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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6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 "금강경 사가해" 강설에서~~~
【冶父】
寒卽言寒이요 熱卽言熱이로다
(說誼 : 以有二乘說二乘하시고 以有大乘說大乘하시니
應物行權無定法이라 隨緣立理脫羅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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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卽言寒이요 熱卽言熱이로다.
추우면 춥다고 말하고 더우면 덥다고 말한다.
無有定法이니까요... 無有定法이니까 우리가 지금 더우니까 에어컨을 틀지만, 또 겨울되면, 추우면 저~ 히트를 틀어야 돼요. 요즘은 기계가 아주 잘 나와 가지고 찬바람 나오라고 딱 누르면 찬바람 나오고, 더운 바람 나오라고 틀면 더운 바람 착~ 나오고요.
아~ 아주 정말 좋은 세상에 삽니다.
진시황은 저런 것도 못보고 세상을 살다 갔으니 참~~ 우리 서민도 진시황보다 훨씬 榮華를 누리고 잘 사는 것을 100가지 적으라면 금방 적을 수 있습니다. 진시황보다 훨씬 우리가 잘사는 것 100가지... 하하하하하 저는 그 말 잘 합니다.
진시황이 버스나 저런 지하철 구경이나 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 아닙니까? 에어컨이 어디 있습니까? 궁녀들이 아무리 부채 부쳐 봤자 몸에서 나오는 열기만 자꾸 부쳐가고 그것 뭐 사람 냄새만 나지 시원할 턱이 있습니까?
허허허 그런 생각도 우리가 해야 됩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해가지고 현실에 너무 도취해 있는 내 자신을 좀 관리해 갈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인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그런 덕이 아니겠습니까? 熱卽言熱이라. 더우면 덥다고 말한다. 8만 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겁니다. 추우면 춥다고 말하고 더우면 덥다고 말하는 것이 8만 대장경이다.
‘그것 뭐, 아무 것도 아니네’ 맞아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無有定法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경전에 대해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라도 알려고 그 아주 목을 매고 그냥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글자를 파고하던 사람들에게는 참 애석한 마음이 들지만, 사실입니다. 그런데서 이제 훌쩍 뛰어나야지요. 제11강 2부 (2011.06.28)
說誼
以有二乘//說二乘하시고, 二乘이 있으면, 성문ㆍ연각이지요? 성문ㆍ연각이 있으면 성문ㆍ연각... 二乘의 가르침을 설하고
以有大乘說大乘하시니,大乘이 있으면 대승을 설하시니
應物行權이라. 사물에 應해서, 맞추어서 저울대를 행함이라.
應은 그대로 해석해도 좋아요. 物은 중생을 말하고 權은 방편이지만, 글자대로 물건의 무게에 따라서 = 應物. 저울대를 행한다. 그렇지요. 물건 무게에 따라서 저울대 추를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지요. 그래서 평행을 잡지 않습니까? 權자가 저울대인데, 저울대같이 물건의 무게에 아주 잘 맞추어서 평행을 유지하는 것은 없어. 방편은 그와같아.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에게 맞는 방편을 쓰고,
조금 초등학생에게는 초등학생에게 딱 맞는 방편을 쓰고요.
장년층에게는 장년층에게 딱 맞는 방편을 쓰고요.
아니, 아주 못 배운 사람에게는 못 배운 사람에게 맞는 방편.
유식한 사람에게는 유식한 사람에게 맞는 방편.
權자를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참 뛰어난 표현입니다. 저울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저울대가... 그러니까 크면 100키로도 달고 한 근도 달고, 같은 저울대가지고 한 근도 달고 100키로도 달고,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 항상 평행을 유지하는 겁니다. 불교방편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어떤 근기에 따라서, 수준과 대상에 따라서 항상, 말하자면 알맞은, 정말 알맞은 방편을 써야 되는데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렇습니다. 應物行權. 중생에게 맞추어 가지고서 방편을 행함이라.
無//定法... 고정된 법이 없다.
隨緣立理 脫羅籠이로다. 인연을 따라서 立理. 인연을 따라서 이치를 세워요. 뭐 불교의 이치가 아무리 참다운 이치다. 진리. 또 참되고 바른 이치다. 그렇게 말하지만 전부 인연을 따른 것이다. 인연을 따라서 이치를 세운 것이라
脫羅籠. 羅는 그물이지요. 籠은 말하자면 새 잡는 기구입니다. 삼태기지요. 대로 만든 삼태기인데 옛날에 시골에서는 눈 오는 날 새들이 많이 날아오지요. 그러면 대로 만든 삼태기를 딱~~ 세워놓고 거기에 새가 들어가면 탁 줄을 당겨버리면 그 안에 새가 갇히고 하는 그런 형식이 있는데, 중국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羅籠이라고 하는 것은 그물이고, 사실은 우리의 어떤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말 쫓아간다” 이런 말을 불교에서는 아주 잘 해요.
“말 쫓아간다” 그것 참 말 안 쫓아갈 수도 없고, 쫓아가도 또 안 되고 그렇습니다.
【冶父】
雲起南山雨北山하니 驢名馬字幾多般고 請看浩渺無情水하라
幾處隨方幾處圓고
(說誼 : 依俙說諦緣하시고 更爲談六度하시니 以機不同으로
法亦無定이라 從此分開萬種名이로다 以無念智應群機하시니
半滿偏圓多少說고 多少說이여 曾無一字落言詮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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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起南山雨北山하니, 구름은 남산에서 일어나고 비는 북산에서 내린다. 이것은 종종근기. 사람들의 여러 가지 근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驢名馬字幾多般고, 이것이 나귀 驢려자지요? 나귀 驢자인데, 나귀라고 하는 이름은 말하자면 馬자, 말 馬변에 있는 글자를 제가 옥편에 찾아봤는데 무수히 많습니다. 말 馬변에 들어있는 글자가.... 타는 것도 있고, 온갖 짐승이름들이 참 많습니다. 몇 가지가 되느냐? 가지ㆍ가지 방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는 가지ㆍ가지 근기에 따라서 가지ㆍ가지 방편이 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請看 浩渺無情水(청간호묘무정수)하라.
