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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1(월)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세상은 더욱 넓어 보입니다.
세상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세상은 나를 가두고
세상을 닫아버립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향하면
세상은 내게로 다가와
나를 열고 넓게 펼쳐 집니다.
내가 있으면 세상이 있고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으므로
분명 세상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만일 지구가 폭발해서 완전히
뒤집어 진다면 이 모든 땅들과
저 화려한 건물의 주인은 없습니다.
그 때는 주인이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자기 땅도 아닌데
마치 땅 뺏기 놀이처럼
금을 그으며 자기 땅이라고
우기며 자기 위안을 삼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건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의 몸속에 영혼이
숨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나요?
- '마음 한번 바꾸면' 중 -
책소개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그 마음을 갖기가 쉽지만은 않다! 삶의 여유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짧은 명상 『마음 한번 바꾸면』. 조급한 마음으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알지만 모두들 잊고 살아가는 소중한 것들을 짧은 만화와 가르침을 주는 짧은 글을 통해 알려준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그려내며 세상살이의 경험과 위로, 행복을 전한다. 갓난쟁이부터 고민이 많은 청년, 살림을 배워가는 새댁, 자녀교육을 걱정하는 부부, 엄마, 가장, 노인 등 나와 닮은 다양한 인물들이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소개
최영순 작가
강릉에서 태어나 강릉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주간신문 시사만화가, 불교잡지 편집장, 아동복지시설 상담원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며 다양한 사회적·불교적 경험을 하였다. 1999년 「현대자동차 사보」에 명상만화 `가라사대`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만화작업을 시작한 이후 「불교신문」, 「스포츠신문 굿데이」 등 여러 신문과 「현대모터」, 「프뢰벨」, 「대교」, 「컬진」등의 기업사보와 인터넷 웹진에 만화를 연재했다. 2002년 명상만화집 「네칸 정원」을 펴냈으며 86년 단편소설 『자물쇠들』로 제2회 오월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청춘의 대부분을 소설을 쓰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백석의 시구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보내다가, 서른이 가까운 어느 날 작은 사회복지시설 ‘자비원’을 방문했다가 그곳 아이들의 젖은 눈망울에 이끌려 눌러앉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그동안 살아온 허황된 삶이 깨지는 아픔을 겪는 대신 눈물로 얼룩진 아이들의 고단하고 서글픈 몸짓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게 된다. 그리고 지극히 낮은 곳을 보듬어주는 따뜻하고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이야기들을 복사용지에 플러스펜으로 조금씩 담아내다가 독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후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 여러 매체에 만화를 연재했다. 어려운 말보다는 일상의 언어로, 긴 설명보다는 짧고 함축적인 메시지로 표현한 최영순의 만화는 어려운 마음공부를 그 어떤 책보다 쉽고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으로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의 한마디
“바람을 마주하고 먼지를 털면 그 먼지가 다시 내게 날아오듯이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면 그 미움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성낼 곳에서도 마음 한번 바꾸면 금세 평화가 찾아옵니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깨끗하면 세상 또한 깨끗해집니다. 그 한순간의 생각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 최영순 -
출판사 서평
최영순 작가의 세번째 카툰집 <마음 한번 바꾸면>이 출간됐다. 그동안 <마음 밭에 무얼 심지?>, <행복 콘서트> 등의 카툰집을 통해 10만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그의 만화는 ‘명상카툰’이라 불릴 정도로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첫번째 카툰집이 불교적 색채가 강하고 두번째 카툰집이 일상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면 이번 세 번째 카툰집은 그 둘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명상을 따로 배운 것은 아녜요. 스님이 운영하시던 아동복지시설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낸 일상생활이 명상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경전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후원자 분들이 오셔서 해주시는 따뜻한 한마디가 바로 경전이더라고요.” 이때의 영향을 받아 그의 만화는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그에게는 카툰 작업이 하나의 수행과도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저자를 두고 소설가 김성동, 이외수 등은 그의 문학성을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저자는 아직은 만화작업에 몰두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올 가을쯤에는 옛 큰스님들의 선문답을 만화로 풀어낸 그의 새로운 작품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4월 10일(일) 아침 일찍 기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재경강릉중앙고동문회 히말라야산악회에서 충북 제천 소재의 '옥순봉'으로 벚꽃놀이 관광을 겸한 등산행사가 있는 날이기에 아침 7시 20분까지 잠실종합운동장 2번 출구앞의 '아세아 공원'앞에 집합해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요일 아침 산행에 동참하고자 지난밤 토요일 저녁 특전미사를 보았기에 마음은 편했습니다. 원로 선배님들께서도 이번 벚꽃놀이를 겸한 첫 원정 등산대회에 많이 참석하실 것이 예상되어 참석하고자 결심했던 것이지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아침에 승용차를 끌고 잠실종합운동장 정문의 공용주차장에 Am 7시경 차를 주차시켰습니다. 그시각 바로 앞에 곧 구순을 앞두신 원로 홍회장님(전 서울시 부시장)내외분이 주차를 하고 계셔서 반갑게 인사를 드렸지요.
