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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연설 1.
우신이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흔히 언급할 때마다, 내가 모르지 않는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조차 나는 사나운 말을 듣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이야말로 내 주장하노니,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몸이야말로 신들과 인간들을 즐겁게 하는 재주를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은 내가 여기 운집한 여러분 앞에 연설하려고 등단하자 여러분 모두의 얼굴이 갑자기 뭔가 새롭고 흔하지 않은 기쁨으로 빛을 발하였으며, 그리하여 내가 사방에 둘러앉은 여러분의 면면을 보노라면 호메로스의 신들이 마시는 신주(神酒)와 더불어 모든 불행을 잊게 해주는 약에 취한 듯, 꼭 그렇게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여, 꼭 그렇게 흥겹고 유쾌하게 환호하였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만 해도 마치 이제 막 트로포니오스의 암굴에서 되돌아 나온 사람들처럼 침통하게 시름하며 앉아 있더니 말입니다. 세상 이치대로 태양이 아름다운 금빛 얼굴로 대지를 내리쬐거나, 매서운 겨울을 보내고 다시 찾아온 봄이 따사로운 서풍으로 불어올 때면, 만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피어나고 싱그러움을 되찾는 것처럼, 꼭 그렇게 여러분의 표정은 내가 등장하자 달라졌습니다. 실로 위대한 연설가라도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고 준비한 연설이라야 사람들 마음의 시름을 덜어 낼 수 있는 법이거늘, 나는 단지 등단하는 것만으로도 이를 성취하였던 것입니다.
우선 어쩐 일로 오늘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색으로 내가 여러분 앞에 섰는지 말하고자 하오니, 여러분은 이 연사에게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물론 귀라 해도 교회 설교자들에게 기울이던 것이 아니라, 다만 장바닥 약장수들, 그들 광대들과 익살꾼들을 향해 세우곤 하던 귀 정도면 족할 것이며, 옛날 미다스 왕이 목동 신에게 기울였던 것이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러분 앞에서 잠시나마 교수 흉내를 내볼까 하는 뜻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쓸데없는 고민거리로 학생들을 괴롭히며 심하게는 여인네들의 집요한 말씨름을 전수하는 오늘날의 교수가 아니라, 그 옛날 ‘현자’라는 치욕스러운 명칭을 거부하며 다만 그저 궤변가이길 자처했던 연설가들을 흉내 내볼까 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예찬 연설로써 신들과 영웅들을 칭송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오늘 예찬 연설을, 헤라클레스에 대한 칭송도 아니요, 솔론에 대한 칭송도 아니요, 다만 나 자신인 우신에 대한 칭송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 스스로를 칭송한다고 해서 이를 아주 어리석고 뻔뻔한 일이라고 말하는 현자 나부랭이들을 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히 그렇게 보길 원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칩시다. 그래서 나한테 오히려 딱 어울리는 일입니다. 우신인 나 스스로 자화자찬의 나팔수가 되어 나자신을 노래하는 것만큼 내게 잘 어울리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있어 나 우신을 나 자신보다 잘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나의 행동이 귀족들과 교수들 가운데 천박한 무리들이 해 버릇하는 동일한 행동에 비하면 오히려 점잖다고 생각하는바, 저들은 염치가 비뚤어졌는지 아첨 잘하는 연설가나 혹은 허튼소리 잘하는 시인을 불러 돈으로 고용하여 자기들을 칭송하는 문장, 그래 봐야 말짱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문장을 듣습니다. 무모한 아부꾼들이 이들 형편없는 인간들을 신들과 나란히 세우며, 모든 덕목의 절대적인 귀감이다 치켜세우며, 까마귀에게 공작새 깃털을 입히며, 시커먼 이디오피아 사람을 하얗게 분칠하며, 심지어 파리를 코끼리로 만들 때면, 그럴 때면 그들은 짐짓 사양하는 체하면서 공작새처럼 깃털을 보이고 머리 볏을 세우고 있습니다. 적어도 듣는 사람 본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것들과는 <완전 8도를 두 번 건너갈 만큼>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말입니다. 각설하고 나는 오래된 속담을 따르고자 합니다. 자기를 칭송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칭찬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고 한 그 속담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들의 배은망덕입니다. 아니 차라리 아둔함이라 하겠습니다. 그들 모두는 나를 열심히 모시고 나의 은공을 기꺼워하면서도, 지난 수 세기 동안 달가운 연설을 마련하여 나 우신을 칭송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시리스나 팔라리스, 나흘거리 열병, 파리와 대머리, 그리고 여타 각종 해악들을 칭송하는 연설문을 쓰느라 밤잠을 설치며 등불을 밝히는 사람들은 없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나로부터 즉흥 연설을 듣게 될 것인바, 애써 꾸미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만큼 더 진솔한 연설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많은 천박한 연설가들은 자신의 연설 능력을 자랑하고자 하지만, 나는 그런 뜻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무려 30년을 공들인 데다가 적잖이 남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연설문을 읽으면서도, 남들에게는 겨우 사흘만에 마치 장난삼아 썼다거나 혹은 즉석에서 받아적게 하여 완성하였다고 말하는 연설가들은 제 능력을 자랑하여 잔뜩 젠체하며 그와 같이 말합니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늘 혀에 걸리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을 그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행여 누군가가 기대할까 봐 말해 두거니와, 연설가 말짜들이 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정의를 통해 설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분류를 통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뜻이 널리 퍼져 있는 우신을 정의로써 어떤 한계 속에 가둔다거나, 혹은 세상 만물이 하나 되어 숭배하는 우신을 쪼개고 나눈다거나 하는 건 둘 다 불경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정의 같은 것을 통해 봐야 겨우 나의 그림자 혹은 겉껍질만을 설명할 뿐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여러분이 여러분의 눈으로 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에야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이렇습니다. 실로 나는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로마인들은 나르르 <스툴티티아(Stultitia)>, 희랍 사람들은 <모리아(Moria)>라고 불렀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의와 분류로써 말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사람들이 내 얼굴과 겉모습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거나, 혹은 누군가 나를 미네르바 혹은 지혜의 여신이라고 주장할 때에, 영혼을 가장 맑게 비추는 거울인 언어를 보태지 않고 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히 반박하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나는 나를 전혀 눈치레로 치장하지 않으며, 가슴속 깊이 품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겉을 가장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보여 줍니다. 그리하여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도 남의 눈을 속일 수 없으며, 제아무리 그들이 현자의 명함을 달고 있다고 해도, 황제의관을 걸친 원숭이들이나,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들이 돌아다닐 때와 같이 쉽사리 본색이 드러납니다. 제아무리 감추려 해도, 말하자면 길게 뻗친 귀 때문에 미다스 왕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치욕을 안기는 일에 내 이름을 마구잡이로 쓰는 등, 하늘에 맹세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마저 나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더없이 어리석으면서도 남들에게는 탈레스와 같이 위대한 철학자인 양합니다. 이들을 <개똥 박사>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지 않겠습니까?