청컨대 浩渺. 넓고 넓은 無情水를 보라. 이것은 불법대해입니다.
불법을 큰 바다에 비유하거든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넓고 커서 그렇게 비유를 합니다. 넓고 넓은 無情水. 情없는 물을 보라.
幾處隨方 幾處圓(기처수방기처원)고?
몇 곳에서 모난 것을 따르며, 또 몇 곳에서 幾處圓. 둥근 것을 따르든가? 몇 곳에서 둥글든가? 그러니까 물이 가득히 있으면 말하자면 그 지세에 따라서 지세가 모나면 물도 모나고ㆍ지세가 둥글면 물도 둥글고ㆍ또 깊으면 깊고, 경사지면 여울져 흐르고, 그 물이라고 하는 것이, 정한 것이 정말 없지요. 상황 따라서...
그래서 아주 좁으면 또 좁은 대로 흐르고ㆍ넓으면 넓은 대로 흐르고ㆍ평탄하면 완만학[ 흐르고, 경사지면 아주 급하게 흐르고ㆍ또 아주 낭떠러지 같으면 폭포로써 흐르고... 모양도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여러 가지가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8만 대장경의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그와 같은 것이다. 이런 표현입니다.
그런 것을 저처럼 이렇게 구지리하게 길게 설명하지 않고, 禪詩라고 하는 것이 아주 함축성 있고, 많은 의미를 이렇게 포함하고 있어서 정말 이렇게 여운이 있지요.
請看浩渺無情水하라 幾處隨方幾處圓고? 여러분 한 자ㆍ한 자 써가면서 그 맛을 느끼면 맛이 아주 더 진하게 다가오지요.
說誼
依俙說諦緣(의희설제연)하시고,
依俙라고 하는 말은 ‘비슷하게’, 비슷하게 4제와 12인연을 설하시고, 왜 비슷하게 했느냐? 그럴듯하거든요. 고집멸도. 아~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ㆍ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ㆍ없애야 되지 않느냐?ㆍ소멸해야 되지 않느냐? 소멸하려면 8정도가 필요하다ㆍ뭐가 필요하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고집멸도! 또 12인연. 사람의 일생은 12인연으로 구성 되어있다. 무명ㆍ행ㆍ식ㆍ명색ㆍ육입ㆍ촉ㆍ수ㆍ애ㆍ취ㆍ유ㆍ생ㆍ노사, 이것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 우리 인생사다. 아주 그럴듯하지요.
비슷하게ㆍ그럴듯하게 依俙說諦緣하시고,
更爲談六度(갱위담륙도)하시니,
또 우리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을 하려면 여섯 가지 덕목을 닦아야 된다. 다시 육바라밀을 또 이야기를 하지요.
以機不同으로, 근기가 不同함으로
法亦無定이라. 그 가르치는 법도 또한 일정하지 아니함이라. 일정함이 없다.
從此 分開 萬種名이로다. 이로부터 그래서 만 가지 이름을 나누고 열도다. 만 가지 이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以無念智 應群機하시니, 無念智로써, 고정된 생각이 없는 그런 지혜입니다. 딱 고정된 그런 지혜가 아니라 텅 빈 지혜지요. 그것이 無念智입니다. 생각이 없는 지혜로써,
群機에 應하니 온갖 근기에 群機. 여러 가지 근기에 응하시니
半滿偏圓多少說고?
반교ㆍ만교ㆍ편교ㆍ원교를 얼마나 많이 설했던가? 多少 = 얼마나 많이 설했던가? 이것은 반교ㆍ만교 = 半字敎ㆍ滿字敎 그래요.
半字敎 = 소승교, 滿字敎 = 대승교.
그 다음에 偏敎. 치우칠 偏자는 치우친 교니까 역시 소승교고요. 滿자, 圓자는 대승교고요. 간단하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교리가 아주 복잡했습니다.
복잡해서 5교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ㆍ2교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ㆍ8교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 그것 뭐 천태교학이라든지 또 교학을 전문적으로 정리 하신 분들은, 말하자면 경전에 있는 내용을 교리적으로 재차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한 것이지요. 그 정리가 아주 다양합니다. 열 가지교로 정리한 사람ㆍ한 가지교로 정리한 사람, 역사적으로 그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대표적으로 半字敎ㆍ滿字敎ㆍ偏敎... 치우친 교ㆍ원만한 교, 그래요. 半字敎ㆍ滿字敎는 자주 나오는 말인데, 이것이 梵書, 그것이 실담자라고도 하는데 본래 인도에서 경전을 처음 성문화 할 때 사용했던 글자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아주 변하고 변해가지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은, 데바나가리 라고 조금 발전된 그런 문자를 쓰는데요. 초기에는 그 문자보다 다른 문자를 많이 썼었습니다.
그것이 梵書라고 해서 우리나라에도 목판본도 있고ㆍ법당에는 간혹 옴 마니 반메 훔도 써놓고, 옴 자도 써놓고 그러는데... 이것이 어쩌다가 梵書에 반마니 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가하면 ... 우리나라에는 “철자법” 이렇게 하는데 범어에는 切継法이라고 그래요. 짜를 切, 이을 継잖아요. 우리는 예를 들어서 ㄱ+ㅏ → ㄱ과 ㅏ를 엮어서 “가” 가 되는 것이 철자인데, 梵語는 반대로 예를 들어서 ㅈ+ㅗ+ㅣ 이것이 “아” 자인데, ㅗ 를 자르고 (지원 안 됨, 영상보시기 바람) 붙여요. 자른 것을 切이라 하고, 갖다 붙이는 것을 継라고 그래요. 梵書에 전부 이런 식으로 돼있습니다. 이것을 실담자라고 그러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옴” 자도 切継法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르고ㆍ붙이고, 자르고ㆍ붙이고 해가지고 글자가 된 겁니다. 자르기 전의 “옴” 자도 滿字가 되고, ㅈ+ㅗ+ㅣ도 滿字가 되고요. 그런데 잘랐을 때는 온자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에 말하듯이 半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자가 아니고 반자...