새로 동문회 산악회장직을 맡게된 동기생 崔회장이 처음 시도하는 행사라서 우리 동기생들도 많이 참석해 주어 더욱 마음 든든했지요. 아침 7시 30분경 약 80여명의 동문들이 모두 집결완료 되어 관광버스 2대에 탑승한 우리 일행은 목적지인 충북 제천으로 향했습니다.
잠실종합운동장 앞에서 7시 40분. 출발하여 중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 경유하여 충주와 단양을 잇는 36번 국도를 탔습니다. 오전에는 날씨가 많이 흐렸고 또 황사 현상까지 있어 시야가 좋지는 않았으나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야는 온통 봄꽃들이 만발해 아름답기 그지 없었습니다. 장거리의 먼길이기에 지루함을 달래려고 잠시 버스 안에서 책을 읽었으나, 나들이 가는 넘이 분위기에 맞지 않게 너무 튀는 짓을 하는 것 같아 슬며시 덮고 말았습니다. 차창 밖에 펼쳐진 대자연의 경치를 감ㅅㅇ하는 것이 책을 읽는 것 보다 더 가치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잠실종합운동장을 출발한지 약 2시간만에 충북 제천의 이정표가 눈에 띄었고, 이어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인 장회루 앞을 지났습니다. 지난해 여름 용산성당 주일학교 중고등부 하계수련회 행사가 있을 때 사목위원으로서 신부님을 모시고 이지역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어 낮설지 않았으나, 그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인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차창 밖에 펼쳐진 충주호와 주변의 기암괴석은 중국의 황산과 태항산과도 맞먹을 정도로 정말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주변일대의 도로 좌우의 가로수 길에는 벚꽃이 만발한 터널이었기에 마치 꽃동굴을 지나것 같아 기분이 째질것만 같았지요.
오전 10시 20분. 우리 일행은 약 2시간 40여분만에 목적지인 '옥순봉과 구담봉' 등산의 출발지인 계란재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 많은 관광버스와 승합차 그리고 개인 등산객들이 갖고 온 차량들이 도로 좌우측을 꽉 메우고 있는 등 아주 많은 등산객들이 붐볐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 북적거리는 계란재 앞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우선 단체로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이곳 일대의 경치는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리울 만큼 충주호 관광의 최절경지로 꼽힌다고 합니다.이곳의 장회나루의 협곡을 단구협(丹丘峽)이라 불렀는데 이는 연산군 때 김일손이라는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그 절경에 도취되어 "열걸음 걷다가 아홉번 뒤돌아 볼 만큼 절경지"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고, 그 마땅한 이름이 없어 애석하게 생각한 나머지 즉석에서 단구협이라 칭하였다는유래를 들은 바 있어 그저 흥분할 정도로 기대가 컸습니다..
