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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Guillaume Apollinaire(기욤 아폴리네르 1880-1918)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20세기 초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아폴리네르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로,
현대시의 두 주류인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초의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예술가로 일컬어진다.
시인으로서는
현대시의 모든 개념과 방법, 형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며,
미술 평론가로서도
입체파, 아프리카 미술, 초현실주의 등 20세기 초 모든 전위 미술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프랑스 문단 및 예술계에서 모더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며,
초현실주의라는 말 역시 1917년 아폴리네르가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욤 알버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르 아폴리네르 드 코스트로비츠키는
1880년 8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폴란드인 귀족인 안젤리카 드 코스트로비츠키로, 16세 때 그를 사생아로 낳았다.
아폴리네르의 동생 알베르는
그녀가 24세 때 태어났는데,
알베르의 아버지 역시 밝혀져 있지 않다.
아폴리네르의 아버지가 이탈리아인 장교라는 설과
이탈리아 교황청 고위 성직자라는 설 등이 있으나 밝혀진 바는 없다.
유년 시절을
니스와 모나코에서 보냈으며,
7세 때
모나코에서 가톨릭 교단이 운영하는 생 샤를르 학교를 다니다
니스에서 중등학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모범생은 아니었다.
호탕하고 정열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술과 도박, 친구들과 함께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문학을 좋아했는데,
특히 고전보다는 현대 작품들을 좋아했으며,
이 시기부터 기욤 마카브르 혹은 기욤 아폴리네르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세 때
시인이 되기로 하고 파리로 갔다고 하는데,
재혼과 이혼을 거듭하던 어머니 안젤리카가
아들들을 데리고 모나코에서 파리로 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안젤리카는
기욤이 어린 시절에도 두 아들을 팽개쳐 두고
유럽 여행을 다니거나 도박을 하려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또한 이혼 후에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워 파리에서 궁핍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활발했던 두 아들은
각자 나름대로 재미있게 지내다가 어머니와 합류하곤 했다.
파리에서 아폴리네르는
생계를 위해 공무원이나 은행원이 되고자 했으나
외국인에 학력도 부족해 여의치 않자
소설 대필, 막노농꾼, 개인금융금고 사무원 등의 일을 전전했다.
그런 한편 계속해서 여자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연시와 소설을 썼으며,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를 들락거렸다.
22세 무렵부터는
계속해서 문예 비평문을 잡지에 기고했으며,
이듬해 문예지 〈펜〉에 시 두 편이 게재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아폴리네르는
활동 초기부터 많은 시들을 쓰고 발표했으나
처음에는 시인보다 미술 비평가로서 더욱 두드러지는 활동을 했다.
그는 피카소, 브라크, 앙리 루소 등이 시도하는 새로운 미술 경향을 알아보고,
아프리카 조각을 소개하고
입체파 회화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견하는 등 미술계 전반의 전위운동을 주도했다.
아폴리네르는 27세 때인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을 만나는데,
그녀는 아폴리네르의 개인적, 예술적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전에도 영국 여인 애니에게
결혼해 주지 않으면 납치하겠다고 협박하는 소동을 벌일 정도로 열정적인 성격이었던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에게도 한눈에 반해
"그녀 이상으로 사랑할 여인은 없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녀에 대한 연심으로
시적 재능도 개화하여
1913년 시인으로서 문명(文名)을 알리게 될 시집
《알코올》의 기반이 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09년,
소설집 《타락한 마술사》를 앙드레 드랭의 목판화를 삽입해 펴냈으며,
1910년에는
소설집 《이교도 회사》를, 1911년에는 《동물 시집》을 펴냈다.
그런 한편 미술 평론가 및 문학 평론가로서
다양한 잡지에 평론을 발표했으며,
필명으로 가십 기사와 에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또한 그의 편집에 비평이 덧붙여진 《사드 후작 작품집》이 출간되면서
사드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난다.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폴리네르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던 제리 피에레라는 친구가
자신이 모나리자를 절도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쳐온 다른 몇 가지 소장품들을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 두고 있다는 글을 발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폴리네르는 사건 직후 자신의 집에 숨겨져 있던 미술품들을 루브르 측에 돌려주었으나
결국 모나리자 절도 혐의 및 장물 소지죄로 상테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주일 만에 예술가 친구들의 탄원으로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그는 계속 외설 작가,
불법 체류자(죽기 2년 전에야 프랑스인으로 귀화할 수 있었다)라는
언론의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리 로랑생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그녀와 이별하면서 쓴 시가 한국인에게 친숙한 〈미라보 다리〉이다.
〈미라보 다리〉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1913년 4월,
입체파 이론의 기반이 되는 미술 비평서 《입체파 화가들》을 펴냈으며,
〈미래주의의 반전통-종합선언〉이라는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입체파 미술 및 미래주의 미술의 근본 원리를 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대화 형식, 동시성 구현, 구두점 삭제 등 다양한 시적 표현 형식을 실험한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 현대 도시 문명의 삶을
입체파,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실험한 시집 《알코올》이 탄생했다.