그러면 교리가 온전한 교리가 아니고, 말하자면 소승 교리를 “半字敎” 그렇게 표현해요. 滿字敎는 완전한 梵書. 이런 뜻에서 그것은 “대승경ㆍ대승교리.” 이런 식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이것은 梵書에 해당되는 이야기인데요. 그래서 半字敎ㆍ滿字敎 = 偏敎ㆍ圓敎, 이런 것이 얼마나 많으냐? 이 말입니다. 참 많습니다.
多少說이여, 많고 많은 설법이여
曾無一字落 言詮이로다.
일찍이 한 글자도 言詮에 떨어짐이 없더라. 그 전에 제가 詮은 진리를 설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이치를 설하는 것. 이치를 말하는데 떨어지지 않는다. 이치를 표현하는데 떨어지지 않았더라. 한 글자도 이치는 드러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 부처님도 최후에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또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처님, 왜 그리 말씀이 많습니까? 어떤 제자가 그러니까, 부처님이 숲에서 사니까... 나뭇잎을 한 주먹 훑었어요. 그래가지고는
“내 손에 있는 나뭇잎이 많으냐? 이 숲에 있는 나뭇잎이 많으냐?”
그러니까 그 제자가 있다가 숲에 있는 나뭇잎이 천배만배도 더 많지요.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있다가 “내가 말을 많이 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말한 것은 손에 있는 것과 같고, 내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은 저 숲에 달려 있는 나뭇잎과 같다”
이렇게 하하하 부처님이 변명하셨던 그런 내용도 있습니다. 변명이 변명이아니라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말이 많아도 많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說誼 : 佛所說法은 若說有相과 若說無相에 圓話自在하야
終不滯於一邊이라 所以로 不可取說이니라
又佛所說法은 謂是法이라도 亦不是며 謂非法이라도 亦不是니
若定非法인댄 渡河에 須用筏이요
若定是法인댄 到岸에 不須船이니라 所以로 有時에 道호대
至理一言이 革凡成聖이라하고 有時에 道호대 三乘十二分敎는
是什麽오 熱椀鳴聲이라하시니 金屎之論도 亦以此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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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하~ 이런 논리가 도대체가 세속에서는 있을 수가 없지요.
如來所說法. 여래께서 설하신바 법은
皆不可取며, 다 가히 취할 수가 없으며
不可說이며, 설할 수도 없으며
非法이며, 법이 아니며 非非法이니, 법아님도 아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세속적인 흑백논리에 익숙해 있다가 이런 것 보면 아주 말장난 같고, 또는 혼란스럽기도 하고요. ‘이것 무슨 소린가?’ 도대체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불교적 논리에 익숙해져야 되고, 불교적 논리로 무장을 해야 말하자면 그 어떤 깨달은 분들이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그런 이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해가 안 되지요.
說誼
佛所說法은 若說有相과 若說無相에, 여러 가지로 설할 수가 있는데, 有相을 설하기도 하고, 無相을 설하기도 해요.
일반 “소승교ㆍ소승교” 하는데, “법상교” 라고도 하고, 아함부 계통의 경전은 전부 有. 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苦ㆍ集ㆍ滅ㆍ道. 고통도 있다ㆍ고통의 원인도 있다ㆍ고통을 소멸하는 경지도 있다ㆍ또 그 방법도 있다. 이런 식으로 전부 “있다”고 하는 입장입니다. 또 12인연도 “있다”는 입장이고요.
그런데 부처님 설법은 그것 보다 조금 한 차원 높이 올라가면 또 “없다” 는 이야기거든요.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그런 뜻이니까 無相을 설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다가, 그래 圓話自在라. 그랬습니다. 圓話自在하야, 원만한 말씀이 자유자재하다.
무슨 말장난 같고ㆍ변명 같고ㆍ되도 않는 이야기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圓話입니다.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다가, 그것이 圓話라고요.
예를 들어서 여기서 “쿵” 이렇게 소리가 났습니다. 분명히 소리 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 그것 “있다”고 할 수가 없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없는 겁니다. 지금 없어요. 이것이 금방 밑에 내려옵니다만, 또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 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한편 생각해보면 “또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해요”.
이것을 소위 4구라고 그래요. 有ㆍ無. 모든 존재가 그렇습니다. 소리뿐만이 아닙니다. 마이크도 그렇지요. 마이크도 이것이 분명히 있지요. 그렇지만 불교 상식을 가지고 “아, 이것 있는 것 아니잖아, 없는 거잖아?” 하면 얼른 알아듣습니다. 이것 분해해서 온갖 부속들을 분해해 놓으면 없는 것이기도 하고 나중에 또 없어지기도 하고요. 아예 卽空! 바로 없게도 볼 수가 있고요. 그 공하게 보는 것이요? 몇 가지가 있는데
처음에 ◆ “분석공” 그래요. 가장 쉬운 겁니다. 이 마이크를 전부 분석해버려요. 하나ㆍ하나 분석해 해버려요. “우리 육신도 지수화풍 4대라든지 이런 것을 분석해놓고 보면 공하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차원이 낮은 공에 대한 이해인데요. 그런 분석공이 있는가하면, 그 다음에는
◆ “연기공” 이라 그래요. 이것저것 인연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공한 것이다. 이 마이크도 그렇고 우리 육신도 그렇고 모든 것이 이래저래 인연조합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인연이 흩어져버리면 공한 것이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공입니다. 연기공이라는 것이 분석공 보다는 조금 차원이 높습니다. 그 다음에
“반야심경 공” 은 뭐냐? ◆卽空입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卽空입니다. 분석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연도 아닙니다. “인연으로 공하다.” 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로 공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것을 설명한다고 우리가, 저도 어릴 때 늘 그렇게 설명 했습니다만, 반야심경 色卽是空할 때 왜 공이냐? 하~~ 이렇게ㆍ이렇게 해서 인연에 의해서 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 육신이라든지ㆍ우리 단체라든지ㆍ이 집이라든지ㆍ전부가, 전부 인연에 의해서 조합이 돼가지고 형성된 것이고, 이 인연이 흩어지면 공한 것이다. 대개 그렇게 설명을 하는데
반야심경은 그것이 아닙니다. 卽空입니다. 그대로ㆍ그대로 공으로 보는 것입니다.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인연도 동원시키지 않습니다.
