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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명소여행 스크랩 <인도, 네팔 여행> 시체가 되어서라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으로 찾아 온다
일 행 추천 0 조회 147 10.05.11 19: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도, 네팔 여행>

죽어 시체가 되어서라도 찾아 오는 곳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이여

2007년 01월 09일

 

 

 

 

칠흑같은 밤의 장막을 밤 새며 태우던 마니카르니카 가트의 장작불이 사그러질 무렵이면 꺼져가는 장작더미 사이에서 피어 오르던 하얀 연기가 갠지스 강에 깔리고 그 뿌연 강물 위로 인도의 새벽이 밝아 온다. 바라나시에서, 갠지스 강에서 왜 우리는 인도에 대한 관념을 바꾸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물의 세례를 받고 죄 짖지 않은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 내일의 성자로 태어 나고, 다시 죽고.. 그래서 그들의 육신이 한줌 재가 되어 강물에 뿌려지고 혹은, 땅에 섞여 뿌리 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 향기에 취했기 때문일까....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의 갠지스 강 위론 물안개가 스물스물 피어 오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갠지스 강. 이른 새벽, 허무가 짙게 깔린 그 강의 한복판에 조각배를 띄우고 나는 한없이 강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강물을 가르고 나에게 다가 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 썰물처럼 나의 가슴 속에서 빠져 나가는 것이 있었다. 꼭 집어 무어라 말 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 나의 삶은 하찮은 것으로 보였고 죽음도 두렵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물안개 사이로 강변을 따라 늘어 선 수많은 가트들이 서서히 모습을 들어 낸다.
 
새벽의 어둠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진다. 옅은 미명 속에 강물 위에는 수많은 부유물들이 떠있다. 어제 밤, 간절한 소망을 담아 띄워 보냈던 소녀의 촛불도 신에게 다가 가는 전령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저기 어디쯤에 흉한 육신을 뉘었을까? 화장터에서 뿌려진 시체의 가루들이 갠지스의 깊은 심연으로 가라 앉아 강물의 색깔을 이리도 탁하게 만드는 걸까?
 

 
갠지스 위에 떠 있는 강(江)의 도시, 바라나시. 히말라야에서 발원해 남동쪽으로 흐르던 갠지스가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바로 그 변곡점에 바라나시가 있다. 동틀 무렵 강가에는 발 디딜 틈 없는 인파가 몰려온다. 여신(女神)으로 숭배되는 갠지스와 태양신 수리아를 동시에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인도에서 바라나시뿐이기 때문이다.

 
해탈에 이르는 도시, 바라나시. 바라나시는 화장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이다. 시 중앙에 위치한 화장터에는 인도 전역에서 시체들이 운구 되어 온다. “람 남 샤티 헤! (신의 이름만이 진리이다)”를 외치며 유족들이 시체를 바라나시로 모셔와 한번도 꺼진 적이 없다는 신성한 불로 시체를 태운다. 유족들은 바라나시에서 화장을 해야만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바라나시에 쉬바가 있다. 바라나시가 해탈을 약속받은 이유는 시바신 때문이다. 남성 생식기 모양의 상징물로 숭배되는 신 시바. 힌두교 고전에서 말하길 ‘우주의 탄생은 바라나시에서 시작되었고, 바라나시를 만든 이는 쉬바신이다.' 힌두교도들은 쉬바신의 삼지창 위에 세워진 도시인 바라나시에서 죽으면 쉬바신의 도움으로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카알라쉬 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갠지스는 히말라야의 딸이다. 그래서 바라나시는 마더 강가로 불리며 수천년을 힌두인들에게 전래되어 오는 역사의 성지이다. 그들은 정말로 갠지스의 강물로 몸을 씻으면 지었던 죄가 모두 소멸 된다고 믿는 것일까? 이 곳에서 죽은 육신을 태워 강물에 뿌리면 내세에는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 난다고 믿는 것일까?

 
갠지스는 참회와 속죄의 강이다. 갠지스에 와서는 하염없이 바라 볼 일이다. 장작더미 위에 얹혀지는 수많은 시체들을, 활활 타오르는 새빨간 불꽃을, 타서 무너져 내린 잿더미에서 한없이 피어 오르는 하얀 연기를, 또 강물 위에 뿌려지는 한줌 잿가루를....