대담한 분석과 구성, 대상을 사실주의적 질서에서 해방시킨
새롭고 참신한 조형(造形),
그만의 독특한 도회적인 서정을 담은 이 시집은
전위 예술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20세기 새로운 시형의 포문을 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폴리네르는 총동원령에 따라 12월 5일 군에 입대했다.
전쟁 기간에도
아폴리네르의 창작열은 불타올랐는데,
여기에는 두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그는 입대하기 몇 달 전
한 화가의 집에서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옹[루(Lou)로 알려져 있다]이라는 부인을 만나
또다시 첫눈에 반했고,
정열적인 연시와 편지를 수백 통 썼다
(연애 관계가 끝난 후에도 아폴리네르는 그녀와 계속 서신을 교류하고 시를 지어 바쳤다).
이 시들은 1918년 출간된 《상형시집(칼리그람)》에 일부 수록되었으며,
아폴리네르 사후 《루에게 바치는 시》로 편찬되었다.
또 편지들은 《아폴리네르 서간문》으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루와의 관계는 1914년 연말 무렵 허무하게 끝난다.
다음으로 1915년 1월,
아폴리네르는 휴가를 맞아 잠시 귀환하던 중
기차에서 만난 마들렌 파제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급속도로 가까워져 약혼까지 했으며,
역시 마들렌느에게도 수십 편의 시와 편지를 바친다.
현재 마들렌에게 바친 시 23편이 전한다.
1916년 3월 17일
아폴리네르는 전투에서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고 수술하기에 이른다.
이 부상으로 그는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상징주의적 소설집 《살해된 시인》을 발표했으며,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을 상연했다.
아폴리네르는 이 희곡을 일컬어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했는데,
초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새로운 정신과 시인들〉이라는 강연을 통해
랭보, 막스 자코브, 상드라르 등의 시인을 소개하고
모더니즘 시 이론의 초석을 놓는다.
1918년 4월,
아폴리네르는 주제에 따라 글꼴이나 문장 모양, 행간 등을
시각적으로 조절하여 문장을 도형화하면서
시 형식의 혁신을 시도한 《상형시집》을 발표했다.
그해 5월에는
〈아름다운 빨강머리 여인〉을 쓰게 한 자클린 콜브와 결혼했으며,
11월 9일 사망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폐충혈이 사인이었으나
포탄 파편에 맞은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것도 큰 원인으로 꼽힌다.
시신은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혔다.
LE PONT MIRABEAU
Guillaume Apollinaire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Et nos amours
Faut-il qu'il m'en souvienne
La joie venait toujours apres la peine
Vienne la nuit sonne l'heure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Les mains dans les maines restons face a face
Tandis que sous
Le pont de nos bras passe
Des eternels regards l' onde si lass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L'amours s'en va
Comme la vie est lente
Et comme l'Esperance est violent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Passent les jours et passent les semaines
Ni temps passe
Ni les amours reviennent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미라보 다리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우리 사랑도 흐른다.
내 맘 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노라.
손과 손 맞잡고 상면해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미끄러운 물결이 흐르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노라.
사랑은 흐른다.
강물처럼 우리의 사랑이 흘러내린다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노라.
날이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가건만.
우리들 사랑은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아래 센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노라.
18. Albert Camus (알베르 카뮈 1913-1960)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로 인간이 처한 실존과 정의의 문제를 제기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알베르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자 소설가, 극작가이다.
당대 지식인과 청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문단과 사상계를 지배했다.
47세의 나이에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활동 기간은 짧았으나
프랑스에서 볼테르 이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스스로를
"실존주의가 끝난 데서 나는 시작했다."라고 밝히며
실존주의자임을 부정했다.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 몬도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알제리에서 군 복무 중이던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그가 태어난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 중 마른 전투에서 사망했다.
어머니 카트린 생테스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에다 청각장애인이었고,
청소부를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카뮈는 알제리의 벨쿠르라는 노동자 거주 지역의 작은 셋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두 명의 외삼촌들과 함께 가난하게 자랐다.
카뮈는 몇몇 회고담과 짧은 기행문 등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한 아이가 생각난다.빈민가의 그 지역,
그 집에서 살고 있던 아이.
집은 2층이었고, 층계엔 불도 꺼져 있었다.
(중략)
몸은 그 집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두 다리는 계단 높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손은 난간을 잡길 두려워하며 떨고 있다.
바퀴벌레 때문에.
알제리에서 초등, 중등, 고등 과정을 마쳤으며, 알제 대학에 입학했다.
폐결핵으로 대학은 2년 만에 중퇴했지만,
이곳에서 평생의 스승이 되는 철학자 장 그르니에를 만났다.
