 주워 모으기 위해 쫓아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밀초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그의 부친의 일을 방해 했다.

마침내 작품이 완성되자 그 제작자가 날개를 흔드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공기를 쳐서 균형을 잡으니 몸이 공중에 머물렀다. 그는 아들에게도 날개를 달아 주고, 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마치 새가 그 어린 새끼를 높은 보금자리로부터 공중으로 유인하는 광경과 같았다. 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아들에게 말했다.


"이카로스야, 나는 네가 적당한 높이를 유지하기를 부탁한다. 왜냐 하면 너무 저공을 날면 습기가 날개를 무겁게 할 것이고, 너무 상공을 날면 태양의 열이 날개를 용해할 것이니까, 내 곁으로만 따라오면 안전할 것이다."


이런 교훈을 하면서 아들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 주고 있을 동안에 아버지의 얼굴은 눈물에 젖고 손은 떨렸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아들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날아 올라갔다. 그는 아들에게 뒤를 따르도록 격려하고 뒤를 돌아보며 아들이 날개를 조종하는 모습을 살폈다.


농부들은 일을 멈추고 그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양치기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놀랐고, 이와 같이 공중을 날 수 있는 사람은 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왼편으로는 사모스와 델로스의 섬을, 오른편으로는 레빈토스 섬을 통과했다. 그 때 소년은 기쁨에 겨워 아버지의 곁을 떠나서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그러자 불타는 태양은 날개를 고착시키고 있던 밀초를 녹였으므로 날개가 떨어졌다. 이카로스는 팔을 흔들었으나 공중에 몸을 뜨게 할 날개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짖었으나 그의 몸은 바다의 푸른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 후부터 이 바다는 이카로스 해(海)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이카로스야, 이카로스야, 이카로스야 어디 있느냐' 하고 울부짖었다.


마침내 그는 아들의 날개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기술을 한탄하면서 아들의 시체를 묻었으며, 아들을 기념하여 그 땅을 이카리아라고 불렀다.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시켈리아에 도착하여, 그 곳에다 아폴론(제우스와 레토의 아들. 태양, 예언, 의료, 화살, 음악 및 시의 신.)을 위하여 신전을 건립하고 그의 날개를 신에게 바치는 헌납물로 그 곳에 걸어 놓았다.


다이달로스는 자기의 업적에 의기 양양하여 자기에게 필적할 자는 세상에 하나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누이는 아들 페르딕스를 그에게 맡겨 기술을 배우게 했다. 페르딕스는 재주 있는 젊은이로서 놀랄 만한 재간을 나타냈다. 해안을 거닐면서 그는 물고기의 척추뼈를 주웠다. 그것을 모방하여 그는 철판을 손에 잡고 가장자리에 금을 내어 톱을 발명했다. 그는 또 두 개의 철편의 한 끝을 못으로 연결시키고 다른 끝을 뾰족하게 하여 콤파스를 만들었다.


다이달로스는 조카의 업적을 시기하여 어느 날 둘이 높은 탑 위에 있을 때 기회를 보아 조카를 떠밀어 추락시켰다. 그러나 재간을 사랑하는 아테나는 그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새로 변하게 하여―이 새는 그의 이름을 따서 페르딕스(메추라기과의 새)라 불렀다―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이 새는 보금자리를 수목 속에 짓지 않고, 높이 날지도 않고 울타리 속에 깃들이며 추락할까 염려하여 높은 곳을 피한다.

(출처 : 토마스 불핀치, '그리스·로마 신화')



테세우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Aegeus)'는 아들을 얻지 못해 델피 신전에 가서 신탁을 물었더니 "아테네 시로 돌아갈 때까지는 아예 술부대의 마개를 열지 말라"는 것이었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테네로 돌아오는 도중에 트로이젠(Troezen) 시에 들려 그 고장의 왕인 '피테우스(Pittheus)' 집에 잠시 묵게 되었다. 그는 그의 딸이 아이게우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아들을 낳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게우스를 술에 취하게 해 놓고 딸 '아이트라(Aethra)'와 동침케 했다.

아이게우스는 떠날 때 아이트라를 어느 큰 바위로 데리고 가더니, 만일 아들을 낳아 청년이 되어 이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되면 바위 밑에 넣어 둔 샌들과 칼을 가지고 아테네로 찾아와 자기의 뒤를 잇게 하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트라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테세우스이다. 건장한 청년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를 어느 커다란 바위로 데리고 가서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밝히면서 그 바위를 들어 올려 그 밑에서 칼과 샌들을 꺼내게 했다. 테세우스는 그의 어버지 아이게우스가 남겨 두고 간 배로 쉽게 아테네로 갈 수 있었지만 일부러 험난한 육로를 택하기로 했다. 도중에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된다.


처음에 에피다우로스(Epidauros)근처에서 '페리페테스(Periphetes)'라는 강도를 만났다.

