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국립 고고학박물관과 파르네제 컬렉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고고학 박물관의 하나인 이 박물관은 1885년 건립되었으며 18세기에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폐허에서 발굴한 벽화, 모자이크, 청동작품들과 파르네세의 대리석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도 만날 수 있다. 무제오 광장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1, 2층 전시실에는 청동과 대리석 조각, 폼페이 등의 고대 도시에서 출토된 발굴 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쿠마를 비롯한 캄파냐 지방의 고대 유물 출토지의 유물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고고학 박물관의 컬렉션 수준은 높으나, 이 나라에는 고대 유물이 차고 넘쳐서 그런지, 1층의 회랑에는 부조가 화려한 석관들이 어지럽게 전시되어 있는 것이 거의 방치 수준으로 관리가 덜된 느낌이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파르네제(Farnese) 컬렉션부터 둘러본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청동상도 위엄 돋게 서있고, 로마 황제들의 두상 및 흉상도 즐비하다. 파르네제 라이온이라는 곱슬곱슬한 갈기를 가진 사자는 맹렬히 포효하는 것 같다.
이 고고학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모자이크화인 ‘이수스(Issus) 전투’로, 폼페이 파우노의 집'에서 발견된 원본이다. BC.333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가 이수스에서 벌인 전투를 묘사한 프레스코는 일부가 떨어져 나갔지만, 말을 타고 진격하는 알렉산드로스대왕과 그에 맞는 다리우스 3세의 모습이 보인다.
다양한 색깔의 돌을 사용한 명암대비로 전쟁장면과 인물을 현실적이고 입체감 있게 표현한 것이 돋보인다. 마차를 탄 페르시아왕의 얼굴표정은 말을 탄 젊은 알렉산드로스의 당찬 투지에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손톱만한 채색 돌로 만든 이 모자이크를 보면 장인들의 인내심과 노고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좌측에 원 모자이크를 보고 그렸다는 원화의 1/4만한 그림은 너무 원화와 차이가 나서 무시한다.
박물관의 중간층의 비밀의 방에는 폼페이와 에르콜라노에서 발견된 성인물이 전시되어있다. 유아사망률도 높고 전쟁이 잦아 출생률을 높이는 것이 당시 로마의 과제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에 대해 개방적이 되어 벽화나 현관 손잡이, 촛대 등 생활용품에도 성적 요소가 가미했던 것 같다. 폼페이 유적 벽화 중 춘화(春畵)만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이 전시관은 소수자에게만 관람이 허용되다가 2000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지만, 평소에는 아예 문을 닫은 채 관람객들을 받지 않지만 관람객이 드문 12월 말에는 개장한다는데, 오늘은 열려 있다.
1세기 폼페이에는 35개의 루파나레(유곽)가 있었다 하며, 한 유곽 당 약 180명의 손님이 출입할 수 있었다. 폼페이에서 당시 유곽은 오늘날의 스포츠센터와 같은 곳이라,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될 게 없었으니 성을 금기시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금단의 전시관은 바로 1세기 로마 최대 인기산업으로 수요와 공급이 넘치는 현장을 보여준다.
파르네세는 피렌체의 메디치에 버금가는 로마를 기반으로 한 가문이며, 파르네세 컬렉션은 교황 바울3세(재임기간 1534~49년)를 탄생시킨 이 유명한 가문이 16, 17세기에 수집한 로마와 그리스 예술작품에 발굴을 통해 손에 들어온 유물돠 유적이 더해진 것이다. 당시 로마로 여행 간 사람 대부분은 교황과 상류층의 취향을 알려고 현재의 프랑스 대사관 자리인 파르네세 전시관에 들렀다 한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현대화 같은 벽화
당시 나폴리까지 지배했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Carlos) 3세가 파르네세 수집품을 스페인으로 옮기던 중 잠시 보관하려 한 곳이 나폴리였으나,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 예술품들은 최종 목적지였던 스페인으로 가지 못하고 얼떨결에 임시 보관지였던 나폴리에 남겨져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게 된 셈이다. 파르네세 컬렉션은 박물관 1층 로마 역대 황제의 조각 전시관 옆방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길을 잡은 엄청난 크기의 대리석을 만든 헤라클레스 입상이다. 216년 그리스 조각가 ‘글리콘’이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조각가 리시포스가 청동으로 제작한 헤라클레스 입상을 본떠 만든 것이다. 인체 대리석 조각이 통상 2m 안팍인 데, ‘휴식 중의 헤라클레스(Hercules at Rest)’라는 타이틀을 단 조각은 높이가 3.17m에 달한다.