이러고 보니 내가 이 부분분에서도 역시 오늘날의 연설가들과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거머리처럼 두 개의 혀를 가졌음을 보여줄 때 마치 신이라도 된 양 뻐기며, 라틴어 연설문 군데군데, 비록 그것이 있을 자리가 아닌데도, 희랍어 토막말들을 마치 장식처럼 엮어 넣을 수 있음을 대단한 일인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또한 이들은 외국어가 부족해지면, 낡아 빠진 책들에서 전혀 알지 못할 이런 낱말 네다섯 개를 오벼 내어 연설문에 엮어 넣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해하는 자기 모습에 스스로 뿌듯해할 것이며, 정녕 이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이해 못 하는 만큼 더욱 큰 경외심을 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들이 모르는 어려운 말을 할수록 더욱 큰 존경을 받으니, 이는 분명 우리네 어리석은 자들의 커다란 즐거움입니다. 한데 이보다 무모한 사람들은 남들에게 어려운 말도 자신은 거뜬히 이해한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생각에 짐짓 못 알아들으면서도, 당나귀들이 귀를 흔들어 대듯 맞장구치며 큰 소리로 웃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 정도 해두겠습니다.
이제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내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어떤 별칭을 덧붙여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들’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신이 신자들을 호명하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별명이 있겠습니까? 각설하고 내가 어떤 핏줄에서 생겨났는지가 여러분에게나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에 나는 무사이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나의 아비는 카오스도 아니요, 오르쿠스도 아니요, 사투르누스도 아니요, 이아페토스도 아니요, 그런 쉬어 빠지고 늙수그레한 신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내 아비는 ‘부유’인데, 물론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반대하고, 더 나아가 유피테르도 분노하겠지만, 이분이야말로 바로 인간들과 신들의 아버지입니다. 내 아비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예나 지금이나 신들이나 인간들이나 뒤죽박죽 모두가 뒤엉키고 맙니다. 내 아비는 자신의 뜻에 따라 전쟁, 평과, 국가, 의회, 재판, 민회, 결혼, 계약, 동맹, 법률, 예술, 축제, 엄숙,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 만사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이나 모든 일을 주재합니다. 내 아비의 재물이 없었다면 시인들이신성을 가졌다고 노래한 수많은 신국(神國)의 백성들은 고사하고,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선택받은 위대한 신들 마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혹은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결단코 찬밥이나 다름없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아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누군가 내 아비를 성나게 만든다면, 설령 팔라스일지라도 그에게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을 겁니다. 반대로 내 아비에게 재가를 받은 사람이라면 번개를 던지는 위대한 유피테르의 목에 밧줄을 걸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가문과 혈통에서 태어났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런데 유피테르가 성깔 있고 험상궂은 팔라스를 낳을 때처럼 그렇게 내 아비는 나를 제 머리에서 끄집어내지는 않았는바, 실은 매력적인 만큼 누구보다 명랑한 요정인 ‘청춘’으로부터 나를 얻었습니다. 내 아비는 저 유명한 절름발이 대장장이가 태어날 때처럼 지루한 결혼 침상에서 그녀와 결합한 것이 아니며, 이보다는 훨신 매력적인 일이었는바, 우리 호메로스의 말마따나 ‘사랑의 동침’ 가운데 결합하였습니다. 부유의 신이 나를 낳았으되, 여러분은 내 아비를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부유의 신과 혼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 아비는 당시 아리스토파네스의 부유처럼 이미 곧 관에 들어갈 만큼 기력은 쇠잔하고, 앞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시력마저 미약해진 분이 아니었으며, 아직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건장한 청년으로 열정에 달아 올랐답니다. 이는 내 어미 ‘청춘’때문이었으나, 물론 신들의 잔치에 참석하여 누구보다 많이 마셨고 어느 것보다 독하게 마신 신주(神酒) 탓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내 출생 장소를 묻는다면 그것은 오늘날 특히 사람들이 어느 곳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느냐, 그 출생지에 따라 귀족 여부를 판가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델로스 섬도 아니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도 아니며, 속이 빈 동굴도 아닙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행복의 섬입니다. 그곳에서는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밭을 갈지 않아도 모든 것들이 풍성하게 자랍니다. 행복의 섬에는 아무도 고생할 일이 없으며, 아무도 늙지 않으며, 누구도 병들지 않습니다. 섬의 들판에는 수선화, 접시꽃, 백합, 부채꽃, 혹은 누에콩, 혹은 이런 것들과 같이 별 볼일 없는 푸성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몰뤼, 파나케스, 네펜테스, 아마라코스, 암브로시아, 연꽃, 장미, 제비꽃, 히아퀸토스 등 아도니스의 정원에서 자라는 영험한 약초들이 가득 눈과 코를 동시에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이로운 땅에서 태어난 나는 울음으로써 생애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태어나자마자 나는 어미를 향해 해맑게 웃었습니다.
