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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현재의 ‘나를 사랑하자.’ 마음 먹으며
이른 새벽 시간에도 정류장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긴 줄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날이 추워지는 계절이 오면 어스름한 새벽녘 바람에 약간의 싸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 시절 꼭두새벽 꽉 들어찬 버스에 올라타고 서울로 향하던 때가 부스스 떠올랐다. 안양에서 서울로 향하자면 비교적 많은 시간과 번번이 고통이 수반됨에도 이를 감수하며 버텨내야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버스에 거의 반을 차지하는 많은 학생들이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미래의 나를 위한 부모님의 희생이었으며 나로서도 미래를 담보한 크나큰 투자였던 셈이다. 이렇듯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우리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수많은 시간을 희생하며 미래를 준비한다. 이에는 미래의 우리가 현재의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선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의 우리는 현재의 우리의 노고에 보답을 했을까. 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그정도 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닌가 말을 하지만 지금을 되살릴 수도 없는 열정 가득했던 (조금 더) 젊은 날이었다고 말은 할지언정 던 것 전적으로 동의는 못하겠다.
그렇게 미래를 담보삼아 산 세월이 너무 길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살다 보니 한 달, 반년, 일 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지나버리더니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중늙은이가 되어버렸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그 전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러면 또 그 이전에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앞만 보며 맹목적으로 살아왔던 그 시절의 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치자니 내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 싶고 어리석었다 싶은 게 지금의 내 심정이다.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차 모르고 산 나라하면 좀 억울함 구석은 있지만 이 또한 부인을 못 한다. 그렇게 사회가 부여한 가치를 쫓아 산 사람들이 어디 나뿐인가.
경험해보지 않았던 미래의 그 '무엇'을 위해 현재를 감내하며 사는 인생, . 명확하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단지 외부에서 가치를 부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여기며 자존을 추켜 세운 시간들, 막연한 희망과 기대를 안고 살아가다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그 순간에 마주하게 됐을 때 우리는 예상했던 만족스러움이나 행복감을 제대로 느끼게 될까. 되려 공허함이나 허무함만을 느꼈다는 사람들을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았다. 이루지도 못한 탓에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는 게 태반인 우리의 미래 처지들로서 거의 한평생은 그렇게 푸드득 지고 마는 게 인생이 아닌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비단 시대조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미래의 우리를 위해 고통스러운 현재를 인내하며 스스로에게 타당한 이유를 부여하며 오늘 하루도 덤덤하게 버티며 산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 왔던 환상 속 세계, 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은 대학만 가면 이런 절박한 고통은 끝이 날 것이라고 여겼지만, 좋은 대학을 가봐도 그 안에서 또 다시 경쟁을 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며 또 다른 미래에 기대를 걸어두게 된다. '이후에는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야'라는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돌이킬 수도 없는 처지의 난관에 봉착하지는 않았던가. 현재의 고통스러움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바로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은 아니던가.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는 괜찮아질 거야.’ 수없이 반복하고 전진했지만 분명한 것은 이는 분명한 ‘미래의 배신’ 이었다. 살아보니 그렇더라는 꼰데의 정변인 셈이다. 지금 우리는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시간들 까지 포기해가며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오롯이 앞만 보며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무엇이 남아있을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과거의 행복을 무시한 채 살았더니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매 순간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왔더니 현재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이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미래의 배신’을 직감적으로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들 버스정류장에서 시간을 재며 줄을 서고 있다.
나는 이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이제는 말하지 않으련다. 진짜 행복의 의미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 늙어빠진 지금에 깨닫게 되는 것은 어인 일인가. 아주 거창한 '무엇'인가가 있어야지만 행복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너무나 가까운 곳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열정이랄지 욕망은 부귀 영화를 만들지언정 이는 행복한 삶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흔히 성공한 사람들이라 하지만 행복함을 위한 마음 속 자유로운 질서를 구비하지 못해 이내 쇠락하고 패망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다. 진시황이 대표적 표본이 아닌가. 그 소중함과 크기를 모르기 때문에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만 연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음의 질서가 자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공자는 仁이라 하였고 누구는 道라 하였다.
