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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제
서 정 인
1 철쭉제
차가 멎었다. 차장이 인월에 왔다고 소리쳤다. 차 안이 온통 술렁이고, 많은 승객들이 내렸다. 대부분 등산장비를 한 사람들이었다. 포장된 길가에 멈췄던 버스는 거의 비어서 곧 떠났다.
그들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길가 빈 터에서 울긋불긋 배낭들로 줄을 세워 놓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킬킬거리며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방금 내린 사람들이 그들에게로 다가가서 배낭들을 가리키며 도대체 무슨 열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그들끼리 얘기하던 자세 그대로,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게, 백무동으로 들어가는 차를 기다리는 열이라고 대답했다. 물어 본 사람들도 또한 백무동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는지도 몰랐다. 백무동 가는 버스는 삼십 분쯤 후에 있는 모양이었다. 새로 내린 사람들은 재빨리 그들의 배낭들로 열을 이었다. 그리고 그 열의 길이로 다음 차에 탈 수 있을지 없을지를 어림해 보면서, 고개를 가우뚱하고 입을 떡 벌렸다. 건물 모퉁이로부터 한 사내가 나타나서 차표를 끊으라고 소리쳤다. 그는 옷매무새가 허름하고 몸매가 가냘프고, 생김새가 다부진 데가 없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저항감이나 적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래된 친구에게라도 다가가듯 그에게로 다가가서, 부옇게 먼지 낀 장발의 그 삼십대 사내를 에워싸고, 차는 몇 분 후에 오며, 이 사람들이 다 탈 수 있으며, 혹 다 못 탄다면 그 다음 차는 또 몇 분쯤 있어야 오는지,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물었다.
그는 표를 끊어 주고, 받은 돈을 헤아리면서, 하나하나 착실히 대답을 했다. 이마에 두어 가닥 주름살들이 깊숙이 패어 있어서 그는 옷어도 찡그린 상이었지만, 전혀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진짜로 얼굴을 찡그린다 하더라도, 그가 얼굴을 찡그린 것이 아니라 웃음을 짓고 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웃는 것이 찡그린 것이라면, 찡그린 것이 웃는 것 아닌가. 그는 손님들에게 무제한으로 표를 끊어 주었고, 그들의 궁금증들을 모두 시원스럽게 풀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외경과 경이에 가까운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백무동행은 잠시 후에 올 차가 막차였다. 그리고 그 막차는 아마 함양에서부터 거의 만원이 될 모양이었다.
“얘, 마지막 버스를 못 타면 어떡허지? 여기셔 자니?”
“걸어가면 안 되니?”
“얘, 사십 리, 오십 리 길을 어떻게 걷니, 더구나 날도 금방 저물텐 데?”
“버스를 한 대 더 내준댔잖어? 표 끊는 사람은 다 태워다 준댔잖어?”
“얘, 걸 어떻게 믿니? 매표원 말을 어떻게 믿니?”
“한번 믿어 봐요. 매표원 말이 못 미더우면, 영업소장 말이라 하고 한번 믿어 봐요.”
두 처녀들의 이야기를 어깨 너머로 주워듣고, 표를 판 사내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거기까지 몇 시간 걸려요?”
매표원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던 처녀가 말했다. 그녀는 커다란 챙과 테만 있고 뚜껑이 없는 하얀 햇빛 가리개를 쓰고 있었다.
“한 시간 걸려요.”
영업소장이 대답했다. 그녀가 더 뭘 물어 보려 했지만, 그는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내 대신,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그녀의 친구에게 말했다. 그녀의 친구는 빨간 등산모를 쓰고 있었다.
“얘, 지금 들어가서 민박을 할 수 있으까?”
“지금 들어갈 수조차 없지 않어?”
“앤, 다음 차로 들어간다면 말이야.”
“막차가 빈 차로나 와주면 몰라도 우리 차례까지 오겠어?”
“차례가 안 오면, 다음 차 타지? 얘, 넌 꼭 막차를 놓치기를 바라는 거 같다?”
막버스는 예상대로 만원이었다. 비좁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대여섯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끼여든 다음, 차는 긴 배낭들의 열을 그대로 놔두고 곧 떠났다. 사람들은 영업소장에게 다음 차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이왕 올 거라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막차를 만원으로 출발시킬 때 동시에 출발시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불평을 했다. 그런 정도의 창조적인 두뇌도 없이 어떻게 돈벌이를 하자고 덤비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누가 돈 생기는 일을 마다하겠소? 돈 받고 손님 태워 주자고 회사 차린 것 아니요? 그 회사가 돈을 보고도 차를 못 낼 때는 다 이유가 있을 거요. 시간 외 증차운행을 했다가 적발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요? 물론 버스회사가 돈만 아는 건 아니요. 승객들의 편리도 생각해요. 그래서 한번 더 뛰겠다는 거 아니요? 이제 들어갔으니 조금 있으면 나올 거요.”
영업소장은 더 표 끊을 사람이 없는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야, 창조적이 되는 것도 힘드는구나, 치장 차리다가 신주 개 물려 보낸다더라. 하얀 차양의 아가씨가 말했다.
“얘, 관리들이 관청에 앉아서 상관 눈치 살피면서 자동차 바퀴 굴리는 것을 원격조종해야 되니? 자동차는 운수업자들이 굴리면 안 되니?”
“자동차를 운수업자들이 굴리지 누가 굴리니?”
“자동차 굴리는 것이 바퀴만 돌리면 되니? 언제, 그리고 어디서 돌려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 머릿 속에는 지푸라기만 들어 있니?”
“머릿속에 지푸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어디 그들뿐이니? 그들을 원격조종하는 관리들도 마찬가질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유도탄도 아닌 자동차를 원격조종하려 드니?”
빨간 등산모를 쓴 아가씨가 말했다. 하얀 차양모를 쓴 아가씨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법규가 그러는 거 아니니?”
“법규는 아무것도 하지 않어.” 빨간 등산모를 쓴 처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문제는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야. 법규는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와, 권익을 위해서 있을 거야, 아마. 막차를 놓친 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자는 것을 법규는 원치 않을 거야.”
“그럼, 법규를 해석하는 관리가 그것을 원하니?”
차양 모자를 쓴 처녀가 조금 비웃듯이 물었다. 그녀의 친구는 그녀의 웃음에는 아랑곳없이 정색을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럴 거야. 당장 눈에 안 보이니까. 머리가 지푸라기로 가득 찬 사람들이 눈앞에 없는 것을 볼 수 있겠니?”
“얘, 근데 이 자동차는 언제 오는 거니?”
“들어갔다 나오자면 두 시간쯤 안 걸리겠어?”
“그럼, 얘, 우리들은 세 시간 후, 밤중에 도착하겠다?”
“밤중이라도 오늘 중으로 들어만 가면 감삽지.”
“감사와? 누가? 우리가, 버스회사가?”
택시 한 대가 다가와서 길가에 멎었다. 차 안에는 뒷자리에 오십대의 남자와 삼십대의 여자가 간편한 차림새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운전수는 차의 동력을 걸어 놓은 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차창 밖으로 침을 찍찍 뱉으면서 담배만 뻑뻑 빨고 있었다.
“얘, 우리 택시 타고 들어갈까? 밤중에 들어가서 어떻게 민박 잡니?”
“밤중에 들어가서 못 잡을 민박이 지금 들어간다고 있겠니?”
“얘, 너 그 철학자 같은 소리는 실내에 국한했으면 좋겠어.”
“같은 얘기라고 할지 모르겠다만, 지금 들어가서 있을 민박이 밤중에 들어간다고 없겠니?”
“얘, 너 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할 수 없니? 택시를 타자는 거니, 버스를 기다리자는 거니?”
“택시를 타지 말자는 건 아니야. 가서 한번 물어나 봐. 어디 가는 택시인지도 아직 모르지 않니.”
“그래, 그게 좋겠다. 가서 한번 물어나 보자, 얘.”
하얀 모자를 쓴 아가씨가 차를 돌아서 운전수께로 갔다. 젊은 운전수는 담배 꽁초를 손가락끝으로 튕기고 침을 찍 뱉었다.
“이 차, 혹시 백무동 들어가요?”
“예, 들어가요. 타쇼.”
“얼마에요?”
“만 삼천 원인데, 이 두 분이 만 원 냈으니, 삼천 원만 내쇼.”
“막차가 오기 전엔 만 원이었는데.”
“내 차 다음 차는 만 오천 원 부를 거요.”
“좋아요. 둘 탈 수 있죠?”
“둘이요? 둘이면 사천 원 내야 되는데, 이천 원씩.”
“기사양반, 삼천 원에 태워 드려. 아가씨들이 무슨 돈이 있어?”
뒷자리의 중년 남자가 비스듬히 앉은 자세 그대로, 살찐 턱을 올렸다내렸다 하면서 말했다. 운전수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 유리를 향해서, “타쇼,”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무 대꾸 없이 그녀의 친구에게로 갔다.
“얘, 버스를 기다릴까?”
“왜, 안 간대니?”
“아니.”
“흥정이 안 됐니?”
“아니, 삼천 원에 둘 다 태워 주겠대.”
“그럼, 아까 일인당 이천오백 원보다 떨어졌구나.”
“그런데, 돈 내고 타는 우리가 고마워해야 되는 모양이야.”
“그야, 버스도 그랬잖니.”
“택시를 타자는 거니?”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얘, 가, 그럼.”
하얀 차양모자를 쓴 아가씨가 작은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차로 가서 앞자리에 탔다. 차는 형편없는 고물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몸매가 작은 여자가 빨간 등산모를 쓴 아가씨를 위해서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그 삼십대 여자 옆에 탔다. 차가 곧 떠났다.
“얘, 차표 내놔.”
앞자리에 앉은 처녀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물릴 거니?”
뒷자리의 처녀가 표 두 장을 꺼내 주며 말했다.
“지금 어떻게 물리니?”
그녀는 표 두 장을 받아서 미리 꺼내 쥐고 있던 천 원짜리 석 장과 함께 옆자리의 운전수에게 내밀었다.
“이거면 사천 원은 될 거요.”
운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리고 아무 표정 없이 그것을 받아 돈주머니에 넣었다.
차는 포장된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꺾어서 비포장 도로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계곡의 물줄기가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차는 녹이 슬고 삭아서 당장이라도 폭삭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머리통만씩한 바윗조각들이 뒹구는 움푹움푹 팬 길을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용케도 동력이 꺼지지 않고 잘 달렸다. 바위에 받혀서 공중으로 솟았다가 다음 순간에는 웅덩이로 곤두박질을 쳤고, 이쪽으로 기울어서 넘어지는가 싶으면 느닷없이 저쪽으로 홱 기울어서, 차 안에 탄 사람들은 영락없이 키질을 당했다. 챙이질을 할 때 챙이 밑을 손바닥으로 툭툭 쳐서 곡식 낟알들을 뒤엎는 것처럼, 차바닥 밑에서도, 텅, 텅, 하는 돌멩이 튀는 소리말고도, 차바닥이 튀어나온 길바닥 표면에 부딪칠 때마다, 턱, 턱,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린 승객들은 금방이라도 차가 요절이 나는가 싶어서 근심스럽게 운전수를 쳐다보았지만, 운전수는 천하태평이었다. 그가 앞을 향한 채 뭐라고 말했지만, 옆에 앉은 사람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마, 딴 차는 못 들어오고 그의 차만 들어올 수 있다는 자랑인 것 같았다.
뒷자리에 앉은 남자도 뭐라고 떠들어댔다. 그도 꽤 자랑할 것이 많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동행 여자는 그가 말할 때마다 백치처럼 킬킬거렸고, 빨간 등산모를 쓴 아가씨도 이따금씩 말대꾸를 해주었지만, 앞자리에 앉은 아가씨는 아예 그 이야기판에 끼여들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편히 앉아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계곡을 느긋하게 내다보았다. 길은 사차선이 되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아마 근래에 확장공사를 한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작업을 갓 마친 흔적들이 있었다. 전라도땅이 경상도땅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어디서 왔어?”
중년 사내가 말했다. 대만, 홍콩으로 동남아를 다녀왔다느니, 미국 시카고로 딸년한테 국제전화를 십 분간 했더니 통화료가 얼마 나왔다느니, 레코드 월 유지비가 얼마인데 이 차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라느니, 계속 지껄여댔지만, 처녀들에게, 특히 앞자리의 처녀에게 전혀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한 것을 깨닫고 그 사내가 직접 말을 걸어 왔다.
“우리요? 우린 말에요, 서울서 왔어요. 그리고 우린요, 학생들이 아니에요.”
빨간 둥산모를 쓴 아가씨가 앞자리의 하얀 해가리개 모자를 쓴 아가씨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 말했다. 앞자리의 아가씨는 이야기의 흐름이 갑자기 신변 가까이로 다가왔음을 느꼈는지 편안한 자세가 조금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 앞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집요함이 그녀의 신경이 사실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나는 장이요, 장사꾼 장. 이 친구는 마담 윤이고. 우린 지금 사랑의 도피행각 중이야. 돈은 있고, 할 일은 없고.”
윤여사가 옆구리를 찔렀지만, 장사꾼 장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선생님 술취하셨어요.” 빨간 모자의 아가씨가 느리게 말했다. “아까 길 건너 음식점에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는 것을 봤어요. 돈은 많고 할 일은 없고, 얼마나 좋아요? 대개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할 일이 많아지는 건데. 자선사업도 해야 되고. 천당을 가야 하니까. 모리도 해야 되고. 난 일주일 내내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보고 지내거든요.”
그녀는 그녀 자신의 앞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듣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우선, 상대방의 반응이나 기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다 할 수가 있었다.
“아가씨는 침착하게 치열하구만. 내 친구 중에는, 술에 취하면, 웃으면서 사람을 치는 애가 있지.”
“맞아요.” 앞자리에 앉은 처녀가, 중년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앤요, 철없이 철학적이어서 우리들이 철순이라고 불러요. 난 원래가 현애고요.”
“현애는 웃으면서 치지 말어. 칠 때는 화를 내야지.”
“맞아요. 나는 칠 때는 화를 내요. 나는 현실적이거든요.” 현애가 대답했다.
“나는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나는 철이 없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드니? 철학적인 사람치고 현명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현실적인 사람치고 철없지 않은 사람 없다는 생각이 너에게는 벅차니?” 철순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얘, 현명하게 현실적일 수는 없니, 마치 너가 철없이 철학적인 것처럼 현명하게 철학적이라거나, 철없이 현실적이라거나 하는 말은 아무 뜻이 없잖니?” 현애가 말했다.
“전혀 불필요한 동의어 반복이지. 그 분량만큼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지. 그에 비하면 현명하게 현실적이라거나 철없이 철학적이라는 말은 단순한 상태의 기술 이상이야. 내부의 갈등 자체가, 변증법 자체가, 강조되어, 두 가지 상반된 상태들이 동시에 파악되는 거 같어. 이건 불가능이지. 이 불가능은 상태의 기술에 실패했다는 얘기야. 원래 운동이란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니? 사람 사는 것은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이야.”
“그럼 너가 현명하게 현실적 할래, 내가 철순이 할게?”
“아가씨들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우리들이 뭣 하러 돈을 써가면서 여기까지 왔지? 골치아픈 거 잊자는 얘기 아냐? 제각기 잠시라도 잊고 싶은 것이 있을 거야. 나는 숫자놀음. 윤여사는 술놀음. 학생들은 공부놀음. 그래서 다들 산을 찾아온 거 아냐? 안 그래?”
장씨는 정말로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난데없이 꺼내서 마개를 따고 벌컥벌컥 마셨던 수통을 다시 꺼내 들고 또 몇 모금을 들이켰다. 수통은 군인들의 탄대 같은 띠에 매달려 있었다.
“취하셨어요,”라고 철순이가 말했다. “취했다는 것은 정신이 흐리다는 뜻이고, 정신이 흐리다는 것은 사고가 불확실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이죠.”
“그래서?” 장씨가 궁금하다는 듯이 재촉했다. 그리고 철순이가 잠시 말이 없자, 덧붙였다. “방금 마신 것이 술은 분명 술이지. 아까 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되 받아서 마시고 남은 거 담은 거니까.”
“뭘 잊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겠지요.” 철순이가 제 앞을 바라보고 말했다.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문맥에서,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어서 나온 거겠지요. 숫자놀이가 잊고 싶은 게 아니라, 숫자놀이하다가 맺어진 딴사람들과의 잘못된 관계, 또는 욕망대로 되지 않은 관계가 잊고 싶은 거죠. 그 딴사람들은 반드시 남들일 필요는 없죠. 부인, 딸, 아들, 동생, 조카, 친구, 아무나 될 수 있고, 여기 윤여사도 예외는 아니죠. 윤여사의 술장사, 실례 말씀이지만, 도 마찬가지죠. 윤여사는 술장사 일을 잊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르죠. 지금 윤여사는 엊저녁 외상거래의 상환예정시기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다만, 북적대는 서울의 복판에서 생각할 때와는 사뭇 다른 빛깔로 외상의 모습이 보이는 것에 다소 감탄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름다운 산속에서는 외상이 조금 초라한 꼴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대충 맞는 거 같아요.”
윤여사가 이마를 살짝 붉히고 말했다. 맞아서 붉히는 건지, 맞다고 인정을 해서 붉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순진한 것 같았다.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터지만.
“외상뿐이겠어? 대자연 속에서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외상뿐이겠느냐 말야.” 장씨가 소리 높여 말했다. 술이 도는 모양이었다. “외상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초라하게 보이는 판에 말야.”
철순이가 흠칠 놀랐다. 그녀가 말했다.
“외상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뇨?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뭐라고?”
“아니, 도대체,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어디 있어요?”
“무슨 소리야! 부인, 아들, 딸, 부모, 형제, 이런 것들이 외상보다 중요하지 않단 말야? 결혼, 이혼, 질병, 죽음, 이런 것들이 외상보다 중요하지 않단 말야?”
“돈 삼만 원 내놓으라고 육순 어머니한테 몽둥이찜질을 한 삼십대가 있었어요. 빚 얼마에 실직한 가장이 어린 자녀들을 불태워 죽였어요. 입원비에 대한 보장이 없으면 병원이 죽어 가는 환자를 문 앞에서 따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에요.”
“철순이는 왜 그런 무지막지한 사람들 얘기만 하지? 세상이 그런 사람들만 사는 건 아니지 않아?”
“그 무지막지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으시겠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나는 다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장선생님 자신을 예로 들어서 말할 수도 있죠. 선생님한테 나와 같은 딸이 있으신지 모르지만, 만일 있으시다면, 서울에서 그 딸보다 돈벌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분명히 있었을 거에요. 그 구체적 예는 선생님이 더 잘 생각해 내시겠지요. 나는 상상력이 모자라서 못 하겠어요.”
“대충 맞어. 윤여사 말마따나 대충 맞어. 그런데, 왜 그 대충 맞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려 들지? 대충 맞다는 것은 조금씩은 틀리다는 얘기 아냐?”
“그 조금씩 틀린 것이 여기 와서 생각해 보니 많이 틀린 것 같죠? 그리고 그것을 대자연의 조화 탓으로 돌리고 싶죠? 그러나 사실은, 자연의 조화도 조화지만, 술의 조화가 더 클 거에요.”
차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마천이었다. 국민학교의 이름을 보아 알 수 있었다. 길이 구불구불하고 좁았다. 차 두 대가 서로 스치려면 한 대가 조금 넓은 데를 찾아서 멈춰야 했다. 버스를 만났을 때는, 택시가 후진을 해서 보릿대가 쌓여서 썩고 있는 빈 터로 피해야 했다. 길바닥은 파이거나 돌멩이가 흩어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바윗덩이가 그 울퉁불퉁한 표면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다. 도저히 그 위로 차가 갈 성싶지 않았지만, 차는 곡예사처럼 작은 틈을 비집고 기우뚱기우뚱 잘도 굴러갔다. 표고가 높아 감에 따라서 계곡의 물 흐름이 빨라졌다. 제법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골이 깊어지고, 숲이 우거지고, 잎들이 무성해지면서 사방이 컴컴해져 갔다. 산속이 깊어져서 그러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들이 공원입구 버스종점에 도달했을 때, 해는 첩첩산중 어느 한 봉우리 뒤로 빠지고, 저녁 안개가 깔린 골짜기에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종점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비좁고 초라했다. 정류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길보다 조금 넓은 빈 터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그 옆 구멍가게에 간판이 걸려 있었다. 차는 되돌아나가려면 후진을 한 번 쯤은 해야 할 형편이었다. 호텔이나 여관은 없었고, 민가와 구멍가게와 술집들이 좁은 겉 양편으로 서너 채씩 모여 있었다. 민가는 사실은 민가가 아니고 민박을 전문으로 하는 집 같았다. 현애와 철순이가 작은 배낭을 하나씩 들고 그런 집들을 들렀지만 빈 방은 없었다. 미리미리 민박을 잡고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등산객들 중의 아가씨 하나가 한가롭게 방에서 나오는 것을 주인집 사람인 줄 알고 혹 빈 방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 아가씨가 보여 준 조소 섞인 쌀쌀함에 현애와 철순이는 그들이 문득 집 없는 천사, 천애의 고아, 또는 천형의 거지가 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한 오십여 보 더 걸어 올라가자 기와집 서너 채가 또 나타났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얀 벽에 민박이라고 커다랗게 씌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도 “방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빈 방이 없는데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빈 방이 없어서 어떡하지요? 있었더라면 빌려 드릴 덴데, 라는 여운이 풍겼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방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빈 방이건 찬 방이건 당신들한테 내줄 방은 없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더 결어가자 공원관리사무소의 매표소가 나왔다. 긴 통나무로 길을 가로막아 놓고 표를 받고 있었다. 매표소 건너편은 가게였다. 전국 어느 명승지 입구에서나 볼 수 있는 기념품들과 술, 음료수 과자 등을 팔고 있었다. 그 가게 건물의 이쪽 절반은 술청인 모양이었다. 그것은 비어 있었다. 그들은 그리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천연색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는데, 화면이 흐렸다. 두 사람들은 헌 안락의자에 주저앉았다. 벽에는 도토리묵, 토속주, 산나물 등의 이름들이 표어처럼 종잇조각 한 장에 하나씩 씌어져 붙어 있었다. 딴 벽 구석에는 화장품회사의 커다란 미녀 사진광고가 퇴색해서 붙어 있었다. 구멍가게 앞 천막천으로 늘여 낸 지붕 밑에서 긴 널판자 의자에 앉아 어떤 사람과 잡담을 하고 있던 중늙은이 남자가 그들에게로 왔다.
“술 먹을라고?”
그가 웃으면서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우리 민박 좀 구해 줘요.”
“민박할라고?”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민박 지금 없다. 요 아래 물어 봤제?”
“다 찼대요.”
“요 위에 물가에 서너 채 있는데, 다 찼다 카더라.”
“막차를 놓쳐서 늦었어요.”
“일찍 들어왔어도 없다. 천막 안 짊어지고 왔나?”
“천막이 있으면 걱정도 않겠어요.”
“여기서 좀 자면 안 돼요? 안락의자도 있고 좋네요.”
“다방 본딸라고 한번 안 놔봤나.”
“여기서 좀 자게 해줘요.”
“여기? 여기는 진즉 나갔다. 마루까지 다 안 내놨나. 마루가 뭐꼬. 안방까지 다 내주고 우리 식구 잘 데가 없어서 걱정이다.”
