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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낯선 이와의 조우
강선(姜銑)의 『연행록(燕行錄)』을 읽고
20133518 유정금(지식경영학부)
후대가 ‘기억’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은 극히 제한적이다. 나이, 성별, 전공 등을 불문하고 조선시대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군지를 묻는다면 아마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가장 많이 꼽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 나도 ‘존경받을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기록‘은 다르다. 역사의 기록은 그대로 남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전해진다. 내가 『연행록』을 접하게 된 순간처럼.
원래는 이번 과제의 주제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는데 이미 누가 빌려간 터라 같은 주제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한중록이 꽂혀 있었을 자리 주변에서 『연행록』을 발견했다. 일종의 여행기록이라 흥미로울 것 같았으나 선뜻 이 책을 하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이유는 저자인 ‘강선’이라는 사람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첨 들어봤다. 어쩌면 수업 시간에 혹은 수업 관련 자료에서 스치듯 접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내 기억 속엔 없는 이름이었다. 나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나도 흥미로운 주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도전해보자하는 마음으로 『연행록』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낯선 이, 강선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강선의 유일한 저서, 『연행록』
강선은 1645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자화(子和)이다. 그의 부친 강백년은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675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으며, 서인이 집권하였을 때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1689년 기사환국 이후 교리에 등용되어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는 데 앞장섰다. 1693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파직 당했다가 1698년 형조 참의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이듬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1705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이듬해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708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도승지를 맡아 숙종의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학문과 문학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강선이지만, 그의 저술은 물론 그의 묘지문자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일성록』 등에도 1710년 도승지에서 물러났다는 기사만 보일 뿐이다. 규장각 등에 전하는 간찰첩에 그의 글씨가 전해지지만 그의 학문과 문학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연행록이 그의 저서임이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연행록에는 책의 저자와 지어진 연대에 관한 기록이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아서 저자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책의 내용을 연구한 끝에 저자가 동지사행의 부사로 동행했던 강선공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연행록』은 강선의 친필본으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저술이다.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다
강선이 북경으로 사행을 떠났던 시기는 숙종 25~26년(1699~1700),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뒤였다. 약소국의 신하로써 사신 일행이 겪었던 수모와 수치, 그리고 이에 대한 강선의 개탄이 연행록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던 것은 푸대접 받는 입장이면서도 청을 여전히 ‘오랑캐’로 인지한다는 것이었다. 연행록의 첫 장, 기묘년 12월 2일 기록에 보면 ‘잘 오셨는지 문후를 여쭈었다. 저 오랑캐도 또한 인사를 차릴 줄 안다고 하겠다.’고 기록했다. 수백 년 동안 중국에 사대하는 문화가 조선 사대부들의 DNA에도 깊숙이 박혔던 것인지, 청을 오랑캐라 하면서도 결국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사대주의 속박을 스스로 끊지 못하는 듯하여 씁쓸하기까지 했다.
오늘날로 치면 외교관에 해당하는 사신이지만 삼전도의 굴욕이 불러온 여파는 사행 길 곳곳에서 사신일행을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사신 일행의 일정마다 청나라 압군(押軍)의 제제가 가해졌다. 계획보다 더 길을 나서야할 때에도 압군에 뇌물을 바쳐야 했고 이르는 곳마다 뇌물을 요구하는 한족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했다. 일례로, 12월 13일, “여정이 부족하여 역참 하나를 더 가려 하였지만 압군이 막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득이 행렬 중에서 역관이나 상인들이 추렴하여 90냥을 맞추어 지급한 다음에야 허락을 받았다. 약소국의 수치를 차마 어찌 말로 하겠는가?”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예부(禮部)로 나아가 자문을 전달할 때는 정사와 부사, 서장관 모두 대청마루 위에 무릎을 꿇고 그 예를 다해야만 했다. 새벽부터 길을 나설 때가 부지기수고, 때로는 도난을 당하기도 하며, 때로는 일행 중 일부가 밖에서 잠을 청하기까지 했으니 그 추운 겨울 날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을지, 머리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보며 강선의 개탄에 나도 동참해 본다. 갖은 고생 끝에는 빛 좀 보나 했더니 강선의 사행 길은 푸대접의 연속이었다. 원래 사행이 주목적이었던 정월 초하룻날의 조참에 참석해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고 나서, 예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상참례 참석을 거절당하고, 강선 일행이 가져간 예단지를 본 대통관 문봉선은 품질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소리를 질러대며 두세 번 퇴짜를 놓았다. 푸대접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바로, 미처 하지 못했던 환영 잔치가 겨우 열렸는데, 하루 만에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더 황당한데, 당시 황제가 사냥을 나갔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푸대접을 받고서도 ‘그래도 원래 목적은 이뤘으니 다행이지 않은가’하며 서로를 위로했을 사신 일행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상참례 참석을 거절당한 사연
