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8
너무 오래 쉬었는지 뭉친 다리 근육들이 아우성을 친다. 다행히 다음 CP Hauteluce 까지 6.5km 구간은 주로 상태가 좋아 뛰기에 편했다. 방금 지나온 비포트에서는 많은 주자들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극도로 지치고 힘든 상태에서 한숨 쉬고 나면 다시 그 끔찍한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적 본능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기방어 기제는 대부분 완주에 대한 강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하거나 탈진하는 등 몸에 이상이 발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할 수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경우라면 신속하게 레이스를 포기하고 다음에 다시 도전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무모한 레이스 강행은 자칫 몸에 큰 부상이나 후유증을 남길 수 있고 레이스 도중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CP9 Le Signal 까지는 구간거리 16.7km, 상승고도 1342m다. 후반부에서 만나는 2개의 장거리 구간중 첫번째로, 밤에 통과하게 될 구간이다. 비포트에서 한숨자고 나니 졸립지는 않았지만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위험한 구간을 지날 때는 헤드랜턴 조도를 한 단계 높여 주위를 밝게 하고 걸으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칫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바로 옆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가끔씩 머리를 내밀어 옆을 쳐다보면 아찔하다.
어쩌다보니 무리와 떨어져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형광등처럼 생긴 조명이 수직으로 빛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인가도 없는 깊은 산 속에 웬 조명이지? 거기에다 조명이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사람들이 말했던 환각? 눈을 씻고 다시 보았지만 분명히 조명이 움직이고 있다. 어이구… 모르겠다, 일단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겠다.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숲길을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눈 앞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야광 물체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반딧불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이 아니다. 두 마리의 야광 생명체가 짝짓기 하듯이 날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에 있는 야광체는 밝은 주황색, 그 꼬리를 물고 있는 듯한 아래 야광체는 형광색. 형태는 날개와 머리, 꼬리가 있었는데 꼬리가 마치 봉황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요정처럼 신비로운 야광 생명체였다. 혹시나 환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 가까이 접근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야광체들은 옆으로 날아가면서 야광 빛이 점점 약해지더니 나중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소들은 목에 큰 방울종을 달았는데 소리가 어찌나 큰 지 십리 밖에서도 종소리가 들렸다. 낮이나 밤이나 그 소리를 들으면서 레이스를 하였는데, 마치 소들이 우리들을 응원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종소리를 들으면 반가웠다.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아, 이제 CP에 거의 다왔구나 하는 생각에 힘이 나서 뛰었는데 가도가도 CP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트레일런 대회 때 으레 듣던, CP를 알리는 종소리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길고 지루한 두번째 밤이 지나가고 드디어 두번째 맞는 아침이 시작되었다. 조금만 더 가면 115km에 있는 CP9 Le Signal에 도착한다.
122km에 위치한 CP10 Les Contamines 까지 7.6km 구간은 평탄한 내리막 길이어서 뛰기에 좋은 구간이지만 무릎 통증으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몸에 힘과 에너지는 남아 있는데 뛰지 못한다는 것이 억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평지나 경사가 적은 내리막에서라도 뛰어 줘야지… 내리막이 긴 구간에서는 많은 주자들이 나를 추월한다. 그리고 평지나 오르막 구간에서는 오히려 내가 추월한다. 이런 시소 게임을 계속 하다보니 늘 같은 친구들을 만난다. 때로는 같이 가기도 하고 때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도 하지만 결국 만나는 친구들이다. 도라야끼 빵을 먹고있던 나에게 일본 빵을 먹고 있다고 그렇게 반가워했던 젊은 일본 친구, 내가 중국인인가 하고 말을 걸던 중국 친구, 운동이라곤 전혀 못할 것 같은 샌님처럼 생긴 프랑스 친구, 친구끼리 몰려다니던 터키 친구들, 점잖은 유럽 친구들… 이름조차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뛰지도 않았지만 이들이 있어서 혼자 뛰는 레이스가 외롭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난코스가 남았다. 141km에 위치한 CP11 Les Houches까지는 구간거리 18.4km, 상승고도 1597m, 하강고도 1717m나 되는 완주를 위한 마지막 관문이 될 것이다. 