 
그러면 힌두인이 아닌 당신도 느낄 수 있를 것이다. 왜, 속죄의 강인가를...  왜, 참회의 강인가를.... 넓은 가트 위에 줄줄이 앉아 뼈만 앙상한 두 손을 내밀고 당신에게 눈빛으로 말하던 거지들의 축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 갖은 자여! 베품의 공덕을 쌓으라. 나눔의 축복을 행하라..."


갠지스는 축복과 찬미의 강이다.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기 전, 그들은 집을 나서 강 가에 모인다. 남자들은 <나고다>라는 국부만 가린 팬티 차림으로, 여자들은 사리를 입은채 강물 속으로 들어가 밤사이 지은 죄를 닦아내고 깨끗한 몸으로 하루를 연다.

 

 
밤사이 뿌려진 시체를 태웠던 잿가루가 떠다니고, 아직 매퀘한 연기 자욱한 속에서 그들은 몸을 씻고, 옷을 빨고, 그 물로 이를 닦고, 다시 그 물을 마시는.... 현대 교육을 받은 우리 가이드 녀석조차 '갠지스의 물은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물병에 담아 한달을 두어도 부패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대단한 축복이지 않은가...

새벽 갠지스의 강물을 소리없이 가르고 다가오는 보트마켓(Boat Market)
 
"사는 것도 신의 뜻이요, 죽는 것도 신의 뜻이다..." 그런 믿음 속에도 삶의 현장은 존재 하나니... 어느사이 소리없이 다가 온 보트마켓이 내가 탄 조각배 옆에 붙어 선다. 조잡한 장신구와 힌두의 신들을 조각한 작은 신상들... 그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사리라고 믿는 것일까? 그것도 신의 뜻일까...

 
확실히 그것은 신의 뜻이다. 1불에 대여섯장 하는 그림엽서. 그것도 지갑을 꺼내기가 귀찮아 포기한 나에게 일행 한분이 대신 1불을 내 준단다. 그렇구나! 그들에게 신은 이렇게 다가가는 구나... 그 순간 나는 흘러 가는 갠지스의 물결 위에 금잔화 꽃송이와 함께 떠 다니는 그들, 신의 얼굴을 보았다.

 
갠지스에 묻혀 있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 진다.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이 다시 삶으로 연결되는 그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이미 동화되어 스스로 살아 있느지, 혹은 죽어있는지 조차 잃어 버린건 아닐까 ... 그래서 이미 갠지스는 강이 아니라 신이 되었다.

힌두교의 행사에서 귀한 사람들을 태우는 꽃배
 
갠지스는 이미 혼자서 창조의 신이었고, 유지의 신이었고, 파괴의 신이었다. 그렇다. 갠지스는 넓은 강안을 진실만으로 채운 진실의 강이었고,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잉태의 강이요, 생명을 키워 주는 어머니의 젖줄같은 모유의 강이요, 죄지음을 용서해 주는 자비의 강이요, 마지막 남은 한줌 잿가루를 마다않고 걷우어 가는 축복의 강이었다.

태양이 하늘로 떠올라 갠지스의 강물을 데우기 시작하면 강은 분주해 진다
 
그런 엄청난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이 곳 바라나시에서 나도 50년의 삶 속에 묻혀 있는 사랑과 증오, 믿음과 불신 같은 모든 죄악을 씻어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정면으로 부딪혔던 모든 이들을 위해 단죄의 마음으로 강 둑에 서고 싶었다. 히말라야로 부터 쏟아져 내리는 세찬 바람이 비난처럼 나에게 쏟아져 내려도 결코 나는 그들을 향한 사랑을 걷우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히며... 


그러나 내가 평생을 자랑처럼 간직하고 살았던 그리움과 사랑도 스스로의 만족을 담보하기 위한 허울은 아니었을까... 세상 어디에도 진정 조건없는 사랑은 없는 것일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의 진실은 어느새 흔들리는 당신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가식의 뇌물이 되고, 당신을 향한 작은 찬사마져 끝내 당신의 마음을 훔치기 위한 아부에 불과했단 말인가...  진정 신의 뜻이리라... 아! 바라나시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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