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쉽게 쓰는 게 제일 어렵다. 어렵게, 혹은 어려운 글처럼 보이게 쓰는 것은 아주 쉽다. 개념어를 적절히 탑재하고, 잔뜩 각주를 달고, 잊을 만하면 거장이나 대가를 거론하면서, 본인조차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긴 문장을 써내려가는 것은 시각적으로는 어려워 보여도 기술적으로는 매우 쉽다. 그 반대가 어렵다. 쉽게 쓰는 게 진짜로 어렵다.
물론 이 연재의 클리포드 기어츠 편에서 말했듯이, 쉽게 쓴다는 것은 복잡한 세계 구조나 뒤엉켜 있는 현상을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무엇이며 그 현상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본질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쉽게 쓴다는 것일 뿐,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하는 게 쉽게 쓰는 것은 아니다.
쉽게 쓰는 게 제일 어렵다
수천 년 동안 전개된 서양미술의 복잡하고 장구한 역사에 대해 여전히 그 통사로서 정평이 높은 <서양미술사>의 저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방대한 책의 서문, 그것도 서문 맨 앞에서부터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전문용어나 얄팍한 감상의 나열이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평생을 통해서 미술책은 모두 그럴 것이라고 백안시하게 만드는 악습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평범하고 비전문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고 성심껏 노력했다.”
실제로 그러하다. 이 책은 서양사 전체가 미술작품 안에 녹아 있을 정도로 방대한 시간과 정보와 작품을 다루고 있다는 ‘한계’ 말고는, 평범한 교양 수준의 독자가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독자를 일깨워주기보다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우리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곰브리치는 이제 막 서양의 미술사를 알아보려는 “신참자에게 세부적인 것에 휘말려 혼돈됨이 없이 이 넓은 분야의 지세(地勢)를 보여주고, 까다롭고 복잡한 인명과 각 시대와 양식들을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복잡하고 험준한 산을 오르기 위한 지도, 그것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다. 그러나 지도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세 권의 다른 지도들도 아울러 살펴야 한다. 이 책에 개울이나 골짜기나 벼랑이 그려져 있지만 각각의 의미들이 정밀하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이를테면, 인류 초창기에 예술이 어떻게 발생했는가에 대해 뚜렷이 대별되는 시각을 가진, 그래서 그 이후의 미술사에 대해서도 좀 더 사회사적 접근을 하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필수적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다 빈치를 생각해보자. 그는 ‘천재’다. 그림, 건축, 무기, 생활용품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를 상상하고 구현해내려 한 사람이다. 그의 스케치를 보면 비행기 같은 상상의 도구뿐만 아니라 난로·재봉틀·열쇠도 그려져 있는데, 미국의 학술사가 베른 디브너는 이를 두고 ‘홈쇼핑 카탈로그’ 같다고도 했다.
곰브리치는 이 르네상스에 대해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엘로, 티치아노, 코레조와 조르조네, 북유럽의 뒤러와 홀바인 기타 수많은 거장의 시대”였다고 우선 인물 중심으로 강조하면서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영원히 남을 훌륭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술가를 확보하고자 경쟁을 벌였던 이들 도시가 가졌던 자부심은 거장들로 하여금 서로 남보다 뛰어나고자 노력하게끔 자극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서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썼다.
이런 관점에 따라 곰브리치는 다 빈치를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라고 부르면서 그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깊게,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했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작업을 해냈다고 설명한다.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무렵에 대해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레오나르도는 받침대 위에 올라가 그가 그려놓은 것을 바라보며 붓 한 번 대지 않고 팔짱을 끼고 하루 종일 서 있곤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파손된 상태 속에서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사색의 결과이다. ‘최후의 만찬’이야말로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위대한 기적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야말로 위대한 기적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르네상스 편>
반면 하우저는 다 빈치가 이른바 ‘천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천재들의 시대’가 열리게 된 사회사적 원인에 더 주목한다. 중세가 끝나가던 무렵, 이탈리아 반도는 농촌 경제제도와 엄격한 신분제도로 유지되어온 여타의 유럽 지역과 달리 상인 집단이 주도하는 경제적 자유와 문화의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지중해와 서유럽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대규모 자본을 형성한 르네상스 도시들은 경제교역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화와 지식의 활발한 교류를 전개하여 기존의 종교 율법이나 문화적 형식을 벗어나 빠른 속도로 세속화·시민화·근대화를 지향하게 된다. 이 도약의 지렛대는 합리주의였다.
하우저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제도로 나아가고 있던 중세적 발전 경향을 이때부터 전 유럽의 정신적·물질적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합리주의라는 방향으로 심화”시키는 시대이며, 따라서 예술에 있어서도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프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이 지배하게 된다. 르네상스의 이 합리주의 정신은 “계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일체의 것에 대한 혐오”를 말해준다. 다 빈치가 ‘천재’이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이 빚어졌지만, 그 시대가 원근법이라는 철두철미한 합리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두 권을 겹쳐 읽을 때, 서양미술의 장구한 역사가 뚜렷하게 보인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1950년대의 잭슨 폴록이나 1960년대의 팝아트에서 끝이 난다. 저자가 수정 증보를 하면서 찰스 젠크스 등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미술가에 대해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 풍부하지는 않다. 십수 차례에 걸쳐 증보를 했지만 1950년에 초판이 나왔으므로 이 책이 20세기 후반의 미술사를 언급하는 정도로 멈춘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와 실은 20세기 전반기에 대해서도 ‘당대적 한계’를 안고 서술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 “미래의 미술에 관하여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하며 책을 마무리했지만, 그 ‘미래’가 다가왔다가 흘러간 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는다. 그러니 이른바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할 포스터 등이 촘촘하게 책임 편집한 <1900년 이후의 미술사>나 진 로버트슨과 크레이그 맥다니엘이 쓴 <테마 현대미술 노트>가 훨씬 유용하다.
단, 맨 앞에 인용하였듯이 이 두 권의 책에서는 곰브리치의 서술방식, 즉 “평범하고 비전문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저자들의 개성과 의욕의 문제가 아니라 ‘평이하게 서술’하기에는 아직 의미의 차원에서 ‘20세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곰브리치의 서문으로 돌아가면, 그는 서문 맨 앞에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오리엔테이션을 위한 친절한 지도, 이 점에 관한 한 이 책을 따라갈 만한 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