그러나 그는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낯선 두 처녀들의 딱한 형편을 더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많은 등산객들이 떼를 지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민박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등에 짊어진 배낭의 흉악함으로 보아, 게처럼 성곽을 업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버스도 끊어겼을 텐데,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밀어닥쳐요?”
“관광버스가 줄줄이 안 푸나. 아직 멀었다. 방이 많은 민박들은 관광회사들이 일 주일 전부터 예약을 안 끝마쳤나.”
“여기서 밥 같은 것도 팔아요?”
“왜? 그 바나라는 것도 안 가져왔나?”
“칫솔 하나 가지고 떠났어요.”
“산채백반이사 안 되겠나.”
그때 남자 등산객 서너 명이 무거운 배낭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뿐한 차림으로 줄줄이 들어왔다. 천막을 치거나 민박을 잡아서 주거 문제를 해결한 다음, 아마 당번이 식사라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등짐 속에 들어 있는 국산 양주보다는 산속의 한약재 가미주를 찾아 어슬렁어슬렁 나선 사람들인 모양어었다. 현애와 철순이는, 일어서 봤자 갈 데도 없었지만, 피곤하기도 해서, 그냥 눌러앉아 있었다. 주인이 그들에게 손때 묻은 시멘트 목로 위에 놓인 커다란 세 개의 유리통들을 가리키며, 술이 가득 찬 그 속에 삼분의 이쯤 채워져 있는 팅팅
부은 약초들을 설명했다. 그들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의 제안에 따라 당귀주를 선택했다. 그때 문득 철순이가 그들에게서 암시를 받고, 도토리묵 한 접시와 감자적 한 접시, 그리고 막걸리 한 되를 시켰다. 현애가 막걸리 한 되를 반 되로 고쳤다. 그리고 그것은 답답하니 바깥 평상으로 내다 달라고 부탁했다. 가게 옆에는 약수가 대롱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밑에 커다란 합성수지통이 그 물을 받아 음료수 병들을 식히고 있었는데, 그 옆 빈 터에 널빤지 평상 두 개가 놓여있었고 그 위로 차일이 쳐져 있었다. 길이 오르막이었으므로 두 번째 평상이 첫번째 것보다 한 뼘이나 높았다. 현애와 철순이는 플라스틱 바가지에 약수를 받아서 벌컥벌컥 마신 다음, 첫번째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땅거미가 조용하고 빠르게 어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속 올라왔고, 그들은 대개 그 약수를 마셨다. 더러는 수통에 담기도 했다.
도토리묵은 쟁반만한 접시에 인심 좋게 수북이 쌓여서 나왔다. 막걸리는 붙잡고 따를 수조차 없을 만큼 맥이 없는 비닐병, 병이라기보다 봉지에 들어 있었다. 현애와 철순이는 막걸리를 한 잔씩 주욱 들이켠 다음, 도토리묵을 부지런히 먹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도, 쌉쓰레한 도토리맛은 젊고 건강한 위를 자극하여 식욕을 돋울 만하였다. 그들이 묵 한 접시를 거의 해치웠을 때, 김이 피어오르는 감자적 접시가 나왔다.
“밥은 안 할기가? 도토리하고 감자면 되겠나?”
딸이나 며느리인 듯싶은 삼십대 여자가 음식 내오는 것을 보고 주인영감이 가게 앞 의자에 앉아서 소리쳤다. 그것은 밥 한 그릇이라도 더 팔아 보려는 장삿속에서라기보다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배불리 대접하고 싶어하는 순박한 인심에서인 것 같았다. 그 순박이라고 생각된 것에 감웅하여 철순이가 느닷없이 말했다.
“우리 여기서 좀 자요.”
“여기서?”
노인이 그들의 평상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 봐야겠다는 듯이 평상과 차일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사람이 자겠나?”
“이슬은 피할 수 있지 않아요?”
“내가 왜 여길 진즉 생각 못 했자?”
주인영감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착상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통한 모양이었다. 그는 삼천 원을 받고, 민박인데 아무렴 침구 없겠느냐면서, 요와 홑이불과 베개를 내다 줄 것을 약속했다.
“얘, 이제 음식맛이 나는 것 같다.”
“맛도 모르고 먹었드나?”
“여기다 여관 지으면 돈벌 텐데, 왜 안 지어요?”
“허가가 안 나온다. 사람도 없고. 사람이 항상 이렇게 많나?”
“오늘은 왜 이렇게 많아요? 항상 이렇게 많은 거 아네요?”
“철쭉제가 있어 안 그렇나. 철쭉제 보러 온 거 아니가?”
“철쭉제라뇨?”
“내일 세석단에서 철쭉제가 안 있나.”
두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온 골짜구니가 울긋불긋 잔치 기분에 들떠 있었구나!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느라고 그들은 주인영감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기서 또 만나는구만.”
한 중년 사내가 그들이 앉아 있는 평상의 한 귀퉁이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머, 박선생님.” 철순이가 말했다.
“나 말인가? 장이라고 불러 주게.”
“참, 장선생님.”
그를 따라온 여자는 그들이 앉으라고 권할 때까지 자기는 없어도 괜찮다는 듯이 저만치 서 있었다. 장씨는 아까 차에서보다 술이 조금 더 된 것 같았다. 그는 평상 끝에 걸터앉아서 윗몸을 한들거리고 있더니, 벌떡 드러누워 버렸다.
“별이 보이누나, 별이. 별들은 우리들한테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즈이들끼리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면서?”
장씨가 누운 채 허공을 향해서 중얼거렸다.
“저녁은 어떻게 하셨어요P” 현애가 윤여사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했어요. 장선생님요 술만 더 드셨지만.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물가에 민박집들과 음식점들이 있고, 거기서부터 물을 따라 천막들이 꽉 들어차 있어요. 거기서 더 올라가면 산으로 들어가는 두 갈래 길의 갈림길이 나온대요.”
“숙소는 어디다 정 하셨어요?”
“글쎄, 그걸 아직 못 정했어요. 천막도 없고.”
“그래서 지금 내려가는 길이에요?”
“어떻게 하겠어요. 맨땅에서 잘 수도 없고.”
“여기서 자요. 우린 이 평상에다 민박 얻었어요.”
한뎃잠 민박은 장씨에게도 희한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안방 민박보다 더 좋다고 말했다. 주인영감은 천 원을 올려서 사천 원을 받고 남은 평상을 내주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평상 위의 차일을 받치고 있는 간짓대 끝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그들은 차분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술과 밥과 산나물을 시켰다. 정작 밥을 먹여야 할 장씨는 술만 더 마셨다. 여자들은, 조금 전에 밥을 먹었다고 했던 윤여사까지, 깊고 높은 산속 그늘의 비옥한 부엽토에서 자란 부드러운 취나물 무침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아가씨들은 나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시지요?”
반주로 곁들여 마신 맥주 한 잔에 힘을 입었는지 윤여사가 대담하게 물었다. 장씨는 마지막 잔을 비우더니 어느새 돌아누워서 가느다랗게 코를 곯고 있었다. 수통에 받아다가 홀짝거린 막걸리가 맥주 몇 잔과 야합을 한 모양이었다.
“어머, 아주머니,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이제 도덕적으로도 확실해지고 싶으세요? 그렇지만 우리들의 생각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현애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아니, 절대적으로 상관이 있지.” 철순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아주머니의 도덕성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거듣. 원래 도덕이란 사실이 아나고 의견이야. 에스키모 사람들은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을 우리들은 부도덕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가령, 자기 부인을 귀한 손님에게 제공한다는가……. 지금 아주머니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의견이야. 딴사람들의 의견은 아무 소용이 없지. 나는 아주머니가 부도덕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아는 사람들끼리 등산 가는 것어 부도덕 하지는 않지 않어. 그 아는 사람들 사이라는 게 반드시 부부 사이여야 하겠어? 친구 사이면 되는 거 아냐? 그리고 반드시 학교 동기나 직장 동료라야 친구겠어?”
“그렇지만 단둘이 왔다는 게 문제잖아.”
“단둘임을 이용하려 했더라면 산에까지 왔겠어?”
“산에는 같이 갈 수 있지만, 호텔에는 차마 같이 갈 수 없는 사이도 있을 수 있지 않아?”
“물론이지. 그만큼 덜 부도덕하기 때문이지. 즉, 부도덕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걸 부도덕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부도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산에 단둘이 온 것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부도덕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세상에 부도덕할 수도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얘기 도중에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러면 부도덕하다는 걸까요, 부도덕하지 않다는 걸까요?” 윤여사가 말했다. 그녀는 술장사는 하지만, 술에는 약한 모양이었다.
“아주머니가 우리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더 빠르겠어요.”
현애가 말했다.
“그럼 내 마음대로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딴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안 써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철순이가 말했다. “왜냐면, 딴사람들은 아주머니의 형편을 아주머니만큼 알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머니만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해 주지 않거든요.”
“그러는가 봐요. 나는 내 딸아이가, 내 승낙 없이, 내가 반대한다는 얘기가 아녜요, 사전에 내 의견 한마디 묻지 않고, 대학 같은 반 아이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런데 내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은 내가 놀란 것이 우스워 죽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아무에게도 나의 슬픔을 털어놓을 수가 없어요. 어젯밤, 장선생이 술이 취해서 내 포장마차로 와가지고, 밑도끝도없이 딸년 얘기를 했어요. 술이 취해서 그랬을 테지요. 장선생 따님은 일 년째 미국에 가 있는데, 처음엔 매달 얼마씩 보내 주다가 나중에는 힘에 부쳐서 그 절반씩 보내 줬대요. 그래서 그랬는지 얼마 전에 난데없이 미국 사람하고 결혼하게 됐다고 편지가 왔더래요. 나는 애비 없는 년이나 그러는 줄 알았다고 내 딸 얘기를 했지요. 장선생은 내 얘기를 열심히 들어줬어요.”
현애와 철순이는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두 분 서로 아신 지가 오래 되었어요ρ”
“장선생은 어젯저녁 처음으로 내 포장마차에 왔어요.”
“두 번째야.” 장씨가 부시시 일어나 앉으면서 말했다. “전번에 들렀던 것은 윤여사가 기억 못 하는 거지. 관심이 없었을 테니까. 나는 잊지 않고 있지만.”
“두 번째는 일부러 들르셨군요.” 현애가 말했다.
“입가심하러 일부러 들렀지, 지나는 길에 우연히.”
“그리고 또 우연히 철쭉제나 보러 가자고 하셨군요.” 철순이가 말했다.
“무슨 제요?” 윤여사가 물었다. “혹시 그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제사 아네요? 축제라고 하면 이갈려요.”
“철쭉제가 내일 있대요. 두견새가 먼저 간 제 짝을 부르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그 핏자욱마다 철쭉이 선홍빛으로 피어났대요. 사람들은 철쭉이 두견새 죽은 넋이라고 믿늑대요. 그 넋을 달래는 제사죠.”
“두견새는 해마다 죽을까요, 철쭉이 철마다 피어나는 것을 보면?”
윤여사가 말했다.
“해마다 죽죠.”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은 한 번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왜 그런 일이 되풀이 될까요?”
“한 새가 죽으면 다음에는 딴 새가 죽죠. 그 새에게는 한 번이죠, 전체적으로는 무수히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우리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이지만, 사실은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일이고, 또, 앞으로 수없이 되풀이될 일일 거에요.” 철순이가 말했다.
“글쎄. 그 일이 누구에게나 다 일어나는 일이고, 옛날부터 수없이 있었던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마치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것은 자기에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죠.”
윤여사는 철순이와 현애를 번갈아 가면서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장씨는 술이 덜 깼는지 하품을 벅벅 하고 있다가 다시 벌렁 누워 버렸다. 관광버스가 또 한 차 풀었는지, 가슴에 똑같은 표찰을 찬 한 떼의 남녀노소 관광객들이 줄줄이 밀어닥쳤다. 그들은 소리들을 지르면서 약수 흐르는 데로 와서 물들을 마셨다. 약수가 대롱을 타고 홀러내리는 것은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오늘 밤 잠은 다 잤어.” 장씨가 돌아누우면서 중얼거렸다.
2 장터목
그들은 새벽에 떠났다. 길목에서는 시끄러워서 깊은 잠을 들일 수 없었다. 날은 아직 어두웠다. 숲과 계곡에는 밤이 머물러 있었고, 점점 좁아지는 자갈길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잠이 덜 깨어서 시무룩하게 입들을 다물고 각기 제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터덜터덜 비탈을 걸어 올라갔다. 길은 점점 더 험해져 가더니, 마침내 등외 도로가 끝나고 두 가닥 산길이 나타났다. 그 갈림길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비스듬히 기운 것이, 세운 지 오래 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은 그 앞에서 결음을 멈췄다. 그리고 일제히 고개들을 젖히고, 낡은 비문을 판독하듯이 거기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 나갔다. 희미한 첫새벽의 빛에 하얀 글자들이 인광처럼 꿈틀거렸다. 왼쪽으로 가면 장터목에 이르고, 오른쪽으로 가면 세석에 이르는데, 세석으로 가는 계곡은 험난하여 조난 사고가 잦은 모양이었다. 악천후에는 오르지 말고, 여자는 오르지 말고, 남자도 병약한 자나, 열여덟이 못 된 자나, 초보자는 오르지 않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잠시 고개들을 숙이고 있다가, 묵묵히 왼쪽 길로 들어섰다.
큰길에서 떨어져 나간 오솔길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느닷없이 가파라져서 앞 사람의 발뒤꿈치가 뒤따라오는 사람의 눈 높이께에 오기도 했고, 물이 마른 개천의 자갈밭을 만나서는 흔적을 없애기도 했다. 길이 간신히 갈피를 찾자,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숲이 우거지고 덩굴들이 머리 위를 덮어서, 그들은 마치 동굴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풀들과 관목들이 내뿜는 강렬한 향기에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덤불숲을 빠져나오자 물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거대한 교목들이 아직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도깨비굴 속 같은 어둠은 가셨다. 그들은 계곡을 따라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대로 길도 질서가 잡혔지만, 바로 옆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높은 가지들에 무성하게 매달린 잎사귀들이 펄럭임들 사이로 스며든 부연 빛이, 그들을 얼마간 안심시켜 주었다. 풀이 죽은 듯했던 그들에게 원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주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길 옆에 쭈그리고 앉아 흐르는 물에 손을 씻자, 나머지도 여기저기에 주저앉아 손과 얼굴을 씻었고, 발을 씻기 위해서 신발을 벗기도 했다. 그들은 두 시간 너머 걸어왔었다. 네시 반쯤에 출발했었는데, 일곱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평퍼짐한 바위 위에 음식을 꺼내 놓고 둘러앉아 아침 요기를 했다.
“아주머니는 따님과 한집에서 사세요?” 식빵 한 쪽에다 뭘 열심히 발라서 두 조각을 합쳐 한 입 베어 물고 현애가 물었다.
“그럼은요. 한집에서 살아요. 왜요?”
“딸이 엄마 몰래 연애하다가 집을 쫓겨날 수도 있는 거 아녜요?”
철순이가 대신 대답했다.
“안 그래요. 우린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요.” 윤여사가 이마를 붉히면서 그리고 그것을 얼버무리려고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철순이가 아는 체 다시 받았다. “내쫓을 만큼 미운 사이라면 혼자 연애를 하건 시집을 가건, 뭐가 속상하겠어요?”
“네? 사실은, 내쫓으려고 했는데요.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그럼, 왜 내쫓지 않았어요?”
“갈 데가 있어야죠. 갈 데가 없는 걸 어떻게 내쫓아요? 지 외삼촌 하나 있던 거 얼마 전에 죽었거든요.”
“정말! 얘, 나도 외삼촌만 안 계셨더라면 집에서 안 쫓겨났을까? 난, 외삼촌이 아니라 형부지만.” 현에가 철순이에게 물었다.
“아마 안 쫓겨났을 거야. 틀림없이 안 쫓겨났어. 그렇지만 넌 언니들이 너무 많지 않어? 셋이니?”
“그래, 셋이야. 난 갈 데가 너무 많아서 탈이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장씨가 끼여들었다. “쫓겨날 일이 있어서 쫓겨나는 거지, 갈 데가 있어서 쫓겨나나?”
“그렇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쫓아낼 일 없는 집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뇨 피차 성질대로 했다가는 남아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윤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쫓아낼 데가 없어서 못 쫓아냈지만, 그러자니 얼마나 속을 상했겠느냐는 뜻인 것 같았다.
“아가씨는 언니네 집엘 종종 가는 모양이구만?” 장씨가 말했다.
“그래요. 종종 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언니가 내가 왜 왔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맞춰요.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딱 꼬집어 내거든요. 참 신통해요. 놀러 갔을 때는 일부러 시무룩한 척하고, 쫓겨났을 때는 일부러 수다를 떨어 보이지만, 소용없어요. 얘, 너ㅡ? 하면 그만이에요.”
“별로 신통한 일이 아닐 거야.” 철순이가 말했다. “니네 언니라고 너처럼 일부로 수다를 떤 경험이 없겠니?”
“정말! 그럼……?”
“물론.”
“아가씨는 무슨 일로 언니집엘 자주 다녔을까?” 장씨가 두 처녀들을 말똥말똥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그걸 모르겠어요.” 현애가 대답했다. “수다를 떤 생각은 나는데 뭘 수다를 떨었는지 별로 기억이 안 나거든요.”
“무슨 일로 부모님한테 꾸중을 듣고 쫓겨났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말이지?”
“맞아요. 그런 일이 그렇게 자주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래 전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생각이 잘 안 나요.” 현애가 말했다.
“사실은,” 철순이가 말했다. “생각이 잘 안 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몰랐겠지.”
“정말!” 현애가 또 놀랐다:
“뭐가 또 정말?” 장씨가 눈을 말똥거렸다. 윤여사는 식빵 한 입을 웃으면서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럼 너도?” 현애가 장씨의 참견에 상관치 않고 말했다.
“물론.” 철순이가 대답했다. “나는 우리 아빠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어. 왜 화를 내지 않는지는 더 알 수가 없고.”
장씨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두 처녀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윤여사가 그에게 눈짓을 해서 잠자코 있게 했다. 현애가 말했다.
“그 도둑맞은 얘기니?”
“그게 왜 도둑이니?”
장씨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어떻게 듣고 있겠냐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윤여사가 다시 눈짓을 해서 그를 주저앉혔다.
“작년 여름 밤,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왔어요.” 철순이가 말했다.
“자기 전에 수박을 먹어서 그랬는지 밤중에 잠을 깼어요. 달빛엔지 가로등 불빛엔지 창문에 무슨 그림자가 비쳤어요. 나는 동생인 줄 알았지요. 고등학교 다니는 앤데, 장난을 좋아해서 나무 뒤 같은 데에 숨어 있다가 찾으면 툭 튀어나오기를 잘했어요. 내가 기분이 내키면 찾는 척해 주고, 바쁘고 귀찮으면 모른 척해 버렸는데, 그럴 때면 한참 있다가 제풀에 기어나와서 왜 찾지 않았느냐고 투덜댔어요. 그날도 그런 장난인 줄 알고, 잠이 덜깬 결에 잠이 다 깨버릴까 봐 귀찮기도 하고 짜증도 나서, 얘, 여태 잠자지 않고 뭐 해, 가서 자, 하고 소리쳤어요. 그것뿐이었어요. 그림자는 사라지고, 나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지요. 이튿날 아침 동생한테 왜 밤중에 장난하느냐고 묻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을 정도였어요. 그로부터 꼭 두 달 후 한 사내가 날 찾아와서 경찰관이라고 자기의 신원을 밝혔어요.”
“딴 데서 붙잡힌 게로군.” 장씨가 말했다.
“그래요. 그 형사의 말에 따르면, 한 강도강간범이 검거되었는데 그 범인이 두 달 전 새벽에 우리집에 들어왔었다고 자백을 했어요. 경찰관이 온 것은 피해자 진술을 받기 위해서였어요. 나는 피해품이 없다고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랬더니 형사가, 범인이 이미 자백을 했는데 왜 사실을 은폐하느내요. 나는 화가 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죄 범인이냐, 그 사람은 용의자가 아니냐, 그 사람을 범인으로 확정하는 것은 아마도 판사들이 하는 일 아니냐, 당신네들이 그를 범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시기가 이르고 경솔할 뿐만 아니라, 권한 밖의 일이고 위험하지 않느냐, 라고 말했죠. 형사는 날더러 똑똑한 체하지 말래요. 그래서 나는 당신네들은 알지도 못하고 아는 체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형사는 강간사건의 경우, 피해자 조서 받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처럼 뚝 잡아떼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하면서, 범인이 이미 잡혔고, 자백을 다 했는데, 모른다고 잡아떼기만 하면 어떡하느내요. 신문 같은 데는 가명으로 나갈 테니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사실대로만 말하래요.”
“그거 참 딱한 노릇이군. 범인이야 잡혔겠다, 흉악할수록 공이야 되겠지만.”
“처음엔 직무에 충실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사명감에 가득 찬 경찰관이라고도 생각되었지만, 차츰 집념에 사로잡힌 사나이라고 생각되더니, 편집광처럼 보이고, 마침내는 악을 쫓는 또 하나의 악처럼 보였어요. 그는 솔직하게 범인은 잡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곤 믿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악은 악이 물리친다. 선은 악을 물리칠 수 없다.” 현애가 말했다.
“바로 그건가 봐.” 철순이가 말했다. “악을 물리치는 것이 선이다. 악이 악을 물리친다. 즉 악이 선이다.”
“무슨 소리들이야?” 장씨가 화를 내고 말했다. “흉악한 범법자를 교회에 데려다 놓고 안수기도라도 하란 말이야?”
“그럼 폭력이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현애가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럼 목탁만 두드리고 있으면 사회가 폭력으로부터 보호된다는 얘기야?” 장씨가 말했다.
“무슨 폭력?” 철순이가 말했다. “전 지금 예수의 방법이 옳으냐, 시저의 방법이 옳으냐를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설령 시저 군단의 방법이 옳다손 치더라도, 그 방법이 지나치면 그 억지가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하물며 지나치지 않을 때에도 그 도덕성이 모호하다면, 지나칠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 상식적으로 얘기를 하지.” 장씨가 목소리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했다. “질서유지라든가, 선량한 시민 보호라든가, 하는 건 어떻게 되지? 아니, 근본적으로 얘기를 해볼까? 흉악한 폭력을 응징하는 힘이 왜 폭력이지? 폭력을 물리친 힘이 왜 그 폭력과 똑같은 의미의 폭력이 되지? 물론 힘이라는 점에서는 둘이 같을지 모르지만, 방향이 다르지 않어. 하나는 정의 쪽이고 하나는 악덕 쪽이지 않어? 악의 힘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의에게도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힘없는 정의는 구두선이야.”
“어머, 선생님. 선생님은 참 잘 배우셨네요.” 철순이가 말했다. “선생님에 관한 한, 우리나라 국민교육은 성공이에요. 우리나라 국민학교교육은 성공이에요. 둘 다 힘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셨죠? 둘 다 폭력이라는 점에서도 같다는 얘기 아녜요?”
“그게 왜 같어? 방향이 정반대랬지 않어?”
“방향 빼고요. 방향만 다르지 둘의 속성이 같다는 거 아니에요?”
“뭐가 같어? 정의의 힘은 힘이고 악덕의 폭력은 폭력이야.”