나는 크로노스의 아드님이 염소를 유모로 두었던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두명의 아리따운 요정들이 젖 먹여 나를 키웠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였습니다. 이 둘을 여러분은 나를 수행하는 일행들과 하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랫것들의 이름을 여러분이 알고자 하신다면, 하늘에 맹세코 여러분은 오로지 희랍어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쉽게 구분할 수 있는바, 눈썹을 치올리고 있는 아이는 ‘자아도취’입니다. 여기 눈웃음을 지으며 연방 손뼉을 치고 있는 아이를 여러분은 보실 터인데, 이 아이의 이름은 ‘아부’입니다. 여기 꾸벅거리며 반쯤 졸거 있는 아이는 ‘망각’이라고 불립니다. 여기 깍지를 끼고 양쪽 팔꿈치를 괴고 있는 아이는 ‘태만’입니다. 여기 장미꽃으로 다발을 엮어 두르고 온몸 여기저기에 향수를 바른 아이가 ‘환락’입니다. 여기 불안하게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아이는 ‘경솔’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 좋은 몸뚱이를 가진 아이는 ‘음란 호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계집 몸종들과 더불어 여러분은 두 명의 머슴들을 보실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광란 축제’라고 부르며, 다른 하나를 ‘이사불성’이라고 부릅니다. 말하거니와, 이와 같은 하인들의 충실한 도움을 받아 나는 세상만사가 내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 군주들 또한 내게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여러분은 방금 나를 낳은 부모, 나를 키운 양육자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일행들에 관해 들었습니다. 이제 감히 여신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시기 바라오니, 내가 얼마나 커다란 이익을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가져다주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널리 내 신적 역량이 미치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가 분명히 적어 놓은바, 죽을 운명의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증거일진대, 포도주 혹은 식량 또는 유사한 어떤 유용한 것들을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이들을 신들의 의회에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백성들에게 온갖 것들을 넉넉히 나누어 주는 내가, 그런 내가 어찌 모든 신들 가운데 최고신이라는 이름을 얻고 또 그렇게 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생명보다 달콤하고 값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생명은 누구에게서 비롯된다 하겠습니까? 바로 나로부터입니다. 인간 종족을 혹은 생산하고 혹은 번성케 한 것은 강력한 아버지의 따님인 팔라스의 창도 아니며, 구름을 모으는 유피테르의 방패도 아닙니다. 실로 눈짓 하나로도 올림포스 전체를 벌벌 떨게 만드는 신들의 아버지이며 인간들의 왕이신 유피테르도,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틈틈이 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창 모양의 번개를 내려놓고, 매번 모든 신들을 기겁게 하는 티탄족의 근엄한 표정을 지우고, 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표정의 가면으로 가엾게도 자신을 숨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매우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세 배 혹은 네 배, 아니 원하신다면 6백 배나 지독한 스토아 철학자를 한 분 지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분 또한, 염소들이 가진 것과 흡사하면서도 지혜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턱수염은 그대로 둘지라도, 자존심은 분명 꺾어야 할 것이며, 이마의 주름살은 펴야 할 것이며, 강철 같은 원칙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나마 바보스러운 미치광이 짓을 하지 않고서야, 요약하자면 나를 따르지 않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철학자가 아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평소대로 터놓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묻거니와 머리통, 얼굴 낯짝, 젖가슴, 손가락, 귓볼때기 등 이런 의젓한 사지 육신에서 신들이나 혹은 인간들이 생산되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웃지 않고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신체 부위, 내 생각에는 아랫녘 샅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산출지입니다. 이곳이야 말로 경건한 성지요, 세상 만물이 진실로 삶을 획득하는 샘일진대, 어찌 피타고라스의 사원소(四元素)에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이 늘 하는 방식대로 먼저 결혼 생활의 불편함을 심사숙고하였다면, 아니 도대체 혼인의 재갈을 자발없이 덥석 입에 물 남자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만약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를, 양육의 번거로움을 알았는지는 그만두고 최소한 짐작이라도 하였다면, 남자를 받아들일 여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명이 결혼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이렇게 결혼은 나를 시중드는 여종 ‘경솔’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결국 생명이 무엇보다 내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기 바랍니다. 또 출산을 일단 경험한 여자들이 새로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내 시종 ‘망각’이 능력을 발휘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 여신을 생명의 시작이라 떠들어 대지만, 정작 베누스 여신 본인도 내 조력이 보태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없으며 그저 헛손질만을 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술에 취하고 웃음이 가득한 나의 놀이가 있었기에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저 잘난 맛에 취한 철학자들이며, 오늘날 이를 대신해서 사람들이 수도승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며, 자줏빛 관복을 걸친 군주들이며, 경건한 사제들과 그보다 세 번은 더 경건한 교황들도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시인들이 노래하는 신들 모두가, 넓은 품을 가진 올림포스 산마저도 그들 모두를 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내가 생명의 씨앗이요 원천이며, 삶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생명이 살아가면서 접하는 편리한 것들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나의 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묻거니와, 여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어떠합니까? 