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은 서인의 거두 였었다. 그는 관직에서 수차례나 삭탈관직이 되었다가
다시 복귀하는등 입지적인 그런 인물이였다.
그는 명종 16년 (1561년) 27세에 과거에 급제를 하면서 당시 율곡 이이와 함께 湖堂에 들어갔고,
40세에 당쟁에 밀려 낙향하였다가 43세에 다시 조정에 나아가 직제학. 승지등을 지냈으며, 45세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이때에 최초의 가사인 「관동별곡」과 「훈민가」를 지어
가사문학과 시조의 대가로서 재질을 발휘하였으며, 그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 예조판서를거처
49세에 대사헌을 승진하였으며, 이때부터 서인의 거두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뒤 다시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이 되어 전라도 담양지방의 송강정에서 4년간 은둔생활을 하다가
정여립의 난이 발생하지 54세에 우의정으로 발탁이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그는 또 다시
탄핵을 받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서 은둔중에 58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송강선생은 본은 연일(延日) 鄭氏이다. 그는 할말이 있으면 입밖에 내야하고, 사람의 허물이
있으면 용서함이 없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기에 정적이 많아서 그의 삶은 파란만장 했었다.
그의 저서는 「관동별곡」, 「훈민가」, 「속미인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송강가
사」등이 있으며 한국시가문학의 대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서 장사를 지냈으나, 그뒤 72년이 지나서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다시 이곳에 이장이 된 곳이라 하겠다.
그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의 환희산(歡喜山: 402 Μ)기슭의 동쪽편에 있다.
특이하게도 그의 묘소(부부합장묘지)와 그 아래에 있는 아들 차남의 묘지(부부합장묘지)는
환희산이 아래에서 아무런 용진처를 맺지않는 그런 곳이 였다.
즉 명당지가 아니란 점이라 하겠다.
그 일대는 광활한 延日 鄭氏의 문청공파의 문중 宗山이건만 후손중에 인물이 없었던 탓인지 이분
을 명당지를 찾아서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많았다. 우암 송시열은 당초에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
송강마을에 있었던 이분의 묘역을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형기적으로 어떤 산세에 주안점을
두고, 이장을 하였는지 의문이 남을 뿐이다. 참고로 송강 정철 선생의 부모묘, 형제묘는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 연일 정씨 종산에 있고, 그의 조부모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 당지산 아래에
있다. 그는 1536년12월에 서울 장의동에서 부친 정유침의 4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10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매형이 피살되고 아버지가 유배되는등 가계가 몰락하게된 후에 부친이 석방
되어 전남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 조부모 산소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던 16세가 되는해 부터 공부
를 하기 시작 했었다. (범봉 간산기, 무단 도용시는 지적소유권의 문제가 제기 될수가 있슴)
첫댓글 송강 정철이 좌의정, 우의정까지 했었다면, 정치적인 야망도 있었던 사람이였군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끝이 안좋은 경우가 많던데, 예나 지금이나...
위인은 대부분 올곧은 성품을 가졌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불우한 생을 살지요 ㅎㅎ
우의정이나 좌의정까지 했었다는 건 처음 아네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위인들은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것같아요ㅠㅠ
그렇군요...
잘 보았습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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