내가 살아갈 이유. 내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문명은 날로 번창한다. 이에 비례하는 양 사건 사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잔인함도 날로 더해만 간다. n번방 사건은 문명이 주는 혜택을 교묘하게 철저히 망쳐놓은 대표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는 별것도 아닌 게 별것이 된 세상살이에 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점점 왜소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살다 보니 큰 욕망은 어느새 저편으로 사그라지고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나 하고 싶지만 감당이 안 서거나 용기가 부족했던 아니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라 하여 망설였던 것들이 내 마음의 창가에 달 덩어리 되어 환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나의 창에는 작지만 소중한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행복의 소자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 왜소하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소박한 가족의 웃음소리를 촘촘히 재생하여 마음에 기억해두는 것, 과거 역사 속 숨은 인재들은 고독을 어찌 견뎌낸 것이며 난관을 어찌 헤쳐 나간 것인가에 작은 의문을 두는 것, 소국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삶의 가치에 대해 재삼 논해 보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 객쩍없이 달콤하게 떠오르며 기존을 채우던 내 알상에 반란을 도모한다. 이런 모의가 곧 일상 속에서 일탈을 이루는 첩경이 아닐까. 흡사 이름 모를 산을 찾아 그 누군가 남 모르게 올려놓은 돌탑이라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고 그 공적 위에 내 돌 하나를 모르는 척 사뿐히 선사하는 것도 소확행의 한 일원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한 요즘의 수수함이다. 그리하자 한 것도 아닌데 자연 무명이 사는 그쪽으로 발길이 닿는다. 기력이 쇠한 만큼 의욕이 떨어진 이 나이쯤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세상 한복판에 서 있고 싶지는 않다. 무명으로서 그저 오늘이 행복하다면 그뿐이다. 이는 나의 작게 사는 여남은 희망이기도 하고 자연 속으로 서서히 귀의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도 요즘 호탕한 웃음 대신 작은 미소 짓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소확행’이 아닐까.
20. 이른 시각 대덕단지 길은 잠자고 있었다.
* 선택의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시간의 경계를 허물며 생각의 습관화를 벗어난다면.
이사를 8년 만에 했다. 종전과는 다른 환경, 모든 게 다 어색하고 서툴기만 하다. 새집에 친숙할 시간이 얼마쯤 필요한 걸까. 우편물을 찾으러 일주일 간격으로 옛 동네를 찾아야 했다. 1주일 2주일까지는 아직도 그 동네 사람인 양 태연했는데 한 달쯤 지나니까 이제는 점차 옛 동네가 낯설고 마주치는 사람들도 달리 보인다. 인류는 새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우수한 적응력을 발휘하여 지구를 탄복시켰다. 하지만 잘 적응을 한다는 것이지 어쩔 수 없으니 순응할 뿐 거북스러운 것을 또 잘 분별도 하는 게 인간이다.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관계로 자잘한 것부터 해 불편한 점이 제법 많지만 그 중에 아침 출근길이 제일 곤욕스럽다.