삶에서 쾌락을 제거해 버린다면, 삶을 도대체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박수를 보내 주니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쾌락 없는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만큼 현명한, 아니 어리석은, 그러니까 내 뜻은,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스토아 철학자들도 결코 쾌락을 멀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속마음을 감추고 짐짓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는 수많은 비난 욕설을 퍼부으며 쾌락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지만, 결국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고 나면 그들만 홀로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쾌락을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하늘에 맹세코 내게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 우신이 삶을 위해 마련한 청량제와도 같은 쾌락이 없다면, 인생 어떤 부분도 침울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끔찍하지 않고, 무미건조하지 않고, 고생스럽지 않은 게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에 관한 증인으로 가장 적임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바쳐도 모자랄 저 유명한 시인 소포클레스인 듯합니다. 그는 나에 관해 저토록 아름다운 찬사를 지었는바,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관해 그럼 이제 하나하나 모든 것을 밝혀 봅시다.
우선 인간이 살아갈 한뉘(?) 인생 가운데 그 초입이 모두에게 무엇보다 행복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때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젖먹이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가졌기에 우리는 아이들과 입맞추고 아이들을 얼싸안고 호의로써 돌보아 주는가 하면, 심지어 원수지간인 사람마저 유년기의 아이들에게는 도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려 깊은 자연이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정성들여 심어 준 천성인바, 순진무구함의 어리석음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입니다. 이에 끌려 사람들은 즐거움이라는 보상만 받고도 양육의 고생을 잊으며 양육에서 비롯되는 서로 간의 애정을 칭송합니다. 유년기에 이어 다음으로 다가오는 소년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환영을 받으며, 이를 모두가 얼마나 환한표정으로 기뻐하며, 얼마나 진심 어린 마음으로 격려하며, 얼마나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까? 그렇다면 소년의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물어봅시다.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겠습니까? 내 덕분으로 소년은 얼마나 덜 영악하며 그리하여 얼마나 덜 성가시게 합니까? ‘순식간에’라고 말해야 거짓말을 면할 터이니 말하자면, 순식간에 소년은 몸집과 기골이 장대해지고 세상사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성인 남자의 기색을 갖추기 시작하며, 이어 화려하던 영광은 시들고 힘차던 활기는 주저앉고 불타던 열정은 싸늘해지고 넘치던 매력은 사그라집니다. 하여 소년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멀어져 갈수록 인생의 생기는 더욱 줄어드는데, 이리하여 ‘짓누르는 노경’에 이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고통스러운 노령에 다다릅니다. 내가 그와 같이 커다란 고통을 불쌍히 여겨 다시 한 번 인간을 돕지 않았다면, 참아 내기 어려운 노령을 인간들이 견뎌 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인들의 노래에 따르면 신들이 변신을 통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돕곤 하였던 것처럼, 나도 꼭 그런 식으로 마침내 고니에 들어갈 지경에 이른 사람들을 가능한 한 유년기로 변신시켜 돌려보냅니다. 하여 이를 두고 사람들이 노년을 ‘제2의 유년기’라고 부르곤 합니다. 더불어 내가 쓰는 변신의 방법을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것을 숨김없이 말하겠습니다. 나는 노인들을 내 시종 ‘망각’이 연원하는 샘-망각의 강은 행복의 섬에 위치한 샘에서 시작되며, 흔히 저승에 흐른다는 망각의 강은 겨우 작은 지천에 지나지 않습니다.-으로 데리고 가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노인들은, 망각의 샘물을 길게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조금씩 영혼에 가득하던 근심 걱정이 씻기면서, 다시 유년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바, 노인들은 분별없는 소리를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분명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노인이 유년을 되찾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거나 혹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어린아이의 본질이겠습니까? 어린 나이의 지각이 없음이야말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들 어른 같은 지각을 갖춘 어린아이를 괴물처럼 미워하며 저주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조숙하여 일찍 지각이 난 아이가 싫다”라는 속담 또한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노인이 커다란 인생 경험을 얻은 데다가 여전히 그에 어울리는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 매사에 정확하고 날카롭게 따진다면, 누가 이런 노인네와 어울려 교제하려 들겠습니까?