Am 11시, 드디어 우리 일행은 목적지인 '옥순봉'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구순에 가까운 홍순길 회장(19회)님 내외분과 팔순을 훨신 넘기신 권오식 회장(23회)님 내외분이 과연 산에 오르실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때마침 이곳 월출산관광안내원이 산악용 짚차를 끌고와 원로 선배님 내외분을 산 중턱까지 안내해 주어 안도 할 수 있었습니다.
옥순봉에 오르는 길 중턱까지는 도로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원로 대선배님 내외분은 편히 짚차로 모실 수 있었고, 그분들은 가파른 산에 오르시지 않고 우리 일행이 하산 할때까지 기다리시게 하였지요. 그리곤 젏은 동문들은 산행길에 올랐습니다.
옥순봉은 구담봉에서 1km 떨어진 거리에 한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옥순봉은 구담봉과 더불어 단구협의 제일 절경으로 꼽히며 희고 푸른 아름다운 바위들이 마치 힘차게 솟아나는 대나무의 싹과 같다하여 "옥순봉"이라 불립니다. 푸른 소나무들 사이로 보여지는 암벽들은 비록 푸르스름한 옥빛을 띄며 많이 바랬어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은 옛 선비의 굳은 절개를 말해 주는 듯, 그 늠름한 기상이 이 암봉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나 봅니다. 퇴계 이황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하던 시절(1548년), 이황은 단양이 중국의 소상팔경보다 더 아름답다 생각을 하고 훗날 다른 지방 사람들이 단양에 찾아오면 이곳만은 꼭 보고 가도록 단양의 명승지 여덟 곳을 정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단양팔경입니다.
그러나 옥순봉만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단양이 아닌 청풍에 속해 있었습니다. 옥순봉의 절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황은 당시 청풍군수를 찾아가 옥순봉을 단양군으로 고쳐 줄 것을 청하였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하자 돌아오는 길에 옥순봉 하단 석벽에 단양의 관문이란 뜻으로 '단구동문(丹丘東門)'이라는 글을 새겨넣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정비석 명기열전 두향편 기술) 그리고 이 내용은 계란재 아래의 안내판에도 상세하게 기술 되어 있었습니다.
옥순봉 정상까지 올랐다가 곧 하산을 시도하였습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난 시각이고 또 우리들은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고 인근 식당에 예약을 한터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시간에 식당에 도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젊은 동문들은 옥순봉에 이어 구담봉까지 내친 김에 들렸지만, 연식이 오래된 동문들은 백쎄가리가 없어서 그냥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하산 길은 불과 약 1시간정도가 소요되었고, 우리 일행은 출발지인 계란재에 하산하는 순서대로 옹기종기 모여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계란재 앞의 큰 홍보판에는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그림과 함께 '옥순봉'에 대한 소개와 그 전설을 크게 게시해 놓았는데 그 홍보판의 그림과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김홍도(金弘道)
옥순봉(玉筍峰)
옥순봉은 제천 10경중 제 8경에 속하는 명승지이며 “퇴계 이황 선생이 단애를 이룬 석벽이 마치 비온뒤 솟아나는 옥빛의 대나무 순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연산군때의 김일손은 「여지승랑」에 이중환은 「산수록」에 뛰어난 경관을 연출한다.
옥순봉의 전설
퇴계 이황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1548)할 때, 기녀 두향이 옥속봉을 단양군에 속해 줄것을 간청하여, 퇴계 이황 선생이 청풍군수에게 이를 청하였으나 거절하자 단애를 이룬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후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 군수를 거쳐 몸이 쇠약하여 안동으로 낙향하자 두향은 난과 매화를 가꾸며 정갈히 지내던 중 1570년 퇴계 이황이 돌아가시자 강선대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한다.
위와 같은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그림과 함께 옥순봉과 옥순봉의 전설이 한글과 영문으로 게시되어있고 이 그림만 보고서도 옥순봉과 주변의 경관에 큰 호감을 갖고 꼭 옥순봉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 했습니다.
