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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다른 이해, 나은 해석
-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해야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수필은 주제 중심의 문학이다. 모든 장르가 다 주제를 지니고 있지만, 주제를 핵심요인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의 경우는 다르다. 수필은 ‘주제’가 중심이다. 주제를 단일화해서 간접적으로 잘 전달하는가가 창작의 핵심이 된다. 수필의 두 가지 기본 요소는 주제와 제재다. 이 지점에서 수필은 양자물리학의 이중성과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양자물리학 코펜하겐 해석 중 ‘관찰자 효과’는 세상의 모든 물질은 파동 상태로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자신을 진정으로 보고자 측정기구로 주시할 때 자신의 모습을 입자 형태로 드러낸다고 한다. 그 입자 형태가 수필시학에서 ‘제재’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본격수필은 제재를 통해서 주제를 겨냥했을 때,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거둘 수 있다. 글을 읽고 되새김질을 하게 되는 문제를 우리는 ‘주제’라고 한다. 수필에서 주제는 제재를 통해 우러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이야기가 이야기로 드러나면 수필이 아니라 수기가 되듯이 우리가 보고자 하는 대상은 입자를 통해 드러나야 수필이 되는 것이다. 주제는 유령처럼 책에서 탈출하여 독자의 마음이나 머릿속에 계속 살아간다. 수필은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이다. 제재에 주제가 담기고, 주제는 제재에 의해 견인된다.
Ⅱ.
주제는 하나의 선율이다. 주제는 작품이 남겨주는 ‘의미’ 형태 그리고 작품 속 세계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질서’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메시지는 수필의 제목과 분위기를 타고 문맥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수필을 연구하다 보면, 수필시학이 양자물리학의 해석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비유나 대조는 인식의 어머니로서 한 개념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은 논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 장르의 정체성을 알아나가는 것은 그 장르의 정체성과 상위개념 그리고 유종개념 사이에 부정합이 일어나지 않았나를 파헤쳐 봐야 한다. 만약 수필가의 글에서 논리적 모순이 드러나거나 해결하지 못한 물음표가 남아있으면 당연히 평론가로서의 사명인 지도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봄호 계간평에서는 강인철, 옥형길, 장은재 세 분의 수필을 조명해보려고 한다.
강인철의 <숲 사랑 인간인중>이란 작품에 먼저 주목해본다. 이 수필은 아래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날이 갈수록 상상의 한계치를 넘고 있는 폭염, 폭풍, 폭우, 화산, 지진, 해일, 가뭄, 토네이도 등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하늘(天)과 땅(地)에 더 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어선 아니 된다’는 차원에서 쓰여진 생태수필로, 작가는 주제의식을 ‘숲 사랑과 인간존중’에 놓고 있다. 모든 국가가 파리기후협정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아서 생길 대재앙을 예고하면서 작가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심각한 위험을 경고하는 등 메시지의 구체화를 통해 주제의식에 다가가고 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저버린 어리석은 인간의 업보가 이런 현실을 몰고 왔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지구를 달구고 있는 탄소보다 더 심각한 인간의 탐욕이다. 가공할 만한 생태계의 급격한 파괴에 대한 작가의 두려움은 충분한 공감을 자아낸다.
날이 갈수록 상상의 한계치를 넘고 있는 폭염, 폭풍, 폭우, 화산, 지진, 해일, 가뭄, 토네이도 등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하늘(天)과 땅(地)에 더 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어선 아니 될 일이다. 진정으로 차세대의 행복을 바라고 80억 인류의 온전한 삶을 위한다면 새로운 각오로 100년 앞을 내다보며 “한 그루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어 지구(Earth)생명체를 진정시켜야 한다. “숲 사랑 인간존중”의 가치를 되새겨야 할 이유가 그래서 더욱 절실하고 엄중한 오늘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노랫말이 자꾸만 가슴을 저민다.
우리는 지구를 사랑해, 우리들 집이니까 …
(We love the Earth it is our home)
- 강인철 <숲 사랑 인간존중> 중에서
작가는 우리 지구인 모두가 생태적 상상력으로 무장하여 거시적 안목으로 ‘한 그루 나무’를 심고 수필을 가꾸어나가면 지구생명체를 보전할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 절실한 가치를 뒷받침하는 노랫말로 마무리한 결말부 주제의 상상화 전략도 좋았다, 강인철은 “우리는 지구를 사랑해, 우리들 집이니까. (We love the Earth it is our home)”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고 상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문제는 수필의 주제의식을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필은 문학이고 예술이다. 문학적 방식인 간접화를 통해서 주제를 비유나 형상화로 드러내어야 한다. 어쨌든 수필에서는 주제 자체를 제목으로 설정하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숲 사랑 인간존중’ 대신에 다른 제목을 달았다면, 더 좋은 수필이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계간평의 제목에 놓여 있지만 수필은 제재를 통해서 주제를 겨냥하는 데서 문학성이 싹튼다. 주제를 우회적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수필창작에서 필수다. 주제의식의 내면화, 즉 간접화가 수기와 수필을, 작문과 수필을 구분짓는 척도라는 걸 알았으면 한다.
옥형길은 시린 마음으로 한없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인정스런 작가다. 고독한 세월의 그늘에서 작가의 아버지는 농삿일을 하면서 썼던 숫돌을 남겨둔 채 먼 곳으로 떠났다. 옥형길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존재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가시지 않을 향기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에게는 강하다. 그러기에 그는 잡초 베는 일이 예초기의 몫으로 전락해버린 데 대해 아쉬움이 크다. 이 글은 과거의 회고적 그리움으로 생성된 한국적 수필이다. 작가야말로 허리가 잘룩한 숫돌의 습기를 통해 부모님의 지친 삶을 만나는 작가다. 좋은 수필은 남다른 이해와 더 나은 해석으로부터 나온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옥형길은 수필이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제재를 통해서 주제를 겨냥함으로써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해 낸다는 점이 남다르다.