즉공을 이해 못하면 그 뿐인 것이고 그렇지, 무조건 즉공이 그대로 두고 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거기다 인연을 동원하는 것은 그 공을 이해시키려고 억지로ㆍ억지로 동원하는 것이지 맞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있음과ㆍ없음과, 있지도 않고ㆍ없지도 않는 것, 또한 있고ㆍ또한 없음, 이것이 모든 존재가 다 그렇게 구성되어있다ㆍ그런 관점에서 봐야한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있다”고도 하고ㆍ“없다”고도 하는 것이 사실은 圓話입니다. 원만한 말이지요. 그래야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圓話自在라.
있다 했다가ㆍ없다 했다가,
또한 있고ㆍ또한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ㆍ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終不滯於一邊이라. 그랬습니다.
마침내 一邊에도 막히지 않는다. 滯하지 않는다. 있다고 하는 데도 滯하지 않고ㆍ없다고 하는 데도 滯하지 않고, 그래서 中道. 제가 지난번에도 중도를 말씀드렸는데 中道. 그래서 一邊에도 滯하지 않는 것을 中道라고 한다.
所以로 不可取說이니라.
가히 취하지도 못하며 설하지도 못하느니라.
不可取說 이렇게 생략을 했습니다만, 소이로 불가 취며 불가설이니라.
說자를 그렇게 봐야 됩니다.
又佛所說法은, 또 부처님이 설법하신 바는
謂是法이라도 亦不是며, 옳은 법이라 하더라도 또한 옳지 않고
謂非法이라도 亦不是니, 그른 법이라 하더라도 또한 옳지 않다.
若定非法인댄, 만약에 결정코 非法. 법이 아니라고 할진댄
渡河에 須用筏이요, 강을 건너는데 모름지기 뗏목을 사용함이요.
좋은 비유입니다.
若定是法인댄, 만약 결정코 “이것이 법이다” 라고 한다면
到岸에, 언덕에 이름에, 뗏목을 타고 언덕에 이름에
不須船이니라. 그 때는 배가 필요치 아니함이다.
그렇지요. 누가 뗏목이나 배가 강을 건너줬다고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없지요. ‘정말 내가 그런 뗏목ㆍ그런 배를 타고 왔는가?’ 전혀 잊어버리고 갑니다. 不須船 = 배를 필요로 하지 아니함이니라.
所以로 有時에 道호대, 그러므로 어떤 때는 말하기를
至理一言이 革凡成聖이라하고, 아~~ 좋은 말입니다.
지극한 이치의 한 말씀이, 至理一言 革凡成聖 이것은 밑줄 쫙~입니다.
至理一言 = 지극한 이치에 대한 한 마디 말씀이,
革凡成聖 = 범부를 고쳐서 聖人을 만든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 하기도 하고, 정말 한 마디 말에 깨달으신 분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육조스님도 금강경구절 하나 듣고 바로 聖人이 되고ㆍ영가스님 같은 이들도 유마경 읽다가 한 마디에 그냥 척~ 깨달았고요.
지극한 이치의 한 마디 말씀이 革凡成聖이라. 그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그것도 곤란하지요.
그래 有時에 道호대, 그랬습니다. 어떤 때는 말하기를
三乘十二分敎는 是什麽오? 熱椀鳴聲이라하시니,
三乘十二分敎 = 부처님의 일대시교.
그것을 三乘 =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 이렇게 나누고,
十二分敎는 부처님의 교설을 열두가지 내용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그것을 十二分敎라 그래요. 흔히 三乘十二分敎ㆍ일대시교ㆍ대장경ㆍ부처님의 가르침 전부...
이것은 뭐냐? = 是什麽오?
熱椀鳴聲이라. 그랬어요. 뜨거운 사발에 물 붓는 소리다. “뜨거운 사발이 우는 소리” 이랬습니다.
뜨거운 사발이 우는 소리 = 熱椀鳴聲인데요. 말하자면 사발이, 그릇이 아주 뜨거울 때 물을 쏟으면 “지직” 하고 순식간에 증발되는 소리가 납니다. 그와 같은 소리다 이겁니다. 참으로 허망한 소리ㆍ금방 없어져버릴 소리ㆍ아무것도 아닌 소리. 그것이 부처님의 8만 대장경이다 이 말입니다.
▶때로는 그렇게도 표현 한다 이겁니다.
▶때로는 至理一言이 革凡成聖이라고도 표현하고요.
그것이 또 사실이고요. 아~~ 참, 이 깨달으신 분들의 가르침은 정말 시원시원해요. 그래서
金屎之論도 亦以此也니라. 그랬습니다.
金屎之論. 중요한 말입니다. 쇠 金자ㆍ금이란 金자, 똥 屎시자입니다. 이것이 고종숙 어록에서 나온 말인데요. 선종에서 참선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참선. 우리가 하~~ 참선에 목을 매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선은 이것을 제대로 알면, 안 사람에게는 똥입니다. 화두도 똥이고, 참선법도 똥입니다.
▶아는 사람에게는 화두고 뭐고 전부 “똥”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금”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금보다도 더 소중해요. 화두가 생명입니다. 그런 표현 많이 씁니다. 화두가 생명입니다. 금보다도 더 귀중하지요.
그런데 옛 부터 金屎之論. 金屎라고 하는 참선에 있어서, 참선을 그렇게 알아라. 참선은 알면 똥이고, 모르면 금이다. 그런 이야기와 같다 이것이지요. 金屎之論도 또한 이것이다. 그렇습니다.
참선뿐이겠습니까? 8만 대장경ㆍ부처님의 모든 학설이 사실은 알고 보면 똥이고, 모르고 보면 금입니다. 모르면 하~~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역시 경전의 이런 말씀이 그렇게 좋게 느껴지는 걸 보니까 ...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아주 좋게, 재미있거든. 하하 정말 시원하고 아주 좋은 말씀, 至理一言이 革凡成聖이다.