“정의의 폭력은 힘이고, 악의 힘은 폭력이다,고 해야 어울리겠죠?”
철순이가 말했다.
“그래. 힘이건 폭력이건, 똑같은 물건이 정의를 위해서 사용되었을 때와 악올 위해서 사용되었을 때 정반대의 물건이 되는 거야.”
“그렇죠? 같은 몰건인데,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달라진 거죠? 본래부터 다른 물건이 아니죠? 가령 똑같은 권총이 법의 집행을 위해서 쓰여진 때와 범행을 위해서 쓰여진 때처럼?”
“그렇지.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이군.”
“누가 말귀를 알아듣는가는 곧 분명해질 거에요.” 현애가 말했다.
“힘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달라진다,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된다, 그렇다면 그 어떻게 쓰이느냐가 힘 그 자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건 알 수 있겠죠?” 철순이가 말했다.
“그렇지. 그게 바로 내 얘기야.”
“힘 못지않게 방향이 중요하다는 거 말이죠?”
“그래, 맞어.”
“그걸 누가 정하죠? 방향을 누가 정하죠? 힘은 어떻게 쓰는 것이 좋고 어떻게 쓰면 나쁜지를 누가 정하죠? 힘센 사람이 정해요?”
“힘센 사람이야ㅡ 글쎄, 힘이 센 것만으로도 바쁘지 않겠어?”
“바쁜 게 아니라 업무가 달라요.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는 것하고 자동차에게 방향을 주는 것이 같아요?”
“그렇구만. 그럼 누가 정해야 하지?”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른대서야 말이 되나?”
“그렇지만 누가 정해서는 안 되는가온 알 수 있어요.”
“그건 나도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어.”
“누가 정하든 간에, 그 결정이 최종적일 수는 없어요. 아무도 완벽할 수 없거든요. 자기의 결정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면 악당이에요. 바보는 자기가 바보라는 것을 몰라서 탈이고, 악당은 자기가 악당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에요. 그는 자기가 악당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는 자기가 악당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정작 악당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요. 그가 악당을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 증거에요. 원래 악당들은 유능하죠.”
“유능한 게 나쁠 리 있나?”
“악마는 거의 하느님만큼 유능하죠. 타락 천사거든요.”
“그 순경은 어느 쪽일까?”
“처음엔 악당 쪽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았더니 바보 쪽이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할 수 있지?”
“그는 내가 정말로 당한 줄 알고 있어요.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는 내가 사실을 감추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거든요. 악당은 안 그래요. 악당은 사실에 홍미가 없어요. 그는 사실이란 만드는 대로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럼 악당은 뭣에 관심이 있을까?”
“자기 자신의 이익이죠. 그것을 위해서 사실은 사실보다 더 그럴듯하게 꾸며지죠.”
“언제고 들통이 날 테지.”
“그렇죠. 반드시 나죠. 그렇지만 생각보다는 오래 가요.”
“악당이 사실을 완벽하게 조작한다는 말이지?”
“악당이 사실의 조작을 잘하기도 하지만, 사실 자체의 모호한 성격 때문에도 그래요.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사설이란,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그 사실에 대한 어떤 사람의 해석일 때가 많아요. 사실과 해석은 전혀 다르죠. 그런데도 중립적인 사실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괜찮을 만큼 얻기 힘든 것이어서, 대개의 경우 해석이나 견해가 사실 노릇을 하게 되죠. 악당의 경우 이 해석이나 견해가 악의적이라는 것만 다르죠.”
“그런데 그 경찰관에게는 이 악의가 없었던 게로구만.”
“그래요. 악당은 따로 있었어요.”
“바보만으로는 부족했던가? 악당은 없어도 괜찮을 텐데.”
“대개 둘은 붙어다니조. 악당은 바보를 부리고, 바보는 악당을 믿죠.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면 대개 나쁜 일이 이루어지죠.”
“악당만으로 안 될까?”
“바보만으로도 나쁜 일이 안 되지만, 악당만으로도 안 돼요. 반드시 그 악당을 믿는 바보가 있어야 해요.”
“바보가 그렇게 중요하니?” 현애가 물었다.
“그럼. 악당을 만드는 것은 바보거든.”
그들은 요기와 휴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릿살에 힘이 되살아난 듯 그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수풀에 가린 하늘이 파랗게 빛났고, 아침 햇살이 펄럭이는 잎들을 반짝이게 하면서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들은 물소리와 산새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성큼성큼 산을 올라갔다. 밤안개 속에 싸인 새벽산의 신비스러움과 엄숙함과 두려움이 말끔히 가시고 새 아칩의 싱싱함 속에 깊은 산의 낯선 골짜기가 친밀하고 정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역시 오기를 잘 했어. 누군가가 말했다. 아깐 후회가 됐던 모양이군. 한참 있다가 딴사람이 받았다. 그래. 사실 무서웠어. 먼젓번 사람이 인정했다. 고통과 쾌락은 동시적일까? 또 한참 있다가 그 사람이 말했다. 그리고 딴사람들이 잠자코 말이 없자, 덧붙였다. 괴로움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지 않어? 고통이 먼저 아냐? 그 옆에서 걷던 사람이 기름진 검붉은 흙을 내려다보면서 걸음을 늦추지 않고 이의를 체기했다. 목이 마른 다음에 물을 마시는 것이 즐겁지 않어?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고통과 쾌락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거 아닌가? 먼저 말했던 사람이 한참 걷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고통과 쾌락이 같다는 얘기 아냐? 맨 먼저 말했던 사람이 맨 앞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정말! 괴롭지만 지금이 참 좋아! 그때까지 잠자코 걷기만 하던 사람이 말했다. 등산은 고통일까, 쾌락일까? 누군가가 앞을 쳐다본 채 소리쳤다. 둘 다 아냐? 한참 있다가 어디선가 대답이 나왔다. 고행이란 뭘까? 또 어디선가 들려 왔다. 그들은 엇비슷한 간격으로 느리지만 부지런히 걷고 있었으므로 누구의 입에서 말소리가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말을 할 때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도자가 하는 거? 누가 소리쳤다. 중세판 등산. 그들은 입술 모습이나 얼굴 표정 없이 소리로만 전달을 했으므로,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청을 돋웠다. 옛날 사람들은 등산을 안 했을 거야. 말소리가 큼에 따라서 말과 말 사이의 간격도 길어졌다. 삶 자체가 거의 등산 같았겠지. 그들은 앞엣사람의 말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한참씩 있다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두 발로 걸어서 갔을 테지. 걷는 것만큼이나 힘을 들여서 또박또박 그들은 말했다. 말을 타는 것은 특권이었을 거야. 앞 사람의 발이 바위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유심히 살피면서 맨 뒤엣사람이 말했다. 그래, 노는 사람들은 말을 타고, 일하는 사람들은 걷고, 그 앞엣사람이 말했다. 귀족들이 말을 타고 사냥을 가면, 농부들은 들판에서 허리를 펴고 바라보면서, 쉴 핑계를 주어서 고맙다고 했을 거야. 많은 발들에 밟혀서 단단하고 하얗게 되어 버린 뿌리의 한 가닥을 밟으면서 한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등산도 생활로서 했겠지. 가령, 장삿길에 산을 넘는다든지. 옆엣사람이 말했다. 맞어. 장터목이 왜 장터목인지 알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옛날, 아마, 백제 사람들과 신라 사람들이 거기서 물물교환을 했을 거야. 물은 사람이 스스로 대답했다. 마한 사람들과 변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몰라. 누가 말했다. 그도 대강은 짐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쪽에서는 쌀가마를 지고 오고, 저쪽에서는 소금가마를 지고 오뇨! 누가 또 말했다. 물물교환이라는 말에 상상력이 꿈틀거린 모양이었다. 얼마나 무거웠을까! 앞쪽에서 소리가 났다.
그들은 하동바위에서 잠깐 쉬었다. 장씨는 물통에다가 물을 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올라가면 물이 없어진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조금 더 올라가자 개천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물이 말라 가더니, 이내 자갈밭도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골짜기를 벗어나서 능선을 향하여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갔다. 이른 새벽, 어둠 속으로 떠났을 때는 분명히 그들뿐이었는데, 어느새,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사람들의 긴 행렬이 뱀처럼 산허리를 감쌌다.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보다는 가슴에다 표찰을 단 단체모집 관광객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은 열이 길어지고 중간에 딴사람들이 끼여들자 고함이나 확성기만으로는 안 되었던지, 관광회사가 내건 산악회의 이름과 자연보호 표어를 적은 헝겊조각들을 요소요소의 나뭇가지 끝에 매달며 갔다. 크기, 모양, 색깔이 다른 여러 조각들이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 홉사 굿하고 난 뒤 동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같았다. 여러 회사들이 아마도 비슷한 방법을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저자 가운데를 걷고 있는 것 같어.” 현애가 허리들을 구부리고 줄줄이 산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철순이가 물었다.
“저자야 여기까지 오지 않더래도 얼마든지 손 가까이에 있었지.”
“그렇지만 난 참 좋아. 산도 좋지만, 그 산속에 저자가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멋있어? 이 길 좀 봐. 이건 산길이 아니라 도시복판의 공원길이나 장날 시골의 논두렁길이야. 그런데 좀은 이 길 밖으로 한 뼘만 나가면, 낙엽이 쌓여서 발목까지 푹푹 빠질 거야. 과장하자면, 전인미답이야. 그 대조가,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그 대조가 나를 거의 전율케 해.”
보통 때에도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잘 다져진 그 길은 그날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밟고 지나가서, 굳은 흙 표면이 가는 가루로 부서지고 그 위에 신발 자국들이 무수히 나 있었다. 그 좁은 길 양편에는 나무와 바람과 물기와 열기, 그리고 어쩌면 새나 다람쥐나 토끼 같은 짐승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손을 대지 않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때부터의 오랜 침묵의 땅이 마치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신비 속에 묻혀 있었다.
“나는 공기가 좋아서 좋아.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향긋한 냄새가 나기까지 하니. 이걸 다 싸짊어지고 서울로 가져갈 수도 없고.” 장씨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말했다.
“부지런히 심호홉을 하세요. 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야 못 가겠어요?” 현애가 말했다.
“지금 단전호홉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에요.” 윤여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는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그때 거기에 있는 것을 참으로 좋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두어 번 더 쉰 다음 능선에 도달했다. 그들의 다리는 허벅다리와 무릎이 고통으로 거의 마비된 듯했다. 아직 꼭대기는 멀었지만 능선에 오르자 전망이 트이고 벌써 거기에서도 첩첩이 연무에 싸인 산줄기들이 멀리멀리 눈밑으로 뻗쳐 있었다.
“산에 오르는 즐거움이 고통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것 같았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광활한 시야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어.” 철순이가, 처음 나타난 고사목에 그들이 걸음을 멈추었을 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험한 바위를 타고 고사목 밑으로 가서 사진들을 찍느라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 길고 넓은 전망은 여기까지 오는 고통이 없었더라면 별것이 아니었겠지.” 현애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겨 낸 고통이 이 광활함 앞에서 너무 초라해지지 않어? 우리가 고통스럽게 결어온 거리가 이 전망의 길이와 폭에 비하면 너무 짧은 거 같지 않아?”
“그래, 비교가 안 돼.”
“그런데, 이상해. 그 작은 고통이, 우리가 견뎌 낸 그 작은 고통이, 이 엄청난 길이들과 폭들 앞에서, 한없이 커지는 것 같어. 우리가 한없이 큰 고통을 이겨 낸 거 같어. 우리는 이제 한도끝도없이 걸을 수 있을 거 같어.” 철순이가 혼자말처럼 말했다.
“한도끝도없이는 관두고, 꼭대기까지만이라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장씨가 일어서서 엉덩이를 털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꼭대기 못 가겠어요?” 현애가 말했다.
“꼭대기까지 가건 안 가건 간에,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참 좋아요.” 윤여사가 말했다.
“아주머닌 어떻게 지내세요? 아직 따님과 같이 사세요?” 철순이가 물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행렬 속으로 다시 끼여들어갔다.
“그럼은요. 바쁠 땐 그 앤 포장마차에까지 나와서 도와 줘요.”
“그럼 사이가 아주 좋으시네요.”
“그럼요. 아가씬 안 그래요?”
“저두 그래요. 저두 아버지와 사이가 좋아요. 그게 이상하거든요.”
“뭐가 이상해요? 사이가 나쁘면 싸울 일도 없죠.”
“싸우면 사이가 나쁜 거 아니에요?”
“나쁘게 되겠지요. 싸움도 없어지게 되고요.”
“싸우지 않고 사이가 좋을 수는 없어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요?”
“난 우리 아빠와 사이가 안 좋은가 봐요. 우린 싸우지 않거든요. 싸우지 않는 것을 사이가 좋은 것인 줄 알았어요.”
“어머. 그럼 얼마나 좋아요? 부모 자식 간에 싸우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아요? 부모 자식은 싸우건 안 싸우건 간에 사이가 좋게 되어 있거든요. 이왕이면 안 싸우고 좋으면 얼마나 좋아요? 싸우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에요.”
“그래요. 싸우는 건 바보 같아요. 악당은 안 싸우거든요.”
“그렇지만 악당들은 싸우고, 바보들은 사이좋게 지내는 거 아니니?” 현애가 끼어들었다.
“악당들은 지는 싸움은 안 해. 지는 싸움을 하는 건 바보들이야. 싸움이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거야. 이기기만 하는 싸움은 싸움이 아니야.” 철순이가 말했다.
“싸움은 이기려고 하는 거 아니니? 언제나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니?”
“항상 이긴다면 싸우기 전에 승부가 뻔하다는 얘기 아니야? 그게 어떻게 싸움이니? 항상 이기자면 항상 지는 편이 있어야 할 텐데, 누가 항상 지는 싸움을 하려 드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겠다, 얘. 항상 이기는 것은 좋지만, 항상 지는 것은 누가 좋아하니?”
“난 바보가 아니야. 바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래서 우리집에선 아빠와 싸움이 없는가 봐. 내가 바보 노릇을 하는 한 우리집엔 싸움이 없고 평화가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난 이제는 더 이상 바보짓을 하고 싶지 않어.”
“니네 아빠가 악당이니?”
“우리 아빤 완벽주의자야. 서툰 짓은 하지도 않고 용서치도 않어.”
“그렇지만 사람인 이상 실수할 때가 있을 거 아니니?”
“그게 문제야. 사람인 이상 반드시 실수를 하지.”
“실수를 하는데 어떻게 항상 이기니?”
“악당은 사람이 아니야. 악당은 실수를 하지 않어. 악당의 실수는 실수가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웃음이나 침묵으로 얼버무린다고 실수가 실수 아닌 것으로 되니? 우리집 아빤 우리들을 나무라다가 아빠 실수가 드러나면 갑자기 파안하고 허,허,허, 웃는다. 그러면 아빠의 실수는 농담이 되어 버리거던. 농담으로 안 될 듯하면 아예 침묵으로 때우지만.”
“그게 악당들의 초기 증상이야. 침묵은 조금 진전된 거고. 누구에게나 그 정도의 소질은 있지.”
“거기서 더 진행 되면 어떻게 되지?”
“실수가 악당의 것이 아니게 돼. 악당의 실수는 반드시 딴사람들의 실수야.”
‘그렇구나! 우리 아빠도 가끔 거기까지 나아갈 때가 있어.”
“꽤 진전된 거야. 대개 그래.”
“며칠 전 우리 아빠가 술이 취해서 보통보다 조금 일찍 들어오셨길래, 내가 왜 아빤 매일 술만 잡수시느냐고 물었더니, 그게 다 우리들 때문이래.”
“정말이야. 술을 마시는˛ 것만이 아냐. 사우나하는 거, 호텔에 가는 거, 사생아 낳는 거…….”
“설마!”
“설마가 아냐.” 철순이는 현애보다 더 단호했다. “우리 엄마 말에 따르면, 우리 아빠는 회사 경리사원을 오 년째 상관해 왔어. 그리고 그 사실이 들통이 나자, 아빠는 그것이 엄마 탓이라고 말했어.”
“동물 서사시 같다, 얘. 늑대가 새끼염소 잡아먹는 거 말야.”
“맞아. 그것도 사람이 썼기 때문에 맞을 거야. 진짜 늑대는 아마 그렇게 비열하게 염소를 잡아먹진 않았을 거야. 아마 주린 늑대는 목마른 사람이 홀러가는 물을 떠마시듯 자연스럽게 새끼염소를 잡아먹었을 거야. 비열한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늑대의 사악함은 순전히 사람들의 해석이야. 사람들이 그들을 척도로 해서 내린 해석이야. 짐승들 세계에는 악당이 없어.”
“뭘 악당이라고 하니? 나쁜 짓 하는 것이 악당 아니니?”
“나쁜 짓 하는 것은 악당이 아니야. 나쁜 짓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은 나쁜 짓을 나쁜 짓인 줄 알고 하고, 짐승은 나쁜 짓을 나쁜 짓인 줄 모르고 해. 악당은 나쁜 짓을 나쁜 짓인 줄 알면서 좋은 짓인 것처럼 하는 사람이야. 아까 그, 사람이 지어낸 늑대가 바로 악당이야.”
“그럼 바보는 뭐니?”
“바보는 나쁜 짓을 좋은 짓인 줄 알구 하는 사람이야. 바로 악당의 밥이야.”
“아가씨!” 잠자코 맨 앞서 걷고 있던 장씨가 소리쳤다. 그는 길가 큰 바위의 한 끝에 걸터앉았다. 사람의 키만큼씩이나 큰 갈대풀들이 길 양편으로 우거져 있었는데, 한쪽에 바위 주위로 사람들의 발에 밟힌 빈 터가 나 있었다. 능선이 더 높은 산의 비탈로 바뀜에 따라서 시야가 다시 좁아졌다. 가까운 산등성이의 바람이 그 구불구불한 곡선 너머로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 조각들의 푸르스름함과 선명하게 대조가 되었다. 그들은 거기서 잠시 쉬었다. “아가씨는 아빠를 악당이라고 했어,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장씨가 분연히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자 마지막 보는 사람들한테. 장선생과 아줌마를 앞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더라면 그런 말 안 해요.”
“아빠에게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윤여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이죠.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얘기하지 않는 거나 같죠.”
“얘기 않는 거나 같은 얘기를 왜 하지?”
“참, 아저씨도! 얘기하지 않는 거나 같으니까 맘놓고 얘기했죠.” 현애가 말했다.
“얘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맘놓는 것이 목적이었단 말인가?”
“정말이에요. 어떤 말은 그 말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 때가 있거든요.” 철순이가 말했다.
“말이라고 다 하는 게 아니지.”
“물론이죠, 틀린 말은 해서는 안 되죠.”
“아니야, 옳은 말이라도 다 하는 게 아니란 뜻이야.”
“그래요. 옳은 말이라고 다 해서는 안 되죠. 옳은 말을 하다가 목이 달아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마 틀린 말을 해서 목이 달아난 사람들보다 더 많을 거에요.”
“반드시 목이 달아난대서가 아니야. 목이 제자리에 잘 붙어 있더래도, 바른 말이라고 나불나불 다 하는 게 아니란 뜻이야.”
“바른 말 한다고 모두 목이 달아날라구요. 세상에는 목이 달아나도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안 달아나도 못 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혀를 위해서 목을 희생하는 것도 썩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목을 위해서 혀를 희생하는 것도 꼭 잘한 짓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요. 하물며 목이 떨어질 위험이 없는데도 혀를 희생해야 하다니, 그건 어리석고 비겁해요.” 철순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 목숨만 생각하고 이 세상 살아가나, 남의 기분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한 목숨 안전하다고, 남의 기분이야 어찌 됐건 마구 떠들어대도 좋단 말이야?”
“남의 기분과 자기 목숨이라…….” 현애가 영감처럼 중얼거렸다.
“자기 기분을 위해서 남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밟아 버리는 수도 있어요.” 철순이가 말했다. “옛날, 페르시아의 왕이 서방경략을 할 때, 도중에 한 토호의 집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집주인이 다섯 아들들이 모두 대왕의 군대에 가 있으니 하나만 집에 머물러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자, 그 대왕은, 그는 그의 노예이고, 따라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그의 큰아들의 몸을 두 토막내서 길 양편에 내어걸도록 했어요.”
“페르시아 왕이 노예의 목을 친 것과 우리들의 얘기 사이에 무슨관계가 있지?” 장씨가 말했다.
“노예가 아니라 노예의 아들의 목을 친 거죠.” 현애가 말했다.
“노예의 아들이 곧 노예 아닌가?”
“맞아요.” 철순이가 말했다. “노예의 아들이 바로 노예죠. 죄 없는 아들이 노예일 수밖에 없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르니까요. 죄 없는 아들이 왜 노예일 수밖에 없을까요? 애비가 노예이기 때문이죠. 애비가 아들의 목을 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노예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말이야,” 장씨가 말했다. “아들의 목을 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노예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이죠. 아들의 목을 친 사람에게 아들의 목을 친 사람이 받아야 할 몫을 주는 사람이 어떻게 노예일 수 있겠어요?”
“그럼 누구나 그렇게 하면 될 거 아닌가?”
“그게 쉽겠어요? 그게 보통 일이겠어요?”
“그게 왜 어려울까? 아들의 목을 친 사람에게 고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왜 보통 일이 아닐까?”
“그게 바로 악당과 싸우는 일이거든요.”
“악당이라고? 아깐, 왕이라고 했지 않어?”
“자식을 잃은 애비나, 지어미를 빼앗긴 지아비가 그 자식, 그 지어미를 죽이고 빼앗은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면, 그 애비, 그 지아비는 노예이고, 죽이고 빼앗은 자는 왕이죠. 그 애비, 그 지아비가 고맙지 않다고 말을 하면, 노예는 자유인이 되고, 왕은 악당이 되죠.”
“왕이 악당이라고? 페르시아의 왕이 악당이라고?”
“왕은 악당이 아니죠. 노예가 자유인이 아닌 것처럼. 노예가 자유인이 되려고 하면, 왕은 악당이 되거나 물러가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죠.”
“거, 좀, 이상하다.”
“뭐가요?”
“아니, 어떻게 노예가 왕을 악당으로 만들 수 있겠어?”
“노예가 왕을 왕으로도 만들고 악당으로도 만들죠. 노예 노릇을 하면 왕이 왕 노릇을 하고, 노예가 노예 노릇을 그만두면 왕도 왕 노릇올 그만두어야 하는데, 노예 노릇 그만두기도 힘들지만 왕 노릇 그만 두기도 어디 쉬워야죠? 사실은, 노예 노릇 그만두기와 같은 일의 양면이에요.”
“노예 노릇을 하면 왕 노릇을 하고, 노예 노릇을 안 하면 왕 노릇을 안 한다? 그렇다면, 노예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 아니야? 악당이 끼여들 자리가 없지 않어?”
“맞아요. 끼여들 틈이 없는데 비집고 들어오니까 악당이죠.”
“어째 뱅뱅 돈다?”
그들은 제석단에 이르렀다. 그들은 무수히 늘어서 있는 고사목들을 지났었다. 고사목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하나만 서 있어도 신기했지만, 이제는 그것들의 숫자가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 앞에는 새로운 식물지(植物誌)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이 숨 쉬는 공기 속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능선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평탄한 길을 걷고 있어도 이미 평지의 밭두렁길을 걷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산의 높이는 그들에게는 단순한 물리적인 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의 깊이로 그들의 육신들의 마디마디 속에 박혀 있었다. 공중에 가득 차 있는 비범함은 대기의 압력이 낮아진 고산 현상 탓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물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경이였다. 그들은 조용한 홍분 속에서 장터목을 향하여 마지막 걸음들을 터벅터벅 옮겼다.
