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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악보와 가사가 함께 실린 최초의 악보 찬송가인 ‘찬양가’ 모습(왼쪽). 한국성경번역위원회 위원이었던 언더우드(앞줄 왼쪽 두 번째) 선교사는 체계적인 찬송가 편찬과 번역 필요성을 절감하고 1888년부터 악보 찬송가 편찬에 착수했다. 한국찬송가공회 제공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받은 호러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조선은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슴 깊이 품고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조선인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찬송가를 통해 복음의 온기를 전파했다.
언더우드의 선교는 매우 신속하고 진취적으로 전개되었다. 교육 분야에서 1886년 자택에 ‘언더우드학당’을 설립해 고아들을 모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후 ‘경신학당’으로 발전,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로 성장하게 된다. 교회 사역에서도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자신의 집에서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개척했다. 점차 교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당을 신축했고 이는 복음 전파의 중요한 거점이자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했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교육과 교회 개척이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면엔 복음 전도라는 궁극적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쳐 끊임없이 매진했다. 언더우드의 헌신적 선교 활동은 당시 조선 사회에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139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데 여러 방면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언더우드의 공헌은 교육과 교회 개척뿐만 아니라 찬송가 출판을 통해서도 한국교회 음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87년 정동교회를 시작한 그는 사경회에서 매일 한 시간씩 성도들에게 찬송을 가르쳤고 이 사역에는 허버트 선교사의 부인과 하이든 선교사(후에 기포드 선교사의 아내가 됨)도 함께했다. 신학반 사경회에 참석한 조사 권서 교사들은 한 달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찬송을 배웠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족자찬송가를 통해 악보 없이 가사만으로 성도들에게 찬송을 가르쳤다.
당시엔 악보 없이 가사로만 된 찬송가가 주를 이뤘기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보다 체계적인 찬송가 편찬과 번역 필요성을 절감하고 1888년부터 악보찬송가 편찬에 착수하게 된다. 이 작업에는 감리교의 존스 선교사와 장로교의 모펫 선교사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 결실로 1894년 악보와 가사가 함께 실린 최초의 악보 찬송가인 ‘찬양가’가 언더우드 선교사의 친형인 사업가 존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출판되기에 이른다.
비록 하나님 호칭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으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공식 찬송가로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117곡이 수록된 ‘찬양가’는 초기 한국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예배 때 당장 찬송가가 필요했던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찬양가’를 백분 활용했고 1898년까지 4판이 제작됐으며, 1908년 ‘찬숑가’(262곡)으로 증보되기 이전까지 10년간 서울과 전라도를 중심으로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애용됐다.
‘찬양가’를 간략하게 분석하면 117곡 중 9곡은 한국인이 만든 곡이다. 117곡 중 88곡만 악보가 수록됐으며 88곡 중 미국 장로교 찬송집인 ‘The New Laudes Domini’에서 53곡이, 복음성가집 ‘Gospel Hymns’에서 25곡이 차용됐다. 따라서 찬송가의 원자료는 19세기 미국의 보수 장로교에서 사용되던 찬송집과 부흥회에서 사용되던 찬송집에서 차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찬양가 117곡 중 많은 곡이 현재 우리가 쓰는 ‘21세기 새찬송가’에 수록됐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바로 ‘예수 사랑하심을’(563장)이다.
언더우드의 초기 번역은 다소 어색한 번역에 운율도 4·4조로 맞추다 보니 조화롭지 못했으나 지난 1편에 소개했던 안애리(Annie Baird) 선교사는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한글 번역의 한계를 극복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찬양가’는 초기 번역 투의 아쉬움에도 한국 찬송가 발전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한국 찬송가는 꾸준히 개편·확장돼 1908년 ‘찬숑가’, 1931년 ‘신뎡찬송가’, 1935년 ‘신편찬숑가’로 이어지는 찬송가 발전의 계보를 형성했다. 이처럼 한국교회 음악 뿌리에는 언더우드를 필두로 한 초기 선교사들의 땀과 열정이 스며 있다.
일제강점기와 격동의 구한말이라는 혹독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찬송가는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단순한 노래 모음집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통로이자 삶의 어려움 가운데 위로와 힘을 주는 영적 샘 같은 존재였다.
김용남 한국찬송가공회 국장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26045341&code=23111314&sid1=mc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