‘아~~ 그래, 그래. 맞아, 정말 육조스님 같은 이가 한 마디 딱 듣고는 그만 바로 聖人이 됐잖아’ 얼마나 근사한 소리입니까?
제대로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 알려면 ㅎㅎㅎ 경전의 말씀이 소중하게 여겨지면 아직도 못 깨달은 사람이고, ㅎㅎㅎ 경전이 시시하면 아주 바보고 멍청이거나 아니면 깨달은 사람이거나 ㅎㅎㅎ 둘 중의 하나라고 이해하면 틀림없습니다.
【六祖】
恐人이 執著如來所說文字章句하야 不悟無相之理하고
妄生知解일새 故로 言不可取니라 如來가 爲化種種衆生하사
應機隨量이시니 所有言說이 亦何有定乎아
學人이 不解如來深意하고 但誦如來所說敎法하야 不了本心하야
終不成佛일새 故로 言不可說也니라 口誦心不行하면 卽非法이요
口誦心行하야 了無所得하면 卽非非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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恐 = 염려된다ㆍ두려워한다 이 말입니다.
人이, 사람들이 執著如來所說文字章句하야,
여래가 설하신 文字나 長句. 글귀를 집착해서
不悟無相之理하고, 현상이 없는, 상을 초월한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妄生知解일새. 망령되게 知解. 알 지자 알 해자 = 알음알이ㆍ사량 분별로 어떤 지식적으로 이거다 저거다 하는 것을 知解. 그래요. 알음알라고 표현. 그것을 내는 것을 두려워 했을세ㆍ염려 했을세 = 恐.
故로 言不可取니라. 말하기를 不可取. 가히 취할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참 육조스님 답게 점잖게 해석을 했습니다.
如來가 爲化種種衆生하사, 가지ㆍ가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應機隨量이시니, 근기에 맞추고 量을 따랐다.
그렇지요. 그 사람의 그릇이 얼마인지ㆍ근기가 어떤 지ㆍ어떤 수준인지, 한참 기도에 빠져있는 사람보고, “물에 가라앉아 있는 돌을 보고 떠라ㆍ떠라ㆍ떠라ㆍ떠라, 라고 한다고 해서 돌이 뜨느냐?” 라고 이런 소리하면 안 돼지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뜬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틀림없이 뜬다” 라고 이렇게 가르쳐야 됩니다.
應機隨量이거든요. 근기에 응하고 量을 따르시니
所有言說이, 있는 바 言說이
亦何有定乎아? 어찌 고정됨이 있겠는가?
또한 어찌 고정됨이 있겠는가? 말이 고정될 수가 없지요.
그래 참, 불교같이 모순 많은 종교가 없습니다. 전혀 반대 되는 말을 그냥 같이 ․ 같이 섞어서 하니까요.
그것 참, 불교 맨 처음 공부할 때, 제일 혼란스럽지요. 정말 전혀 상반 되는 소리를 아주 당당하게ㆍ자신있게ㆍ틀림없는 학설로ㆍ틀림없는 어떤 진리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所有言說이 고정됨이 없다.
學人이 不解如來深意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여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但誦如來所說敎法하야, 여래께서 說하신바 敎法을 다만 외워서
不了本心하야, 本心. 본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終不成佛일새. 마침내 성불하지 못할세.
故로 言不可說也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가히 말할 수 없다” 라고 말한다.
口誦/心不行하면,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그것을 行하지 아니하면
卽非法이요, 法이 아니요
口誦/心行하야,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行해서
了無所得하면, 無所得을 깨달으면, 얻을 바 없음을 깨달을 것 같으면
卽非非法이라. 法 아닌 것이 아니다. 非法이 아니다.
법과 비법을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육조스님 다운 그런 해석이지요.
제11강 3부 (2011.06.28)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하니까 야보스님이 있다가
【冶父】
是甚麽오
(說誼 : 佛所說法은 如水上에 按胡蘆相似하야 觸著便轉이라
無定法可取며 無定法可說이니 若定說有인댄 爭奈非有며
若定說無인댄 爭奈非無리오 旣非有無法인댄 畢竟是甚麽오
又謂法謂非法이 旣皆不是인댄 畢竟是甚麽오)
............................................................................................................
是甚麽오? 이 무엇이냐? 그러면 뭐냐 말이냐?
所說法이 不可取고 不可說이고 非法이고 非非法
이라면 도대체 뭐냐? 이런 뜻입니다.
說誼
佛所說法은 如水上에 按胡蘆相似하야, 물위에 조롱박을, 胡蘆는 조롱박입니다. 조롱박을 按 = 누른다. 누른 것과 相似하다 = 같다.
觸著便轉이라. 닿기만 하면 곧 움직여버려요. 굴러요. 그렇지요. 조롱박이 얼마나 가볍습니까? 물에 띄워놓고 조금만 손닿으면 그냥 사정없이 어디로 움직여가지요.
無定法可取며, 定法. 고정된 法 가히 취할 것이 없으며
無定法可說이니, 고정된 法 가히 說할 것이 없으니
若定 / 說有인댄, 만약 결정코 說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爭奈非有며, 어찌 있는 것이 아니며
若定 / 說無인댄, 만약에 결정코 없다고 말한다면
爭奈非無리오. 어찌 없는 것이 아니리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有ㆍ◆無, ◆非有非無, ◆亦有亦無,
유ㆍ무, 비유비무 ․ 역유역무. 비유비무를 하나로 치고, 역유역무를 하나로 쳐서 그래서 “四句” 이렇게 합니다. 有ㆍ無, 非有非無, 亦有亦無, 이렇게 하면 사구가 되지요?
旣非 / 有無法인댄, 이미 非有無法인댄, 有無法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있다 없다 하는 법이 아닐진댄,
畢竟是甚麽오? 필경에 무엇이냐? 是甚麽오?
又謂法 / 謂非法이, 法이라고 하고 非法이라고 하는 것이
旣皆不是인댄, 이미 다 옳지 아니할진댄
畢竟是甚麽오? 필경에 무엇이냐? 是甚麽를 그렇게 부연설명을 했어.
