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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내 빚깔 내 모습 들여다보기'라는 제목의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왔다. 전남 무안군 청계남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매달 자신이 달성할 학습목표와 계획을 스스로 짠다. 자신의 수준에 맞게 학습목표를 정할 수 있는 일종의 '무학년제'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와야 하는 다른 학교와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자신의 계획에 대한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고 친구들과 선생님, 부모들의 의견을 듣는다.
아이들이 세운 학습계획에 대해 교사는 1~2학년은 점프(황금색 하트), 기본(은색), 보충(파란색, 녹색, 붉은색) 등 5단계로, 3~6학년은 점프(황금색), 기본(은색), 보충(붉은색) 등 3단계로 평가해 다음 달 스스로 학습계획을 세우는 데 참고하도록 도와준다.
수학은 잘하고 국어는 힘들고 받아쓰기는 재미있을 때도 있고 안 재미있을 때도 있다. 방과후는 중국어가 재미있다. 수영은 재미있고 학교는 재미있지만 힘들다. 발표는 재미있고 책 중에서 '아버지의 꿈'이 제일 좋다.(내가 보는 내 모습)
○○랑은 5살 때부터 친구였다. ○○는 발표를 잘하지만 잘 때린다. 안 때리면 더 좋은 친구가 되어 줄게.(친구들이 보는 내 모습)
○○는 남자답고 아직 어리지만 카리스마가 있어요. 수업시간에 발표도 잘하고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하려고 해요. 리더십이 강해서 친구들을 잘 이끌어요. 하지만 친구들에게 양보를 잘 하지 않아서 선생님이 걱정이에요. 친구들과 다툼 때문에 '손 올리지 않기'라는 약속을 했는데 지키려고 하는 모습들이 보여 고마워요.(선생님이 보는 내 모습)
- 청계남초등학교 한 아이의 '내 빚깔 내 모습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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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뽑은 교장선생님
귀촌을 결정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아이들의 교육문제였다. 사실 젊은 농민들이 농촌마을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빈곤문제가 아니라 아이들 교육문제다. 시골마을에 빈집은 늘어가고 아이들 노는 소리는 사라진다.
어디 공교육과 대안교육이 공존하는 학교는 없을까 늘 고민하다가, '그런 학교를 만들면 되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육철학이 맞는 교사나 교장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학부모나 교사가 새로운 교육을 꿈꿔도 학교장의 결심이 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그만큼 학교에서 교장의 지위는 전제적이다. 특히 초등학교인 경우는 더욱 심하다.
학교에 새 교감 선생님이 부임해 왔다. 나는 5년째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러 간다. 교감 선생님과 차 한잔 나누면서 대안학교에 대한 불안과 공교육에 대한 불만족에 대해 말씀드렸다.
"자기 빚깔을 스스로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 아닌가 싶네요."
장학사 출신 교장·교감 선생님은 관료적이고 보수적일 것이라 생각한 나를 부끄럽게 만든 한마디였다. 근 1년을 지켜보며 선생님의 말씀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동네 형님들과 뜻을 모아 교감 선생님을 교장 선생님으로 모시는 방법을 의논했다. '교장공모제'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학부모들은 교감 선생님의 교육철학과 학교운영 계획을 미리 받아보고 학교에 모여 2시간에 걸쳐 검증했다. 그렇게 교감 선생님은 새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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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빚깔의 꿈을 키워가는 행복한 아이들의 학교"
청계남초등학교에는 교사들의 잡무가 없다. 교장 선생님은 교사들이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류작업을 전담할 직원을 새로 채용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의 잡무에 대해서는 교장 교감 선생님이 직접 일손을 거든다. 잡무로부터 자유로운 대신 교사들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연구활동을 충실히 해야 한다.
수시로 공개수업을 실시하는데, 동료교사들이 다른 교사의 수업을 벤치마킹하고 학부모들이 원하는 교육에 대한 건의도 듣는다. 교사들끼리 교수법에 대한 스터디도 한다. 공교육, 대안학교를 망라해 유럽이나 일본, 국내 우수사례를 꼼꼼히 살펴보고 직접 견학을 가기도 한다. '수업예술, 수업비평'이라는 수업연구 인터넷 카페를 교사들이 직접 운영한다. 학교홈페이지만 봐도 색다른 학교운영 방식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수업시간은 교사가 자유롭게 편성한다. 10분짜리 수업도 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업은 1시간을 훌쩍 넘기도 한다. 토요일엔 한나절 동안 아이들이 희망하는 '자기계발' 수업이 진행된다. 학급의 필요물품을 일괄구매하지 않고 교사에게 학급운영비를 100만 원씩 지원한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 살림이 빠듯해 더 올려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미안해한다.