내 생각에 아무튼 노인은 분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각이 없기 때문에 노인은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있습니다. 지각이 남아 있었다면 괴로워 고통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때로 노인은 시름을 잊고 즐겁게 술을 마십니다. 정력이 넘치는 나이의 사람들도 감히 이겨 내지 못할 고단한 인생의 무게를 노인은 견뎌 냅니다. 노인은, 만약 아직 지각이 남아 있었다면 아파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마냥 즐겁게 플라우투스의 노인과 함께 저 세 글자로 돌아갑니다. 나아가 노인은 내 축복을 받은지라 마냥 행복하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기분좋게 사람들과 어울려 축제를 즐깁니다. 호메로스에서 아킬레우스는 듣기에 쓰디쓴 독설을 뱉어 냈던 반면, 네스토르의 입에서는 꿀보다 달콤한 연설이 흘러나왔으며, 역시 호메로스에서 노인들은 트로이야 성벽 위에 앉아 ‘백합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노인은 어린 아이를 능가한다 하겠으니, 어린아이는 사랑스럽기는 하되 아직 말을 하지 못하며 삶을 살아가는 데 각별한 활력이 되는 재잘거리는 즐거움을 나룰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덧붙여 말하거니와, 노인들은 어린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며, 어린아이들은 노인들고 어울려 재미있어합니다. <신은 비슷한 사람들을 늘 하나로 묶어 놓는 법입니다>. 사실 노인들과 아이들은 얼마나 유사합니까? 그저 노인들은 얼굴에 주름이 좀 더 많고, 나이가 좀 더 많을 뿐입니다. 머리카락이 검지 않다는 것, 치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 육신이 왜소하다는 것, 젖 먹기를 좋아한다는 것, 말을 더듬어 한다는 것, 재잘거리기를 좋아한다는 것, 어리석은 소리를 한다는 것,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 생각에 앞뒤가 없다는 것 등, 한마디로 말한다면 모든 점에 있어서 노인과 어린아이는 동일합니다. 점차 고령에 가까워질수록 노인은 그만큼 유년에 더욱 가가워집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한편 삶의 고단함과 다른 편 죽음의 두려움 너머 이런 것들을 모두 잊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자, 이제 원한다면 내가 행하는 이러한 호의적 변신과 여타 신들이 행하는 변신을 비교하도록 합시다. 감히 언급하기도 두려운 일이거니와 여타의 신들은 화가 났다 하면 평상시에는 대개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던 사람들을 나무로, 새로, 매미로 심지어 뱀으로까지 바구어 버립니다.
그렇게 바꾸어 버리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나는 한 사람을 그의 가장 풍요롭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돌려놓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현명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내내 나와 더불어 인생을 보내기만 한다면, 그들은 결코 노인이 아니며 오로지 영원한 유년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철학 공부와 같은 심각하고 힘겨운 학문에 시달려 심각한 표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대개 아직 젊으믜 활개를 펼쳐 보기도 전에 벌써 늙어 버렸는데, 이는 냉철하고 진지한 사유 행위 등을 하느라 골머리를 썩이는 바람에 점차 호흡과 생명의 진액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를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 몸뚱이와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아카르나이아의 돼지처럼 지혜로운 자들과의 접촉이 없는 한 -물론 전혀 접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대개 노년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 삶이 모든 면에서 행복할 수야 없는 노릇입니다.
흔히 사용되는 속담이 이에 대한 가볍게 볼 수 없는 증거인바, 우신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젊음을 붙들며 동시에 달갑지 않은 노년을 멀리 두고 늦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합니다. 브라반트 사람들에 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르지 않은 것이, 다른 민족들에게는 세월이 현명함을 보태어 주는데 반해, 브라반트 사람들은 나이 들어 감에 따라 점점 더 미련해집니다. 따라서 삶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일로 즐거움을 잃지 않으며, 노년의 고단함에 시달림을 받지 않는 데 있어이들을 따라올 만한 민족은 없습니다. 이들 브라반트 사람들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생활 모습에 있어서도 흡사한 사람들로 내 고향 홀란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이들에게 붙여진 별명이 이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바에야, 이들을 <나의 홀란드 사람들>라는 말로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그 별명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혹은 때로 이를 몹시 자랑스러워합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메데아를, 키르케를, 베누스를, 아우로라를, 어디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청춘의 샘을 찾아 나선들, 그들이 여러분에게 청춘을 돌려줄 것 같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나만이 해오던 일입니다. 멤논의 딸이 할아버지 티토노스의 청춘을 연장시켜 주었다는 신비의 진액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보로 파온을 다시 젊게 만들어 사포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하였다는 베누스입니다. 내가 바로 사라진 청춘을 되돌려 줄 뿐만 아니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청춘을 찾아 준다는,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약초이며, 그런 주문이며, 그런 샘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청춘만큼 좋은 것은 없으며 노년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내 생각에 여러분은 그렇게 좋은 것을 되돌려 주고 그렇게 혐오스러운 것을 멀리 쫓아 주는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신세를 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유한한 생명의 인간들과 관련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 하늘을 한번 훑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신들 가운데 과연 누가 고단하지 않고 조롱당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그런 신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하여 원한다면, 나의 이름을 걸고 나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바쿠스 신은 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유년을 늘 과시하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팔라스와는 일체 상관하지 않으며, 잔치와 춤과 합창과 놀이 등으로 진탕 놀며 흥취를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자라고 불리길 원하지 않으며, 다만 장난과 농담으로 칭송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자신의 별호가 멍청이를 뜻하는 속담에 쓰여도 결코 화내지 않습니다. 