【冶父】
恁麽也不得이며 不恁麽也不得이니 廓落大虛空에
鳥飛無影跡이로다 咄 撥轉機輪卻倒迴하니 南北東西任往來로다
(說誼 : 定有定無俱不是니 莫向四句覓黃老어다
黃老는 不坐四句中이니 不坐四句中이여 鳥飛空中無影跡이로다
咄 更須向鳥道裡轉身하야사 始得이니 南北東西一天地에
莫分彊界任往來로다
又法與非法이 二俱不是니 二見이 皆非佛本心이라
誰向空中覓鳥跡이리오 咄 縱然伊麽去라도 亦非佛本心이니
若也眞知佛本心인댄 謂是法이라도 亦不妨이며
謂非法이라도 亦不妨이니라)
.........................................................................................................
恁麽也不得이며 不恁麽也不得이니
廓落大虛空(확낙대허공)에 鳥飛無影跡이로다. 그랬습니다.
恁麽也不得이며 不恁麽也不得이라.
▶恁麽也 하는 것은 有를 뜻하는데, “있다” 하더라도, 恁麽也 라고 하는 말, 그것은 “이렇다” 해도 안 되고, // “이렇지 않다” 해도 안 된다. “이렇다” 하는 것은 有를 말한 것이고 = “있다”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不恁麽 하는 것은 “이렇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은 = “있지 않다” 를 말하는 것입니다. “있지 않다” 하더라도 또한 얻지 못함이니
廓落大虛空에, 툭~ 터져버린 = 廓落. 툭~ 터져버린 태 허공에
鳥飛無影跡이로다... 새가 날아감에 影跡 = 그림자나 자취가 없음이로다.
如空中鳥迹이라. 불교에서 그런 말 잘 씁니다. 허공에 새가 날아가는 자취와 같다. 새가 날아가긴 날아갔지만 자취가 없잖아요. 그런데 날아가야 돼요. 앞산에서 뒷산으로 가려면 자취는 없지만 날아가야 되고, 날아갔지만 자취는 없다.
그것이 이 법과 또 說. 부처님이 얻으신 그 깨달음과 또 깨달음을 설하신 내용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것이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鳥飛無影跡. 새가 날아가는데 그림자와 자취가 없다. 하지만 또 새가 날아가야 됩니다. 자취는 없어도...
咄 撥轉機輪/卻倒迴하니 南北東西任往來로다.
機輪을 撥轉한다. 이 機輪은 지구로 보면 운전대와 같은 것입니다. 고동이라고도 하고 말하자면 무슨 기계. 기계를 機輪이라 그래요. 옛날에 예를 들어 물을 길어 올리는데, 물을 길어 올리는데 쓰는 기계를 機輪이라 그랬습니다. 옛날 기계는 기껏 그것입니다. 물을 길어 올리는 것. 아주ㆍ아주 옛날에는... 그것도 일종의 기계거든요. 모든 기계는 말하자면 중심 되는 스위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는 운전대 같이요. 또 불을 켜는 데는 스위치와 같이요. 그것을 말하자면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 撥轉한다. 움직이는데 움직이니까 바로가야 할 텐데
卻도리어 倒迴라 그랬어요. 거꾸로 간다 이 말입니다. 거꾸로 도니,
제대로 가라고 機輪을 움직였는데 거꾸로 돈다. 그래서
南北東西任往來 = 마음대로 간다 이 말입니다.
물을 길어 올리는 기계가 機輪인데,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도로 내려가 버리니까... 옛날에 물 한 바가지 떠서 올리고ㆍ올리고 하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다시 내려가 버려. 그것이 말하자면 恁麽也不得이며 不恁麽也不得. “이렇다” 해도 안 되고, “저렇다” 해도 안 되는 겁니다. “있다” 해도 안 맞고, “없다” 해도 안 맞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說誼
定有定無俱不是니, 결정코 있고ㆍ결정코 없다 하는 것이 俱不是라. 함께 다 옳지 아니함이니
莫向四句覓黃老어다. 四句를 向해서 黃老를 찾지 말라. 부처님을 찾지 말라.
그러니까 四句. 말씀드린 有ㆍ無, 非有非無, 亦有亦無. 이것이 四句지요.
아까 제가 소리를 “쾅” 내면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없습니다. ◆있는 것은 有요 ◆없는 것은 無입니다. 또 그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또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해요. 소리 하나에 그렇게 네 가지 시각으로 관찰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모든 존재를 똑 같이 그렇게 네 가지 각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四句입니다.
그 四句에서 黃老.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지를 말라.
黃老는 不坐四句中이니, 부처님은 四句中에 앉아있지 아니해요.
不坐四句中이여, 四句中에 앉아있지 아니함이여
鳥飛空中無影跡이로다. 새는 空中에 날아가는데 그림자나 그 자취가 없더라.
咄 更須向鳥道裡 轉身하야사 始得이니,
다시 모름지기 鳥道裡를 향해서, 새가 날아가는 길. 공중이지요. 결국 空中입니다. 鳥道裡라고 하는 것은 텅 빈 空中입니다. 새 날으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공중일 뿐이지요. 空中을 향해서 轉身해야 됩니다. 텅 빈곳,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몸을 한 번 뒤쳐야 됩니다. 거기서 뭔가 머리가 한 번 돌아와야 된다ㆍ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없는 것 가운데서 뭔가 눈을 한 번 떠야 비로소 된다.
南北東西一天地에, 남북동서 한 천지에 莫分彊界任往來로다.
彊界 = 경계. 경계를 나누지 않고 마음대로 왕래하도다.
그러니까 부처님 법이 열반이니ㆍ보리니ㆍ진여니ㆍ법성이니,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말입니까? 그런데 그것 매이지 않고, 말하자면 툭~ 터진 그런 어떤 소견ㆍ그런 안목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又法與非法이, 또 법과 법 아닌 것이
二俱不是니, 둘 다 함께 옳지 아니 함이니
二見이 皆非佛本心이라. 두 가지 견해, 있다 없다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심이 아님이다. 中道를 뜻하는 것입니다.