학교 예결산 편성과정에 교사의 의견을 수용하고 학급담임의 교육과정 운영을 중심으로 집행한다. 학부모들은 학교장에게 교사들의 노력에 대한 인센티브를 요구한다.
방과후학교는 선택의 폭이 매우 넓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연극, 사물놀이, 판화, 글쓰기, 벨리댄스, 영어, 중국어, 바이올린, 한자 중 아이들이 선택한 강좌를 들을 수 있다. 한 아이 당 5~6개의 강좌를 수강한다. 따로 학원을 가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사교육이 따로 필요 없다. 우리 아이들도 면소재지에 있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수요일에는 전교생이 수영을 배우러 간다. 겨울에는 스키를 배운다. 소풍은 없앴다. 대신 직업체험을 한다.
아이들은 학교 담벼락에 '나의 20년 후'라는 주제로 30m짜리 벽화도 그렸다. 스탠드에는 지역의 대표 향토자원인 '분청사기'를 주제로 타일벽화도 만들었다. 아이들이 운동장 한편에 만든 움집 4채는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다. 마을지도 만들기도 한다. 교무실과 교실, 행정실의 명패는 아이들이 직접 조각하고 색칠해서 붙였다. 부모들의 교육철학도 학교 게시판에 게시되고 졸업생들이 남긴 작품들도 복도에 넘친다.
주말에는 학부모와 함께하는 동아리를 운영하는데, '아이들과 숲길 걷기'가 운영되고 있다. 5월부터 아이들의 신청을 받아, 노는 토요일에 '마을의 역사 쓰기'와 '마을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를 시작한다. 강사는 학부모다. 지난해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생애사 써드리기'를 했는데 마을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서 이번에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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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애국조회 시간에는 교직원과 전교생이 원을 이루고 한자리에 모여 '자기 빚깔 자치마당'을 여는데, 학교운영에 대한 의견을 듣거나 주제를 잡아 토론을 벌인다. 가끔은 교장 선생님을 곤혹스럽게 하는 제안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학교운영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학기 초에 아이들이 급식시간에 먹는 우유를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건의가 받아들여져 학부모와 아이들에 대한 설문조사가 이뤄졌고, 학기 초 S우유를 마시던 아이들은 지금 M우유를 마신다. 딸아이는 이번 주에 '급식시간에 자리 찜하기'의 문제점을 지적할 예정이다. 학교에는 급식실 바닥에 물기 제거가 안 돼 미끄러질 수 있다는 건의를 하겠다고 한다.
도서 구매는 한 달에 한 번 전교생이 책방 나들이를 가서 자신이 읽을 책을 직접 고르는 방식으로 한다. 아이들이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야채는 급식시간 식단에 오르고 매주 토요일에는 아이들이 직접 요리를 한다. 식단에 인스턴트식품은 없다. 모두 지역에서 나는 친환경 농산물이다.
또한 교직원과 아이들은 매일 중간놀이 시간에 뒷산을 등산하며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나무와 들꽃들의 이름을 공부한다. 1년에 한 번 전교생이 캠프를 떠나 조를 나눠 직접 밥을 지어먹고 선생님들이 준 아주 특별한 과제를 수행하기도 한다.
학교 게시판에는 '자기 빚깔의 꿈을 키워가는 행복한 아이들의 학교'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이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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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학교에서 열리는 작은 마을축제
매년 겨울이 되면 지역주민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작은 축제가 학교에서 열린다. 아이들이 1년 동안 배운 재주들을 마음껏 뽐낸다. 또 지역에 축제가 열리면 아이들은 멋진 공연을 선보이는 단골 초대손님이다. 작년에는 세 차례나 초청공연을 했다. 목포에서 열린 학생국악대전에서 대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앞으로 학교는 학부모들이 자기계발이나 취미생활을 위해 '동아리'를 조직할 경우 주말에 학교를 개방할 예정이다.