이자는 다리 힘은 약하지만 팔 힘이 아주 세어 쇠곤봉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그의 재물을 약탈하는 강도였다. 코린토스 협곡에서 '시니스(Sinis)'라는 악한을 만났는데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다가 휘어놓은 소나무 가지 두 개에다 다리를 묶어 놓고는 그 소나무 가지를 튕겨 양다리를 찢어 죽이는 자이다.

메가라(Megara) 시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괴한 '스키이론(Sciron)'을 만났다.

이자는 스키이론 바위라는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불러 자기 발을 씻게 하고는 도중에 걷어차서 바다 속의 커다란 거북이 밥이 되게 하는 자이다.

또 이들 보다 더 흉악한, "늘어나게 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를 만났다. 이자는 길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데려다가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 집에는 길고, 짧은 침대 두 개가 있었다. 키가 큰 나그네는 짧은 침대에 재워 침대보다 큰 부분을 잘라 죽였고, 키가 작으면 긴 침대에 재워 침대 길이 만큼 잡아 늘여 죽었다. 테세우스는 그들이 남들에게 했던 방식으로 이들 모두를 처치하고 드디어 아테네 식에 도착했다.


이 무렵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이아손에게서 도창친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 왕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를 보는 순간 그가 아이게우스의 아들임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테세우스를 없앨 계략을 꾸몄다.

메데이아는 왕에게 테세우스는 왕위를 노리고 온 불온분자라고 중상하기 시작했다. 아이게우스 왕은 테세우스를 시험할 겸 마라톤 평가를 돌아다니며 온갖 행패를 부리는 마라톤의 황소를 잡아오도록 했다. 테세우스는 이 황소를 잡아다가 아테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번에는 황소를 잡은 공로를 치하하는 척 테세우스를 초대하여 술잔에 독약을 타 놓았다. 초대받은 자리에서 테세우스는 고기를 자르는 척하면서 칼을 뽑아 왕이 그 칼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왕은 그때서야 테세우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리고 독약이 든 술잔을 내던져 버리고 부자상봉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틈에 메데이아는 용이 끄는 차를 타고 아시아로 달아났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은 그의 아들이 아테네에서 죽은 것을 트집잡아 그 배상으로 9년마다 처녀 총각 각 7명씩을 바치도록 했다. 몸뚱이는 사람이고 머리는 황소인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에게 이 사람들을 먹이로 주려는 것이었다. 이 괴물은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 라비린토스에서 살고 있었다.


남녀들을 바쳐야 할 때가 되자 테세우스는 자청해서 이 무리에 끼었다. 미노스 왕이 다시는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없도록 괴물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아이게우스 왕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테세우스의 청을 끝내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 한 척을 내어 주면서 일이 잘 되어 돌아오면 흰 돛을, 잘못되면 검을 돛을 달고 오도록 했다.


테세우스가 미노스 왕의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는 첫눈에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되고 그를 도와 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미궁 라비린토스르 축조한 다이달로스에게서 실타래 하나를 얻어와 테세우스에게 주면서 입구에 실 끝을 메어 놓으면 다시 나올때는 그 실타래를 따라나오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미궁 속을 한참 들어가다가 잠들어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만났다. 그 괴물을 때려눕히고 같이 갔던 동료들과 함께 실타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와 결혼을 약속하고 낙소스 섬에까지 왔는데 사고 때문이었는지 혹은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를 낙소스 섬에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일설에는 그가 파이드라(Phaedra)를 사랑하게 되어 아리아드네를 버렸다고도 한다.)

그런데 아테네로 돌아올 때 흰돛을 달고 오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다. 배가 검은 돛을 달고 항구로 들어오는 것을 본 아이게우스 왕은 절망 끝에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이 바다를 아이가이 해(오늘날 에게 해)라 불렀다 한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어 각 지방의 대표들을 아테네로 모아 공동 의사당을 마련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대법정을 만드는 등 민주제도를 창설하였다. 그는 앞장서서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설사 적이라 할지라도 테에베 땅에 묻힐 수 있도록 했으며, 눈이 먼 채 쫓겨나 방랑하던 오이디푸스와도 친구가 되었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피로 더러워진 헤라클레스도 환영해 맞아 들였다.


테세우스는 호전적인 아마존 여족과 싸워서 여왕 '히폴리타(Hippolyta)'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 아들 '히폴리토스(Hippolytus)'를 낳았다. 이를 복수하기 위해 아마존 여족이 아테네를 침공하였는데, 여왕이 자기네 부족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하자 여왕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테세우스는 이러한 아마존 여족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한다.