3 세석
그때 그녀는 감기를 앓고 있었다고 철순이가 말했다. “목이 붓고, 콧물이 흐르고, 그리고 온몸이 쑤셨어요. 독감이었나 봐요. 밖에는 장대 같은 빗줄기들이 어둠을 섬뜩섬뜩 가르며 쏟아지고 있었어요. 나는 그날 밤 빗발들이 비스듬하게 포도 위로 꽂히는 것을 주위의 어둠으로부터 도려내 준 자동차의 불빛을 잊을 수 없어요. 어머니는 죄인처럼 비를 맞으며 차를 잠아타고 빗속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요. 어머니가 크고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가방을 좁은 차의 뒷문으로 밀어넣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어요. 어머니는 일 년 뒤 자살을 했어요. 어머니가 이 겼어요.”
“자살이 이긴 거라니, 알 수가 없군.” 장씨가 비스듬히 누운 채, 천장을 이루고 있는 위층 바닥의 널빤지들 사이의 틈을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말했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 왔다. 신발 벗어요. 거, 신발 좀 벗어요. 가만있어요. 버너 좀 집어넣고. 신발 벗어! 쇠주 없소? 소주는 없다지 않소. 언제 없다고 했소? 입구에 써붙인 거 못 보았는교? 그럼 뭐가 있소? 자리 좀 미리 잡아 놓읍시다. 당신 혼자 편히 잠자라꼬 산장 세와 놓은 줄 아는 기요? 이따가 늦게 돌아오면 자리가 없을까 봐서 하는 소리요. 아무리 늦게 찾아와도 받아 주요. 자리가 없어도 받소? 자리가 없어도 받아 주요. 여기는 대피소요. 포개서 자고, 앉아서 자요. 또 호루라기 소리. 신발 벗어요. 신발. 현애는 눈앞에 대롱거리는 군화를 보았다. 아니, 등산화를 보았다. 누군가가 위층에 걸터앉아서 발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물 쏟아져요! 저만치 위층 바닥의 널빤지 사이로 물방울들이 주르르 홀러내렸다. 수통을 엎질렀어요. 마시는 물이요?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들락거렸다. 그들이 부려 놓은 등산짐들이 점점 불어 갔다. “오늘 밤도 편히 자긴 힘들겠어. 미리 좀 자두지 않겠소?”
“지금 그러려고 하고 있어요.” 그 옆에 누운 윤여사가 말했다.
“꼭대기를 일찌감치 다녀오기 잘 했죠?”
“우리가 정상을 정복한 게 한 시쯤이었던가?”
“한시에 꼭대기를 올라갔겠죠.” 윤여사가 대답하기 전에 현애가 끼여들었다. “설마 우리들이 산을 정복했다는 말은 아닐 테죠?”
“그럼 산이 우릴 정복했나?” 장씨는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산이 우릴 정복했다고 해야겠나?” 철순이가 장씨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그래, 산이 우릴 정복했다고 해야겠어?” 장씨가 다시 말했다. 그에게는 진술과 주장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정복으로 말하자면야, 우리가 산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산이 우리를 정복했겠지요. 산의 아름다움 앞에 우리들이 항복을 한 것이지, 산이 우리들 앞에 무릎올 꿇었어요? 우리들이 그 위에 올랐다고 산이 아파했어요? 우리들이 아파하고, 우리들이 괴로워했지요. 산이 우리들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었어요. 산이 우리들의 고통을 이긴 거죠.”
“우리들이 우리들의 고통을 이긴 것은 아닐까요?” 윤여사가 조심스럽게 현애에게 물었다.
“맞아요. 우리들이 우리들의 고통을 이겼겠지요. 산의 힘을 빌어서.”
“그런데 그 고통은 산이 준 고통이 아니겠어요? 산이 준 고통을 우리가 이겼다면, 어떤 점에서는 산을 이겼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장씨가 윤여사를 돌아보았다.
“어떤 점에서 그렇죠.” 철순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 점에서만 그렇죠. 그 점이란 바로 우리들의 입장이죠.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산이 고통을 주었죠. 그러나 산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준 적이 없어요. 주지도 않은 고통을 이겨 냈다고 해서 산을 이겼다고 한다면, 아무리 우리들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지만 산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산이 어떻게 생각하면 뭘 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지?” 장씨가 말했다. “산이 생각을 하기나 해?”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니까 우리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안 되죠. 물론 우리들의 생각이 우리들의 입장을 벗어나기는 힘들겠죠.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입장을 벗어나야 하는 이유에요.”
“역시 잠이나 한숨 자두는 게 낫겠어.” 장씨가 말했다. 그는 곧 철순이나 현애가 하는 말의 함축으로부터 안전하게 빠져나가 이내 코를 골았다. 윤여사도 곧 뒤를 따랐다.
“자니?” 철순이가 말했다.
“아니.” 현애가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철순이가 살며시 자리를 빠져나가자, 현애는 그녀가 누웠던 쪽으로 돌아누우며, 두 손을 내밀고, “나가지 마. 같이 나가. 같이……,”라고 중얼거렸다.
밖에는 아직 햇볕이 빛나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산장 주변 빈 터에는 사진들을 찍고, 천막들을 세우고, 버너에 불들을 붙이는 많은 사람들이 흙먼지를 풀썩이면서 법석대고 있었다. 비탈진 곳 저만치 아래에 샘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강철, 알루미늄, 플라스틱, 쭈그럭비닐 따위로 만든 여러 가지 모양의 물통들을 들고 십 미터도 넘게 산장 입구께에까지 열을 짓고 있었다. 판잣집 산동네, 물차 기다리는 것 같다. 그릇들이 너무 작잖어? 양동이가 아니잖어? 그릇들만 너무 작냐? 아귀다툼도 없잖어? 새치기도 없다, 그지? 먹고 살자판이 아닌 놀자판에서 새치기가 웬말이냐? 극장은 놀자판 아니냐? 정말! 그런데, 왜 이렇게들 여유가 있다지, 너두? 그러게 말이야. 내가 왜 이렇게 여유가 있지? 다들 느긋하니, 나라고 빠질 수가 없었던가? 저 사람들도, 너처럼, 택시 잡을 땐 앞뒤 재지 않았을 거로구만. 하루 일 끝내면 피곤하잖어? 지금은 안 피곤하냐? 더 피곤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들 점잖지? 새치기도 없고, 있더래도 못 본 척해 줄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어. 올라올 때 고행들을 해서 그럴 꺼나? 네 시간 반 고행해서 득도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누가 득도랬냐? 사람들이 선량해진 건 분명해. 맞아, 등산객들 중에는 도둑이 없다더라. 도둑은 등산을 오지 않는단 말이냐? 아니, 도둑도 등산을 오면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야. 사람은 좋은 공기를 실컷 마시고 팔다리를 부지런히 놀리면 현명해진다더라. 산소공급이 좋아서 뇌활동이 전량 가동되냐? 전량이야 가동될라구? 산에 오르자면, 팔다리야 부지런히 움직일 거고, 숨이 가빠서 공기야 허파 껏 들이마실 거고, 공기야 맑다 못해 멀걸 테니, 바보라도 현명해질 수밖에 없겠다. 현명해진 걸거나, 선량해진 걸거나? 선량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야. 현명해진다고 다 선량해지는 것도 아닐 테고. 물론이야. 현명하다고 다 선량하다면, 선량해지는 게 어렵달 것이 없지. 선량해지는 거가 두뇌의 왕성한 회전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면, 지금 저 사람들의 저 선량한 모습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현명해졌다는 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얘기이고, 그 어리석음 중에는 불량함도 들어 있다고 하면 되겠지. 그렇구만. 평소, 아득바득 불량을 떤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 불량함을 깨달았으면 깨달았으니까 분명히 현명해지긴 했는데, 불량을 깨달으면 그게 곧 선량일까? 선량은 행동이고, 앎만 가지고는 부족하지 않겠어? 물론이야. 저 사람들이 지금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
철순이는 목이 말랐다. 그녀는 비탈을 내려갔다. 물 한 모금 마시자고, 열 사람 스무 사람 꽁무니 뒤에 서서 기다리는 것은 현명치 못할 뿐 아니라 부도덕했다. 물은 시멘트 옹달샘으로부터 구리관을 통하여 가늘지만 힘찬 줄기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돌투성이 산몬댕이에 마르치 않는 샘이 사철 숙아나고 있는 것은 이적이었다. 교련복바지를 입은 한 학생이 씻고 있던 알루미늄 밥그릇 하나를 깨끗이 헹궈서 그릇 가득히 물을 떠주었다. 물값 안 받아요. 그 학생이 말했다. 그녀는 공짜로 그 물을 맛있게 받아마셨다. 왜 물값을 안 받아요? 에? 아, 예! 그 학생은 물그릇을 돌려받았다. 여기서는요, 딴 데서 소리가 났다. 철순이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좋은 건 다 무료거든요. 또 한 학생이 쭈그리고 앉아서 기름때 묻은 국그릇들을 흘러가는 물에 씻고 있었다. 물맛 좋죠? 그 학생이 계속해서 말했다. 서울서는요, 돈 주고도 못 먹어요. 정말 그렇네요. 공기도 그렇구요. 물맛, 공기맛뿐만 아니라, 햇볕, 저녁놀, 안개, 구름, 달, 철쭉꽃, 단풍나무, 흐르는 물, 불어오는 바람, 다 그래요. 형! 지이십경이 뭐뭐지? 너가 방금 다 말했잖어. 지이십경이 다 있어요? 그럼은요. 십경뿐이겠어요? 백경도 넘겠지만 대표로다 열 개만 뽑았겠죠. 백 개나? 아니, 열 개요. 열 개도 많은데요. 난 하나도 모르거든요. 단양에도 팔경이 있고, 작은 섬 선유에도 팔경이 있는데, 삼도에 걸쳐 있는 삼신산에 십경이 뭐가 많아요? 야, 넌 조그만한 게 왜 어른 냄새를 피우냐? 헝, 내가 냄새를 피워? 어른 냄새가 아니라, 바로 어른스런 거야. 덩치만 크면 어른인 줄 알어, 이게? 너, 단양팔경 알어? 그걸 누가 몰라. 착 그건 나두 알지. 선유팔경은 뭐냐? 선유팔경은 말야, 잘 들어, 형. 삼도귀범에 평사낙안이요, 선유낙조에 장자어화라. 월영단풍에 명사십리요, 망주폭포에 무산십이봉이라. 야, 이게 제법이야. 지이십경은 뭐냐? 내가 다 말했다며? 야, 문자를 써야지, 떨어지는 물, 불어오는 바람, 하면 어떡하냐? 그게 더 좋은데요? 거봐, 그들은 며났다. 하나는 식기들을 챙겨들고 또 하나는 큰 그릇 하나에 씻은 쌀과 물을 담아서 들고 갔다. 우리 둘이 식사당번이거든요.
“어디 갔었니?” 현애가 말했다. 그녀는 아래충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물 마시러.”
“물?”
“그래, 물.”
“물 마시러 갔었니?”
“그래.”
“그런 걸, 난 널 찾으러 촛대봉에까지 갈 뻔했다.”
“촛대봉은 낼 아침 일찍 가기로 했잖니.”
“먼저 가는 수도 있지 않니, 얘.”
“뭣 하러 먼저 가니?”
“그걸 글쎄 모르겠단 말야.”
“넌 잠이나 자지 않고 왜 딴 걱정이니?”
“잠자러 이 꼭대기에까지 올라온 거니?”
“우릴 두고 하는 소린가?” 장씨가 벽을 향해서 누운 채 말했다.
“하긴 나도 잠잘 데가 마땅찮아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지. 아무리 무료 숙박소지만.”
“푹 주무세요.” 철순이가 말했다. “주무시는 것도 산을 보는 한 방법이에요.”
“자면서 산을 보니? 자면서 도대체 뭘 볼 수가 있니?”
“넌 장님이 점치는 것도 모르니? 너는 장님의 먼 눈앞에 펄쳐지는 미래의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니?”
“시이불견이니?”
“그 반대지. 보고도 못 보니까, 못 보고도 보는 거지. 가까운 데 것을 보느라고 먼 데 것을 못 보니, 먼 데 것을 보기 위해서 가까운 데 것을 못 보는 거지.”
“천문학자가 별 쳐다보고 걷다가 개천에 빠진다더라.”
“전주 남쪽에 모악이라고 하는 표고 구백의 아름다운 산이 하나 있는데, 주말에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꼭 이 산에 올라가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르고 또 여러 번 오른 사람들도 많지만, 이 산꼭대기에서 서해의 고군산열도가 보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들은 밝은 날, 이 산을 올랐기 때문이야. 고군산열도는 흐린 날에만 보였어.”
“정말이니? 멀리 보기 위해서 개인 날 산에 가는 거 아니니? 믿을 수가 없다. 그 산이, 혹시, 계룡산 버금가는 신흥종교 발상지 아니니?”
“흐린 날에만 보인다고 해서, 흐린 날에는 항상 보인다는 말은 물론 아니야.”
“그렇지? 흐린 날이라고 항상 보이는 건 아니지? 신들렸을 때만 보이는 거지? 이제 실토를 하는구나. 흐린 날이 맑은 날보다 더 잘 보이자면 무슨 농간이 있어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내가 아는 그 사람은 트인 산이 아니라 막힌 산을 보자고 흐리고 비 오는 날 그 산에 갔던 거야. 안개와 구름으로 눈앞이 안 보이는 산을 보자고 갔던 거야. 안 보이는 산을 보자고 갔던 그에게 어느 날 하늘 한쪽이 벗겨지면서 바로 눈앞에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섬들이 보였어. 그것은 신들릴 일이었고, 농간이라면 큰 농간이었어. 그는 그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뒤로 그는 비만 오면 그 산으로 달려갔지만, 고군산열도는 좀처럼 안개와 구름으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축복이란 자주 있는 게 아니거든.”
“아, 잠을 깨서 아쉽고 아쉽도다.” 장씨가 부시시 일어나 앉으면서 말했다. “비몽사몽간에 한 마리 학이 되어 만학천봉을 훨훨 날았더니, 한번 잠을 깨고 하계로 귀양 와서 날개 잃은 적선되매, 부질없다, 구만리 장천을 나는 백학의 꿈이여, 대붕의 뜻이여!”
“아저씨, 아저씨, 장씨 아저씨, 지금 꿈꾸세요? 주무세요?” 현애가 물었다.
“내가 꿈을 꾸냐구? 내가 자느냐구?” 장씨가 눈알을 말똥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꿈을 깼다고 한 말이 잠꼬대로 들렸단 말인가? 내가 꿈속에서 꿈을 깼다고 말했던가?”
“꿈을 깼다고 하는 말을 꿈속에서처럼 하시니까 그렇죠.” 철순이가 말했다. “말하는 소식과 말하는 방법이 서로 반대 되면, 대개 방법을 믿죠. 방법이 소식을 정하거든요. 그런데 만학천봉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분명히 만 골짜기, 천 봉우리였어. 그 위를 내가 훨훨 날어갔어.”
“아직 잠이 덜 깼다.” 현애가 말했다.
“지리산의 십경도 한눈에 보셨겠어요.” 철순이가 물었다.
“십경이 문젠가, 만학천봉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지리산 십경이 뭐니?” 현애가 물었다.
“글쎄, 그걸 나두 모르겠어.”
“지이십경 말인가?” 장씨가 말했다, “그거 내 뒤꽁무니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지.”
“아직 잠이 덜 깨셨어.” 현애가 중얼거렸다.
“이게 그거 아닌가?” 장씨가 손수건을 꺼내듯이 뭘 꺼내 보였다. 손바닥만한 크기로 두 겹 네 겹 접은 종이였는데, 쭈그러지고 모서리가 해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 겹 두 겹 펼쳐서 안경을 끼고 들여다보았다. 두 처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윤여사가 살며시 일어나 앉아서 무슨 영문인지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여기 있고만.” 장씨가 말했다. “천왕에 일출이요, 반야에 낙조로다. 칠선이 계곡이니, 불일은 폭포로다. 연하 선경이요, 벽소 밤달이라 노고는 구름바다요, 섬진은 맑은 물이라. 세석에 척촉 피니, 직전에 단풍진다.”
“그게 뭐에요, 아저씨?” 현애가 말했다.
“아저씬 산을 세 번 보셨어요.” 철순이가 말했다.
“그건 어제 입구 가게에서 산 국립공원 안내도 아니에요?” 윤여사가 말했다.
“삼백 원 주고 샀지.” 장씨가 말했다.
날이 저물자 산장에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과 차지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위아래층, 통로 양편에서 심심치 않게 실랑이가 일어났다. 끼여들 틈이 넉넉했을 때는 끼여두는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조심들을 했지만 점점 그 틈이 비좁아지자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너만 편히 자고 싶냐, 나도 조금 자야겠다. 잠깐 나갔다 오면 자리가 없어지고, 모로 누웠다가 돌아누우면 두 팔이야 배 위에 얹으면 되었지만, 어깻죽지 놓을 데가 없었다. 통로 바닥도 만원이 되었다. 공중에다가 그물을 치고 대롱대롱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서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붙였다. 이 고생을 하자고 나왔다냐, 잉. 집 나오면 고생이여. 안 나오면 되제, 잉. 안 나오면 산천경개는 언제 구경헌다냐? 지리산을 우리집 앞마당에 떠다 논달 수도 없고, 나오기는 밸 수없이 나와야 허겄네, 잉. 내사마 몬 찾겠다. 왼쪽에 안 있나. 내 손이 지금 왼쪽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다 아이가. 왼쪽 아니모 오른쪽 아니겠나. 지가 가모 어딜 갔겠나. 가 봤자 배낭 속 아이가. 배낭, 배낭 카지 마거라. 배낭 속에 집이 한 채 들어 있다 카이. 뭘 찾는다요? 묵다 남은 캡틴큐 병을 찾을라꼬 시방 저러지 싶어예. 면 생각이 솔고시 나는 개비그만요, 잉. 꼭 캡틴큐여야 헌다요? 어데예. 우리덜이 마시던 기 고마 그기 돼놔서 하는 소리 아닌교. 아이야, 거 베리나인 남은 거 있지야? 존 말로 헐 때 이리 내놔라. 홀짝 해불자야. 니가 그걸 냉겨 놓고 잠이 오겄냐, 잉. 우린 종주 코스로 가요. 노고단까지 사십오 킬로미터, 그러니까 백 리가 더 되죠. 왕서방면이 전망이 좋았었다구요. 매상도 오르기 시작했고, 광고에 천만 원 이상이나 이미 부었었다구요. 그런데 왜……? 왕씨 화수회에서 들고 일어선 거죠. 중국면은 그럼 대만 대사관에서 들고 일어섰나요? 내일 아침 일찍 안개 속으로 해뜨는 것을 잡아야 되거든요. 설악산에서 동해로 솟는 해를 잡아 가지고 반응이 좋았거든요. 사진이 빠지는 대로 물건판매에 영향이 오거든요. 옛날 군대 있을 적에, 육상선수였는디 말이요, 그때는 선수들이 육본휼병감실에 소속헐 때요, 이태리에 세계군인체육대회에 갔었단 말이요. 시합에는 다 져쁠고, 셋이서 로마구경이나 허자고 숙소를 나와 가꼬는, 택시 한 대를 하루 빌렸단 말이요. 그때 십 리란가 오십 리란가 잊어뿌렀소만, 아, 이 자식이 선금을 받덩만 차에 홀딱 올라타가꼬는 발동을 걸고 그냥 내뺀단 말이요. 내가 달음박질 선수 아니요? 얼렁 쫓아가서 나도 차를 탔지라. 저것들이 필시 몸이 둔해서 차를 따라잡지 못할 것인디 어쩐다냐 험시롱 뒤를 돌아보는디, 아, 차가 안 간단 말이요. 붕붕 소리만 나제 헛바쿠만 돌고 있는디, 운전수 쪽
문이 열림시롱, 소두방 뚜껑 겉은 유도선수 손이 들어와 가꼬는 운전수 멱살을 거머쥐고 끌어냅디다. 또 한 사람은 역도선수였는디, 차 뒷밤바를 불끈 들어올리고 용을 쓰고 있습디다. 나는 지금 중학교에서 체육선생을 허요.
“장선생님, 장선생님은 진짜로 사업을 하세요? 장선생님의 딸은 진짜로 미국에서 호화 유학을 하고 있어요? 장선생님은 진짜로 돈이 많으세요? 진짜로 방탕하세요?” 철순이가 윤여사를 사이에 두고 장씨에게 물었다.
“왜? 가짜 같어?”
“아니요. 진짜 같아요. 장선생님, 시인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나처럼은 안 생겼겠지.”
“그래요. 장선생님처럼 살찌고 유복해 보이고 자신만만하고 조금 파렴치하고, 그러진 않을 거에요. 장선생님은 시인에게 있을 법한 특징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세요. 그런데, 바로 그게 장선생님이 혹시 시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문득 들게 해요.”
“내가 시인이라! 허,허.”
“왕년에 시인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지 마세요. 왕년을 묻고 있는 게 아니에요. 왕년에 시무이었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에요.”
“가만있자, 어디서 시인 이야기가 나왔지?”
“나는 이것이 처음 등산이에요. 둥산이라면 남산도 올라간 적이 없어요. 첫 등산에 섬을 제외한 남한의 최고봉에 왔어요.”
“나도 비슷해.”
“산 밖에서 산을 보았을 때, 산은 도시 주변에 그리고 농촌 주변에 있었어요. 산 속에서 산을 보았을 때, 도시도 농촌도 없고 온통 산뿐이었어요. 사람들은 도시에서는 산을 생각하고, 산에서는 도시를 생각하나 봐요. 도시에서 산을 생각하는 것은 산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고 대개 열등한 사본이었어요. 산에서 도시를 생각하는 것은 도시가 눈앞에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절실하고 강렬했어요. 도시에서 도시를 생각하는 것은 산에서 산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무에요. 도시에서 산을, 산에서 도시를 생각하는 것이 시에요. 나는 지금까지 시를 도시에서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했었나 봐요. 시는 싱겁고 쓸모없고 사치스런 것이었어요. 시를 산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하자, 시가 그렇게 맵고 쓰리고 아릴 수가 없어요. 우리들의 생활은 도시에서 생각하면 사무지만, 산에서 생각하면 시예요. 도시에서 산을 생각하고 얻는 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였어요. 앞마당 얘기, 술병 찾는 얘기, 광고사진 찍는 얘기, 라면 이름짓는 얘기, 운동선수 택시 타는 얘기는 시내에서 들었으면 생활 주변의 잡담이었어요. 첩첩산중의 꼭대기에서 들었을 때, 그것들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진술들이었어요. 도시에서는 인간들이 커요. 그들에 대해서 웬만큼 큰 목소리로 얘기해 봤자 크게 들리지 않아요. 여기서는 인간들이
작아요. 그들에 관한 조그마한 얘기도 크게 들려요. 우리들이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는 동안 인간이 계속해서 작아졌어요. 얼마나 작아졌는가를 미처 몰랐을 뿐이에요.”
“사람이 작아지면 사람 사는 얘기가 커진단 말이지? 이야기가 커지면 잡담도 시가 되고? 그렇다면 나도 시인이지.”