모두 하산을 한 후, 인원점검과 더불어 단체기념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또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서 힘차게 모교 강릉중앙고의 응원가를 트럼벳 연주(47회. 서창식 동문)에 맞추어 불렀고 또 가슴을 재키고 K-Key 구호를 목이터져라 외쳤습니다. 그리고 곧 대기해 있었던 관광버스에 탑승을 하여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예액해 놓은 읍내 마을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계란재에서 읍내의 마을까지 가는 거리는 차량으로 불과 10여분이 소요되었지만, 주변 산야가 온통 노란색의 개나리꽃과 하얀색의 벚꽃, 분홍색의 진달래 꽃밭이라서 황홀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약한 식당의 이름도 한식전문점인 '옥순봉 식당'이었습기에 더욱 친근감이 갔습니다. 두당 1만원으로 맞춘 한정식은 산나물과 꽁치구이, 두부찌게 등 푸짐했고 그 맛 또한 일품이었습니다. 아마도 땀을 흠뻑 흘렸기에 더 밥맛이 좋았는지도 모릅니다.
점심식사를 마친후, 식당 앞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이어 이번에는 제천이 자랑하는 "청풍문화재단지"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1985년 충주댐 건설 이후, 수몰지역 마을에서 출토된 각종 문화재을 비롯한 당시 생활하던 용품들을 전시해 놓은 훌륭한 전시장도 있다며, 사전 현장을 미리 답사한 바 있는 산악대장은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침을 튕기며 자랑했기에 산행 못지 않게 멋진 역사탐방이 될 것 같아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곳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손꼽히는 벚꽃 축제가 열리는 최상의 자연 환경이었습니다. 차창 밖에 펼쳐진 벚나무 꽃 동굴을 지나면서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아~아~ 하는 탄성"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옥순봉 식당에서 20여분만에 벚꽃이 활짝핀 '청풍명월"에 도착했습니다. 청풍문화재단지의 주차장에는 손가락으로 셀수 없을 만큼 많은 관광버스들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국각지에서 이곳에서 열리는 벚꽃놀이 축제에 참석한 관광객들이 타고온 차량들이었습니다.
하여 우리 일행은 청풍 문화재단의 관문인 "청풍팔영루(淸風八詠樓)" 앞에서 힘차게 우리의 모교 응원가를 다시한번 트럼벳 연주(47회. 서창식 동문. 밴드부 출신)에 맞추어 불러재켰습니다. 인근에 관광객들은 그 광경을 지켜 보곤 힘차게 박수를 보내 주었습니다.
청풍명월(淸風明月)
청풍명월은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뜻하며 충청도 사람이 결백하고 온건한 성품을 일컬어 충청도를 지칭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쓰이기도 합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조선 팔도 사람을 평하라고 했을 때, 그는 결백하고 온건한 충청도 사람의 성품을 청평명월이라 평하였고, 조선시대 임금 정조는 충청도 사람은 췅청도 양반과 더불어 청풍명월이라 평하였다고 합니다.
청풍 팔영주(淸風 八詠樓)
이 누문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李箕洪)이 남덕문(覽德門)이라고한 그 터에, 고종 7년(1870)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다시 중수(重修)하였으며, 팔영루는 청풍(淸風府)를 드나드는 관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입니다. 북측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성누문(城樓門)답게 홍예(虹霓)를 쌓은 높은 대(臺) 위에 우뚝 서있지요. 고종조(高宗朝) 부사 민치상(閔致庠)의 청풍명월을 읋은 팔영시(八詠詩)로 하여 "팔영루"라 하였답니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지인 청품면 읍리(邑里)에서 1983년 현 위치로 이전 했습니다.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제천과 충주의 깊숙한 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생겨났습니다. 평화로운 듯 보이는 내륙의 바다를 제천지역의 사람들은 "청풍호"라고 부릅니다. 이곳 남한강 상류주변은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선사시대부터 많은 인구가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습니다만,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대부분이 수몰되었지요. 청풍문화재단지는 8만 5천평의 규모로 제천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천각, 청풍향교, 古家 4동), 지석물, 문인석, 비석 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 문화재는 직접생활하거나 사용하던 것으로 타지역과 차별화 되고 있습니다.
