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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6절-18절
일본은 정부는 가끔 주변 국가들을 심심치 않게 자극합니다. 일본에 특별한 날이면 지금도 일본 총리들은 ‘야스꾸니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는 것입니다. ‘야스꾸니 신사’는 어떤 곳입니까? 일본의 전쟁 영웅들의 영혼을 모셔 놓은 곳입니다. 각종 전쟁에서 활약한 전쟁 영웅들을 신으로 모신다는 곳이기에 그곳에 가서 참배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일본으로부터 태평양 전쟁에 침략당하여 피해를 입은 나라에 대해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말 이해 할 수없는 사람들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온갖 것을 신으로 여깁니다. 일본에는 자그마치 약 3만 5천여 종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심각한가 하면, 자기들이 키우는 고양이도 신이라고 믿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오래 전부터 요코하마 시에 있는 한 절에서는 로봇으로 만든 스님이 등장해서 신도들이 부탁하는 기도를 대신 해 준다고 합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은 많고, 스님의 숫자가 모자라다가 보니 이렇게 머리를 쓴 것입니다. 신도들이 기도를 부탁하면 녹음기가 장착된 로봇 스님이 신도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가면서 기도를 해 줍니다.
그러나 이런 웃지 못 할 현상이 비단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가장 볼만한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닌 ‘통곡의 벽’입니다. 그런데 그 통곡의 벽을 보면 벽돌과 벽돌들의 사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새하얗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적어서 그곳에 끼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벽돌사이에 끼워 놓으면 기도가 응답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스라엘의 체신부인 ‘베제크’에서도 통곡의 벽 옆에 팩시밀리를 설치해 놓고, 전 세계에 그 번호를 선전한다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그 기도내용을 팩스로 보내면 수수료를 받고 벽돌 사이에 꽂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유대인들의 기가 막힌 상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씁쓸할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믿음이 바른 믿음이라고 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목적과 요구만 이루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참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무엇이며, 우리가 믿는 믿음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입니까?
그것을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4장 13절과 14절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는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믿음의 수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까지 계속 성숙해 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려면 우리의 믿음은 한 순간이라도 정체되어서는 아니 되며, 정체되는 믿음은 바른 믿음, 성숙한 믿음, 옳은 믿음이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우리의 믿음이 바르게 성숙하고 원숙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작이 바르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동기가 분명하고 올바르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하던 동기가 바르지 못하면 좋은 결과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를 수 있는 바른 믿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의 동기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리도 전서 2장 5절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우리들의 믿음이 우리들의 지혜의 한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없고 짐작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한 착각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능력의 한계를 말씀드려 볼까요?
오래전에 강남에서 여섯 살 난 어린이가 유괴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범인을 잡았지만 이미 아이는 죽은 뒤였습니다. 그래 놓고서도 유괴범은 부모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이 범인은 아이를 옷 넣는 트렁크에 넣어서 자동차에 싣고 다니다가 곳곳에 검문이 심해지자 아이가 들어 있는 채로 트렁크를 한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트렁크를 건져 올려놓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 아이의 부모는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트렁크 안에서 아이는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죽어 있었는데, 얼마나 살려고 몸부림쳤던지 손톱이 빠질 정도로 트렁크를 할퀴었던 모습이었습니다.
금세기에 미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핵무기만 가지고도 이 지구를 몇 번이나 완전하게 잿더미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하다고 자부하는 미국이지만 어찌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밤이 되면 대도시의 흑인 할렘 가를 백인들이 감히 지나가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막강한 경찰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리 강력한 국가, 아무리 강력한 경찰력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내 자식이 살기 위해서 손톱이 빠지면서 발버둥 쳤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강력한 초강대 국가라 하더라도 밤거리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꽃 한 송이를 제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능력은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 능력으로 지킬 수 없는 인생과 가정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능력이 없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위축되지 마십시오.
어렸을 때부터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베드로의 주특기는 고기 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밤이 새도록 빈 그물만 건져 올리게 되므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통감하게 되면, 진실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내 능력의 끝자락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의 출발점입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의 능력을 믿을 때, 그것이 참믿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에서 믿음은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기에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동기입니다.
둘째: 믿음의 동기는 인간 생명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는 무슨 뜻입니까?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셋이 ‘에노스’라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이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송성일 선수라는 레슬링 선수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1994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열렸던 제 12회 아시안 게임에서 레슬링 그레코로만 형 100kg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입니다. 그는 92년부터 세계무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했으며, 각종 세계 대회에서 실력자로 인정받아 96년 미국의 애트란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기대되는 유망주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기 전부터 위에 통증을 심하게 느꼈지만 결코 쉴 수 없어서 계속해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금메달을 따기 위해 더 땀을 흘리며, 악착같이 고통을 참아내며 연습을 했습니다. 그 결과 예상했고, 기대했던 대로 금메달을 따서 온 국민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시상대에 서 있는 송성일 선수는 훤칠한 외모에 당당한 체격이 너무나 호감 가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돌아와서도 위에 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놀랍게도 위암 4기의 판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었습니다. 성한 몸을 가지고도 아시아에서 최고,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꿈꿀 수 없음에도 이미 위암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까지 달했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는 놀라운 투혼에 온 국민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기대했습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놀라운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이므로 당연히 이번에는 암과 싸워서도 승리할 것이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병원에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지 불과 3개월 만에 송성일 선수는 결코 이번의 싸움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신문의 한 지면을 장식하고는, 힘없이 그의 짧은 26세의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신력이 대단하고, 체력이 놀랍다하더라도 불치의 병에 걸리면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에야 인간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이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될 수 있으며, 오늘에라도 죽을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여호와를 찾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간절히 부르고 찾는 사람은 반드시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서 말씀하시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생명의 한계에 대해, 유일하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셋째: 믿음의 동기는 인간의 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바로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정확한 이유와 동기에 해당합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즉 인간 생명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믿음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다 죽음 이후를 나름대로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라면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내 믿음의 대상으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더 확실한 믿음의 동기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 당연히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의 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는다. 다만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한 것’ 때문에 후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완전한 의인일 수 없으며,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르게 알고,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님만이 진정한 구원자(그리스도)입니까?
세상의 어떤 종교 창시자도 죄에 관하여 이야기한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이 남의 죄를 대신해서 값을 치러주고, 죄인 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어준 이는 더더욱 없습니다.
바로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의로우신 참으로 사람이시며, 그리고 죄가 없으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구원자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신 오직 유일한 그분을 의지하여야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 보잘것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영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고,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만을 믿어야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고,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신들은 여러분의 구원의 문제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에게 나아와 머리만 조아리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수께서 왜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우리가 머리로 지은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그분이 손에 못이 박히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그분이 발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우리가 가서는 안 될 곳을 걸어 다닌 우리들의 발이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그분의 옆구리에 창이 찔리고 물과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내셨습니까?
썩어 문드러진 육체로 지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능력과 그분이 주시는 영생의 기쁨과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맑은 가락을 울려내어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