“물론이죠. 사람이 작은 한.”
“등산만 하면 되는 거지? 산에서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등산과 산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단 말이야.”
“주말에 등산을 하고, 주중엔 돈을 벌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그거 안 될 게 전혀 없죠.”
“거, 참 편리하군. 일요일에 교회 가는 셈치고 나오면 되겠어. 그렇다면 시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라구?”
“주말마다 귀찮게 산에까지 올 필요도 없어요.”
“산에 와야 사람이 작아지는 거 아니야?”
“물론이죠. 그래서 대개 보통사람들은 입산수도를 하는 거겠죠. 그렇지만 반드시 대은은 은어시래서가 아니라, 저자 한복판에서도 사람은 작아질 수가 있어요.”
“그야 눈이 트인 사람들 얘기고.”
“눈이 트일 필요도 없어요. 헛것만 안 보이면 돼요.”
“눈에 헛거미가 잡히면 돌아갈 때가 됐단 얘기지.”
“맞아요. 눈에 헛것이 보이면 죽어야죠. 사람이 작아져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람은 원래 작아요. 도시에서고 산에서고, 원래가 작았어요. 다만 서로 모여서 저자를 이루고, 산답시고 북적거리는 사이에, 욕심이 생겼고 눈에 헛것이 씌어서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거죠. 사람들은 서로를 사실에서보다 더 크게 보게 되었고, 크게 보이기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에는 싸움이 어떤 형태로든지 끊이지 않는 건 그 때문이죠. 나는 겨울 해수욕장을 좋아해요. 여름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여들면 반드시 탐욕이 따라오거든요. 텅 빈 겨울 바닷가의 무모함 속에 묻혀 있으면, 사
람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 것 같아요. 산속에서 사람이 작아진다는 말은 사람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려 한다는 뜻일 거에요. 제대로만 보인다면 산에까지 올 필요가 없죠.”
“그게 쉬울까?”
“글쎄요.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겠지요.”
“그게 말이 되나?”
“안 되죠.”
“눈에 허깨비가 씌어서 사람의 꼬락서니가 제대로 안 보인다고 했지? 그리고 허깨비가 보이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했지? 그 죽을 때가 평생 간단 말이야?”
“평생 가죠. 간다간다 하면서 아들 셋 낳는다는 말도 못 들으셨어요? 죽는다죽는다 하면서 평생 사는 거에요. 죽지 못해 한 평생 사는 거에요. 집단적으로 보면, 말세를 사는 거에요.”
“산에 오는 게 낫겠어. 등산으로만 된다면.”
“그렇게 시인이 되고 싶으세요?” 윤여사가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그녀는 벽 옆에 누운 장씨와 철순이 사이에서 잠이 든 것처럼 보였었다.
“시인이 되고 안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란 말씀이에요.”
“지금까지 죽었어요? 지금까지 산 것은 산 것이 아니세요?”
“지금까지 살았지. 살긴 살았지만 산다고 다 사는 건 아니란 말씀이야.”
“누군 두 세상 살아요? 하루 밥 몇 끼 먹기는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 더라구요.”
“이 봐, 말 좀 해. 내가 하니까 안 되는데?” 장씨가 철순이를 찔벅거리면서 말했다.
“아니죠. 말이란 하기보다 듣기가 더 어려워서 그래요. 장선생님이 잘 들어 주셔서 얘기가 됐었죠. 아주머니도 잘 들어 주시면 얘기가 될 거에요. 지금은 졸려서 별로 들어 주고 싶지가 않으신 모양이에요.”
“그래? 듣기가 어려울까? 난, 듣기가 쉬울 것 같은데? 내가 뭘 했게? 그냥 들어 주면서 이따금씩 바보 노릇 한 것밖에 더 있어?”
“어머, 바보 노릇이 얼마나 힘든데요? 듣는 사람이 영리하면 얘기가 안 되거든요.”
“그러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갇단 말이야. 말을 잘 하자면 남을 병신 만들어야 하는데, 남 병신 만드는 것보다야 제가 병신 되는 게 훨씬 힘들지, 암.”
“바보 노릇 그만하시고, 주무시는 게 어떻겠어요?” 윤여사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럴까? 그만 잘까? 옛날 우리집 선친께서 항용 하시던 말씀이, 박만석이는 네 끼 먹냐? 였거든.”
“맞아요. 박 아무개라고 네 끼 먹는 게 아니죠.” 철순이가 말했다. “박아무개라고 ㅡ”
“빅·, 만, 석, 이야.”
“박만석이라고 네 끼를 먹느냐,는 말은 그 뒤에 박만석이는 네 끼를 먹어도 좋다, 네 끼를 먹을 수도 있다, 네 끼를 먹는다,는 말을 감추고 있어요. 그것은 박씨를 잘못 본 거죠. 그는 하루 네 끼를 먹을 수가 없어요. 왜 그를 사실에서보다 더 크게 생각했을까요? 그가 가지고 있는 땅, 아마도 한해 소출이 만석은 될 광대한 그의 땅이, 가난한 우리들의 탐욕스러운 눈으로 하여금 그를 제대로 볼 수 없게 했던 거죠. 우리들은 그를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와의 모든 관계를 그런 생각에 바탕을 두고 맺어 가면서, 세상을 살아가죠. 그런 생각이, 그가 사실에서보다 더 크게 보이는 그런 생각이 그에 대한 우리들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죠. 그에 대한 태도뿐이겠어요? 우리들의 부모형제에 대한 태도, 이웃에 대한 태도, 나라에 대한 태도, 세계에 대한 태도가 그에 대한 그러한 태도에 의해서 틀이 잡혔어요. 우리들의 인생이 그러한 무수한 생각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가 네 끼를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거죠. 그도 우리들처럼 세 끼밖에 못 먹는다는 생각이 떠오른 거죠. 이건 아주 쉬운 생각이죠. 날달걀을 세우기만큼이나 쉬운 이 생각이 왜 그때까지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사실은, 박 모가 하루에 네 끼를 먹지 못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박가가 하루에 네 끼를 먹는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가 네 끼를 먹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전율처럼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통쾌함은 웬일일까요? 하루에 그가 네 끼를 먹을지도 모른다는 이 맹랑한 생각에 얽힌 관계들이, 그 생각에 바탕을 둔 태도들이 너무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죠. 그것들은 일이 년이나 일이십 년이 아니라, 한 세대 두 세대, 백 년 이백 년, 천 년 이천 년을 굳어져 왔어요. 어떤 사람의 밥통의 크기에 대한 깨달음은 단순히 한 생리학적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대대로 물려받은 한 유산의 파괴였어요. 그 생리학적 허위가 맹랑하면 맹랑할수록, 파괴된 유산의 위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강요할 수 있었겠어요? 장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혁명을 선언하셨어요. 만일 그것이 혁명적이 아니었다면, 그건 이미 그것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돌아가신 아버님의 그 말씀을 기억했던 경우들 중에서, 특히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하나 있는데, 그건 거금 삼십 년 전에, 논산에서 신병훈련을 받을 적에 나의 동료 훈련병 하나가, 엎드려뻗쳐를 한 채, 소대의 악질 선임하사에게, 누 뱃가죽에는 철판 깔았냐,고 소리칠 때였어. 나는 그 훈련병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그의 그 말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고, 또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선친의 그 말씀을 기억했던 사실도 오늘날까지 잊을 수가 없어. 그 병장의 뱃가죽은, 훈련병의 뱃가죽과 마찬가지로, 한 치 쇳조각이 뚫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것은 아니었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어. 그 상식적인 발언이 같이 기합을 받던 훈련병들의 둥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게 했어. 물론 상식 때문이 아니었지. 그것은 소대에 대한 반란이었어. 훈련병들이 소대 선임하사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반란이란 말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어. 소대에 대한 반란이 소대에 대한 반란으로 그치겠어? 그것은 훈련소에 대한 반란이었고, 육군에 대한 반란이었고, 육군을 중요한 기관으로 삼는 국가에 대한 반란이었어. 우리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지. 총살까지는 아니더라도 군법회의와 영창은 쉽게 머리에 떠올랐어. 그런데, 또 한번 놀랄 일이 벌어지더군. 선임하사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기합 하나 견디지 못하는 졸장부’를 데리고 대포를 한잔 하기 위해서 면회장으로 나간 거야. 그날은 일요일이고 면회날이었는데, 우린 허가 없이 나이롱 면회를 나갔다가 기합을 받았던 거야.”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해가 빠지자 드는 사람들은 늘고 나는 사람들은 줄어서 초저녁부터 만원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정 너머까지 배낭을 짊어지고 들어서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찾아냈다. 한밤중이 되자 드는 사람들이 뜸해졌다. 만원인 대로, 바람과 이슬을 피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별로 내쫓지 않았고,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찾아드는 사람들이 끊어졌다. 젊은 산장지기의 말이 적중한 셈이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면 다 받아 줘요.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든지 포개자는 고생이 많았든지, 둘 중의 하나였을 테지만 포개질 수 있을 만큼만 찾아들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배낭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말고도 잠깐씩 크고 작은 용무로 드나드는 사람들과 매점에 소주와 라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았고, 이야기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도란도란 이어졌고, 음식 먹는 소리들, 술 권하는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 와서, 한밤중인데도 초저녁 같은 생동감이 가득 차 있었다. 코고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코고는 소리는 초저녁에도 났었다. 이따금씩 어느 구석에서 손전등에다 시계를 비춰 보고 누가 아, 벌써 몇 신데 하고 말을 하면, 그때사 사람들은 밤이 이슥한 줄을 깨달았다. 전지로 켜지는 전등에는 여러 가지 꼴들에 여러 가지 기능들이 있었다. 수첩에 아마 비망록을 끄적거려 넣고 있는 사람의 머리맡에는 탁상시계만한 크기의 네모난 둥이 벽등처럼 걸려 있었고, 둥글고 길쭉한 손전등들은 주먹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 주먹 안으로는 절반도 다 못 들어가는 큼지막한 것, 머리가 몸통과 크기가 비슷한 것, 몸통보다 더 큰 것, 들것처럼 손잡이가 붙어있고 머리만 뎅그렇게 큰 것 등이 있었는데, 느닷없이 어둠을 가르고 천장이며 구석이며 남의 얼굴이며 배낭이며를 홱홱 비춰 댔고 네댓 사람 일행과 함께 일어나 앉아서 새벽 일찍 떠날 차비를 챙기는 남자의 홀렁 머리털이 물러난 이마 한복판에는, 광부들의 작업등처럼, 둥글납작한 탐조등이 달라붙어서 그가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는 데만을 따라다니며 밝혔다. 천장에 전등만 박혔으면, 영락없이 왕년의 야간열차야. 맞어, 옛날에 서울 가는 밤차, 좀 만원이었어? 선반에까지 사람들이 기어 올라갔었지, 나는 꼬박 서서 갔지만. 사람들은 파김치가 되어 펴지다 못해 처지고. 입을 헤벌리고 침을 홀리며 자는 사람들. 퀭한 눈으로 멀뚱멀뚱 허공을 쳐다보는 깬 사람들. 여기 이 사람들은 지쳤기는 마찬가질 톈데, 그렇게 험악해 보이진 않는군. 보이진 않지, 천장에 불빛이 없으니까. 불빛 환한 데와 캄캄한 데, 어느 곳이 더 피곤할까? 밝으면 우선 눈이 피곤할 거야. 부시고 보이는 게 많을 테니까. 그럼 어둠은 포근하겠다. 그 대신 답답하지 않을까? 손전등이 있잖아. 그걸 누가 켜놓나? 켜 놓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언제든지 켤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전혀 켜지 않더래도 언제든지 켤 수 있는 것과 전혀 켤 수 없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큰 차이는 또 있다. 기차는 달리고, 산장은 서 있다. 맞았어. 기차는 사람들을 조리질하고, 산장은 사람들을 씨암탉처럼 안아 준다. 그럼 우리들이 병아리새끼들이란 말이냐? 다 병아리들일라구, 덜 깬 달갈도 있을 테지.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찻간에서는 꼼짝달싹을 않고, 멈춰 있는 산장 속에서는 꼼지락꼼지락한다. 마음이 놓여서겠지. 어머니 품안에서처럼.
“사실보다 더 크게 보는 것만 문제니?” 현애가 말했다. 그녀는 몸을 꿈틀거리면서 옆엣사람들의 어깨들로부터 제 것을 빼내고 일어나 앉았다.
“자지 않고 있었니?”
“어떻게 자니? 넌 네 끼 먹냐? 넌 배에 철갑 쳤냐? 이게 사람을 제대로 보아 주는 거니? 사람을 너무 작게 보아도 문제가 되지 않겠니? 사람은 신만큼은 크지 않겠지만, 말 못 하는 미물들보다야 더 크지 않니? 사람을 꼭 신 옆에만 두고 봐야 하니? 물론, 벌레 옆에 두고 보자는 얘기는 아니야. 경천애인이라는데, 사람을 사랑하자면 꼭 작게 보아야 하니? 크게 보면 미워하고 싸우게만 되니? 크게 보아야 존경을 하게 되고, 존경이 사랑에 필수적인 거 아니니? 물론 작은 것을 크게 보았다고 그게 진짜 존경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작은 것을 크게 보았으니 작게 보아야 한다는 건지, 큰 것을 작게 보았으니 크게 보아야 한다는 건지, 어느 쪽이니? 아니,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니? 작은 것을 크게 보아도 병, 큰 것을 작게 보아도 병, 병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 않니? 자니?”
“그러려고 노력중이야. 작은 것이! 크게 보이는 것과 큰 것이 작게 보이는 것은 같은 현상이야. 제대로 못 보았다는 점에서 같은 현상이고, 작은 것이 크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큰 것이 작게 보인다는 점에서도 그래.”
“난 보는 것이 문젠데, 넌 보이는 것이 문제니?”
“보는 것은 행위이고, 보이는 것은 현상이야.”
장씨와 윤여사는 잠이 들었다. 남자는 코를 골았고, 여자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했다.
그날 아침 이른 새벽에 장터목에는 짙은 안개가 꼈다. 진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뿌연 물방울들을 등성이 너머로 밀어냈지만, 연기처럼 안개는 계속 밀어닥쳤다. 불일폭포로 해서 쌍계사로 빠지겠다는 패거리가 제일 먼저 행장을 수습하고 떠났다. 고자베기 잠을 잔 사람들은 더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이 구석 저 구석 한 무더기씩 빠져나가는 통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철순이는 쌍계사패들이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잠을 깼다. 변소에 가면서 보니 네시였다. 안에서는 입은 채 아무것도 덮지 않았어도 더웠는데, 밖은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옷섶 사이를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안개 때문에 잘 몰랐지만, 결어가면서 자세히 보니 산장 주변의 빈 터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가지각색의 천막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조심을 했지만 비스듬히 쳐진 천막끈에 여러 번 발이 걸렸다. 그럴 때마다 지붕들이 후들후들 떨었다. 불 켜진 천막들이 많아서 이른 시각인데도 일찍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변소 앞에는 사람들이 사오 미터 열을 서 있었다.
“떠나시게요?” 그녀가 돌아왔을 때, 윤여사는 옷을 다 차려 입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고, 현애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장씨는 수통에 물을 채우러 나간 모양이었다. 그들은 잠을 더 붙일 수 없을 바에야 새벽공기를 가르며 걷는 것이 낫겠다고 합의를 보았다. 운이 좋으면 연하봉이나. 촛대봉에서 일출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밖은 봄비고 있었다. 천왕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처럼 그 반대 방향으로 세석을 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순서는 어제 세석단에서 꽃구경을 하고, 여기서 잠을 자고 지금 천왕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이 정석인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안개가 자욱해서야 해돋이가 되겠어?” 샘에서 돌아온 장씨가 말했다. “해돋이는 되지만 해맞이가 안 되겠죠.” 현애가 말했다. “해 뜨는 것이 안 보이면, 뜨나마나 아니야? 야, 따끈한 커피 한잔 생각나는구만.” 장씨가 코를 벌름거렸다. 불켜진 천막들 안에서 버너 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장선생님, 손에 더 좋은 것을 들고 계시면서 그러세요? 철순이가 말했다. “뭐, 이거?” 장씨가 물통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들은 약수로 배를 채운 다음 산장을 떠났다. 이십 미터쯤 가자 천막촌이 끝났고, 이십 미터쯤 더 가자 사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하고 캄캄했으므로 그들이 너무 일찍 떠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 다져진 오솔길이 능선을 따라 희뿌연 어둠 속으로 나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저벅저벅 들으면서 말없이 걸었다. 이따금씩 마주쳐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개 두셋씩 패를 지어 왔다. 동이 조금씩 텄다. 그들은 등산의, 특히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의, 아름다움은 다 가지고 있었고, 산을 오르는 것의 결점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산이 높아서 숲은 비범하고 공기는 맑았고, 이른 시간이어서 어두움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조용함은 신비스러워 보였다. 높은 산이었지만 이미 다 높아 버렸기 때문에 더 오를 것이 없었다.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한결 가벼웠다. 떠날 때는 새벽 찬 기운에 위아래 턱들이 떡떡 부딪쳤지만, 몸이 풀림에 따라 땀이 났다. 아침 안개와 이슬에 땅이 촉촉이 젖었지만, 맑은 날을 예고하는 마른 공기가 그들의 허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지난밤의 수모는 갚고도 남겠어.” 해돋이를 보기 위해 촛대봉으로 올라갈 때 누군가가 말했다. 안개가 짙기로는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밝아지긴 밝아졌지만 해가 어디서 솟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세석에 닿은 것은 여섯시 무렵이었다. 고개를 빨딱 넘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넓은 분지의 푸른빛 위에 여러 가지 꼴들의 빨강 파랑 천막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핏빛처럼 진한 빨강과 물빛보다 더 푸른 파랑이 풀들의 푸른빛 위에서 아침의 첫 햇살을 받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풀들 속에는 홀린 피보다 더 끈끈한 붉은 꽃들이 들불처럼 번져 있었다.
4 한신계곡
그들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땅에는 날이 밝았고 안개가 없었다.
“닫힌 데서 열린 데로 나온 것 같다.” 현애가 말했다.
“안개가 걷혔으꺼나, 처음부터 깔리지 않았으꺼나.” 철순이가 말했다.
“여기서 화랑들이 무술을 익혔다는 거야?” 장씨가 말했다.
“여기서요? 통일신라 때였을까요?”
“삼국시대였겠지.”
“삼국시대! 그땐 여기가 전방이었을까요? 여기가 국경지대였을까요?”
“그럼 여기서 싸웠을까,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그리고 피를 홀리고.”
“여기서? 바로 이 자리에서 누가 죽어 갔을까?”
“운동장이 넓어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칼춤 추고 창질하기에 불편이 없었겠구만.”
“이쪽에서 일원 대장이 나와, 그와 그의 일당의 애국심을 소리 높여 외쳐 대면, 저쪽에서도 똑같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왜 똑같으니, 정반대지?”
“맞아. 정 반대지.”
“아냐, 똑같어.”
“그래, 똑같어. 싸우다가 사상자가 너무 많다 싶으면, 오똑 서서 독전하던 양편 장수들이 나팔수로 하여금 나팔을 불게 한 다음, 어이, 쉬었다 하자!고 소리쳤을 거야.”
“또는, 날이 저물었으니 밝은 날 다시 하자!”
“대장과 대장이 일대일로 겨뤄서 결판을 내는 일도 있지, 수많은 부하들이 둘러보는 가운데서.”
“맞아요. 양편 대장이 서로를 죽여 버리면 싸움은 싱겁게 쉽게 끝나 버리죠. 옛날 희랍에 그런 일이 있었죠.”
“야만이었구나, 옛날 사람들은. 삼국시대도 그렇게 야만이었니?”
“삼국시대도 고대니까, 아무래도 인지가 미발달했을 것 아닌가.”
“무슨 말씀이세요, 장선생님? 여기서 노고단 쪽으로 가면 단풍으로 이름난 피아골이라고 하는 골짜기가 있는데, 삼국시대로부터 이천 년이 흘러갔을 때 그 골짜기가 단풍보다 더 붉게 피로 물들었어요. 피아골뿐이겠어요? 그리고 지리산뿐이겠어요?”
“그렇지만 그건 대장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싸움이었잖니?”
“대장을 위한 싸움이 바로 나라를 위한 싸움이야.”
“무슨 소리니? 국가와 민족을 개인이나 집단과 혼동할 수 있니?”
“나라를 위해서, 겨레를 위해서, 젊은 사람들이 아까운 피를 흘린다고 너는 생각하니?”
“그럼 누굴 위해서 젊은 피가 홀려지니? 늙은 사람들 잘 먹고 잘 살라고 홀려지니?”
“나는 군인들 중에서는 용병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솔직하고 바보가 아니야.”
“용병이라니, 살인 청부업자들 말이냐?”
“엉클 샘은 당신이 필요하다!는 광고와 당신은 입대하면 나랏돈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나랏돈으로 최신 통신장비교육을 받고, 나랏돈으로 최신 전자장비교육을 받는다!는 광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미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겠니?”
“그렇지만 애국애족이 없으면 어떡하니, 그거 하려고 그 사람들 모인 건데?”
“그래, 맞아. 늙은 사람들이 안락의자에 앉아서 결정한 애국애족을 젊은 사람들은 참호를 파고 그 속에서 ㅖ 몸을˛상하면서 죽어 가면서.”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애국애족을 가르치는 것은 늙은이들의 책임이 아니냐?”
“맞아. 늙은이들의 말을 믿는 것은 젊은이들의 책임이고.”
“정말이야. 그래야만 전통이 대대로 이어지는 거 아니니?”
“늙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은 경험이 없고, 어리석고, 혈기방장하여, 속기 쉽다고 생각하고, 젊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들이 노련하고, 현명하고, 냉철하여,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한, 인습은 천 년이고 이천 년이고 면면히 계속되어 끊이지 않겠지.”
“그럼 안 되니?”
“젊은 피가 항상 끓는 건 아니야. 전쟁이 끝난 다음, 환상에서 깨어난 다음, 몸의 한쪽이 없어진 다육 그들의 피는 노인들의 것보다 더 싸늘할 수가 있지. 그때 그들은 노인성 치매가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겠지.”
“깨달았으면 개선이 되지 않겠니? 다음부터는 안 그러는 거 아니니?”
“아니야. 다음부터 안 그럴 기회가 없어. 다음 실수는 그가 아니라 딴사람, 다음 세대가 하는 거야.”
“배운다는 게 뭐니? 문화라는 게 뭐니? 역사는 뭐고?”
“역사는 되풀이고, 문화는 답습이고, 배운다는 건 반복이야. 우린 삼천 년을 그렇게 살아 왔어. 모든 전쟁은 같은 전쟁이야.”
“삼천 년이나! 그렇게 오래되었으면, 혹 뭔가 좋은 점이 있는 거 아니겠니, 단지 우리들이 모를 뿐이지?”
“질병과 매춘도 그만큼 오래되었지. 물론 우리들이 알 수 없는 필요성에서 겠지만.”
“오래된 것이라고 다 좋을 수야 있겠어? 그리고 오래된 것이라고 다 나쁠 수도 없겠지. 전쟁을 좋은 거라고까지야 할 수 없겠지만, 질병이나 매춘과 같이 취급할 수도 없지 않겠어? 전쟁에는 대개 질병과 매춘이 따라다니지만. 저쪽에서 치고 달려드는데 가만있을 수만은 없지 않아? 민족도 개인과 다를 게 없지. 질병은 전혀 불필요하고, 매춘은 필요악이고, 전쟁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끔 영광스런 것이 아닌가?”