誰向空中覓鳥跡이리오? 누가 공중을 향해서 새의 자취를 찾으리오? 공중에는 새의 자취가 없지요.
咄 縱然伊麽去라도, 비록 그렇더라도 = 伊麽去.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亦非佛本心이니, 또한 부처님의 본심이 아니다.
若也眞知佛本心인댄, 만약에 부처님의 본심을 진실로 알진댄
謂是法이라도, 이 법이라 하더라도
亦不妨이며, 방해롭지 않다. 괜찮다 이 말입니다.
謂非法이라도, 非法이라 말하더라도
亦不妨이니라. 또한 방해롭지 않다.
그래서 결국은 中道인데, 중도는 有와 無를 배제하면서 有와 無를 다 수용하는 것. 융화ㆍ조화ㆍ수용.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전부 상반된 견해. 어떤 치우친 그런 주의주장이 꽉~ 차 있지요. 전부 진보 아니면 보수. 뭐 ... 좌 아니면 우. 대개 사람들은 그렇게 치우쳐야만 뭔가 그것이 의지가 됩니다. 치우치지 아니하면 어디 종잡을 수가 없고, 대개 소인들은 뭔가 확실한, 그것이 치우친 견해이고, 편벽된 견해라 하더라도 뭔가 그것이 의지가 된다고요.
“이것이다” 라고 할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놓아 버리면 그만 황당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면 어디에도 치우칠 수가 없게 되어있는데, 우리의 좁은 소견에, 중생들의 알량한 그런 어떤 집착하기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뭔가 치우친 견해를 자꾸 갖고자 하는 겁니다.
어디에도 보수 아니면 진보. 진보 아니면 보수. 중도ㆍ중도하지만 진정한 中道는 사실 거의 없습니다. 뭔가 그것이 치우쳐야만 성에 차는 겁니다. 그것이 보통사람의 근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도를 아주 잘 이야기하고 있어. 中道.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더욱 더 그렇지요. 세상사도 그렇지만 불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부처님 본심이라고, 불교의 진리. 이렇게도 표현할 수가 있겠는데...
그것은 사실은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다. 그리고 다시 법이라 해도 괜찮고, 비법이라 해도 괜찮다. 不妨이라고 하는 말은 괜찮다. 이런 뜻이거든요 = 방해롭지 않다. 사실은 그렇게 돼야 옳은 겁니다.
“옳다ㆍ그르다” 꼭 그렇게 고집할 것이 아니고, 법이라 해도 괜찮고 법이 아니라 해도 괜찮다. 또 법도 아니기도 하고 비법도 아니다. 그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 입장을 충분히 안다. 그래서 융화ㆍ조화ㆍ수용, 중도는 그 겁니다. 사실 융화ㆍ조화ㆍ수용, 이것이 중도입니다. 치우치지 않고요. 그런 내용을 이 석 줄에서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所以者가 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說誼 : 一切賢聖所證法이 皆以無爲로 有差別이니
而此差別이 卽無爲라 逈出中間與二邊이로다
伊麽則一味無爲法이 在聲聞則名四諦요 在緣覺則名因緣이요
在菩薩則名六度니 六度因緣與四諦가 一一無取不可說이로다)
.....................................................................................................
所以者가 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이것도 금강경에서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까닭이 무엇이냐?
所以者가 何오? 아주 친절하게 토를 달아놨네요.
所以者가 何오? 까닭이란 것이 무엇인가?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일체 현성이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었다.
보통 그 ◆賢聖들, ▲현인이나 ▲성인들은 법을 증득했습니다. 법을 깨달았습니다. 법을 깨닫고, 그들이 또 법을 施設을 했습니다. 법을 깨닫고, 법을 施設을 했어요. 법을 깨달은 그 본질하고, 법의 본질하고 // 賢聖들이, 부처님이나 그 외 깨달은 분들이 施設한 법하고 // 이것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지 // 잘못 그 施設한 법만 쫓아가면 // 그들이 본래 깨달은 속심... 그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 切賢聖은 皆以無爲法으로써 차별을 두었다. 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無爲法. 깨달은 분들은 텅 비었습니다. 그야말로 空中鳥跡입니다. 공중에 새 지나가듯이 그런 심정인데, 중생들을 건지다 보니까, 또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다 보니까 할 수 없이 이런 저런 방편의 敎說을 나열 할 수밖에 없다 = 而有差別
그래서 어떻습니까? 중생이 부처가 되기까지 별별 그런 과정들을 施設하지요. 십신ㆍ십주ㆍ십행ㆍ십회향ㆍ십지ㆍ등각ㆍ묘각... 기본적으로 52단계를 그렇게 施設해 놨지요. 오직 사람이라고 하는 것. 그 하나뿐인데, 사람이라는 존재, 그것 하나뿐 ---> 그런데 거기다가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이런 것들도 있을 수가 있고, 무슨 52 보살계위 점차도 있고, 별별 점차가 많지 않습니까? 또 그런 敎說이 필요한 근기가 있습니다.
說誼
一切賢聖所證法이, 증득한바 법이
皆以無爲로, 無爲로써, 도교에서 말하는 無爲自然하고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어떤 이치. 그것을 無爲라고 하는 것입니다. 함이 없는 것 = 조작이 없는 것으로써
有差別이니, 차별을 두었으니,
而此差別이, 이 차별이라고 하는 것이
卽無爲라. 곧 無爲지요. 無爲에서 차별이 나왔으니까 차별이 그대로 無爲다. 중요한 말입니다.
逈出 // 中間與二邊이로다.
그래서 중간도 아니고, 二邊, 有ㆍ無. 이쪽ㆍ저쪽도 아닌, 이변과 중간까지도 멀리 벗어났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중도는 중간도, 그리고 이쪽ㆍ저쪽도 멀리 벗어난 상태. 그러면서 다 수용하는 것. 그런데 보통 우리 정계에서 “중도성향” 그렇게 하면 말하자면 이쪽도ㆍ저쪽도 아닌, 그런 어떤 또 다른 주의주장을 흔히 이야기를 합니다.