그 속담이란 바로 <모뤼코스보다 못난 놈>입니다. ‘모뤼코스’라는 별호를 바쿠스에게 사람들이 붙이게 된 것은, 농부들이 즐거운 마음에 장난삼아 신전 입구에 세워진 바쿠스의 좌상을 막 수확한 포도와 무화과로 지저분하게 칠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구희극에서 얼마나 많은 악담을 들어야 했습니까? 사람들은 말하길 “사타구니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어리석은 신이여”라고 하였답니다. 하지만 어리석고 어리석을 망정 언제나 행복하며, 언제나 청춘이며,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줄 수 있다면야, 도대체 누가 그처럼 되길 마다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모두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음흉한 유피테르, 혹은 늙은이의 주책없는 소란으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판(Pan), 혹은 늘 대장간 일로 지저분하게 재를 뒤집어슨 불카누스, 혹은 고르곤이 새겨진 방패와 창을 들어 위협적인 모습으로 노려보고 있는 팔라스가 되길 원하겠습니까? 어찌하여 쿠피도는 항상 유년입니까? 왜냐하면 그는 헛소리하는 인물이며, 뭔가 제대로 된 것은 행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황금의 베누스는 언제나 변함없이 봄날의 자태입니까? 내 아비의 낯빛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내 친척이 틀림없습니다. 호메로스도 그런 이유에서 ‘황금의 아프로디테’라고 여신을 이름 불렀습니다. 게다가 시인들 혹은 시인들에게 도전하는 조각가들의 말을 따르면. 베누스 여신은 계속해서 웃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사람들이 플로라보다 크게 경배하는 여신이 있겠습니까? 여신 플로라는 모든 즐거움의 어머니입니다. 제아무리 엄격한 신들일지라도 그들의 삶을 호메로스와 여타 시인들에게 묻는다면, 그들 삶 전체가 어리석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번개를 내리치는 유피테르가 즐기는 사랑의 놀음을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을진대, 다른 신들의 그런 행각은 언급해 무얼하겠습니까? 자신의 성별을 망각하고 줄기차게 사냥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던 여신 디아나도 엔뒤미온 때문에 시름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신들은 비난의 신 모모스로부터 예전에 자주 그러하였던 것처럼 요즘도 자신들의 처지에 관하여 잔소리를 좀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모스에게 화가 난 신들이 미망의 여신 아테와 함께 모모스를 지상으로 내던져 버렸는바, 모모스가 그 알량한 지혜로서 신들의 환락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추방당한 모모스는 인간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환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모스는 군주들의 왕궁에서도 자리 한 자락을 얻지 못하였으니, 거기에는 내 시종 가운데 하나인 아부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바, 아부와 모모스의 관계는 양과 늑대의 관계보다 멀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모모스가 축출되고 나자, 신들은 예전보다 훨씬 방탕하고 즐겁게 헛짓을 저지르게 되었으며, 이를 비난할 감독관이 전혀 없으므로 호메로스의 언어를 빌리자면 <편안한 삶을 누리게>되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로 만든 남근 신 프리아포스가 짖궃게 조롱하지 않은 것이 누구입니까? 메르쿠리우스가 자신의 특기인 도둑질과 속임수로 장난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심지어 불카누스마저도 신들의 잔치에 참여하여 우스개 장난을 행하는 데 익숙하여 때로는 쩔뚝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때로는 한심한 소리를, 때로는 우스운 소리를 지껄여 잔치의 좌중을 흥겹게 합니다. 사랑을 즐기는 노익장 실레노스는 코르닥스 춤을 즐기곤 하는데, 그 옆에서 플뤼페모스는 트레타넬로 춤을 추며, 또한 숲 속의 처녀들은 맨발로 춤을 춥니다. 염소를 닮은 사튀로스들은 아텔라나를 춥니다. 판(Pan)은 아무렇게나 질러 대는 노래로 모든 신들에게 웃음을 강요하는데, 넥타르에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신들은 무사이 여신들보다 더욱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진탕 거나하게 마신 신들이 술잔치에 이어 무엇을 하고자 할지 말해 무엇하겠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어찌나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내가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입니다. 이쯤에서 이런 일들에 관해서는 하르포크라테스를 상기하여 침묵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쓸데없이 우리가 비난의 신 모모스조차 막지 못한 신들의 작태를 이야기하였다가 이를 코뤼키아의 신이 엿들어 버린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천상에 거주하는 신들을 내버려 두고 호메로스의 모범에 따라 지상으로 내려가 볼 시간입니다. 여기서도 내가 나의 은총을 베풀지 않으면, 어떤 것도 결코 행복하거나 즐거울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은 세상 만물의 어머니이며 인간 종족을 창조한 자연이 커다란 예지로써 세상 어디고 간에 어리석음을 양념으로 뿌려 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스토아의 정의에 따르면 지혜란 합리성에 따르는 것이며, 반대로 어리석음은 정념의 처결에 따르는 것인바, 유피테르는 인간들의 삶을 슬프고 심각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합리성보다는 정념을 더 많이 인간들에게 주지 않았습니까? 대략 정념과 합리성의 비율은 24대 1쯤 될 것입니다. 유패테르는 더욱이 합리성은 두개골의 한쪽 구석에 몰아넣은 반면, 정념은 온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도록 뿌려 두었습니다. 