"완전 귀족학교네. 학부모 등골이 휘겠는걸."
학교운영에 대해 외지의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나는 큰아이 3년, 작은아이 1년을 이 학교에 보내면서 단 한 번도 학교에 돈을 낸 적이 없다. 급식부터 시작해 체육복, 직업체험, 수학여행, 수영, 스키까지 전액 학교가 부담한다. 오히려 교장 선생님이 내게 선물한 책도 벌써 3권이나 읽었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잊지 않는다. 컴퓨터와 인터넷 설비를 학교가 해주었다. 아이들에게 다문화가정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고 부러움의 대상이다. 방학 때 필리핀을 다녀온 한 다문화가정 아이의 주변에는 무용담을 듣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학부모는 스승의 날을 비롯해 명절 때에도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할 수 없다. 처음에는 몇몇 학부모들이 작은 선물을 보내곤 했는데 아이들 손을 통해 되돌아오고 '마음만 받겠습니다'라고 쓴 손편지에 무색해졌다.
치맛바람을 꿈꾸는 학부모들은 왕따가 된다. 오히려 학부모가 학교에서 선물을 받는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학교에서는 음식을 마련해 학부모들을 대접한다. 교장 선생님은 학부모들이 아이 교육을 위해 꼭 읽어야할 책을 사서 매년 두 차례씩 나누어준다.
직장생활을 하는 학부모들을 위해 학교는 오후 7시 30분까지 돌봄학교도 운영한다. 물론 방학 때도 마찬가지다. 학부모가 돌봄교사다. 급식실이나 교무실에서 학부모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다른 학교들처럼 봉사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건비가 지급된다. 지역주민 다섯 사람이 새로 일자리를 얻었다.
교장 선생님과 학부모들은 한 달에 한 번 학교에 모여 '사랑방모임'을 갖는다. 그달의 교과과정이나 학교운영 계획을 발표하고 일본이나 핀란드 등의 교육방식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학교 예산은 모두 공개된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교 예산 편성이나 집행을 직접 챙긴다. 학교의 각종 계약사항이나 학교장의 업무추진비 집행 내용은 모두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누구든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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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로 전학 보내지 마세요"
소문이 나면서 학교에 전학을 희망하는 문의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은 '마을에 주소지를 두고 살 것'을 강조한다. 철저하게 지역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학교다. 도시에 살면서 학교만 보내려는 일부 학부모들의 바람은 '소망'으로 끝난다.
그래서 청계남초등학교의 전교생은 28명이다. 유치원과 장애인 특수반을 포함해도 50명을 넘지 않는다. '한 반에 10명 이상의 학생을 받고 싶지 않다'는 교장 선생님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최근 몇몇 도시민들이 이주해오면서 학생 수가 늘어 5~6학년을 빼고 복식수업도 해소되었다.
유치원 아이들은 교사가 직접 하교를 시켜주다가 지난해부터는 학부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인택시와 계약을 맺어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
"저는 아이들이 평가를 받기 위한 성과물 만들기에 동원돼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자기 빚깔의 꿈을 가꾸며 행복하게 살아갈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결과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아이들이 과정에서 행복하면 그것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체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노는 방법'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오승호 교장 선생님의 학부모 특강 중에서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데, 학교 운동장에서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교감 선생님이 축구를 하고 계셨다. 3학년 여자 아이들은 총각 선생님의 팔에 매달리기도 하고 선생님을 놀리고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아서 좋다.
의미 있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최근 몇 년 간 40명 가까이 줄었던 학생 수는 최근 증가세로 돌아섰다. 학교가 살아나고 전원마을이 만들어지면서 작년에는 23가구가 새로 지어졌다. 지금도 새 집이 지어지고 있다.
사실 이런 수치도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골학교의 존폐를 경제적 논리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시골학교가 사라지면 농촌도 사라진다. 농촌 살리기의 출발은 학교 살리기다. 단 한 명의 아이가 있더라도 학교는 존재해야 한다.
나는 공교육의 희망을 '작은 학교'에서 발견한다. 부디 이런 변화의 움직임들이 다른 학교로도 전파돼 '행복한 아이들의 학교'가 널리 널리 전염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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