강선의 길에 앞서 임양군이 여러 차례 정사로 간 일이 있었는데, 지난번 임양군이 조참에 참석할 때 예법을 잘못하여 예부의 낭중이 파직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청의 조롱을 샀다. 이에 강선은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컬어지다가 도리어 오랑캐에게 예법을 잘못하였다는 질책을 받게 되었음을 통탄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예행연습을 거쳐 무사히 정월 초하룻날 조참에 참석하였으나 삼행이 1월 25에 있을 상참례에 참석할 의사를 표하자 대통관은 이렇게 말했다. “정월 초하룻날 조참을 할 때 모두들 예법을 잘못한 일이 없었지만, 내일 황제가 전좌(殿坐)할 때 나아가 추창(趨蹌)하는 일은 정월 초하루 때보다 두 배나 급합니다. 정사께서 조참에 참석하였다가 혹 예법을 잘못하게 되면 저희들은 장차 파직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참석하시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을 듯합니다.” 이에 정사는 병을 핑계대고 상참례에 나아가지 못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
어디 사신 일행만이 이런 고초와 모욕을 당했겠는가? 강선이 사행 길에 만난 조선 포로 중에는 병자년에 15살의 나이로 잡혀왔다가 79세의 노인도 있었고, 심양으로 귀양 온지 16년이 되어 과거 공부를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병자호란(1636~1637)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 숨어 있는 동안 서울과 그 주변을 비롯한 한강 이북 지역에서는 처참한 살육과 ‘포로 사냥’이 자행되었다. 당시 청 내지로 압송되었던 피로인의 수는 최대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 엄청난 수의 자국 백성이 청의 포로가 되는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그들을 나 몰라라 했다. 서울 환도 직후 호조가 올린 보고에 따르면 ‘여염은 모두 불타고 시체가 즐비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단순히 포로의 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환향녀(還鄕女)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호란의 사회적 여파는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 된다. 청이 조선인 포로에 욕심을 냈던 것은 전쟁을 통해 획득한 포로를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인적 자원’으로 데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얼마나 갖은 고생을 하며 청의 부역 살이를 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포로들을 조선 정부는 청의 눈치만 살피며 외면했다. 15살의 소년에서 79세의 노인이 된, 나라 잃은 저 포로의 잃어버린 세월 64년이 이 책의 한 구절에 내 시선을 묶이게 했다.
『연행록』을 통해 ‘강선’을 만나다
강선의 저서로는 『연행록』이 유일하고, 그와 관련된 연구 논문 또한 1편이 존재한다. 이 책은 강선이 거의 매일 한시를 지어 기록했다는 것이 특징인데, 이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강선의 한시 작품이 약 64가 된다. 일록에 비해 시의 비중이 높을뿐더러 차운시의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연행록』이 17세기 연행의 코드를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구된 바가 없는 이유는 문학사에서 강선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비중이 미미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17세기 개별 연행록연구 자체가 부족한 결과이기도 하다.
『연행록』은 전반부가 일실된 불완전본임에도 불구하고 강선의 유일한 저서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그에 대한 유일한 연구 논문 1편조차도 ‘강선’이라는 인물보다는 ‘한시’ 분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아직까지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 과제로 『연행록』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연행록』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내가 과연 살면서 ‘강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져볼 일이 있었을까? 아마 평생 ‘강선’이라는 이름조차 몰랐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 책 한 권만으로 그 저자를 다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연행록』 자체가 강선 개인의 감정이 드러나게 쓴 문장들도 있긴 하지만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에 가깝기 때문에 내가 강선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단지, 강선이 사행 일정 중에 좋은 경치나 명소들을 보고서 일정 때문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아쉬움에 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것, 그 정도일 뿐이다. 훗날, 강선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가 진짜 어떤 인물이었는지 밝혀진다면, 이 책이 소설책으로 출간 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 널리 읽히고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강선을 알아줄 테니까.
참고문헌
강선,『국역 연행록』, 국립중앙도서관, 2009.
한명기,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재론」, 『역사비평』, 2008.
김묘정, 「강선(姜銑)의 ‘연행록(燕行錄)‘ 연구」, 『한국문학연구』 50, 2016.
첫댓글 만약에 다른 주제를 선택했더라면 연행록을 독후감 주제로 할 생각이었는데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포로와 환향녀 부문에서 관심이 가네요!
잘 정리했음. 원전을 읽으라는 의미를 이해했으리라 사료됨.
좋은 책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역사에는 승자의 역사가 주류를 이루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을 가진들의 역사도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지식인으로써의 괴리감과 힘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인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