특히 하강고도가 높아 무릎부상인 내게는 쉽지 않은 구간이 될 것이다. 두번째 낮도 따가운 햇살에 덥긴 했지만 첫번째 낮에 비하면 그래도 견딜만 했다. Col de Tricot로 가는 산길은 경사가 엄청 가파라서 중간중간 가던 길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렵게 오른 길을 다시 어렵게 내려온다. 욕이 나온다. 레이스 마지막까지 이렇게 뺑뺑이 돌리다니 코스를 설계한 사람이 야속하다. 그렇지만 선수는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하는 것 – 이것이 트레일런 대회의 첫번째 원칙인 것을 어찌하랴. 그냥 무념무상, 묵묵히 길을 따라갈 수 밖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하겠지 뭐…
빙하가 녹은 물이 모여서 엄청난 물보라와 굉음을 내면서 계곡 아래로 흘러내린다. 뿌연 쪽빛 색깔이 곱다. 이 물들이 몽블랑 주변 마을들의 젖줄이 되는 것이구나. 샤모니를 가로지르던 강물도 이곳에서 흘러간 물이구나. 조금 있으면 TMB 트레킹 코스의 시작점으로 알려진 레후슈에 도착한다. 그리고 마지막 피니쉬라인을 향하여...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후 2시 30분경 레후슈에 도착하여 음료수와 과일만 챙겨먹고 바로 출발한다. 그리고 속도를 붙여 뛰어갔다. 이제 결승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천천히 걸어도 되겠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비록 과정은 엉망이었지만 마무리만이라도 깔끔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금방 나올 것만 같았던 결승선은 가도가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언덕인데도 힘이 부친다. 모르겠다, 날도 더운데 걸어 가자구…. 걸어가는 주자들이 많이 보인다. 이틀 밤과 이틀 낮 동안 걷고 뛰고 했는데 뭐 이 상황에서 걷는 것도 용한 것이지. 스스로를 위안하며 다왔다는 안도감에 여유를 즐기며 걷고 있는데 앞에서 웬 한국인이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알고보니 내가 묵을 숙소에 공동 투숙하는 한국 친구 ‘제돌’인데, TDS 대회에 출전한 체릉의 남편이고 UTMB 월드시리즈(100마일)에 참가하는 친구이다. 처음 보는 한국 주자를 응원하기 위해 결승선에서 2km 정도 거슬러 올라왔다니 감동 그 자체다. 그리고 같이 출발했던 TDS 동료 주자들의 소식을 물어보니 모두 DNF 했다고 전해준다. 아아~~~
제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금방 샤모니 시내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뛰어야 한다. 시민들의 박수 소리와 응원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레이스를 시작하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들었던 박수와 응원 소리다. “바브바브”, “오레오레” 주로 양쪽에 쭉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 음식점에 앉아 있는 손님들,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환호를 지르며 진심으로 뜨겁게 응원해 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불끈 솟아난다. 나 또한 눈인사로, 파이팅을 외치며, 손바닥을 마주치며 그들의 응원에 화답한다. 어느새 같은 숙소 친구들이 앞, 뒤, 옆에 붙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준다. 마치 내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미 주인공이 되었다. 만세를 부르며 결승선을 통과하니 거기에는 영표와 종두와 체릉이 이미 와 있었다. 그들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만 완주하게 되어 미안해, 그리고 몸도 피곤할 텐데 이렇게 응원까지 나와 주어 정말 고마워 !!!”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악수와 진한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숙소 친구, 리차드와 피터, 영알에서 같이 훈련했던 친구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나와서 완주의 기쁨을 나누고 축하해 주었다.
첫댓글 저도 멋진 풍경을 보며 코스를 함께 달린 느낌이네요 ㅎ 생생한 후기 감사합니다! 힘든 환경에서 완주도 축하드려요~^0^/
마지막엔 함께 눈물이 고이네요. 그 광장에서 저도 박수치고 있는거 같아요.ㅋ
수고 많으셨습니다.
날것 그대로의 후기!!
고맙습니다.
배탈과 설사 문제가 없었다면 어떠했을지?
여운을 남기셨네요.
다음 도전도 궁금합니다.
봉황이었나 봅니다. 길조였네요.
회장님의 무사완주를 알려주러 왔나봐요~^^
장편소설급 생생한후기 너무 잘봤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Live상황, cp 지날때마다 촬영된 동영상을 보며 응원했었는데,,, 어려움 속에서도 잘 극복하며 완주 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회복 잘 하시고, 제주100k도 화이팅입니다.
아~~ 역시, 리스펙 타잔형님.
정독 했습니다.ㅎ
이번 제 생애 트런은 없지만.. ㅡ.ㅡ;;
다음번 후기도 기대할께요~~
뒤늦은 후기 광팬입니다..^^
이제 마지막편까지 다 읽었어요.
좀 아껴 읽느라..ㅋ
감동적인 레이스 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세요.
축하드리고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