후일 그는 장 그르니에게
《안과 겉》, 《반항적 인간》을 헌정하고,
그의 권유로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한다.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카뮈는
대학 시절부터 많은 일을 했고,
대학 중퇴 이후에도 잠시 요양을 했을 뿐,
알제 여기저기에서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시청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중등학교 시절부터
앙드레 지드,
앙드레 말로,
프루스트 등의 작품들을 탐독했으며,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노동자들의 극장'이라는 아마추어 극단을 창단하고 극본을 쓰고 직접 연기도 했다.
1934년,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성 시몬 이에와 결혼했으나
서로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2년 만에 이혼했다.
그 후 1940년에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와 재혼해 쌍둥이를 낳았다.
카뮈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실질적으로 결혼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데다
몇 차례 불륜까지 저지른 것이다.
1934년,
카뮈는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공산당 활동에서 다소 회의를 느꼈던 듯하다.
스스로 1년여 만에 공산당에서 탈퇴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공산당과 알제리 인민당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 제명당했다고도 한다.
공산당 탈퇴 후에도
카뮈는 좌익 성향의 〈알제 레퓌블리캥(알제리 공화당)〉 지의 기자로 일하면서
문화 기사와 르포를 썼으며,
1942년에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합류해
레지스탕스 기관지인 〈투쟁〉에 참여했다.
1943년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뒤에도
계속 신문기자를 하면서
세계대전 관련 기사를 보도했으며,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한 반대 논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카뮈는 대학 중퇴 후부터 몇 편의 짧은 산문을 잡지에 발표하며 계속 글을 썼다.
1937년
《안과 겉》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에 뛰어들었고,
《결혼》, 〈칼리굴라〉, 《이방인》, 《시지프 신화》, 《페스트》를 완성해
차례대로 하나씩 세상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사르트르의 저서들을 접한
그는 실존의 비극성을 나타내고자 지나치게 인간의 추함을 강조한다면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반대 의견을 표한다.
그럼에도 레지스탕스 활동 당시 만난 사르트르와는
학문적 동반자로서 10년 가까이 우정을 지속했다.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카뮈는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듬해
《시지프 신화》를 출간하고
'절망의 철학자'로 불리면서 철학적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945년에는 〈칼리굴라〉를 상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때까지 일련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카뮈의 사상은
일명 '부조리의 철학'으로 불리며, 전후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실존주의 사상으로 꼽힌다.
그러나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부정했으며,
부조리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것도 꺼려했다.
때문에 《시지프 신화》를 출판한 이후에는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부조리주의란
인간 존재를 부조리의 산물로 보는 데서 출발하는데,
작가들마다 이를 확립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개념은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서부터 극명히 드러나며,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결국 세계와 자신의 삶에서까지 소외된
철저한 이방인 뫼르소를 내세운 《이방인》에서 이미지화된다.
《시지프 신화》에서는
부질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부조리에 반항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을 그려 보임으로써
'부조리에 대한 반항과 의욕'을
철학적, 이론적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이 저술에 카뮈의 실존적, 부조리에 관한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
이후 〈칼리굴라〉에서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 주고,
세계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책임과 도덕성에 관한 종말이 아니라 시작임을 주장한다.
전쟁이 끝난 후
카뮈는 사르트르, 르네 샤르, 말로, 케슬러, 메를로 퐁티 등과 친분을 나누며
사상을 토론했고,
뉴욕을 방문해 문명의 위기에 관한 강연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페스트》 역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비평가들로부터도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카뮈는 《페스트》를 직접 〈계엄령〉이라는 희곡으로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1949년,
카뮈는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칩거했으며,
1951년에는
《반항하는 인간》을 출간하면서
이후 1년간 이 책에서 다룬 주제를 두고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이다 끝내 결별하였다.
이 책은 《시지프 신화》와 함께
카뮈의 철학적 성찰을 체계화시킨 대표적인 작품으로,
폭력과 테러(반항의 역사)를 역사적, 철학적, 정치적 맥락에서 살피며,
이런 세계에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1950년대
카뮈는 《시사평론》을 쓰면서 청년층과 지식인층의 절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여름》, 《전락》, 《적지와 왕국》 등을 펴내고,
〈계엄령〉, 〈칼리굴라〉 등 자신의 희곡을 비롯해
포크너의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이나 《동 쥐앙》,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등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
이 시기에 그는 인권운동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유엔이 프랑코 장군 치하의 스페인이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받아들이자
유네스코 임원직을 사임했고,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렉스프레스〉 지의 기자 활동을 재개하여 알제리 문제를 다뤘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과 폴란드의 노동자 파업 분쇄,
소비에트 연방의 헝가리 혁명 무력 진압 등에 앞장서 반대했다.
사형 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
195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프랑스인으로 9번째 수상이자 최연소 수상이었다.
1959년,
카뮈는 쓰다가 중단했던 《최초의 인간》을 다시 쓰기 시작했지만,
이 작품은 끝내 미완성 유작으로 남았다.
1960년 1월 4일,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친구 미셸 갈리마르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나무에 부딪히는 사고로 즉사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 소비에트 첩보당국(KGB)의 암살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