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1월 중순(아마도 구정 전날?)
어머니의 붉은 눈시울을 뒤로하고 사관학교 가입교 훈련을 받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저 며칠동안의 소양교육정도를 마치고 영화에서 처럼 하얀 정복에 낭만스런 캠퍼스 생활만을 기대하였기에 어머니의 걱정어린 얼굴을 이해하지 못한채 형으로부터 물려입은 촌스런 옷차림으로...
진해의 1월 바닷바람은 몹시도 차가웠다.
다음날 아침부터 소위 사회물을 빼기위해 머리를 빡빡으로 밀고 모든 소지품과 의류를 회수한 그들은 소위 관품을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팬티착용!
지금은 사라졌지만 길이가 20센는 족히되는(여성의류중 거들?정도는)사각 면팬티 1장이 렇게도 따뜻한줄 몰랐다. 군복은 미군 체형에 따라 지나치게 커서 바지가 가슴상단까지 올라가는가 하면 군화가 발에 맞지 않는다는 말에는 발을 군화에 맞추라는 명령만이 들려왔다.
새벽 5시 45분 부터 밤 12시전후까지 구보, 직각보행에 직각식사, 옥포탕(차가운 바닷물에 온몸을 담드는 기압의 일종)등은 그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한상황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내가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훈련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 퇴교를 요구하거나 탈영을 시도한 동기가 발생한 날은 거의 잠도 재우지 않았다.
사실 난 우리시대의 어느 시골아이와는 다르게 고생다운 고생은 하지 않고 자라서 중학교 65킬로, 고등학교 73킬로의 과체중으로 안돼지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던 내가 아니었나.
1개월 여의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정식 사관생도가 되는 입교식날, 많은 동기생들이 부상으로 중도포기를 하거나 동상 및 부상등으로 목발에 의존해야만 했다.
정규 사관생도 생활도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어떤날은 루에 속옷을 4번 이상 갈아입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리기도 하고 수영훈련간에는 얼굴 및 목부위의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르기도 하였다
같은 또래들이 자유분망한 대학생활을 보낼때 난 폐쇄된 공간에서의 감옥살이같은 생활이었다.
동창중 부산,마산등지로 진학및 취업을 나갔던 친구들과의 만남과 그외의 여자친구로 부터온 편지들은 내게 커다란 희망이자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었다.
210여명이 가입교 하여 160여명이 소위로 임관한 우리 동기생들은 올해처음으로 대령진급자가 ,10여년 후에는 참모총장의 직위에 오를것으로 기대된다.
되돌아 보면 지금까지의 삶중 가장 힘든시기였던만큼 추억도 많고 앞으로 삶에 밑거름이 될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동창들중 빠른 친구의 자녀가 군복무중이거나 앞으로 하게 될것이다.
내 주변에도 어떻게 해서라도 군복무를 피해 보려는 사람들이 일부 있는데 난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군복무도 교육의 연장이요 이나라 남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이른바 빽을 써서라도 자녀의 군복무를 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군대 다녀와서 사람되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들 하지 않는가!
강한 파도가 강한 어부를 만들듯이......
첫댓글 병하의 글 참 마음에드네,오늘날 군대 조직속에서 강인한 병하가 되었는데,군대를 나온 사회인으로서 살기에는 주변에 온갖 어려움과 권모술수가 만연할텐데....이 세상 속 직장 생활은 많은 훈련과 인내가 필요하리라 생각하네...
사회에서의 생활도 부디 성공하기를... 병하 화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