제천 유물전시관
남한강 줄기를 낀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습니다. 또한 곳곳에 선사시대의 집자리 유적과 고인돌 그리고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고분군들이 흩어져 있는 등, 강줄기를 따라 많은 문화유적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제천 유물전시관 내의 입구벽에는 조선시대의 수운역할을 하는 전경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운의 요충지로 제천지역에서 가장 큰 市場이 서는 인근의 생활중심이었던 관계로 많은 생활 유적이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1985년 충주다목적댐이 완공 되면서 댐 상류에 위치한 이 지역의 마을들은 대부분 물에 잠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충청북도에서는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의 지원을 받아 이 지역 안에 있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1980년부터 수몰대상지역 안의 문화유적을 지표발굴 조사하였으며, 1983년~ 1985년에 중요문화재를 청풍문화재단 및 그 주변지역으로 이전하였지요. 비록 원위치는 청평호 물속에 잠겨있지만 문화유산은 원형이 보존되어 당시 선주들의 생활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위 '제천 유물전시관" 주변에는 역사의 향기와 선주들의 손때가 묻은 한벽루를 비롯하여 금남루, 팔영루, 응천각 등의 문화재는 단지조성으로 청풍면 물태리 산등성이로 이전 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김중명(金重明)
김중명(1614년 / 광해군6년 ~1685년 / 숙종 11년)은 청품김씨로 자는 이회였다. 아버지 김전은 병자호란 당시 임금을 문안하러 급히 가던 길에 청병을 만나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호조 참판을 추종 받았다. 그때 중명은 부친의 시신을 메고 양주 금촌까지 가서 장사를 지냈다. 그후 인조 을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발탁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한 후, 성묘를 가던 길에 묘 뒤에 숨어 있는 큰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따라온 사람들이 혼비백배하여 감히 앞에 너서지 못하자, 중명이 말(馬)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그 호랑이를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효종이 중명의 힘을 시험해 보고자 부르자, 중명은 모래 흙 세포대를 가져다 양쪽 겨드랑이에 한 포씩 끼고 나머지 한 포는 등에 지고 대궐 밖에서부터 전각까지 걸어오니 임금이 매우 장하게 여겼다. 날로 총애가 깊었진 중명은 병마절도사의 벼슬까지 받게 되었으나, 효종 임금이 기해년 승하하자 팔뚝을 어루만지며 "나의 일은 이제 모두 끝났구나~!"라고 크게 울부짖더니 결국은 청풍고을의 백치로 물러나 생을 마쳤다고 한다.