“그래요? 전 그 반대에요. 전쟁과 매춘은 악이고, 질병은 돌멩이나 나무나 바람처럼 선악이 없어요. 전쟁과 매춘을 비교해 보면, 매춘은 거의 악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에요. 큰 악 앞에서 작은 악은 거의 선처럼 보이거든요.”
“모든 전쟁을 악이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가 되겠지.”
“전혀 지나친 얘기가 아니죠. 어떤 전쟁은 선이고 어떤 전쟁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분쟁의 씨앗이죠. 하물며 같은 전쟁의 어느 쪽은 선이라고 하고, 어느 쪽은 악이라고 한다면, 맡이 되겠어요?”
“그렇지만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은 선이지. 더 큰 악을 막는 작은 악은 선일 테니까.”
“그건 공리주의에요. 아마 산술을 잘하는 아라비아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기독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의 양 이야기가 있죠?”
“그렇지만 전 세계가 기독교도들의 것은 아니지 않아? 더구나 삼국시대는 말야.”
“물론이죠. 저도 기독교도가 아니에요. 불교도에요. 불교의 자비는 분명히 살생을 금하고 있죠.”
“그렇지만 말야, 기독교에도 십자군이 있었고, 불교에도 호국불교라는 게 있고 승병이라는 게 있었어. 종교의 이상과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현실을 혼동해서는 안 되지.”
“맞아요. 신자들의 현실이 그들의 종교의 이상일 수는 없어요. 베들레헴 예수 탄생의 성지에 접근하는 길들이 교파별로 여럿이래요. 예배 시각도 각각 다르구요. 서로 만나면 싸우기 때문이래요.”
“그야 절간에서 살인도 나는데.”
“바로 그거에요. 사제들이 서로 싸우고, 목사들이 서로 싸우고, 승려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이 그만큼 더 필요하다는 증걸 거에요. 그들의 태어남부터가 필요에서였겠지요. 그들의 가르침대로 이 세상이 되어 있었더라면, 그들이 가르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 필요는 오늘날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더 불어난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랬을라구. 이천 년 동안이나 가르쳐 왔는데.”
“예수는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왔어요. 그는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십자가에 도둑놈처럼 못박혀서 찔려 죽었어요. 그는 설법으로는 물론, 생애로도 가르쳤어요. 그의 태어남과 수난과 죽음이 바로 가르침이었어요. 그의 가르침이 무엇이었겠어요? 총독과 왕과 고승들도 권력과 돈과 명예를 가지지 못한 보통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기독교국가들 한복판에서 예수 후 천팔백 년, 천구백 년 동안, 짐 즉 국가가 판을 쳤고, 농노제도가 유지되었어요. 왕을 끌어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왕과 이름 없는 백성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문제였어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봐요. 지금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만일 그런 생각을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더라면, 삼국시대에 한 나라가 나머지 두 나라들과 싸움질을 할 수가 없었을 거에요. 그들은 왕을 위해서 싸웠어요. 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었어요. 왕이 국가였으니까요. 의자왕이 죽고 삼천궁녀가 물에 빠지자, 하나의 마누라도 제대로 못 먹여 살렸을 백제사람들은 슬펴했을 테죠. 경순왕이 항복을 하고 태자가 삼베옷을 입자, 신라 사람들은 망국을 통곡했겠죠. 우왕 창왕해서 왕씬지 신씬지 모를 공양왕이 이씨에게 밀려나자, 고려 유민들 중에는 두문불출하고 불타 죽은 사람들도 있었죠. 이런 일들이 중세나 고대에만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이대통령이 경무대를 떠나자 여학생들이 광화문 길거리에 늘어서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고, 그 다음 대통령이 죽어 나가자, 중년, 노년 부인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뻗고 울었어요.”
“그만 일어서는 게 좋겠어요. 다리가 저려 와요.” 윤여사가 말했다. 그들은 붉게 물든 땅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천막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버너에 음식을 끓이기도 하고,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천막올 드나들기도 했다. 그들은 매점으로 가서 먹을 것을 사고 샘으로 가서 물을 길었다. 매점 주인은 자고 있었는데, 판자쪽을 손바닥으로 쳐서 깨우자, 하품만 벅벅 하면서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그들은 깨울 줄도 모르고, 도대체 안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만 했었는데, 파란색 운동복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젊은 남자가 등산화 뒤축을 질질 끌면서 다가오더니 서슴지 않고 판자쪽문을 두드리면서 깡통 좀 팔라고 소리를 쳤었다. 물건을 다 판 주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잠은 언제 자누?” 하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자꾸 깨워서 미안해요.”
“나는 돈이라도 벌지.”
“우리야 자러 왔나요?”
“남 생각은 않고?”
“잠잘 사람은 호텔로 가야죠.”
“돈이 있어야지?”
“그럼 집에서 자야죠.”
“라지오도 집에서 틀지.”
“집에서야, 티비, 비티아…….”
그 소년은 신발을 끌면서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은 매점 주인을 쳐다보았다. 산바람에 그을린 중년 사내는 가버린 소년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무동으로 가는 방향을 묻자 그는 턱으로 한쪽읕 가리켰다. 그는 백무동으로 빠지는 귀퉁이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샘으로 갔다. 샘은 가게 주인이 턱으로 가리킨 방향 반대 쪽에 있었다.
“얘, 너, 부모한테 허락받고 왔니?” 장씨가 양치질을 막 끝내고 일어선 한 소녀에게 물었다. 그 아가씨는 장씨를 흘낏 한 번 쳐다보고는 같이 온 아가씨가 부어 주는 물을 손바닥으로 받아 세수를 했다.
“아저씨, 그건 알아서 뭐 하시게요?” 물을 따라 주면서 두 번째 아가씨가 말했다.
“교외지도 할라고 그런다.” 장씨가 말했다.
“어머,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한참 걸릴 거에요.”
“친구하고 둘이서 왔니?”
“넷이서 왔어요. 둘은 지금 아침을 준비하고 있어요.”
“머슴아들이 밥을 짓니?”
“어머, 사내애들은 음식 못 해요?”
그들은 그릇을 빌려 물을 마셨다. 샘터에는 그들 말고도 네댓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들은 장씨의 수통을 가득 채운 다음 샘을 떠났다.
“아저씨네는 어디서 왔어요?” 그 소녀들이 뒤따라오며 말했다.
“백무동에서 왔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백무동으로 간다.”
“얘, 백무동이 어디니? 요즘 강남구에는 처음 듣는 동네 이름들이 왜 그렇게 많으니? 영동구에도 그렇고 말야.”
“영동구도 있니?” 처음 아가씨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녀에게는 두 번째 아가씨의 수다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영동은 구 아니냐?”
“얘, 니네들 어디서 왔니?” 현애가 돌아보고 물었다.
“어머, 아가씨도 교외지도할래요? 글쎄, 그걸 잘 모르겠어요. 얘, 우리가 어디서 왔니? 청학동이니, 추성동이니, 칠선동이니?”
“마천동이던가, 화개동이던가? 우린 왜 그런 것도 보른다지?” 첫번째 아가씨가 말했다.'
“자네들이 그걸 모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일 거야.” 철순이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
“어머, 그래, 정말이야. 당연하지 머니? 우리가 그걸 왜 아니?” 두번째 아가씨가 말했다.
“그걸 모르는 것이 왜 당연한지는 알겠어?” 철순이가 다시 말했다.
“그래, 정말 그게 왜 당연하니, 우리가 바본가, 머.” 두 번째 아가씨가 말했다.
“당연해서 안 될 거 있니? 우리가 동네 이름 외러 왔니? 우린 놀러왔어.” 첫 번째 아가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맞어. 우린 놀러 왔어.”
“카세트 틀어 놓고, 밤새도록 디스코 추러.”
“어머, 정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많이 해봤겠어, 형.”
“잠은 낮에 자고. 양지바른 데서.”
“그래, 정말! 난 어제 바위에 기대 앉아서 한 시간을 잤어. 형, 커피 한 잔 하고 가, 여기야.” 둘째가 철순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천막 둘이 입구를 마주 대고 쳐져 있었는데, 그 사이 빈 터에 비옷을 깔고 소년 둘이 이마를 맞대고 버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펌프질을 하고, 액체를 붓고, 조리개를 틀고, 권총을 쏘자, 펑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파란 불꽃들이 꽃잎들처럼 둥글게 한꺼번에 확 붙었다. 소년들은 누가 다가가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불 위에 물그릇을 올려놓고, 두 번째 아가씨가 “얘, 물 더 끓여,”라고 말을 해도 돌아보지 않고 불붙이던 자세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서 소리를 내며 타는 작은 불
꽃들만 바라보았다.
“얘, 물 더 부우란 말야.”
“목욕할래?” 소년 하나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두 번째 아가씨에게 되물었다.
“차를 더 타야 한단 말야. 손님들이 오셨어.”
“알어. 네 목소리는 동구 밖에서부터 들리거던.”
“그럼 왜 가만있니? 너네 집에선 냄비에 목욕물 끓이니?”
“아니. 튀김닭 목욕시키니?”
“고개를 좀 쳐들면 안 되니?”
“물을 더 붓지 않는데 고개는 왜 쳐드니? 커피나
“니네는 안 마실래?”
“왜 안 마셔?”
“그럼 니네만 마실래?”
“손님 오셨다며?”
잠자코 팔짱만 끼고 있던 소녀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커피 여덟 포를 가지고 나왔다. 두 번째 소녀가 씻어 온 그릇들 중에서 자그마한 밥그릇 네 개를 꺼내 놓고 커피를 한 포씩 까서 털어넣었다.
“밥솥하고 국솥 뚜껑을 까.” 소년 하나가 커피잔을 흘낏 곁눈질해 보면서 말했다. 소녀가 그렇게 하자 커피잔 네 개가 더 생겼다. 그때까지 말없이 고개를 한쪽으로 잦히고 불꽃들만 들여다보고 있던 또 하나의 소년이 잔들에다가 더운 물을 부었다. 모두 여덟 잔이 나왔다.
“미리 말해 주면 입이 부르트니?” 두 번째 소녀가 말했다.
“따라 봐야 알지.” 처음 소년이 말했다.
“넌 버너 다 들여다봤니? 항상 보는 버너가 그렇게도 신기하니?”
“내가 버너 들여다봤나, 물 끓는 소리 기다렸지?”
그들은 차를 마셨다. 현애가 철순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녀가 킥킥 웃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소년들이 찻잔을 입에 대고 거의 합창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우리가 방해가 됐다면 미안한데.” 장씨가 말했다.
“방해는요. 산에 오면 다 친군데요.” 소년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니네들 제법이다.” 두 번째 소녀가 말했다.
“너가 시키지만 않으면, 우리들도 제법일 줄 알아.”
“나 때문에 제법이 못 된 것 같구나.”
“그래. 우린 기사도 정신이 지나쳤어.”
“부족했겠지.”
“맞어. 네 말은 항상 옳아. 우린 기사도 정신이 부족했어. 네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우린 진즉 제법이었을 거야.”
“내가 의젓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니네들은 의젓잖았구나?”
“그래, 맞어. 사내 대장부들이 어떻게 여자애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니?”
“만일 내가 의젓잖으라고 시켰더라면 니네들은 의젓했겠구나?”
“그렇다니까. 여자 애 말대로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의젓했을 거야.”
“니네들 희한하다.”
“우리가 희한할 게 있니, 우리들 생각이 희한하지? 말은 똑바로 하는 게 좋아. 그리고 바른대로 말하자면, 우리들 생각도 희한할 게 없어. 엣날 조선 남자들이, 요즘과는 달리 의젓했던 이유가 뭔지 아니? 여자들이 아녀자 노릇을 했기 때문이야. 그게 부덕이라는 것이었어.”
“요즈음은 어떠니? 여자들이 남자 노릇을 하니?”
“네 말 정확했어. 여자들이 남자 노릇을 하니, 남자들이 여자 노릇할 수밖에 없잖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들뿐이니까.”
“여자가 남자 노릇하고, 남자도 남자 노릇하면 어떨까,” 라고 철순이가 말했다. “여자도 여자 노릇하고 남자도 여자 노릇하는 것보다야 나을 것 같은데?”
“여자가 여자 노릇하는데, 남자 노릇 못 할 남자가 어디 있어요? 그런 남자는 잠지를 떼서 월이 줘버려야죠.” 소년이 말했다.
“월이가 뭐니?”
“시골에서 강아지를 부르는 소리야.”
“그럼 강아지라고 하지 왜 월이라고 하니?”
“시골 개와 도시 개는 다르단 말야. 월이와 스피츠가 어떻게 같으니? 스피츠는 우유나 고기를 먹지만, 월이는 시골 초가에서 사는 어린애들이 일단 소화하고 난 것을 먹는단 말야. 시골에서 월이, 월이, 하는 소리가 나면, 그 집 애가 일을 보았다는 얘기야.”
“여자와 남자, 둘 다가 남자 노릇을 하는 것은 어떻겠어?” 철순이가 다시 말했다.
“여자도 남자, 남자도 남자라면, 그 집안에 가구가 배겨나겠어?”
“남자가 남자 노릇을 하는데도, 여자가 남자 노릇을 할까?” 철순이가 계속했다.
“엉?”
“여자가 남자 노릇을 하는 것은, 남자가 남자 노릇을 못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소년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여자가 여자 노릇을 하면 남자 노릇 못 할 남자가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남자가 남자 노릇 하는 것은 여자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남자가 남자 노릇 하면 남자 노릇 할 여자가 없을 테고, 결국 여자가 여자 노릇 하는 것은 남자에게 달린 거 아니겠어?”
“얘, 잘 들었어?”
“그래, 잘 들었다. 널 여자애로 환원하기 위해서도 우린 남자 노릇을 해야겠어. 처음부터 그게 내 생각이었지.”
“내가 여자 되는 거는 걱정 안 해도 좋으니까, 니네들 남자 되는 거나 걱정해.”
“우리가 여기 뭣 하러 왔지?” 철순이가 말했다.
“커피 마시러.” 남자애가 밥솥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어떻게 해서 커피를 마시러 오게 되었는지 잊어 먹었어.”
“커피만 마시지.” 남자애가 말했다.
“얘, 니네들, 우리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어?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어?”
“그걸 어떻게 아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여기가 어디며, 우리가 누구며,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지 않어?”
“그걸 왜 모르니? 우린 놀기 위해서 여기 와 있고, 지도만 보면 여기가 어딘지는 금방 알 수 있어.”
“맞아요.” 철순이가 말했다. “디스코토 추고, 철쭉도 보고, 천막도 치고, 걷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만나고 헤어지고…….”
“옷자락을 서로 스치고…….”
그들은 밥그릇 커피잔을 비옷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를 사례하고 천막을 떠났다. 낡고 녹슨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정표라기보다 안내판이었다. 그들은 그 안내판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펑퍼짐하게 트인 고원의 한 귀퉁이에 귀가 빠지고 골짜기로 내려가는 흙비탈이 있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숲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서로 얽혀 있었고, 뿌린지 줄긴지 알 수 없는 검은 덩굴들이 뱀처럼 또아리들을 틀고 있었다. 흙이 없어지고 바위가 많아졌다. 길이 길 아닌 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사위는 어둡고, 새소리도 없이 괴괴했다.
“이 길이 백무동 길 틀림없으꺼나?” 철순이가 말했다.
“안내판이 허술해서 화살표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화살표가 가르키는 길이 이 길이라는 확증도 없잖아.”
“여기 어디쯤 바위에 빨간 화살표 하나만 그어 놨으면 확인이 되는 건데.”
“가보는 수밖에 없지.”
“빨간 헝겊 조각이 가지 끝에 매달린 걸 보니 등삭길 임은 분명한데,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아낼 재간이 있아.” 장씨가 말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그저 가보았다가, 아니면 어떡하지? 새로 시작한다?” 철순이가 말했다.
“그건 그때 생각해.”
“너무 늦어도?”
“그렇지만 우리가 이미 내려와 버린 백 미터를 되돌아갈 수는 없지않어?”
“없을 것도 없지, 정 자신이 없으면.”
“되돌아가는 것은 지금 당장이고 확실하지만, 이 길이 틀릴 것은 나중이고 불확실 하잖어?”
“비중은 생각 안 하니? 비록 확실하다 해도 되돌아가는 것은 오십 미터, 백 미터야. 틀릴 것은 불확실하지만 십 킬로미터야.”
“어렴풋이 아는 것이 전혀 모르는 것보다 나을 것도 없구나? 전혀 모르면 모험이나 않지.”
“전혀 모르면 모험을 안 할까? 아마 모험인 줄도 모르고 하게 될 거야.”
“모험을 모험인 줄 모르고 하면, 그게 어떻게 모험이니?”
“맞아. 모험이 아니야. 용기도 필요 없고, 그건 저돌이야.”
“어렴풋이 알고 하면 모험이고, 전혀 모르고 하면 저돌이고, 그럼 잘 알고 하면 뭐니?”
“그야 땅 짚고 헤엄치기지. 용기도 필요 없고, 만용도 필요 없고.”
철순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장씨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건가요? 땅 짚고 혜엄치긴가요? 전 올라갈 때보다 더 힘이 드는 것 같아요. 다리가 막 떨려요.” 윤여사가 말했다.
“올라갈 땐 정말 땅 짚고 헤엄치기였어. 네 발로 기었잖어?” 현애가 말했다. “지금은 풀뿌리, 나무줄기 거머쥐려고 허우적거리지만.”
“그래, 땅 짚고 헤엄치기가 쉽다는 거니, 어렵다는 거니?”
“이 길이 잘못 든 길만 아니라면, 땅 짚고 헤엄치기라도 뭐가 어렵겠어요?” 윤여사가 말했다.
“그래요. 이 길이 틀리면 어렵고, 맞으면 쉽다는 거죠? 그런데 땅 짚고 헤엄치기란 원래 쉽다는 뜻으로 쓰이죠. 아주머니는 이 길 가는 것이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하셨어요. 아마 이 길은 잘못 들어선 길이 아닐 거에요. 아주머닌 가끔 엉뚱하게 맞추는 재간이 있으세요.”
그들 앞에 한 남자가 발을 절며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양복을 입고 있었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의 양복 바짓부리는 양말 속으로 야무지게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는 커다란 생나무 지팡이와 성한 다리 하나에 의지해서, 곡예사처럼 껑충껑충 바윗돌들 위로 길을 만들어 나아갔다. 여러 걸음 하기가 다리에 무리인지, 몇 걸음 가다가 한 손으로 나무줄기를 붙잡고 멈춰 서서 다음에 딛을 데를 골똘히 바라보곤 했다. 그에 의하면 그들은 옳게 가고 있었다. 그는 일행과 함께 두 시간 전에 출발을 했었는데, 발목을 삐어서 일행 뒤로 처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이 삼십 분 동안 내려온 거리를 두 시간 동안 쩔둑거렸다는 계산이 나왔다. 일행 중에서 하나쯤 남아 그를 부축해 주었을 법도 했다. 그는 그게 싫어서 발을 삔 자리에 주저앉아 맨 뒤엣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쉬는 체했던 모양이었다. 마을까지 보통 걸음으로 세 시간이 걸린다면, 그의 걸음으로는 열두 시간이 걸릴 판이었다. 앞으로도 자그마치 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설마 열 시간 새 해사 빠지겠소. 저물기 전에 마을에 닿기만 한다면 무슨 걱정이요.”
“일행이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테니, 그게 걱정 아니요?”
“그게 걱정은 걱정이요. 내가 달려가서 기다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거야 우리들이 전해 드릴 수 있지요. 다리까지 불편한데, 일부러 달려가서 기다리지 말라고 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렇지만 아픈 사람을 산속에 두고 자기들끼리 떠나려 하겠소?”
“그건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테고, 내가 늦을 것이니 기다리지 말고 떠나라고만 전해 주시요.”
“그러지요. 누구를 찾을까요?”
“혹시 내려오면서 어떤 한 남자 하나 못 보았느냐고 묻는 사람만 찾으시요.”
“일행이 몇이요?”
“둘이요.”
“셋이서 왔소?”
“아니요. 둘이 왔소.”
“그럼 먼저 간 사람은 하나요?”
“아니요. 한 사십 명 될 거요.”
장씨는 잠시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장씨를 마주 보았다.
“당신을 찾는 사람이 없으면, 전하지 않아도 되오?”
“그야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전할 필요가 있겠소?”
“우리가 뭐 도와 드릴 것은 없겠소?”
“지금까지 같이 쉬어 준 것만도 고맙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행결 시원하구료. 어두컴컴한 게 흡사 지옥 입구 같아서 기분이 으스스하던 참이었소.”
그가 먼저 일어섰다. 그들은 그를 거대한 교목들의 얽힌 줄기들에 덮인 바윗골의 어둠 속에 남겨 두고 내려갔다. 물 흐르지 않는 골짜기의 바위들은 해골들처럼 하얗고 메말랐다. 빗물에 씻긴 나뭇가지의 매끄럽고 하얀 토막들이 뼉다귀들처럼 바위들 사이에 뒹굴었다. 한참 내려가자, 나무들이 곧아지고, 줄기와 뿌리가 분명해지고, 돌길에 흙이 오르고 물소리가 났다. 물은 커다란 바위 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물기가 스민 바위들에는 검고 푸른 이끼들이 돋았고, 길은 물이 흐르는 바윗골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물가에 앉아서 얼굴과 손발을 씻고, 가게에서 산 음식으로 아침 요기를 했다. 일곱시가 겨워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장씨가 말했다.
“엄마는 여행용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갔어요. 아빠는 엄마가 처녀적 애인을 만났기 때문에 쫓겨났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어요. 넉 달 후, 눈발 섞인 바람이 잎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소리를 내며 불던 날, 엄마는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외투깃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서 있는 여자가 엄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달려가서 엄마를 껴안으려고 했어요. 나의 발이 힘차게 땅을 차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 같았어요. 그랬는데 어떻게 된 일이었지요? 나는 친구와 시시덕거리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 앞을 지나쳤어요. 내가 엄마를 알아봤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엄마 쪽을 힐끗 쳐다보았던 것 같아요. 엄마는 머뭇머뭇하다가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버렸어요. 엄마의 시선을 등으로 느끼면서 엄마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동안 나는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정신이 없었고, 발은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어요. 길 모퉁이를 돌아서 엄마의 시야로부터 사라지는 순간, 엄마를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에서 맥이 쑥 빠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 왔어요. 우린 그때까지 백방으로 엄마의 행방을 찾았지만 허사였어요. 나는 친구에게 아무케나 핑계를 대고 버스 정류장으로 막 달려갔어요.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의 일이었어요.”
“그래서 어찌 되었지?”
“두 달 후 나는 엄마를 다시 만났어요. 병원에서였어요. 엄마는 죽어 가고 있었어요. 엄마는 저를 용서해 주셨어요. 학교로 저를 찾아오신 날, 엄마는 의사한테 선고를 받으셨어요. 엄마는 반 년 후 갈현동의 한 셋방에서 죽었어요.”
“그래서?”
“뭐가 그래서에요? 죽었으면 끝난 거죠.” 현애가 말했다.