또 유피테르는 마치 매서운 폭군과 같은 정념 두 개를 홀몬의 합리성에 대립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는 분노인바, 분노는 오장육부의 성채를 장악하고 있으며 더불어 생명의 원천인 심장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욕인바, 성기에 이르는 아랫도리 제국을 넓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쌍둥이에 대항하여 합리성이 도대체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삶이 충분히 입증해 주었습니다. 합리성은 자신에게 허락된 오로지 그것 하나를 목이 쉬도록 외치며 올바른 삶의 명제들을 선전하지만, 그럴 때면 쌍둥이 정념들은 더욱 요란스럽고 어지러운 목소리로 소리 지르며, 마침내 지칠 대로 지쳐 쓰러져 두 손을 들어 항복한 적장 합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제 목에 올가미를 걸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자연이 집안 경영을 주관할 과업을 사내들에게 주고, 그리하여 합리성을 약간이나마 남자에게 더 주어 남자가 사내 된 구실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였을 때, 다른 문제들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자연에게 조언을 하였으며, 나에게 딱 어울리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나는 여자를 남자에게 덧붙여 주도록 말하였는바, 대체로 어리석고 바보스러우며 실로 웃음이 많으며 우스꽝스러운 동물을 남자에게 붙여 주어 집 안에서 함께 어울려 살며 여자의 어리석음으로 사내의 심각한 태도를 누그러드리고 풀어 줄 수 있도록 하자고 조언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여자를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이성적인 동물로 놓아야 할지 아니면 어리석은 동물로 놓아야 할지를 두고 망설였다고 하는데, 이는 플라톤이 여자라는 성별을 특징짓는 것으로 어리석음을 적시하고자 하였던 것을 뜻합니다. 만약 어떤 여자가 현명하다는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두 배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는 마치 황소를 체력 단련실로 데려가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사람들이 속담에 이르듯이 미네르바가 이를 거절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잘못을 두 배로 키우는 일인바, 타고난 천성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본성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억지로 꾸며 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희랍 속담에 이르길, 원숭이에게 제아무리 제왕의 의복을 입힌들 원숭이는 변함없는 원숭이일 뿐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변함없이 여자일 뿐이라, 다시 말해 여자에게 어떤 가면을 씌우든지 간에 변함없이 여자는 늘 어리석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신인 나 자신이 여자이면서도 어리석음을 여자들에게 부여하였다는 이유로 내게 화를 낼 만큼 여자들이 어리석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올바른 길을 따라 사태를 정확히 따져 본다면, 여자들은 자신들이 많은 측면에서 남자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 모두 어리석음 덕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름다운 몸매의 우아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여자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아름다운 몸매를 앞세워 세상 모든 독재자들을 상대로 독재자 노릇을 합니다. 여자들의 언제나 반주그레한 얼굴, 언제나 사분사분한 목소리, 곱고 해사한 속살은 흡사 영원한 유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반해 남자들이 가진 노년의 징표라 할 우락부락한 생김새, 까스스하게 털로 뒤덮인 피부와 숲을 이루는 턱수염 등은 실로 지혜가 뿌려 놓은 폐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음으로 남자들을 최대한 즐겁게 하는 것을 여자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으로 삼은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 모든 치장술들이며, 그 모든 화장법들이며, 그 모든 목욕 방법들이며, 그 모든 머리 손질법이며, 그 모든 향유들이며, 그 모든 향수들이며, 얼굴과 눈매와 피부를 매만지고 색칠하고 꾸며 내는 그 모든 기술들은 뭣 때문에 있겠습니까? 이때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닌 다른 무슨 이유겠습니까? 남자들은 몸 달아 쾌락의 빵 부스러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약속합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쾌락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주는 쾌락을 만끽하기로 결심한 남자들이 그때마다 여자들과 어떤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어떤 허튼수작을 감행하는지 이를 곰곰이 스스로 생각해본다면 누구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은 삶의 최초이자 최대의 쾌락이 누구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아셨습니다.
몰론 몇몇 사람들은, 특히 나이 든 노인네들은 여자를 밝히기보다는 술을 밝히는 경향이 있어 술잔치에 최고의 쾌락을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참석하지 않는 술잔치가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양념이 없다면 술잔치는 결코 흥겨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든 아니면 그저 어리석은 척하는 사람이든 웃음을 돋워 줄 사람이 아무도 술잔치에 참석하지 않을 경우, 돈을 받고 잔치를 흥겹게 만들어 줄 어릿광대를 불러오거나 혹은 밥을 구걸하며 웃음을 파는 사람을 도모해야 합니다. 술자리의 말 한마디 없는 엄숙함과 지루함을 이들이 우스운, 즉 어리석은 재담으로 쫓아내도록 말입니다. 그 많은 맛난 후식들과 진수성찬과 산해진미로 밥통을 채운들, 만약 눈과 귀, 그리고 영혼이 한가득 웃음과 재담과 해학으로 배부르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나는 이런 종류의 여흥을 양념으로 덧붙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설계자입니다. 술잔체에서 이제는 관례가 되어 버린 많은 것들, 그러니까 주사위로 술자리의 주인을 뽑는다든지, 골패를 던져 술 마실 사람을 정한다든지, 친구를 위해 건배를 청한다든지, 순번대로 돌아가며 장기를 자랑하며 마신다든지, 도음양을 걸고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을 한다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희랍의 일곱 현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진실로 내가 인간 종족의 건강과 유익을 위해 마련해 준 것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더 많은 어리석음을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인간들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입니다. 