(출처 : '매산집 조선문신 홍직필(1776~1852)의 유고집에 수록된 내용)
석물군(石物群)
수몰 이전 옛 청풍, 수산, 덕산, 한수 지역에 산재되어온 고대 사회의 장의(葬儀) 풍속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그리고 도호부 시대 군수와 부사의 송덕비, 선정비, 공덕비 32점과 제천향교 경내에 보관하던 역대 관찰사, 현감, 군수의 치적, 공적비 10여개 등 총 42점은 이곳에 배치하여 남한강변이 거석문환(巨石文化)에 대한 변천과 당시 인물의 공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堤川 勿台里 石造 如來立像)
제천물태리 석조여래입상은 원래 파강(청풍강)변 대광사(大光寺) 입구에 서있던 像으로 1971년 보물 제546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자, 1985년 청풍문화재단지 내로 이전 된 것이다. 위 석조여래입상은 기다란 불신이 경직 되어 보이지만, 풍만한 인상과 세밀한 조각 수법 등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 341 ㎝의 대형석불로 얼굴과 손이 약간 파손 되었지만 보전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고인돌과 성혈(星穴)
고인돌(支石基)은 선사시대 거식문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 방위에 괴였던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무덤 양식의 일종이다. 지역에 따라 형식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받침돌 위에 덮개돌이 있는 탁자모양을 띄고 있다. 고인돌군은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품년 황석리 지역에서 옮겨온 남방식 고인돌로 특히 중앙에 배치된 고인동은 하늘에 별자리를 보는 성혈(星穴)이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전국의 많은 고인돌 중, 별자리가 표시되어 있는 고인돌은 흔치 않으며, 약 2,5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풍화작용에 의해 벌자리들은 마모가 되어 알아 볼 수 없지만, 북두칠성(큰 곰자라)과 북극성(작은 곰자리)만은 선명히 남아있다. 이 성혈은 묻힌 사람의 영생불멸을 기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이며, 별자리 위치로 보아 당시 4~5 경에 조성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청풍 금남루(淸風 錦南樓)
조선 순조 25년(1825)에 부사 조길원이 세운 관청의 정문으로 고종 7년(1870)년에 고쳐지었고, 1985년에 청풍문화재단지 안으로 옮겼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1층은 세개의 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문은 부사가 출입했고, 양쪽문은 평민들이 출입했다고 한다. 2층은 난간을 둘렀으며, 사방이 확트여 멀리있는 적의 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조호부절제아문(都護府 節制衙門)" 이라는 현판은 건물을 세울 당시에 부사 조길원이 썼다고 한다. 도호부(都護府) 는 조선시대 특별행정구역으로 조선시대 현종(18대 임금)의 비(妃)인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년 ~ 1683년) 의 관향으로 청풍군은 행정구역이 1660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청풍 금병헌(淸風 錦屛軒)
집회 및 집무를 처리하던 동헌(東軒)이라고 전해지는 이 건물은 명월정이라고도 한다. 조선 숙종 7년(1681)에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 2년(1726)에 다시 옮겨 짓고 이름을 금병헌으로 바꾸었다. 광무 4년(1900)에 전체적으로 보수하였는데,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 되었다. 건물의 오른쪽은 대청이고 왼쪽은 온돌방이다. 죄인을 가두어두던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조선말기에 없어졌다.
청풍 도화리 고가(淸風 桃花里 古家)
이 집은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ㄷ자형의 우진각 기와집이다.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을 이루고, 좌측 간살은 방, 부엌, 광으로, 우측 간살은 방 2칸과 2칸 크기의 부엌으로 되어 있다. 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자창 옆의 관솔을 피워 어둠을 밝히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본래 이전하기 전의 흔적으로 보아 앞쪽에는 바깥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큰 ㅁ자형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청풍 황석리 고가(淸風 黃石里 古家)
이 가옥은 원래 제원군 청풍면 황석리 164 번지 투구골에 있던 유인모(柳寅模)씨 목조 가옥을 충주댐 건설에 따른 수몰로 인하여 198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81년 5월 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고 여러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청풍 황석리 고가는 조선시대 시골의 양반가옥으로서 규모는 크지 않으나 구조 형식과 건축공법에서 독특함을 발견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곡식을 넣어 말릴 때 쓰던 멍석, 누에섶을 만드는 꺼치틀을 비롯해 수십가지의 농가 생활용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청풍 지곡리 고가(淸風 池谷里 古家)