자식들은 모두 부모의 속을 숫돌처럼 닳아먹고 파먹으며 저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날을 세웠다. 그리고는 제 갈 길을 찾아 부모님 곁을 떠났다. 여덟 남매를 등에 졌던 부모님의 삶의 무게가 어떠하였을까. 아마도 내가 처음 짊어졌던 숫돌의 무게보다도 더 무거웠을 것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내어 주고 무너져 가는 고향집을 지키셨던 부모님의 외로움 또한 어떠하였을까. 부모님의 지친 삶이 돌담 위에 올려 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잘록한 저 숫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러나 새 숫돌인들, 날이 선 낫인들 이제 무슨 소용이랴. 벼를 베는 일, 탈곡하는 일 모두를 트랙터가 한꺼번에 해 치우지 않는가. 전답 언저리의 잡초를 베는 일은 예초기의 몫이다. 이렇게 세월 따라 인류의 문명 또한 끊임없이 발전되어가는 것이니 그저 순응하며 살 일이다.
-옥형길 <숫돌이 있는 고향집 풍경> 중에서
‘자식들은 모두 부모의 속을 숫돌처럼 닳아먹고 파먹으며 저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날을 세웠다.’라는 벼랑 같이 느껴질 정도의 안타까움이 녹아든 문장으로 시작하는 인용 예문만 읽더라도 그가 한 편의 좋은 글을 쓰기 위 해 얼마나 감각의 촉수를 갈고 닦았을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부모님의 지친 삶이 돌담 위에 올려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잘록한 저 숫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진다.’라는 표현은 그의 수필가적 문재를 보여주는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그 향기는 이런 사부곡에서 나오지 않는가.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옥형길에 있어서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내었을 뿐만 아니라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해낸 결과라 하겠다.
장은재 수필 속에는 식물성적인 노거수 노래의 향연이 다채롭다. ‘나는 식물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이랄까 에너지 파동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거수는 이제 나의 반려목이 되었다.’라는 진술은 작가와 식물 사이에 영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작가가 노거수를 스승으로까지 숭배하는 걸 보면, 반려목 노거수에 대한 믿음이 절정에 달한 것 같아 보인다. 우리 사회가 물질문명에 의해 산업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반려’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다. 산림문학회의 일원으로서 생태환경을 가까이하는 생활 공간이 자연스럽게 작가를 생태친화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나무들은 어쩌면 인간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기에 작가는 노거수에다 반려목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서 문학적 성취를 잘 견인해 내고 있다고 하겠다.
나즐로 명품 노거수를 탐방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즐기고 있다. 노거수를 우리 모두 반려목으로 키워보면 어떨까. 반려동물처럼 경제적으로 부담도 없고, 여행을 간다고 어디다 맡길 필요도 없다. 반려목 노거수는 자연이 연출하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작품을 늘 품고 있어 무상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쉽고 가치 있는 일은 없을 듯하다. 인간과 나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산림문화라 한다면, 시나 수필, 소설로 삶의 질을 높여 주는 표현 활동을 산림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즐로 노거수 생태와 문화를 탐방하면서 거대함, 숭고함,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장은재 <반려목 소나무 노거수> 중에서
이 수필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설득적인 논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은재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반려목에 대한 진한 애정의 표백에 있다.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진술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자기 논리를 설득적으로 전개시키려는 노력이 이 수필의 공감성을 담보해 주고 있다. 반려견과 반려목을 비교해가면서 반려목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등의 노력도 좋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반인들은 반려견, 반려묘는 들어보았어도 반려목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니체가 말했듯이 피로 쓴 글들을 읽는 것이다. 한 수필가의 반려목 사랑과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반려목의 장점을 드러내고 그 가치를 온전히 전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목을 ‘반려목’이나 ‘노거수’로 했으면 더 깔끔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Ⅲ.
한 작가의 가치관은 그 사람이 겪은 경험들의 총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사회체에서 누구를 어떻게 마주쳤냐에 따라 우리는 수만 가지의 가치관을 각자 나름대로 정립하고 살아간다. 때문에 상반되는 가치관이 부딪쳤을 때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사유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살아온 인생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는 그냥저냥 때로는 모른 척하면서 지나가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수필문학을 공부하는 공간에서는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설령 그 부딪침이 폭탄이 될지언정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알아온 수필의 오류를 뒤흔드는 특정한 지점이 있다면 그 지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걸 언급하지 않고서는 수필의 잡문성을 들어낼 수가 없다.
그 중에서 특히 더 민감한 문제가 수필의 개념이다. 수필의 오도된 개념 전파 그 이후의 수필에 따라온 잡문성, 비문학성, 폄훼가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고민하는 것이 계간평을 쓰는 나의 사명이 되었다. 그래서 평자는 본격수필의 장에서 수필을 바로 세우는 일에 신명을 바치고자 한다. 수필뿐만이 아니다. 문학 그리고 예술의 영역에서까지 나는 잘못된 주제 제시 방법의 문제를 지적했고, 이 수필의 개념과 수필시학의 오류를 이끈 전통수필학의 틀에서 작가들을 구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다른 이해로부터 더 나은 해석을 이끌어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본다. 그래도 ‘수필은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다’라는 나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좋은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해야 한다. 그래야 주제의식이 간접화되고 문학적 성취가 빛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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