“아냐. 그때부터 시작이었어. 나는 엄마가 처녀 때는 물론, 결혼 후에 딴 남자를 사랑했더라도, 엄마가 옳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일 년 전 엄마가 가방을 들고, 죄인처럼 밤비 속으로 사라졌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음이 분명했었어요. 엄마가 아빠 말대로 나쁜 여자라 하더라도 엄마가 옳았어요, 처음부터. 그런데 차츰 사실들이 누설됐어요. 배신자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어요.”
“어째서?”
“엄마는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어요. 아빠는 친구와 아내를 배반했어요. 친구와 아내를 배반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배반하는 것이었어요. 두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이 되느냐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 친구를 버린 사람이 딴 친구를 안 버리겠으며, 아내를 저버린 사람이 자식들을 안 저버리겠어요? 한 사람에게 친구들과 처자식들, 부모형제면 모든 사람이 되지 않겠어요?”
“아빠가 생활비를 안 대줬단 말인'P 학교를 안 보내 줬단 말인가?’
“아빠는 아파트를 얻어 주고, 매달 생활비를 부쳐 줬어요. 그리고 대학까지 보내 줬어요.”
“엄마가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엄마가 아빠 몰래 딴 남자를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고 했지 않았어?”
“아빠 몰래 만난 건 아니었어요. 아빠는 엄마가 결혼 전의 애인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엄마는 아빠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엄마는 감추지 않았어요. 아빠가 그것을 모르는 것으로 해두기를 원했을 뿐이에요.”
“알 수가 없군.” 장씨가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새끼들 멕여 살리고 대학까지 보냈으면 됐지, 그 이상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 이상 어떻게 해야 배반이 아니란 말인가?”
“가난한 사람이 자식을 대학에 못 보내면 배반일까요? 가난한 사람이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면 배반일까요?”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멕여 살리고 대학에 보내는 것이 조금도 값어치가 덜해지는 건 아니지.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자식이 은공을 모르면 배신감을 맛보는 건 당연한 일이야. 배신이란 그럴 ˙때 쓰는 말 아닌가? 돈이란 벌기도 어렵지만 쓰기도 어려운 법이야.”
“정말이에요. 쓰기에 따라서는 안 쓴 것만 같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가 봐요. 돈이 있느냐 없느냐, 대학에 보내느냐 안 보내느냐는 그것만으로는 선도 악도 아니에요. 그건 바람이나 돌멩이처럼 중립적이에요. 배반은 적극적인 악이에요. 아빠는 배반을 했어요. 그리고 딸을 대학에 보내는 것으로, 또는 미국에 보내는 것으로, 그 배반을 조금이라도 상쇄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배반만 더욱더 추악하게 만들 뿐이에요.”
“그만해 둬, 얘.” 현애가 말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자면, 남자가 세상에서 돈을 벌자면, 하루에 적을 열두 명씩이나 만나야 하고, 배반도 더러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배반 아닌 것을 배반이라고 하고, 배반을 배반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배반을 배반이 아니라고 하기 위해서는 배반이 아닌 것을 배반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아빠는 우리들한테서 엄마를 없애 버려서 배반을 했고, 배반을 하지 않은 엄마를 배반한 것으로 해서 배반을 했고, 배반한 자신을 배반 안 한 것으로 해서 배반을 했어요.”
“딴 남자를 만난 것을 감추지 않은 것은 배반이 아니고, 아내가 딴 남자를 만나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베반이란 말인가?”
“엄마가 옛날 애인을 만난 것을 아빠가 모른 척했던 것은 그것을 모르는 것으로 해두는 것이 아빠에게 편리했기 때문이었어요.”
“엄마는 어떤가? 엄마는 괜찮은가? 엄마는 남편 아닌 남자를 만나고, 그것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 괜찮은가? 일단 결혼을 했으면, 그 이전이야 어찌 됐건, 남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 아닌가?”
“괜찮지가 않았죠. 그래서 엄마는 집을 나갔고, 종국에는 죽음으로 청산을 했죠. 그러나 나는 괜찮았어야 했다는 강렬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적어도 아빠가 괜찮은 것보다는 더 괜찮았어야 했어요. 엄마가 안 괜찮아야 했다면, 아빠는 안 괜찮아도 벌써 안 괜찮아야 했어요. 그런데 아빠는 지금도 멀쩡해요. 잘못일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다시는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 없도록 죽어 버렸고, 도저히 저질러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 잘못을 수없이 되풀이하기 위해서 뻔뻔스럽게 살아 있어요. 악어의 눈물조차 홀리지 않으면서.”
“그렇지만 아빠에게도 괴로움이 있을 거야. 아무도 모르는 괴로움이, 아내나 자식들도 모르는 괴로움이 있을 거야.”
“그럴까요? 우리 아빠도 괴로움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아빠도 지금 설악산 어느 계곡쯤을 내려오고 있을까요?”
“사람 세상 사는 것이, 달라 봤자 어딜 갈꼬.”
그들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물이 점점 불어 갔다. 그리고 길보다 점점 더 낮아졌다. 길은 형체가 뚜렷해지고 탄탄해져 갔다. 물과 길은 한 골짜기 안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갈라져서 서로 보이지 않았다. 길이 부지런히 내려가서 물과 높이가 엇비슷해졌다 싶으면, 물이 멈추는 듯하면서 잔잔하다가 느닷없이 곤두박질쳐서 폭포가 되었다. 장씨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고 혼자서 휘적휘적 부지런히 앞서 걸었다. 뒤엣사람들은 그와 점점 거리가 떨어져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작은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두어 결음 눈앞 길 복판에 한 젊은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그 여자를 본 것과 그 여자가 등뒤로 인기척을 느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여자가 황급히 일어서서 바지를 끌어올렸다. 완벽한 두 개의 하얀 구형들은 짙은 빛깔의 청바지 속으로 밀려 들어가기 전에 푸들푸들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여자의 애띤 목소리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 “아, 아니, 내가 미, 미안하게 됐소.” 지진 머리칼을 삼각형으로 풀어헤친 머리 위에 빨간 등산모자가 얹혀 있었고, 등에는 작은 빨간 배낭이 대롱거렸다. 조금 가자, 그녀의 일행인 듯한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팻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한신폭포를 구경하기 위해서 샛길로 들어섰다. 장씨는 팻말 옆에 주저앉아 무릎에 팔꿉을 얹고 턱을 괬다.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그는 땅만 굽어보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잠시 쉰 다음 다시 길을 내려갔다.
물이 제법 불어나서 괸 데는 그 깊이가 한 길도 더 되어 보였다. 집채만큼씩이나 큰 바윗덩이들이 물을 막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졸졸거리게도 했다. 물이 좋고 바위가 펑퍼짐한 곳에 빨간 천막 두 개가 치기 좋은 데를 찾아 위아래로 엇비슷하게 세워져 있었다. 천막 하나에 한 쌍씩, 두 쌍의 젊은 남녀들이 근처에 한가롭게 앉아서 양치질을 하고 뮐 씻기도 했다. 그들은 몇 개의 폭포들을 지나갔다. 그것들은 한 길 정도의 작은 것에서부터 네댓 장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꼴들을 하고 있었다. 전혀 등산복 차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차린 음식을 보자기에 싸들기도 하고, 커다란 술병을 한 손에 거머쥐기도 하고, 앉을 자리를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기도 하고 줄줄이 올라왔다. 산 어귀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백무 삼거리에 이를 때까지 어떤 남자를 찾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갈림길에 세워진 낡욱 안내판 앞에 서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안내문을 읽고 있는 한 남자에게 혹시 발목을 삐어서 뒤에 처진 일행을 기다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그들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양옆으로 잘래잘래 흔들었다. 그들은 산어귀에 이를 때까지 그런 짓을 두 번 더 했다. 그리고 누가 듣기 전에는 발목을 삔 사람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제법 큰 내를 이룬 계곡에 음식점들이 민박집들과 함께 널려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데에 내놓은 의자들에 앉아서 감자적과 도토리묵으로 술들을 들고 있었다. 그들도 그렇게 했다. 벽에 붙은 차시간표에 의하면 다음 버스는 삼십 분 뒤에 있었다. 열시에 하나 있었지만 정류소까지 달려가기에는 조금 늦었다. 술이 한 잔 된 장씨가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는 물이 너무 좋아서 철 이른 목욕을 했다. 그러느라고 그들은 열시 반 차를 놓쳤다 그들이 열한시 차에 맞춰서 정류소에 갔을 때, 사람들이 이십 미터쯤 구불구불 줄을 서서 버스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한쪽에 노선 버스 아닌 버스 한 대가 손님들을 가득 태운 채 서 있었다. 그들은 표를 끊고, 맨 꽁무니에 가서 줄을 섰다. 그리고 손님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운전수도 제자리에 앉아 있는데 발동을 걸지 않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네 사람 다 술들이 조금씩 올랐지만, 아주 취하지는 않았다. 철순이가 장씨를 바라보았다.
5 백무동
장씨가 버스께로 갔다. 차문이 열려 있었다. 키가 큰 여자 차장이 승강구 위 문틀에 기대서서, 매끈한 다리 하나를 치마 밑으로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감색의 양장 제복 속에서 표정 없이 문 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열린 문짝을 한 손으로 잡고, 착 안을 기웃거리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올라타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비스듬히 기대선 자세 그대로 한 손을 내저으며 “이 차, 손님 안 태워요,”라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 찬데?” 장씨가 차 안의 냉랭한 기운에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뭐해요? 손님 안 태워요.”
“좀 알고 싶어서 그래. 이 차, 혹시 손님 기다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혹시 말야, 손님이 덜 탄 게 아니야?”
“저기 가서 기다렸다가, 노선버스 들어오면 타고 가시라고 해. 보면 몰라?” 운전사 자리에 앉아 있던 운전사가 차창 밖으로 외면을 하면서 내뱉었다.
“보아하니, 누굴 기다리는 거 같아서 하는 소리야.”
“이것 봐요. 거, 어디 와서 주정을 하쇼? 이 차는 전세버스에요. 댁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구.” 승객들 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장씨는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양쪽 뺨과 턱밑으로 살이 꾸역꾸역 밀려나온 한 중년 남자가 팔짱을 끼고 앉아서, 꼰다리 한 가닥을 복도로 내뻗고 있었다. 장씨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가 안내원을 향해서 말했다.
“누구 한 사람하고 얘기를 했으면 좋겠어. 사십 명을 혼자서 당할 수 없지 않어?”
“누가 아저씨더러 사십 명을 상대하라고 했어요?”
“말을 걸어 오는데 안 할 수가 있나?”
“말 안 걸 테니, 어서 가보슈.” 팔짱 낀 그 승객이 말했다.
“나도 어서 가봤으면 좋겠소.” 장씨가 대답했다.
“누구 붙잡는 사람 있소?” 팔짱 낀 사람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눈을 치켜뜨느라고 홀렁 벗어진 이마에 주름살들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 소리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씨는 한 발을 승강구 맨 아래칸에 횰려놓았지만, 나머지 한 발을 마저 올려놓지도 못하고, 올려놓은 발을 내려놓지도 못했다. 그때, 놔 안 뒤쪽에서 한 승객이 여자 목소리로, “한없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거가?”라고 소리쳤다. 장씨는 그 순간을 이용해서, 발판 위에 올라가 있는 발 하나를 얼른 끌어내렸다. 그리고 낮고 빠르게 차장에게 “발목을 삐었어. 가내소 폭포쯤 내려오고 있을 거야,”라고 말하고 돌아서서 뒤도 안 돌아보고 버스를 떠났다.
“어떻게 됐어요? 저 버스가 맞아요'” 현애가 물었다. 그의 일행은 딴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배낭으로 줄을 세워 놓고 한쪽에 무료히 서 있었다.
“조금 있으면 밝혀질 거야.”
“뭐가 밝혀져요?”
“발목 삔 사람의 일 말야.”
“지금까지 그것 밝히지 않고 뭘 하셨어요?”
“그것 밝히는 게 시간이 걸리는군. 도대체 밝힌다는 게 시간이 걸리는군.”
“왜 시간이 걸려요? 한국말이 안 통해요?”
“말이야 통하지만, 주파수 맞추는 데 시간이 결리겠지.” 철순이가 끼여들었다.
“맞어. 나와 그들은 각기 딴말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 그들은 지금 아마 머리들을 맞대고 내가 한 말의 뜻을 해독하고 있을 거야.”
“맙소사, 한국말이 한국 사람들에게 암호가 되다니!” 현애가 탄식했다. “간단명료하게 뜻을 전하면 될 거 아네요?”
“해봐.”
“이 차가 혹시, 우리들이 내려오다가 만난 발목 삔 사람이 다리를 쩔뚝거리느라 뒤 에 처져서…….”
그때, 감색 양장 제복을 입은 키 큰 젊은 여자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면서 장씨를 손가락질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뒤에는 기념휘장들을 다닥다닥 붙인 검정 등산모를 쓰고, 단추 안 잠근 등산 조끼를 걸치고, 무릎까지 펑퍼짐한 등산 바지를 입고, 무릎 밑으로 울긋불긋한 긴 양말과 발목까지 덮는 투박한 등산화를 신은 중년 남자가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발 다친 사람을 어디서 보셨어요?” 젊은 여자가 걸음을 멈추면서 물었다.
“산속에서 보았지.” 장씨가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서면서 즉시 대답했다.
“아, 선생님, 김박사를 만나셨군요. 아까는 실례했소이다. 우린 그 사람 때문에 두 시간을 기다리느라고 신경들이 좀 날카로워졌어요. 그 김박사를 어디서 만나셨어요?”
“발목 삔 남자를 내려오다 길에서 만났지요.”
“많이 다쳤어요?”
“많이 절뚝거립디다.”
“이거 야단났구만. 누가 가서 떼메고 온달 수도 없고. 언제쯤 내려올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나!”
“앞으로 서너 시간은 좋이 결릴 거에요.” 철순이가 말했다.
“서너 시간이나! 그럼 오후 세시 아니요?”
“오후 다섯시였어요, 거기서 나온 계산으로는요.”
“다섯시!”
“물론 그 사람이 김박사라면 그렇다는 얘기죠.” 현애가 말했다.
“뭐요? 우리가 지금 김박사 얘기하지 누구 얘기하고 있소?”
“김박사라니?” 장씨가 중년 남자와 현애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 김박사가 다리를 다쳤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어떻게 된 거야?” 중년 남자가 젊은 여자를 돌아보았다.
“발 다친 사람을 만났다고 했잖아요?” 젊은 여자가 장씨를 돌아보았다.
“했지.”
“그 김박사 말이에요.”
“무슨 김박사?”
“당신이 다리 다친 사람을 만났지요. 우린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사람이 김박사요.”
“그렇지만 그 사람은 등산복 차림을 하고 있지 않았어요.” 현애가 중년 남자의 차림새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그래. 신사복 차림이었어. 신사 구두를 신고.” 장씨가 말했다.
“그렇지요? 신사복 차림이었지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복장이 그래 가지구서야, 원, 다리 몽댕인들 성할 수가 있나.”
“발이 많이 불편한가 보던데, 이 산골에 병원이 있나.” 장씨가 중얼거렸다.
“병원이요?”
“혹시 일행 중에 의사는 없소, 일행이 많던데?”
“의사요?”
“예, 의사요. 응급조치라도 해야 할 거 아뇨?”
“그 사람이 의사요.”
“의사요?”
“그래서 제 몸을 아끼느라 늑장을 부리는 모양이요. 남의 생각은 하지도 않고.”
“남의 생각을 합디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떠나라고 합디다.”
“먼저 떠나라고 그래요? 기다리지 말고?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두 시간이요? 여섯 시간을 더 기다릴 뻔했지 않아요?”
“여섯 시간을 더 기다려요? 누가요? 우리가요? 두 시간도 너무 길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사람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버스에서는 몇 사람들이 내려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은 네 분이세요?” 키 큰 아가씨가 물었다. “우리 차 타고 가요.”
“그게 좋겠군.” 중년 사내가 버스로 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정말 떠날 테요, 아픈 사람을 놔두고?”
“그 사람 동행이 하나 있어요 원한다면, 그 사람은 남겨 놓고 가야죠.”
“그 사람도 남기지 말고 떠나시요.”
“물론이죠. 그 사람이 남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마 그 사람은 남기를 원치 않을 거요. 그가 남기를 원했더라면, 우린 진즉 떠났을 거요. 그 사람만 남겨 놓고. 그런데, 왜 다 떠나라는 거지요?”
“그게 그 사람에게도 속이 편할 거요.”
“그렇지요. 그게 그 사람에게도 속이 편하겠죠. 바쁜 사람 붙잡아서 뭘 하겠소? 자기 시간이 황금이면, 남의 시간도 황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자, 같이 가십시다.”
“먼저 내려가시요. 나는 남는 게 속이 편캤소.”
“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고, 와봤자 한 대 가지고는 차례가 오기 힘들겠는데, 남아서 속 편할 게 뭐 있겠소? 의리요? 다리 다친 사람에 대한 의리요? 같이 온 우리도 두고 떠나는데, 잠깐 스친 댁에가 두고 못 떠날 게 뭐 있소? 의리 때문이라면, 우리 하는 대로 해요. 우린 그 사람을 잘 알고, 그 사람은 우릴 잘 알아요. 그 사람이 기다리지 말고 떠나라고 했다면, 그건 빈말이 아니에요.”
“아, 물론 나두 떠나요. 내가 왜 누글 기다려요? 다만, 저 전세버스는 앉을 자리가 조금 편치 않을 것 같아서요.”
“아까 일은 사과하지 않아요, 우리가 신경들이 좀 예민했었다구? 이제, 큰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떠나니, 유쾌하게 갈 수 있어요. 우리들 노는 것을 한번 봐요. 젊은 애들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어요.”
“삼거릭가지만 같이 가요. 철순이가 말했다.
“삼거리까지만? 왜 삼거리까지야, 서울까지 가지?” 장씨가 말했다.
“광화문까지 가요. 삼거리가 어디 있나? 말죽저린가?” 중년 남자가 말했다.
“여기서 삼 키로쯤 가면 삼거리가 나와요.”
“삼백 키로겠지?”
“실덕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벽소령 물과 백무동 물이 합쳐져요. 거기까지만 가요.”
“실떡이든, 콩떡이든, 같이 가겠으면 와요.”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가 막 걸음을 떼놓으려 했을 때, 철순이가 말했다.
“떠나시기 전에, 우리가 만난 발 다친 사람이 당신들이 기다리는 김박사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할 필요는 없을까요?”
“없지, 전혀.” 중년 사내가 철순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맞으면 헛일이고, 틀리면 낭패거든. 어느 쪽이건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를 좀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는 사이에 혹 어떤 사람이 발을 절며 나타날지 누가 알아요? 그러면 시간 낭비가 아니죠.”
“우리도 두 시간 전엔 그랬지, 턱 떨어진 개 지리산 쳐다보듯이.”
중년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감색 양장의 아가씨가 그들에게 웃어 보이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차에 오르고 조금 있자, 차가 슬슬 움직였다. 방향을 잡고 막 떠나가는가 싶더니, 차가 멎었다. 문이 열리고 감색 제복의 아가씨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가 차 떠나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 그들에게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철순이가 그녀에게 같은 손짓으로 응답을 했다.
“우리 저 차 타고 가요, 삼거리까지.” 그녀가 말했다.
“난 안 타겠어.” 장씨가 짧게 말했다.
“그럼 삼거리에서 이따 만나요.” 철순이가 현애의 팔을 끌면서 말했다.
“얘, 이 표 물리는 거니?”
“아니.”
“타려면 빨리 가봐야겠어요.” 윤여사가 말했다.
“아니에요.” 철순이가 대답했다. “천천히 갈수록 좋은 일이 더러 있어요.”
철순이와 현애가 버스로 갔다. 그들이 오르자 차가 떠났다.
“정말 실떡에서 내릴 거요?” 차가 마지막 민박집 앞을 지나갈 때 구면인 중년 남자가 말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났다. 그들 끼리끼리 웃고 있었다. 그 중년 남자의 말에 웃은 사람은 차장 자리에 앉은 아가씨와 옆자리에 앉은 승객들 두엇 정도였다. 도중 승차자들은 차장 자리 뒤,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었지만 뒤쪽 빈 자리로 옮겨 주었었다. 승객들은 모두가 중년들이었다. 여자가 절반쯤 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왔었던 중년 남자가 회장인 모양이었다. 그는 운전사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 그래요. 삼거리에서 내려 주세요.”
그때 그들 등 뒤에서 “여보, 회장!” 하는 고함 소리가 잡담과 웃음소리들 위로 들려 왔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뭐라고 소리쳤다. 회장이 철순이에게 “아무래도 노래를 한 곡조 불러야 될 모양이요,”라고 말했다.
“신고식을 하기 전에 내릴 데가 되겠어요. 벌써 다 왔는데요.” 철순이가 말했다.
“인월까지 가지? 남원까지 가면 더 좋고.”
“노래 때문이라도 꼭 내려야겠어요. 창가할 줄 모르거든요.”
그때 뒤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지방방송 꺼, 어이, 지방방송 꺼. 디제이, 디제이, 디제이…… 낄낄대는 웃음 소리들이 났다.
“춤을 추는 모양이군.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겠어. 저 사람 노래는 길거든.” 회장이 말했다.
“발 다친 사람의 동행은 어느 분이세뇨? 왜 안 내렸어요?”
“내, 다음, 다음, 창가에 앉은 사람이야.”
“여자에요?”
“그래, 우린 부부동반으로 왔지.”
“부부요?”
“그래. 부부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내려야겠어요. 삼거리에요.”
“구경할 게 뭐 있어?”
“지리산이 한눈에 보인대요.”
“우리도 잠깐 내릴까?”
차가 멎었다. 그들의 길이 곧게 뻗은 길과 직각으로 만나서 삼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차는 오른편으로 꺾어서 길가에 섰다. 사람들이 내렸다. 안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맨 젊은 사람들이 서넛씩, 아마 차를 기다리는지, 가게 앞 평상에 걸터앉기도 하고, 길모퉁이에서 서성거리기도 했다. 있는 가게 하나도 신통찮아 보이는데, 블록 벽돌로 길가에 또 하나 외딴 집을 올리는 것이, 아마 가게를 낼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빙 둘러 온통 산봉우리들뿐이었다.
“어느 게 지리산이야?”
달리던 차를 세우고 내린 중년 남자들이 서로 마주 쳐다보면서 여기저기서 물었다. 더러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정도의 산세야 어디 가면 없을라구. 지리산같이 큰 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데가 있겠어?
“이것 봐요, 어느 게 지리산이요?” 승객 하나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이 든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다.
“보이는 게 죄 지리산이구마.” 한 중늙은이가 대답했다. “저기, 형씨들이 나온 백무동 쪽으로 봉우리 셋이 안 보이는 기요? 저게 천왕, 중봉, 하봉이요.”
“저기, 저, 전주 위로 보이는 봉우리들 말이지요? 넷인데요?”
“맨 오른쪽 거넌 제석봉인기라. 색깔이 안 다르요? 가까워서 높아 보이지. 그 옆에 천왕봉이 기중 높으요.”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가 가리킨 봉우리들을 넣고 사진들을 찍었다. 제석봉이 천왕봉이었으면 좋겠군. 사진을 찍고 나서 그들은 하나 둘씩 차에 올랐다.