이 집은 본래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민가 주택이다. 충주 다목적댐 건설에 따라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며, 사랑채와의 사이에 담장으로 경계를 두었고, 중문으로 출입하도록 꾸며져있다. 사랑채와 행랑체는 – 자형의 초가로 되어있다. 행랑채는 대문간 우측으로 외양간과 방앗간이 있고, 상부에 다락을 꾸미고 있다. 이 집의 행랑체의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있는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 후산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 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후보하여 제사방으로 꾸미고 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망월산성(淸風望月山城)
청풍명월문화재단지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Pm 4시경이었습니다. 관광버스 운전기사는 약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주었기에 서둘러 청풍명월문화단지를 둘러 보느라 허둥지둥했습니다. 산행을 했기에 다리가 아픈 동문들은 古家의 마루에 앉아 쉬기도 했고 또 잘 조성된 단지내 산책로를 거니는 동문도 있었으나 정작 상기 본인은 이곳 저곳 바쁘게 움직이며 청풍명월문화단지 내의 문화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다니다시피 했지요. 그러나 정작 멀리 보이는 청풍망월 산성까지는 올라 갈 수 없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망월산성에 올라갔다오면 다른 문화재들을 둘러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산성에 오르는 입구에서 망월산성을 그저 바라만 보았습니다. 흑~흑~흑~
청풍망월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해발 373m의 망월산 정상을 돌로 룰러 쌓은 작은 城으로 둘레는 475m이며, 이곳을 "사열이산성" 또는 "성열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문무왕 13년(673년)에 사열산성은 더 늘려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청풍은 고구려의 사열이현이었는데, 신라에 귀속되어서는 경덕왕 16년(757년)에 청풍현으로 고쳐져서 내제군으로 개칭한 제천의 영현이라 할 것으로 보아 사열이현 시대에 이 城이 쌓아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성벽은 서남면에 너비 16m, 높이 3m, 남쪽에 너비 15m, 높이 4.6m의 완전한 모습으로 잘 남아 있다.
청풍명월문화재 단지를 떠나 귀경길에 오르다.
오후 5시, 아쉬움 가득한채로 청풍명월문화재 단지를 떠나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이번 옥순봉 산행도 좋았지만, 청풍명월문화재단지를 둘러본 것은 큰 보너스였습니다. 언젠가 빠른 시일내에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이곳을 다시 이곳을 찾을 땐 꼭 청풍망월산성을 올라가야겠다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청풍대교를 지나 제천 IC에 이르는 동안 끝없어 펼쳐진 도로 좌우에 활짝 만개한 벚꽃은 아름다움의 극치였습니다. 바람이 불면 마치 함박 눈이 내리듯 벚꽃이 휘날리는 전경은 너무도 멋졌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벚꽃 터널을 지나면서 그저 아~아~! 하는 탄성의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상기인은 관광버스 운전석 옆의 보조석에 앉아 스마트 폰으로 아름다운 전경을 마음껏 담아 보았지요. 아마도 수백번 셔터를 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경 길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곳 관광지를 찾아 오는 관광객들의 차량이 많았고 또 귀경하는 차량들도 많이 붐볐습니다. 우리의 관광버스도 수많은 챠랑들의 정체로 인해 '가다 서다'를 반복했으나 도로변 좌우측의 만개한 벚꽃에 취해 그나마 지루하지 않았지요.
오후 6시경. 어둡지 않을 시각, 제천 IC에 진입하였는데 그때까지는 쌩쌩거리며 잘 달리던 우리 관광버스는 충청북도를 벗어나 서울로 향하면서 엄청나게 밀리는 귀경 차량 대열에 끼고서 부터는 지체하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지요. 그렇지만 노련한 관광버스 기사님은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면서 어떻든 우리 일행을 밤 9시까지 잠실종합운동장까지 무사히 안내해 주었습니다. 귀경 길 관광버스 안에서는 동행한 동문가족분들이 해성처럼 나타난 명사회자인 후배 임병산(54회) 동문의 진행솜씨에 현혹되어 이에 호흥하면서 장장 2시간 동안 광란의 무대를 펼쳤습니다. 남자동문들은 무조건 노래 한곡당 1만을 내게 하였고, 모아진 돈은 가족들 장기자랑 우수자에게. 몽삥을 하였기에 가족들은 이에 크게 고무되어 서로 무대로 뛰어나와 마음껏 끼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하여 귀경길도 역시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잠실운동장 앞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서로 포옹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상기인은 종합운동장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를 타고 내부순환도로를 내달려 밤 9시 40분에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짧은 하루였지만 소중한 분들과 함께 아주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