伊麽則, 그렇다면
一味無爲法이, 한맛의 無爲法이
在聲聞則名四諦요, 聲聞에 있어서는 四諦의 가르침이 되고, 이름이 四諦가 되고
在緣覺則名因緣이요, 緣覺에 있어서는 因緣이되고 12인연이 되고.
在菩薩則名六度니, 보살에 있어서는 名六度. 6바라밀이 됨이니
六度因緣與四諦가, 六度ㆍ因緣ㆍ그리고 四諦가
一一無取不可說이로다. 낱낱이 취할 것도 없고 가히 설할 것도 아니로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근기 따라서 그저 假說. 假說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요. 근기 따라서 假說 해놓은 것일 뿐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런 근본교리에 심취해있는 사람들에게 “假說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ㆍ아주 섭섭해 하지요. 6바라밀이다ㆍ4제다ㆍ8정도다ㆍ12인연이다ㆍ37조도품이다. 이 주옥같은 불교교리에 대한 용어들, 이것은 전부 假說이다. 이래 버리면 아주 섭섭해 해요. 아주 섭섭해 해... 평생 거기에 목을 매고 살아온 사람들인데... 假說이라면 ‘ 내가 假說만 쫓아서 이렇게 했단 말인가?’ 싶지요. 그 다음에 육조스님
【六祖】
三乘根性이 所解不同하야 見有淺深일새 故言差別이니라
佛說無爲法者는 卽是無住니 無住가 卽是無相이며
無相이 卽是無起며 無起가 卽是無滅이라
蕩然空寂하야 照用齊收하며 鑒覺無礙가 乃眞是解脫佛性이니라
佛은 卽是覺이며 覺은 卽是觀照며 觀照는 卽是智慧며
智慧는 卽是般若波羅蜜多니라
..............................................................................................
三乘의 根性이, 三乘 = 성문ㆍ연각ㆍ보살 근성이
所解不同하야, 이해하는 바가 같지 아니 해서
見有淺深일새, 견해에 深淺이 있을 세.
故言差別이니라. 그러므로 차별이라고 말한다.
佛說無爲法者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無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卽是無住니, 머묾이 없는, 어디에도 주착함이 없는 것이다.
無住라고 하는 것, 無住가 卽是無相이며, 형상이 없는 것이며
無相이 卽是無起(記?)며, 여기는 기록함이 없다. 또는 기억함이 없다. 그러지요? 뭐라고 말하자면, 있다 없다 라고 그렇게 기록 할 수 없는 그런 경지. 예를 들어서 혼침도 아니고 도거도 아닌, 망상도 아니고 잠도 아닌, 그러면서 화두는 전혀 들지도 않고, 또 기도도 안 되고 그런 상태. 그것을 흔히 공부할 때 “무기에 떨어졌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無相이 卽是無起며 無起가 卽是無滅이라.
蕩然空寂하야, 텅 비어 공적해가지고서
照用齊收하며, 照와 用을, 照 = 가만히 비추는 것. 用 = 그 비추는 작용. 이럴 때는 照가 體가 되고, 用이 用이 되고요. 선가에서는 “기용” 이라 그래요. 照가 기가 되고, 用은 用이 되고요. 體用ㆍ起用ㆍ照用.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약간 씩 좀 다릅니다.
齊收. 조와 용을 가지런히 다 거두어들이며
鑒覺無礙(감각무애)가, 鑒 = 그냥 비추는 것. 覺 = 知覺하는 것.
鑒은 그냥 비추기만 하는 겁니다. 비추어서 뭔가 아는 것, 지각하는 것을 覺이라고 그러고요.
鑒覺의 無礙가 乃眞是解脫佛性이니라.
참으로 이것이 解脫佛性이다. 해탈한 불성이다.
佛은 卽是覺이며
覺은 卽是觀照며, 관찰하고 비춘다. 이겁니다.
觀照는 卽是智慧며
智慧는 卽是般若波羅蜜多니라
【冶父】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이로다
(說誼 : 法雖一味나 見有千差하니 所以千差가 只在一念이라
一念之差에 隔同天地로다 雖然如是나 天地一統이니
伊麽則金爲千器에 器器皆金이요 栴檀萬片이 片片皆香이로다)
...........................................................................................................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이로다. 역시 신심명에 있는 구절입니다.
신심명ㆍ증도가는 다 외워야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이다. 毫釐라도, 털끝만치라도 차이가 나는 그 순간 바로 하늘과 땅으로 차이가 벌어진다. “현격하다” 그러지요?
說誼
法雖一味나, 법은 한 맛이지만
見有千差하니, 그 견해에 대해서는 천 가지 차이가 있다. 그렇습니다. 뭐 “불교” 하더라도 사람마다 불교에 대한 그 견해가 다 다르지요.
뭐 “부처님” 하더라도 부처님에 대한 견해도 또 천 차 만 차입니다.
所以로 千差가 只在一念이라.
그러므로 천 가지 차별이 다만 한 생각에 있음이라.
一念之差에, 한 생각 차이 남에
隔同天地로다. 하늘과 땅처럼 간격이 생긴다.
雖然如是나, 비록 그런 것이 이와 같으나
天地一統이니, 우리는 “통일” 그러는데 여기는 一統 그러네요.
하늘과 땅이 一統이다. 하나다.
伊麽則, 그렇다면 金爲千器에, 금이 천 가지 그릇으로 만들어짐에, 불상도 되고ㆍ반지도 되고ㆍ목걸이도 되고ㆍ별별 것 다 천 가지 그릇으로 만들어짐에
器器皆金이요, 그릇그릇이 다 金이다.
栴檀萬片이, 전단나무 만 가지 조각들이
片片皆香이로다. 낱낱이 다 향기가 난다.
참 좋은 표현이지요. 그야말로 부처님 법은, 진리는 하나지만 견해에 따라서 각각 다르다.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역시 불법이다ㆍ역시 진리다 이 뜻입니다.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이것 중요합니다.
제11강 4부 (201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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