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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저는 충북지방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신체검사 결과는 3급 판정이었고 동시에 재 신체검사 판정이 내려 졌는데 그 이유는 ‘과체중’ 때문이었습니다. 2주 뒤 재신체검사를 받았고 4급 ‘보충역’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4급 판정은 제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방영되면 다시 찾아서 볼 정도로 현역입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군대에 간 친구들이나 이미 전역을 한 친지들이 들려주는 군대 이야기도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천안함 피격사건이나 연평도 포격도발을 보면서 북한의 도발이 이루어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남자라면 필수인 병역의 의무를 현역병으로서 다하고 싶었습니다. 억울하였습니다.
그때 부모님께서 체중을 감량하여 재 신체검사를 다시 받아 현역판정을 받으면 현역으로 갈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하면서 체중감량을 시작하였습니다. 세 달 여의 운동을 한 후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대전병무청에서 재 신체검사를 받았 습니다. 접수를 한 후 체중계에 올라가 체중을 재는데 행여 현역판정을 받지 못할까봐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뛰었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뒤로 한 채 최종 판정을 받는 곳에 가서 기다리던 중 공무원분께서 고민을 하시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꼭 현역으로 가고 싶었기에 공무원 분께 현역을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고민을 하던 공무원 분께서는 결국 3급 현역 판정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후 지원방법에 대해 알아보던 중 육군 기술행정병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기술행정병 지원을 통해 병과도 선택 할수 있었습니다. 155mm 사격지휘, 의무 보급, 편성보급 등 여러 병과가 있었지만 저의 마음을 이끈 병과는 탄약 관리였습니다. 유지관리하는 탄약관리병이 현역병으로서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탄약관리병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기초체력의 중요성을 알게 됐습니다.
초기에는 별로 안 되는 가까운 거리를 걸을 때나 산을 오르고 뜀걸음을 할 때는 정말 힘들어 했습니다. 육군훈련소에서 아침점호를 마친 후 처음 뜀걸음을 뛸 때는 체력적으로 무척 힘들어 하고 대열에서 뒤처지기 까지 하며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대열에서 뒤떨어지더라도 걷지 않고 느리게라도 뛰어 보자 라는 생각으로 꾹 참고 뛰었습니다. 하루 하루 힘들어도 꾹 참고 뛰다보니 어느 순간 대열에서도 뒤처지지 않고 전우들과 같이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대에 와서도 아침점호 후 뜀걸음 시간과 오후 체력단련 시간을 통해 구보를 하다 보니 입대전보다 체력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두 번째로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입니다. 훈련소에 입소하여서 K2사격, 화생방훈련, 장애물-지형지물 각개 전투, 종합 각개전투 등 각종 힘든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적군의 생화학 공격에 대비하여 진행하는 화생방훈련은 정말 고통스러웠습 니다. 소대장님의 지시에 따라 방독면을 쓰고 화생방 안으로 입장한 뒤 방독면을 벗는 순간 눈이 따갑고 숨이 탁 막히고 눈물과 콧물이 나왔 는데 정말 괴로웠습니다.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고통 때문에 화생방을 뛰쳐 나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답게, 한번 참아보자 라는 생각으로 화생방 훈련에 임하니 처음 들어갔을 때 보다는 고통이 덜하여 참을 수 있었습니다. 또 15km, 30km 주간 행군 또한 무척 버거웠습니다. 15~20kg 가량의 완전군장을 메고 장거리를 오랜 시간 걸으니 발바닥이 아프고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어깨와 발바닥, 허리가 너무나 아팠지만‘한번 해보자!’, ‘다른 전우들도 한다. 나라고 못할 것 없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꾹 참으니 성공적으로 행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각종 고된 훈련을 받으 면서 인내 즉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참아낼 수 있는 정신력을 배우게 된 좋은 계기였습니다.
입소대대 연병장에서 부모님과 헤어질 때의 그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였습니다. 저를 연병장으로 보내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프고 그동안 부모님께 효도를 하지 못한 것 같아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입대 전 까지는 부모님이 저에게 주시는 사랑이 당연 하다 라는 듯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입소를 하여 부모님의 얼굴도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고 싶을 때 듣지 못하니 부모님이 너무나 보고 싶었으며 살아오면서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그 쉬운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제가 너무나 한심하면서 큰 후회를 하였습니다. 훈련을 받던 중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다행히 훈련소의 배려로 청원휴가를 나올 수 있어 청원휴가 기간 동안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 할 수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훈련병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께 편지로 밖에 사랑한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을 하니 너무나 부모님이 보고 싶고 직접 얼굴을 보면서 사랑 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문득 행군을 하면서 엄청 힘들었을 때 부모님 생각을 하였는데 그동안 부모님께 살갑게 대하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훈련기간이 끝나고 수료식 때 부모님을 뵈었는데 정말 너무나 반가워 부모님의 얼굴을 보자마자‘충성 사랑 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순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너무나 기분이 좋고 앞으로도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냥 미래나 꿈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허탕하게 놀면서만 보냈습니다. 저도 꿈과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꿈과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그동안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왔던 제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선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전역 후에 학교에 복학 후 학교 생활이라던가 미래에 자신이 갖고 싶은 직업, 미래에 삼고 싶은 직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부대에서 실시하였던 집중정신교육 기간에‘나의 인생 그래프 만들기’ 시간을 통해 선임들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 더욱 심층적으로 제 자신의 미래에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확고한 국가관 및 안보관이 성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입대 전에는 북한에 관해 그냥 불쌍한 나라 내지는 도와주어야 하는 나라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입대 후 각종 훈련과 교육을 통해 그동안 북한이 저지른 도발이나 만행에 대해 배우면서 북한이 그저 불쌍한 나라 라는 것 보다 경계해야 하는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 니다. 김신조 사건이나 KAL기 폭파사건,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연평 해전, 연평도 포격도발, 천안함 피격 사건등 여러 도발 사건에 대해 배우면서 북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확실한 국가관을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당시 저를 비롯한 모든 국민들의 관심이 월드컵에 팔려 있을 때 서해에서는 북한의 긴급 도발로 제 2연평해전이 일어났습니다. 정신교육시간에 제 2 연평해전에 대해 배우 면서 그때 당시 국가안보나 방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군입대를 하여 지금은 김정은과 북한군의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복무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습니다. 걱정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 드렸습 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기 전에 저처럼 현역과 보충역(공익근무) 사이 에서 고민하는 분들께 몇 가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6개월 남짓의 짧은 군 생활 동안 체력, 정신력, 가족에 대한 사랑, 확실한 국가관 및 안보관 등 다양한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 저의 미래에 대해서도 진지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현역병으로 군대에 오셔도 결코 후회하시지 않으실 거란 것입니다. 물론 사회에서 자유롭게 규칙 없이 살다가 규칙이 존재하는 군대라는 곳에 들어와서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군대에 입대 하여서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한번 자신의 삶을 규칙적으로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북한의 위협이 계속 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와 가족, 친구들을 지킨다는 사명으로 입대를 하여 군복무를 하면 값지고 후회 없는 21개월을 보낼 수 가 있습니다. 현역병과 보충역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현역 입대라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충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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