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지각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요?
답 : 그것은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초월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지각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우선 지각이 형상을 다루는 것임을 깨닫도록 하세요.
이원적인 것은 정량화할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예를 들어서 지각의 기능을 밝혀보도록 합시다.
예시 1 마음 속에 완전히 하얀(당신이 원다면 완전히 까만) 벽을 그려 보십시요,
그 벽에 가상의 점 하나를 찍으세요, 그 점은 이제 하나의 초점이 될 것입니다.
그 점이 자신이 선택한 벽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그 지점에 크레용이나 분필로 표시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고방식(따라서 이원적인)은 그 점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확히 '저기에'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잠시 숙고해 보면, 사실 어디에도 그런 '점'이 존재하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저기에' 있는 점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런 생각은 순전히 마음속에만 있습니다.
상상 속이 아니라면 어디에도 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정의(定義)는 인간의 마음에 완전히 의존합니다.
그 점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해지기 위해서도 인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 점을 자리 잡게 하는 일에서 다른데로 주의를 돌릴 경우 그 점은 즉각 사라집니다.
이것은 점이 하나의 실체로서 참으로 존재한 것이 없었기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언어로 규정하는 것은 사고 작용 자체와 관련된 것이며,
결국 우리를 외부의 실상이 아닌 사고의 혼란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시 2 하나의 '점'은 초점에 대한 선택적인 주시를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 점이 유효하려면 그것에 필연적으로 따른 작용,
곧 그 초점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부주의(不注意)라는 작용이 필요합니다.
한 점을 '본다'라는 것은 '그 점이 안닌' 모든 것,
즉 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자각을 말끔히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예시 3 그 벽에서 두 번째 점이 될 또 하나의 점을 마음속에 그려보세요
두 점은 사실상 상상 속에만 , 즉 관찰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세요.
그리고 두 점 사이에 그러진 선하나를 상상해 보세요. 이제 우리는 그것을 '거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점이 완전히 가공의 것이고 오로지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므로
점들 사이의 가상적인 거리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을 알 수 있습니다.
예시 4 이제 우리는 그 벽 앞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세 번째 점이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세 점을 이을 경우에는 하나의 '평면'이 창조됩니다.
세 점과 마찬가지로 그 평면 역시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저 밖에는 ' 평면이 없습니다.
그리고 점들을 이은 선들은 어떤 고유한 방향성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세요.
예시 5 그 가상의 삼각형과 마주보는 곳에 네 번째의 가상적인 점을 보탤 경우 가상의 '삼차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점들 사이의 간격이 '공간'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시 6 이 시점에서 우리는 가상의 점들이 가상의 위치, 방향, 평면, 공간과 차원을 낳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그 다음에 그려 낼 만한 것은 기간, 혹은 한 점에서 다른 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상상 속의 점들 사이의 상상 속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시 7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수히 많은 빛의 점들이 보입니다.
그 수많은 빛들을 마음대로 골라 연결시켜서 가상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우리 자신의 별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크레용을 쥔 아이처럼 고양이, 개, 쥐 등의 별자리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든 망음대로 그릴 수 있지만
우리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갈 경우 오리온 자리를 비롯한 모든 별자리가
자체의 존재성을 잦지 못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앞의 예시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이 어떻게해서
참으로 '하나'인 것 속에서 '여럿'을 지각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초월할 경우에는 여럿과 하나가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지어낸 '하나'니 '여럿'이니 하는, 서로 상반되는 이원적인 용어가 없다면
어떤 것도 존재한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에 거기에는 오로지 '전부 있다(All is)'라는 깨달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전부 있다(All is)'라는 문장에는 주어도 술어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실상은 하나도 아니고 여렷도 아니며
서술과 차원, 시간, 장소, 시작이나 끝을 넘어선 그 자체일 따름입니다.
실상을 서술하고자 할 때는 '지금(now)'이라는 단어조차도 미묘한 오류에 속합니다.
지금이라는 용어는 '지금 아님(not now)'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니까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제를 포괄하므로 '있다((is)'인 실상에서는 '없다(not)'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든 오류는 '있지 않다(is not)'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어떤 실체성도 없고,
설명하거나 대답해줄 필요도 없는 것들입니다.
참으로 ;있다(is)'인 것 속에는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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