이사 오기 전에는 쌩하면 신호등 두 개 지나 10분도 채 안 돼 바로 근무처 정문에 다다랐었다. 이른 아침이면 내가 가는 방향으로는 차도 별로 없고 과속 탐지 CCTV도 없어 그냥 시속 80km의 쾌주의 주행이었다. 지금은 차 행렬이 이른 시각임에도 엄청 나 조금만 지체하면 근무처로 향하는 외줄 서기 좌회전 방향 틀기가 장사진을 이뤄 나를 못 견디게 만든다. 내 뇌세포는 만끽한 편리함을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자극에 반응하는 뇌의 활동이다. 조금 더 풀어보면 어떤 자극에 대해 뇌세포와 뇌세포가 연결되면서 생각이 발생한다. 자극이 중단되면 대체로 해당 뇌세포 연결망이 약화되거나 소멸되고, 동일한 자극을 받으면 그 연결망은 강화된다. 지속해서 동일한 자극을 받게 되면 강화된 연결망으로 인해 우리가 인지할 새도 없이 해당 자극과 연결된 생각이 거의 무의식 수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즉, 생각의 습관화다. 이는 행동의 습관화로 연결된다. 같은 행동이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만나면 자극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에 불편함으로 여겨져 무의식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내가 그간 쌓은 무의식에 젖어 불편함을 크게 인지하고 지루하고 짜증을 내는 것이다. 일상은 아마 편리함의 안착이 크게 작용하여 이런 무의식의 반복이 대부분일 것이다. 버스나 카페에서 같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항상 마시던 음료를 선택하고, 같은 패턴의 여가를 보내는 것. 드응 대개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실 무의식적으로 하기에 별 불편이 없을지는 몰라도 이 얼마나 권태로운 행위인가. 그래서 더욱 스트레스 유발이 빈번한 인지도 모른다.
신탄진 방향으로 가는 좌회전 틀기에서 신호가 세 번 정도 바뀌기를 기다리는 대기시간이라는 게 실제 기껏해야 5분 정도인데 그 지루함은 1시간도 더 된다. 왜 그럴까. 이에는 촌각을 다투는 아침 출근 시간이라는 명제에 과거의 쾌주의 출근을 했던 기억이 크게 한몫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일상의 생활자라면 아침 시간에는 서두른다. 어찌하면 이 지겨움의 의식을 해방시킬 수가 있을까. 제일 좋은 것은 당연히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느긋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해도. 더 일찍 일어나 그 밀집 구역을 쏜살같이 빠져 나가면 가뿐할 것이다. 여유로운 생각과 부지런한 행동. 그렇지만 매일 닥치는 일상에서 이것이 또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내게 묘안이 떠올랐다. 그 시각 그곳이 밀리는 것은 바로 신탄진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탄진은 왜? 그곳은 한국 타이어, 코카콜라 등등 공장들이 많고 그들은 그들이 경유하게 되는 대덕연구단지의 사람들보다 최소 1시간은 일찍 출근한다. 그렇다면 1시간을 늦게 나온다. 이는 또 근무처나 사무실 출근자들로 붐벼 또 마찬가지 형태다.
가만 생각하니 그들과 공유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연구단지의 큰길로 우회하여 간다면 연구단지가 아직은 출근 전이므로 대로는 텅텅 비어 원만할 것이다. 다만 돌아서 고가도로를 타면 그만인데 문제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점이다. 지루함과 시간 절약. 두 갈래 길, 이후로는 나는 당연 돌아서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같은 동네에 사는 임박사가 그렇게 돌아서 출근 하는 나를 보았던 모양이다. “ 막히지 않으니까 별반 시간 차도 없던데” 하며 나같이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는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선 꽤 오래 산 고참으로서 신참의 추천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이후 그를 우회하는 길목에서 자주 보게 되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간 그는 고착화된 행동과 생각의 습관에 젖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일상에 무뎌져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때로는 실기한다.
자유! 나는 학교에서 인류의 역사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배운 것을 잊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자유는 근세 역사의 주제가 된다. 미국 독립 전쟁을 앞두고 영국 식민지 버지니아의 웅변가 패트릭 헨리는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는 한 마디를 남겨 인구에 회자하게 되었다. 이 명언에는 자유란 사람이 자기 목숨과 바꿀 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의미가 담겨 있어 보인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1933-1945)는 1941년 1월 6일,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4대 자유를 설파하였다. 그의 이 4대 자유(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및 공포로부터의 자유) 역시 역사상 불후의 명언이 되었다. 인류의 근세사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앞세우고 구질서(앙샹레짐)로부터 탈출하여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기류가 그 주 특징이 되었다. 이 정신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사상적 모태가 된다.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자유가 먼저인가, 아니면 평등이 먼저인가 하는 도전이 있지만, 자유가 전제(前提) 보장되지 않는 평등 중심의 이른바 민주체제들은 실패하여 왔다. 이것은 역사의 법칙이 되었다.
