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운명한
글,편집: 묵은지
조선시대에 임금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도 일찍 죽는 바람에 임금이 되지 못한 안타까운 왕자가 두명이 있습니다. 그 둘은 다름아닌 이 글 직전에 묵은지의 글에서 밝힌 '소현세자'와 바로 이 글의 당사자인 비극의 '효명세자'를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500여년 역사가운데 거의 중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이후 후반 말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타락상을 보였던 조선시대 정치는 이 두 왕자를 통해 보여준 신선한 모습들로 혼탁한 조선의 정치계가 한때는 환한 빛으로까지 보여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죽음은 후손들에게 더욱 큰 아쉬움을 주었는데 만약에 이 두 왕자들이 임금으로 보위에 올라 이들 뜻대로 정치를 펼쳤다면 조선의 앞날은 또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비단 묵은지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조정을 중심으로봐서 붕당정치로 업치락 뒷치락 했던 전반기 조선이 지나고 후반기로 접어든 조선은 정조가 안동김씨 김조순을 자기곁에 가까이 들이면서부터 세도정치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병석이 위중하다는 것을 느낀 정조는 나이어린 왕세자의 앞날이 걱정되어 죽기 보름전에 자기가 신임하며 사돈까지 맺기로 언약한 김조순을 곁에 불러들여 조정의 정치에 적극 개입해 줄 것을 요청 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안동김씨들이 조선의 앞날을 극도로 불행하게 만든 이른바 '세도정치'의 시초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김조순은 정조가 죽고나자 자신의 딸(순원왕후)을 순조의 왕비로 앉히고 병약하고 어린 순조를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문을 활짝 열어 대를이어 가면서 무려 60여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통해 조선을 좌지우지 하였습니다. 1800년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심성 또한 연약하여 거절을 못하는 성격에 큰소리 조차도 내지 못하는 심약한 몸이었습니다. 그런 순조이기에 일단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정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런 형태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고 정조의 유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김조순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조선의 정치는 문란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조정부터 지방 관아까지 백성들을 들볶는 착취가 극에 달하여 혼탁한 조선사회 전체가 혼란과 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사이 순조 나이 15세에 친정을 시작하긴 했는데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1809년에는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아들인 효명세자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는 효명세자가 조선 숙종이후 완벽한 첫 적통의 신분이었습니다. 왕실로 봐서는 큰 경사였는데 이런 기쁨도 잠시, 해를 거듭할수록 세도정치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지방 곳곳에서 탐관오리에 항거하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가뭄과 기근까지 들어 힘에부친 순조는 도저히 수습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변에 안동김씨로 둘러싸인 순조는 스스로 어떤 정치도 펼칠수가 없었으며 차츰 순조는 정치에 흥미를 잃고 급기야 38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건강문제를 들어 아들인 19세의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고 정사를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남다른 영특함이 있었고 외모 또한 출중하였으며 재능까지 겸비한 효명세자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항상 잔뜩 주눅이 들어 정사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던 순조에게는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게 할 한가닥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뛰어난 재능을 보인 효명세자는 세자시절을 굵직하게 보냈는데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과 궁궐 전경을 도화서 화원들과 함께 조감도식으로 그려진 대형크기의 '동궐도'를 제작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궁중연회에 등장하는 궁중무용인 '정재' 가운데 효명세자의 창작무인 춘앵전을 위시하여 가인전목단, 고구려무, 향령무, 장생보연지무 등을 직접 만들고 보완, 수정하여 다듬는 예술적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칼춤에 쓰이는 칼날이 금속의 날카로움과 뻣뻣한 느낌을 주는 것을 보고 특이하게 손잡이와 칼날을 따로 놀게 만들어 칼춤의 흥미를 더하고 그 멋을 한층 더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효명세자는 1819년 풍양 조씨 가문의 규수를 세자빈(훗날 신정왕후)으로 맞아 들였으며 대리청정을 시작하던 그 해 1827년에는 원손인 아들(훗날 헌종)을 낳았습니다.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우선 안동김씨들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정치권에서 배척하려 노력했습니다. 어린 나이의 효명세자 였지만 정사에 있어 안동김씨의 간섭을 철저하게 배제하여 일처리를 단호하게 해냈으며 인사 또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엄격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창덕궁 후원인 비원에는 17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중 아주 소박하게 지어진 '기오헌'과 '의두각'은 효명세자의 간청으로 지어진 건물로 할아버지인 정조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삼았던 탓에 건물의 이름도 그를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아 지었다고 합니다. 지긋지긋한 안동김씨들의 세도정치에 신물이난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를 본받아 개혁정치를 펼치고 유능한 젊은 인재를 등용시켜 조선을 융성하게 이끌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포부는 어디까지나 포부일뿐 안타깝게도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엇나가고 있었는데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세자빈 역시 풍양 조씨인 탓에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으로 실세가 된 풍양 조씨들도 안동김씨 못잖케 그들과 쌍벽을 이뤄가며 한술 더뜨는 그야말로 세도정치의 끝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몸이 약한 효명세자는 도리어 아버지 순조보다 더 허약해 보였는데 그동안 순조가 미뤄 두었던 정사를 하나씩 풀어가야 하는 대리청정의 고단함을 이겨내지 못했을뿐 아니라 양쪽 세도 가문의 막장 스토리 덕에 끝없이 들려오는 원성 등은 병약한 효명세자를 이런저런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말할 수 없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1812년, 8살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효명세자는 순조 내외의 깍듯한 사랑과 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키우며 성장하였지만 세자 나이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3년 3개월 끝에 22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아버지 보다 먼저 자신의 생에 죽음으로 마지막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순조는 갑작스럽게 죽은 세자에 대한 크나큰 슬픔을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며 후세들은 효명세자의 죽음을 두고 안동김씨들이 후환이 두려워 독살시킨 것이 아니냐라는 의혹을 갖기도 했었지만 결국 몸이 허약하여 건강이 좋지않아 죽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함께 조선의 왕조에 새바람을 기대했던 많은 백성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주었으며 만약에 이 두 왕자 가운데 어느 한사람 만이라도 살아서 임금이 되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아쉬운 생각만을 하게 했습니다. 효명세자는 현재 동구릉 가장 동쪽에 있는 '수릉'에 신정왕후와 함께 합장되어 있으며 비록 짧은 생애로 안타깝게 임금의 자리에는 앉질 못했지만 아들인 헌종이 '익종'으로 추존했고 1899년 고종이 다시 그의 양자 자격으로 '문조 익황제'로 추존을 했으나 보통 사람들의 기억속에는 추존된 묘호보다는 익종이나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향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