심각하고 지루한 삶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없을진대, 만약 오락거리들로 권태로움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삶은 우울하고 지루하게 끝나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종류의 쾌락을 즐기지 않으며 다만 친구들과의 우애와 교제에서 쾌락을 얻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정을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며 공기도 불도 물도 이보다 우선할 수 없을 만큼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정은 대단히 달가워 우정을 빼앗긴다면 마치 태양을 앗긴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덧붙여 철학자들이 기꺼이 우정을 매우 훌륭한 것들 가운데 넣는 것을 근거로 들어, 아무튼 불가능한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우정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런 대단히 훌륭한 것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이를 증명하는 데 악어의 역설 혹은 가감의 역설, 뿔의 역설 등 이런 유의 논리적 궤변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속담에 이른바 미네르바는 쉬게 하고 손가락으로 이를 입증할 것입니다. 자, 그럼 증명하거니와, 친구들의 잘못을 모른 척하고 덮어 주고 감싸 주는 행위 혹은 탁월한 무능력을 대단히 큰 능력인 양 흠모하여 칭찬하는 착란 증세 등이 어리석음에 가깝다고 여러분은 생각지 않습니까? 어떤 이는 여자 친구의 사마귀에 입 맞추며, 어떤 이는 코맹맹이의 하그나를 사랑하며, 사팔눈의 아들을 아버지는 방울눈이라 두담두는 등 어떻습니까, 내가 주장하거니와, 이는 다른 무엇도 아닌 어리석음이 아닙니까?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반복해서 그것이 어리석음임을 외칩니다. 사람들을 엮어 주며, 엮인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이 어리석음입니다. 인간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들은 누구나 결점을 갖고 태어나며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고작 결점을 가장 적게 갖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신과 같이 지혜로운 철학자들 사이에 우정은 전혀 형성되지 않거나 혹은 그저 냉랭하고 무덤덤한 우정이 맺어지며 그마저도 극히 소수의 사람들과(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히 말하자면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합니다만) 맺어질 뿐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리석어 여러 가지 일에 있어 우매하게 처신하되, 우정은 서로 닮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깐깐한 철학자 양반들 사이에서 어쩌다 우정의 마음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어지간해서는 지속적이지도,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이는 이들이 마치 독수리 혹은 에피다우로스의 뱀과 같이 매섭게 친구들의 잘못을 찾아내어 준엄하고 신랄하게 꾸짖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에는 참으로 눈이 어두워 자신의 등에 매달린 보따리는 전혀 보지 못하는 존재들이여! 인간은 이렇게 본성적으로 중대한 과오를 면치 못할 처지이며,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그렇게 서로 다르니 그렇게 다양한 오류들과 다채로운 잘못들과 각양각색의 실수들이 인간 삶에는 빠지지 않는 형편인데, 그런데도 누군가 아르고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단 한 시간이나마 우정의 달콤함이 지속되겠습니까? 희랍 사람들이 만한 무던함, 우리가 이를 번역하자면 너그러움이나 어리석음이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서로간의 끈끈한 친밀감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쿠피도는 기실 눈이 어두워 앞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에게는 추한 것도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습니까? 쿠피도는 또한 여러분을 자기와 똑같이 만들어 각자 제 것을 아끼게 하였으니, 마치 청춘의 젊은이가 꽃다운 제 애인을 보듯 꼬부랑 영감이 쭈그렁 할멈이 다 된 제 마누라에게 미치도록 열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웃음을 불러일으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스운 일이야말로 인간 삶을 즐겁게 하며 인간 세상을 하나로 묶어 주는 힘입니다.
우정에 관해 이제까지 말했던 것은 오히려 결혼에 훨신 더 잘 들어맞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모름지기 결코 나뉠 수 없는 결합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멸의 신이시어, 만약 애교와 희롱, 무지와 관용, 묵과 등 나를 추종하는 것들의 도움을 받아 남녀의 가정생활이 튼튼하게 지탱되지 않는다면, 이혼 혹은 심지어 이혼보다 더 지독한 일이 때로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맙소사, 만약 처녀가 아리땁고 겉으로는 정숙해 보이지만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 놀았는지를 알아챌 만큼 남편감이 현명하다면, 세상에 결혼이 얼마나 성립하겠습니까? 또 아내가 남편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도움받아 많은 일들을 숨기지 못한다면, 과연 이미 이루어진 결혼일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겠습니까? 실로 이것이 어리석음의 덕택으로 얻어진 혜택일지니, 어리석음이 있어 남편에게 아내가 사랑스럽고 아내에게 남편이 반가운 것이며, 집 안은 조용해지고 가족의 유대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방질하는 여편네가 눈물을 흘리면 이를 안아 주고 달래 주는 사내는 뻐꾸기 혹은 두견이라 부를까요, 뭐라고인들 아니 불리겠습니까만 아무튼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 정도로 모를 수 있다니! 하지만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닙니까? 사납게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이끌려 사내가 일을 쳐 모든 것이 엉망 비극이 되는 것보다 말입니다.
종합해 보자면, 어떤 사회나 어떤 생명의 결합도, 내가 없었다면 어떤 것도 즐겁거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며 때로 아첨에 속고, 때로 알고도 눈감아 주고, 때로 어리석으믜 꿀맛에 이끌리기도 하는 마당에, 만약 이럴 수 없었다면 인민은 군주와, 주인은 머슴과, 안주인은 계집종과, 학생은 선생과, 친구는 친구와, 남편은 아내와, 지주는 소작인과, 전우는 전우와, 동료는 동료와 오래가지 못하고 진작 파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것들은 전부 언급된 것으로 여러분이 생각할 줄 압니다만, 이보다 훨신 중요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