그런 자유가 있기에 선택이 있다. 현대를 선택의 시대라고 한다. 영화관에 가도 예전처럼 하나의 영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CGV관에 가면 여러 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텔레비전도 50여개의 채널이 있어서 선택하며 본다. 얼마 전 어느 자료에 보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아이스크림 종류만도 37가지나 된다고 한다. 매일의 삶은 선택의 삶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지금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이제까지 나의 선택의 결과이며, 지금 내가 선택하는 길은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인생에는 우리 평생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들이 있다. 나는 어떤 배우자와 결혼할 것인가 또 나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여 한평생을 살 것인가 이것은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들일 것이다.
가는 길에 비록 시간이 더 걸린다 해도 선택이 존재하니 얼마나 행운인가. 살다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따른 길도 개중에는 너무 많다. 그로 생기는 숨 막히는 무기력은 말해 무엇하리. 그런데 선택의 자유를 맞이한 선택의 홍수가 요즘은 오히려 생각의 자유스런 여유를 망각시키고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이를 흔히 매너리즘에 빠진다고들 말을 한다. 일상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사사롭지만 골라 먹는 재미가 있듯 고르는 선별의 특수에서 자각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를 선택한 것은 이래서 그렇다는 의식의 향유는 바로 자신이 고유의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생각의 루트는 자유를 만끽하게 하는 행복의 원동력으로 삶을 윤택하기에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순히 출근길에 5분 정도 지체하는 것으로 지루하다 느끼는 내 정서이지만 10분을 돌아서 가도 전혀 지루하지 않는다면 당연 그 선택은 옳은 것이다. 반복된 일상은 보다 큰 스트레스를 양산하기 쉽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고자 한다. 성장이란 생각과 행동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같은 생각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 성장을 꿈꾸기란 요원하다. 물론 성장 속에 얻는 편리함은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인간이 늘 꿈꾸는 것은 성장에 대한 가능성이고 편리함보다 더 상층에 자리한 성장이란 의식이다.
그 성장의 밑거름으로 나는 여행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가면 오감을 통해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뇌에서 새로운 뇌세포 연결망을 만들어 내고 기존의 틀을 벗어난 새롭고 다양한 생각도 하게 된다. 일상에서 잠시 떠나 여행을 다녀오는 것만큼 좋은 명약도 없을 것이다. 여행은 매일 반복된 일상의 권태로움을 이길 수 있는 청량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여행, 특히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았다던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했다는 말을 종종 한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음식을 먹으면서 자아 성찰을 하게 된다면 이보다 값진 의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
특히 예술가에게 여행을 통해 얻은 색다른 체험은,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그 광경이 내게 얼마나 큰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듯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굳이 멀리 떠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익숙함을 벗어나는 것, 낯섦을 만나는 것은 모두 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고 생각한다. 해보지 않았던 행동을 해 보는 것, 즐겨보지 않던 장르의 영화를 감상하는 것, 새로운 길로 걸어보는 것,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 등의 낯선 경험은 마음속 여행을 떠나게 하고 새로운 영감을 주어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이르는 첩경이 아니겠는가 싶다. 나는 이른 아침 선택의 귀로에서 선택의 자유와 시간의 경계를 허물며 나날이 새로워지며 작은 여행을 동반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을 생각하는 그 이른 시각 대덕연구단지 길은 여전히 잠자고 있었다.
첫댓글 늘상 쳇바퀴처럼 이루어지는 하루의 반복성에 지루해왔지만 요즘엔 자아성찰의 기회가 되는 것 같아 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수요일이면 점심, 저녁 약속에 종종걸음을 걸었지만 뒷산을 찾습니다. 어젠 몸살이 나서 끙끙대고 있는데 14년 전, 동료한테 전화가 왔어요. 못 본지 10년이 되었지만 보고싶다는 희망적인 발언에 조금이나마 힘이 솟았답니다. ~'미래의 배신'~이란 표현에 폭발적인 감탄을 하며........
작가는 역시 다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