“벽소령은 어느 쪽이에요?” 철순이가 그 동네 사람에게 물었다. 그 중늙은이는 쭈그리고 앉은 채, 서 있는 철순이를 말똥말똥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참, 별 가시나도 다 있다. 지가 벽소령은 우찌 아노? 벽소령을 알고 벽소령이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카나? 산이 움직이드나?”
“벽소령 알아서 안 될 기 있나?”
“안 될 기사 있겠나. 제석봉 오른쪽으로 세석이 안 있나? 가려서 안 보일 기다. 세석 오른쪽이 벽소령 아이가. 저쪽으로 돌아서모 보일끼고만. 그리로 올라가모 벽소령 오부자 바우가 나오고, 이 길로 올라가모 백무동이고, 저 아랫길로 내려가모 마천 인월 아이가.”
“오부자 바위가 뭐에요?”
“가보소. 내가 우찌 알겠노? 오부자 바우라 카더라. 저 모퉁이로 돌아가서 보소. 인걸과 아미가 아들 하나, 딸 둘을 데리고, 벽소령 몬당에 서 있는 기 보일 끼고만.”
중년의 사람들은 버스로 가고, 철순이와 현애는 그 반대편 길로 접어들었다. 벽소령으로 가는 길은 버스가 다니는 오르막 자갈길이었는데, 길 양편으로 논배미가 짧은 계단식 논들이 골짜구니를 메우고 있었다. 현애가 도랑을 건너 논두렁 위로 올라서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산 너머 또 산이구나. 먼 산은 가까운 데 산에 가려서 끝간 데를 모르겠구나.”
철순이는 길 한복판에 서서, 그 길ㄺ 산모퉁이로 사라진 쪽을 향하여 겹겹이 산둥성이들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산이 움직이드나, 카더라만, 벽소령 오부자 바위는 행방이 묘연타!”
그들은 행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마침 농부 두 사람이 커다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들 쪽으로 내려왔다.
“벽소령 말인교? 저기 저 산 뒤로 먼 산 꼭대기가 쬐끔 보이지예? 그 산 꼭대기 둘 사이에 고개가 있지예? 그기 벽소령 고개고예, 거게 바우가 너댓, 잘 보면 보일 기라예. 그기 오부자 바우 아닌교.”
“저기 저 산 너머에 있는 푸르스름한 산 뒤에 등성이만 간신히 보이는 산 말씀이세요?” 철순이가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농부들은 벌써 그들을 지나 몇 걸음 걸어가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 그런 걸, 난 또, 사람 꼴을 한 커다란 바위 다섯 개를 찾았지! 엄마 바위 아빠 바위, 아들 바위 딸 둘 바위!”
“그래, 이젠 찾았니? 이젠 그 일가족 바위가 보이니? 그 일가족 바위가 사람 모습을 안 했으면, 무슨 모습을 했니?” 현애가 말했다.
“보이긴 보인다, 바위가 네댓 개. 그런데 너무 멀어서 무슨 꼴을 했는가는 알 수가 없어.”
“아마 그 밑에 가서 봐도 알 수가 없을 거야. 아마, 더 알 수 없을 거야.”
“삼십 리도 더 되겠지? 가까이 가서 보면, 무슨 꼴을 하고 있을까? 사람 꼴이 아니라, 그저 바위 꼴을 하고 있을 테지? 넷인지 다섯인지, 또는 셋인지: 알 수 없는 바윗덩어리들이겠지? 높으디높은 산마루에 바위들이 네댓 개, 크고 작게 올망졸망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거야. 만일 그 바위들이 사람 꼴을 했더라면, 오부자가 아니라, 마애불과 마애보살들, 마애미륵들이 되어 버렸겠지. 전설이 아니라 신앙이 되어 버렸겠지.”
“그럼, 오부자 바위는 전설이란 말이니?”
“전설 아니겠니? 상징주의와 낭만주의로 가득 찬 전설이 아니겠니? 설마 역사는 아닐 테지. 신앙도 아닐 테고. 신앙이란 원래 사실주의와 실용주의 아니니?”
“신앙이 어떻게 사실주의고, 실용주의니?”
“복을 비는 게 실용적 아니니?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서 잘 살자는 거 아니니? 무당의 굿거리는 아마 병원 의사의 처방만큼이나 실용적이었을 거야.”
“그렇지만 사실주의는 어떻게 된 거니? 사실주의가 아니라 상징주의겠지?”
“너, 기자암 중에서 가장 신통력이 있었던 남근 바위가 상징적이겠니, 사실적이겠니? 난, 아무래도 사실적인 것 같어. 너무 사실적인 것 같어. 유치할 정도로.”
“봤니?”
“둘 다?”
그들은 천천히 길을 올라갔다. 조금 가자, 아마도 벽소령 계곡에서 흘러나왔을 물이, 여러 골 물들과 합쳐져, 시내를 이루고 길을 따라 낭떠러지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먼 능선의 바위 네댓 개가 삼거리께에서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오부자 바위까지 가고 싶으니?” 현애가 물었다.
“아니. 여기서 바라보는 게 더 좋겠어. 여기서라면, 바위를 선녀라고 해도 곧이듣겠어.”
“선녀라니? 무슨 선녀?”
“이런데 고생해서 오는 것이 좋다는 게 뭐니?”
“선녀를 만나기 위해서 오니?”
“선녀가 어디 있니, 요즘 세상에, 아무리 깊은 산속이지만?”
“그럼 뭐니?”
“옛날 사람들은 이런 데서 선녀들이 살았다고 믿었겠지. 그리고 더 먼 옛날 사람들은 이런 데서 선녀들을 만났었겠지.”
“그랬겠지.”
“우리나라 물 좋은 산치고, 비선대니 강선암이니, 선녀들이 놀지 않은 데가 어디 있니?”
“옛날에는 선녀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없다면, 옛날 사람들이 틀린 거니, 오늘날 사람들이 틀린 거니?”
“옛날에 있었던 선녀들이 오늘날에 없을 리가 없고, 오늘날에 없는 선녀들이 옛날에 있었을 리가 없지 않니?”,
“옛날에 있었던 선녀들이 오늘날 없다면, 그건 우리들 잘못이겠군. 오늘날 없는 선녀들이 옛날에 있었다면, 그견 옛날 사람들 잘못이었겠고.”
“물론, 선녀들은 옛날에도 오늘날처럼 없었겠지. 우리들은 없는 것을 없다고 하고, 옛날 사람들은 없는 것을 있다고 했겠지.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더 홀륭해.”
“그건 거짓말 아니니?”
“없는 것을 못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없는 것을 보는 것은 비범한 일이거든. 한양의 인구가 오늘날 읍 소재지의 인구만 했을 때를 생각해 봐. 그땐, 사람들이 모두 신비 속에서 살았을 거야. 마을 한복판, 도시 한복판에서 살면서도 선녀들과 함께 살았을 거야. 지금은 모두가 도시에서 살고 있어. 모두가. 산골 사람들까지도.”
“신비 속에서 살아서 선녀들이 보였니? 오늘날 사람들은 편리 속에서 살아서 못 보고? 난, 편리를 택하겠다.”
“수도꼭지 끝에서 더운물 찬물이 콸콸 쏟아지는데, 물동이 이고 오백 미터나 물 길러 가는 것을 택할 수야 있겠니?”
“정말이야. 선녀들은 텔레비전에서 보면 될 테고.”
“요즘 선녀들은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하고, 말도 잘 하더라. 그렇지만 수돗물은 너도 마시지 않지? 옹달샘물을 약수라고 부르지?”
“선녀들은 옛날 사람들의 부족과 불편을 보상해 주려고 생긴 거 아니니? 가령, 새처럼 훨훨 날고 싶은 욕망을 선녀들을 통해서 성취했던 거 아니니? 우린, 비행기가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지만.”
“천왕봉 꼭대기에 비행장을 닦아라. 비행기만 있으면 뭘 하니? 테선들, 텔레비전 선녀들은, 오늘날 사람들의 결핍을 메꿔 주니?”
“날개말고 또 천사가 실현한 것이 뭐가 있으거나?”
“아름다움, 순결, 정절, 신의, 불멸…….”
“옛날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도 많았구나?”
“요즘 사람들에게는 있니?”
그들은 걸음을 멈췄다. 삼거리 쪽에서 찻소리가 났다. 현애가 서둘러서 길을 내려갔다. 철순이는 느릿느릿 그 뒤를 따랐다. 차는 버스였다. 삼거리를 왼편으로 꺾어서 백무동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넌, 찻소리가 나는데도 서두르지 않는구나. 무슨 이유라도 있니?”
“있지. 들어가는 버스는 탈 필요가 없지 않니?”
“들어가는 버슨지, 나가는 버슨지 어떻게 아니, 소리만 듣고?”
“들어가는 버스가 없었는데, 나가는 버스가 있겠니?”
“그렇구나. 설마, 버스가 장터목을 넘어왔을 리도 없고. 저 버스가 나올 때까지 한 이십 분 또 기다려야 되겠구나?”
“승용차나 택시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나올 수가 있겠지.”
“승용차는 산을 넘어오니?”
“아니. 들어가는 소리가 잘 안 들렸겠지.”
“너는 차들이 네 짐작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무슨 이유라도 있니?”
“있지.” 철순이가 머무동 쪽으로 가리켰다. 택시가 한 대 나오고 있었다. 차는 팬 데와 솟은 데를 피해서 갈지자로 달려왔다. 그 차가 그들 앞에서 멎었다. 차의 앞뒤 문들이 열리고 장씨와 윤여사가 한꺼번에 내렸다. 차 안에는 한 남자가 뒷자리에·남아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문이 닫히자 차는 곧 떠났다.
“누구에요?” 현애가 달아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장씨에게 물었다.
“손을 흔들고도 몰라? 어떤 사람이 다리를 절며 나타났어.”
“그, 발목을 삔 사람이 나타났어요? 벌써?”
“그래. 버스가 산 모퉁이 저쪽으로 꽁무니를 채 감추기도 전에 나타났어.”
“의사라 다친 데를 고쳤나?”
“들것에 들려서 내려왔겠지. 지게에 얹혀서 내려왔든지.”
“발을 절며 나타났어. 산길을 업혀서 내려온 모양이야.”
“오 분만 더 빨리 오지.” 현애가 말했다.
“오 분만 더 기다리지.” 장씨가 말했다.
“차가 오 분을 더 기다렸더라면, 그 양반은 오 분 더 늦게 나타났을 거야.” 철순이가 말했다.
“숨어서 버스 떠나기를 기다렸으꺼나?” 현애가 물었다.
“설마. 그럼, 뭐 하러 내려와, 남의 등에 업혀서? 경치 좋은 골짜구니에서 쉬고 있지.”
“한없이 산속에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지 않아요, 더구나 혼자서?”
“그렇다고 일부러 차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 분 늦게 나타날 것도 없지 않아?”
“일행이 타고 있는 버스가 보이는 데까지는 업혀서 왔겠죠. 빨리 가서 돈을 벌어야 했지 않겠어요? 사람을 하나 사서 등에 업혀 왔겠죠. 버스가 보이자, 내려서 걸었겠죠. 천천히. 그랬더니 차가 떠났겠죠.”
“맞어. 그 친구가 나타나자 차가 떠났어. 아니, 차가 떠나자 그 친구가 나타났던가?”
“그건 확실치 않겠죠. 다만, 버스가 떠난 거와 그 양반이 나타난 거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만 확실하겠죠. 버스는 마치 아무도 뒤에 처진 사람이 없는 ˙것처럼 떠나갔고, 그 양반은 마치 그를 기다리는 버스가 없는 것처럼 나타났겠죠.”
“그를 기다리는 버스가 없긴 없었지, 그가 나타났을 땐.”
“그를 기다리는 버스가 없어도 그는 전혀 놀라거나 당혹한 기색이 없었겠죠. 마치 그를 기다리는 버스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마치 일행이 없이 혼자 왔던 것처럼.”
“맞어.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고 생각될 정도였어.” 장씨가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이 두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넌 어떻게 현장에 있었던 사람보다 더 잘 아니?” 잠자코 듣고 있던 현애가 물었다.
“장씨 아저씨는 그 차에 그 양반의 부인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니?”
“원래 안 본 사람이 본 사람보다 더 잘 아는 법이야. 그런데 이 동네에는 뭐가 볼 게 있지? 물이 두 개가 만난다고 했던가?”
“그리고 바위가 다섯 개 모여 있어요.”
“바위가 다섯 개? 그게 혹시 오부자 바위 아닌가?”
“맞아요. 착한 초부가 쫓긴 토끼를 구해 주죠.”
“사슴이지.” 현애가 말했다. “그런데 이 바위들이 바로 그 선녀네 식구들이 니?”
“나무꾼과 선녀와 그들의 세 자녀들이면 바위가 다섯 개 되지 않니?”
“그래, 맞어. 넷 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 사슴이. 그런데 착한 나무꾼은 아내가 자식 셋을 낳자 간청에 못 이겨 선녀의 옷을 보여주고 말았지. 날개를 찾은 선녀는, 두 아이를 양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하나는 두 다리 사이에 끼고, 하늘 나라로 날아가 버렸지. 넷이었더라면, 하나를 남겨 두고 가버리지 못했을 것을. 홀아비가 된 나무꾼 앞에 고라니가 다시 나타났지. 그리고 맨 처음 선녀들이 멱감는 곳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선녀들이 비 오는 날 두레박질을 하는 데를 가르쳐 주었지, 그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헤어진 처자
식들과 다시 만나라고.”
“그래서 그렇게 했나?”
“했겠죠.” 철순이가 말했다.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먼저 간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 오래오래 잘 살았겠죠.”
“두레박질이 아니라 칠성판이었겠지. 그리고 착한 나무꾼이라고 했으니까, 천국에 가서 영생을 얻은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데, 난, 하늘나라에서 오래오래 산 것은 좋은데, 천국에 가서 영생을 얻은 것은 어쩐지 으시시해서 별로다! 두레박이라면 얼마든지 타고 올라가고 싶지만, 요단강 건너 영생은 천천히 했으면 좋겠어.” 현애가 말했다.
“정말 그렇구나. 두레박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죽음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조차 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처음 알았어. 난 그게 그냥 나들이 가는 건 줄 알았어. 저승이 이승의 계속이냐, 보상이냐,에 따라서 저승에 대한 친근감이 달라지겠구나. 계속으로 본다면야, 조금 먼 데로 여행 떠나는 거밖에 더 되겠니? 여기서 못다 한 일, 거기 가서 할 수도 있고 말야. 그렇지만 보상으로 본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 이 세상에 좋은 일만 하고 산 사람은 괜찮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하니? 그리고 좋은 일이라는 것도, 무엇이 좋은 일인지 어떻게 아니? 자기가 생각할 때 좋은 일이 반드시 남이 생각할 때도 좋은 일인지 알 수 없고, 또 마지막 심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내가 그 동안 얼마나 해놓았는지,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얼마나 해야 좋은 데로 가는지, 또 얼마나 좋은 데로 가는지, 그리고 남들은 나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을 해서, 또는 더 나쁜 일을 해서, 얼마나 더 좋은 데로, 또는 더 나쁜 데로 가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것들뿐이지 않니?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저승에 가기가 두려운 것도 무리는 아니겠어.”
“저 세상이 이 세상의 보상이라면, 이 세상은 저 세상의 준비니?”
“그렇게 되니?”
“무슨 입학시험 같다, 얘.”
“다만 재수를 할 수 없는 게 다를 뿐이지.”
“차라리, 죽고 사는 것은 다만 죽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말해라. 그런데 저 바위 다섯 개는 언제 찍은 가족사진일까? 아니, 언제 쪼은 가족조각일까? 선녀가 애들 셋을 끼고 올라갔을 때 거라면 넷이어야 하고, 다섯이 맞다면 나무꾼이 같이 있었다는 얘긴데, 옆에 있으면서 아내가 새끼들을 데리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는 거니?”
“그래서 바위들이 얼른 보면 네 개, 다시 보면 다섯 개 아니니? 나무꾼이 아마 뒤미처 천방지축 달려왔겠지. 그 나무꾼이 그의 가족 나머지 넷과 같이 있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절실했길래 바위들이 다섯이 되었겠니? 조각가에게 조각할 사물의 순간을 선택할 권한이 있다면, 그 권한 속에는 가장 풍부한 순간을 선택할 권한뿐만 아니라, 한 순간에 여러 순간들을 조각할 권한도 포함되어 있겠지.”
“사진 한 장에 여러 순간들을, 즉 여러 장면들을 찍는다는 얘기니?”
“그럼 안 되니? 한 장면으로 여러 장면들을 나타낼 수 있으면 좋고, 그게 안 되면 여러 장면들로라도 여러 장면들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니?”
“어디서들 들었는지 내가 어찌 알까마는, 아가씨들 이야기는 내 얘기와 다르구만. 미역감는 선녀들의 옷을 한벌 훔쳐내어, 날개 잃고, 뒤에 처진 한 선녀를 데려다가, 초가삼간 외딴집에 살림낸게 아니라네.”
장씨가 말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종이 접은 것을 하나 꺼내서 펼쳤다. “옛날옛적 깊은 산속 산천 좋은 벽소령에, 구름따라 바람따라 총각하나 홀러와서, 움막치고 땅을 일궈 혼자 숨어 살았다네. 사람 발길 닿지 않은 맑은 샘물 골짜기에, 선녀들이 하황하여 옥황상제 상차릴제, 가마소에 밥짓기요 구시소에 설거지라. 선녀아미 불지피다 문득한곳 바라보니, 나무하다 목이말라 물찾아온 인걸이라. 젊은아미 젊은인걸 서로한번 눈만나니, 정신들이 가물가물 천지현황 안보이네. 어린아미 물정몰라 하계에다 정을준다. 눈만나니 입만나고 입만나니 배만난다. 어린연분 불쌍하여 딴선녀들 동정한다. 감춰주고 도와주니 연분나고 정분난다. 연분나니 정분이냐 정분나니 연분이냐. 물흐르듯 세월가니 일남이녀 생겼구나. 좋은일이 오래가고 궂은일이 안생기면, 세상일이 어려워도 둘이함께 견디련만, 선녀들이 상제눈을 어찌오래 속일소냐, 크게노한 옥황상제 선녀하강 막았도다. 강선을랑 금했지만 벽소물맛 잊지못해, 두레박질 길은물로 수라짓게 하였더라. 하계에서 맺은인연 다하기전 끓는것이; 안본다고 될일이냐 시킨다고 될일이냐. 상제눈을 두번다시 기이자고 했으랴만, 두레박끈 저쪽끝에 보고싶은 얼굴들을 적선하곤 못바꾸랴 죽음하곤 못바꾸랴. 선녀아미 저랬을적 인걸인들 성했으랴, 하계인간 선골되기 강선도곤 안될노릇, 인걸인들 그이치를 몰랐을리 있을까만, 아미향한 그마음이 그를향한 선녀마음, 그마음이 하나임에 인걸이곧 신선이라, 앞뒤미처 못가리고 두레박에 자식태워, 아들하나 두딸들을 선계에다 보냈더라. 자식들은 반선녀라 두레박에 실었지만, 되내려온 빈두레박 앞에놓고 생각하니, 제몸선뜻 신선길에 오르기가 망설여져, 하늘보고 땅을보고 나오느니 한숨인데, 두레박에 매인줄은 왜그렇게 제혼자서, 사시나무 떨듯떨어 남의애를 태우는고, 올라서도 못하겠고 보내지도 못하겠네. 사람자식 인걸이가 두레박에 몸을 싣고, 구름위로 솟구쳐서 하늘나라 당도하니, 이게사람 소행이냐 물주의 조화이냐, 아무래도 이거사가 예삿일이 아니로다. 인걸선경 들어온죄 아미사람 불러온죄, 상제께서 용서하고 두루두루 복을주니, 두레박탄 인걸이는 우화등선 하였구나. 만난이들 서로잡고 오래도록 회포푸니, 상제로도 막지못한 아미인걸 둘사이에, 연분이야 정분이야 그게바로 조화로다.”
장씨가 소리를 마치고 막 한숨을 돌렸을 때 백무동 쪽에서 버스가 나왔다. 그들은 그 차를 탔다. 완행이었는데, 손을 번쩍 쳐들자 차가 섰었다. 차는 만원이었다. 그들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비좁은 통로에 배낭들을 피해서 섰다.
“발목 삔 사람하고 그냥 가셨더라면 편할 걸 그랬어요.” 철순이가 말했다.
“고속버스 정류소까지 바로 갈 뻔했지.”
“광한루가 아니고요?” 현애가 말했다.
“그 친구, 일행과 만나려 했으면 진즉 만났지. 택시를 둘씩이나 놓쳐 주었거든.”
“아까 그 종이 쪽지는 어디서 났어요? 그것도 공원입구 매점에서 샀어요?”
“무슨 쪽지?”
“그 당골네 굿하는 소리 적은 쪽지 말에요.”
“아, 그 쪽지 말인가? 그게 또 좀 묘하게 됐어. 그게 김씨한테서 나왔다고 하면 곧이듣겠어?”
“어떤 김씨요?”
“내가 삼거리 실덕 벽소령 입구에까지만 같이 갈 수 있다고 했더니, 그 발목 삔 사내가 그 쪽지를 내주드군.”
“그 사람, 의사라고 했지 않아요? 의사가 무당굿 좋아하네.” 현애가 말했다.
“대개, 지은이들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꾸미려고 그런 소리들을 종종 하죠. 자기는 다만 전할 뿐이라든가, 편집만 했다든가.”
“김씨에게 우스운 게 하나 더 있어.” 장씨가 철순이의 말에는 상관없이 계속했다. “그는 발목을 삐지 않았을지도 몰라.”
“안 삔 발목을 삐었다고 한 것은 천천히 내려오기 위해서, 일행과 떨어지기 위해서, 일행과 함께 광한루로 가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라.”
“업혀서 내려왔다고 했지 않아요?” 현애가 말했다.
“그랬지. 그런데, 그 증거가 없어. 업고 내려온 사람을 내가 본 게 아니거든.”
“그렇지만 발목을 다쳤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어요. 높은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발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문제는 그가 왜 발 삐기를 원하느냐에 있겠죠.”
“그는 천천히 내려오기 위해서 발목을 삐었겠지.” 철순이가 천천히 말했다. “그는 발목을 삐었거나 안 삐었고, 발목 삐기를 원했거나 원치 않았겠지. 그런데 장선생님은 왜 그가 발목을 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장씨 아저씬, 김씨가 발목을 삐어서 일행과 합류를 못 한 것이 아니라, 합류하기 싫어서 안 했다고 믿고 싶으신 모양이야.”
“왜 그렇게 믿고 싶으꺼나?”
“벌써 마천을 지났군. 저것 봐. 물이 거꾸로 흐르고 있지. 우린 지금 산에서 내려오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저 물은 산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어.” 장씨가 말했다.
“정말. 조금 전엔 분명히 우리와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거꾸로 흘렀지?” 현애가 창 밖으로 물의 흐름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말했다. 물은 넓은 내가 되어 길 옆 낭떠러지 밑으로 저만치서 검은 돌들 위를 흐르고 있었다.
“물이 산속으로 흘러 올라갈 리야 있겠어요? 물은 남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죠. 다만 우리들이 진주 반대편으로 가고 있을 뿐이죠.”
“진주라니, 촉석루가 있는 진주 말이니?”
그들은 인월에서 차를 내렸다. 직행으로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철쭉제』, 민음사, 1986. 1995년 부분 수정)
2016년 5월 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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