'페이리토오스(Peirithous)'는 테세우스의 용맹과 기질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테세우스의 소떼를 습격했는데, 테세우스는 그의 모험심과 용맹이 마음에 들어 금방 친구가 되었다. 라피테스 족(Lapithes)의 두목인 페이리토오스는 그의 결혼식 때 테세우스는 물론 테살리아 지방의 깊은 산 속에 사는 마인족들도 초대하였다. 그런데 마인족들은 술이 취하자 신부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등 소란을 피웠다. 테세우스는 마인족들을 연회장에서 쫓아 버렸지만, 그 후 마인족들이 라피테스 족을 역습하여 라피테스 족은 결국 제고장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페이리토오스의 아내 히포다메이아가 죽자 페이리토오스는 테세우스와 함께 스파르타로 가서 헬렌을 납치해 오자고 했다. 헬렌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둘이서 제비를 뽑아 둘 중의 하나가 헬렌(Helen)을 아내로 삼기로 하고, 그 다음에는 나머지 한 사람의 신부를 구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헬렌이 성장하여 테세우스의 아내가 되자, 둘은 누구를 페이리토오스의 아내감으로 정할 것인가를 상의하고 있었는데, 이 때 제우스 신이 장난삼아 페르세포네는 어떻겠느냐고 했다. 이 둘은 그것 잘됐다 싶어 지하 망령세계의 왕인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를 납치하기로 했다.

하데스 왕은 이 둘을 환영하는 체하면서 의자를 권하고 앉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의자에 앉자 마자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의자는 <망각의 의자> 였다. 이 일이 있은 뒤 4년 후에 헤라클레스가 그의 열 두 번 째 시련으로 지옥문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Cerberus)를 잡으러 내려 왔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테세우스는 구출했지만 페이리토오스는 구출하지 못해 그는 아직도 죽음의 골짜기에 그대로 앉아 있다는 것이다.


이 무렵 헬렌의 오빠들인 카스토르(Caster)와 폴리데우케스(Polydeuces)가 그들의 동생 헬렌을 되찾아가 버렸기 때문에, 테세우스는 파이드라(Phaedra)와 재혼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테세우스의 아내 파이드가가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에게 연정을 품게 된 것이다. '히플리토스'는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를 섬기며 사냥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가 유혹을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이점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벌을 주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히폴리토스가 끝내 파이드라의 사랑을 거절하자 그녀는 히폴리토스가 그녀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메어 자살하고 말았다. 히폴리토스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소용이 없었다.

테세우스는 배은망덕한 아들을 추방해 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그의 아들을 죽여달라고 빌었다. 히폴리토스가 코린토스 지협에 이르렀을 때 포세이돈이 큰 파도를 몰아쳤다. 전차를 끌던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히폴리토스는 전차에서 떨어져 죽어 버렸다. 화가난 아르테미스 신이 테세우스에게 모든 진실을 밝혀 주었다. 그리하여 테세우스는 슬픔과 후회 속에서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게 되었다.


노인이 된 테세우스는 메네스테우스(Menestheus)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리코메데스(Lycomedes)를 찾아갔다. 그러나 리코미데스는 메네스테우스와 친한 사이였던지라 테세우스를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고 말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메네스테우스 왕이 죽자 테세우스의 유골을 찾아다 시내에 묻고 제사를 지냈다.



아리아드네의 실


테세우스는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구하고자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희생물로 나서서 크레타에 도착하여 미노스 왕으로 나갔고, 그 자리에서 왕의 딸인 아리아드네를 만나게 된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열애하여 다이달로스에게 미로를 탈출하는 방법을 알아, 그에게 미궁 속에 갇힌 괴물을 칼로 찌를 칼과 실 한 타래를 주어 결국 괴물을 참살하고 미궁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리아드네의 실로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읽어 보라.


우리는 전에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할 때,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도와 미궁(미궁)으로부터 탈출케 한 후, 테세우스와 같이 낙소스 섬에 왔었으나 배은망덕한 테세우스는 그녀가 잠든 사이에 그대로 그녀를 남겨 두고 혼자만 귀국길에 오른 이야기를 했다.

아리아드네는 잠이 깨어 버림받은 줄 알자 슬픔에 잠겼다.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가 상실한 인간의 애인 대신에 신을 애인으로 내려 줄 것을 약속했다.


아리아드네가 버림받은 곳은 디오뉘소스가 좋아하는 섬으로서, 티르레니아 선원들이 배반하여 그를 포박하였을 때,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던 곳도 다름아닌 이 섬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운명을 한탄하고 있을 때에 디오뉘소스는 그녀를 발견하고 위로하여 자기의 처로 삼았다. 그는 결혼선물로 그녀에게 보석으로 장식된 금관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금관을 손에 쥐고 공중으로 던졌다. 금관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 보석은 더욱 광휘를 발하여 별로 변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금관은 그 원형을 유지하면서 무릎을 꿇은 헤라클레스와 뱀을 쥐고 있는 그 부하 사이에서 한 성좌로서 하늘에 박혀졌다.  



/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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