그리스 시대의 조각은 대부분 청동으로 만 들었으며, 로마시대에 대리석 조각이 시작되 어, 이 헤라클레스도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조각가 리시포스가 제작한 헤라클레스 청동입 상을 본떠 서기 216년 조각가 글리콘이 만든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청동 헤라클레스는 유실 되어 소재를 모른다.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로 다소 지친 모습으로 사자 가죽을 왼쪽 어깻죽 지에 걸치고 자신의 상징물인 곤봉에 지탱해 있는 헤라클레스 입상은 허리 뒤의 오른손에 는 그가 11번째 난관을 통과한 뒤 얻은 황금 사과를 쥐고 있다. 튼실한 다리와 근육질 팔은 남성의 육체미를 보여준다. 카라칼라 정원에서 발견되어 여기로 옮겨와 헤라클레스를 보고 있는 한 쌍의 플로라 마이올 여신상의 여성미와 대조를 이룬다.
로마로 들어서면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부분의 대리석 조각은 그리스의 청동작품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대리석 조각은 원작인 리시포스의 헤라클레스는 당연히 청동제품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찾을 수 없다. 어쩌면 그리스 청동 조각품처럼 불에 녹여져 창이나 그릇으로 재활용됐을지 모른다.
아프로디테가 욕조 물에 비친 자신에게 도취된 순간을 잘 포착한 아프로디테(Aphrodite Callipygos) 조각에는 '아름다운 엉덩이를 가진'이란 별명이 붙어 있다. 여성미를 누드로 처음 표현한 조각이 처음 등장 한 때는 기원전 360년이다. 터키 남서쪽 해변가인 크니도스의 유프로이아 사원에서 들어선 아프로디테 여신이다.
누드 아프로디테를 만든 사람은 조각계의 전설로 불리는 그리스인 ‘프락시텔레스(Praxiteles)’로, 그는 여신의 누드는 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져, 그동안 금지돼왔던 누드 여신을 만들어 그리스 전역에 확산한 인물이다. 프락시텔레스 이전에도 여인의 누드는 항아리나 접시 같은 곳에 그려진 그림 형태로 볼 수 있고, 남성 신은 누드로 만들어져, 제우스나 반신반인(半神半人) 헤라클레스는 가장 많이 만들어진 누드 남상이다.
기원전 4세기 인간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 들었던 프락시텔레스의 작품은 현재 전부 사 라진 상태다. 당시 모습을 로마인이 모방해서 만든 작품만이 남아 있다. 오른손으로 여성의 국부를 가리고 왼손으로 옷을 잡고 있는 모 습이다. 목욕을 하던 중 누군가의 방해에 의 해 ‘깜짝 놀라면서’ 옷을 추스르는 순간을 포 착한 작품이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의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나폴리 대성당(Duomo di Napoli)
나폴리의 수호성인 성 야누아리오에게 봉헌된 나폴리 대성당은 앙주의 샤를 1세의 명령으로 옛 개신교 성당이 있었던 장소에 짓기 시작하여 후계자인 샤를 2세(1285-1309)의 재위기간 동안 지속되어 14세기 초 앙주의 로베르 치세에 완공되었 다. 대성당 내부에는 성 야누아리오의 피를 담은 앰풀이 안치된 경당과 프레스코 그림들과 화려한 중앙 제대,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그린 ‘성모 승천과 4세기의 모자이크 그림 등 볼 거리가 많다.
나폴리 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대성당은 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3세기의 순교성인인 성 야누아리오의 피를 담은 앰풀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 응고된 피는 보통 해마다 두 번(5월의 첫 번째 토요일과 9월 19일)은 고체에서 액체로 변화하며, 그 때마다 외부에 공개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피에 변화가 일 어나지 않을 때는 나폴리에 재앙이 닥 친다는 전설은, 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1980년에 나폴리 지진이 일어나서 입증(?)되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야누아리오는 베네벤토 지역의 부유한 로마 귀족 가 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세 때, 야 누아리오는 자신의 본당인 베네벤토 성당의 교구사제가 되었고, 20세 때에 나폴리의 주교가 되었으나, 디오클레 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던 305년에 그는 체포되어 맹수들에게 던졌으나. 맹수들은 그를 공격하지 않자,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시신 은 로마 곳곳에 버려졌다.
성 야누아리오의 유해는 나폴리의 주교 성 세베로에 의해 나폴리 성 밖에 있는 카타콤베로 옮겨졌다. 10세기 초에 성 야누아리오의 두개골은 나폴리에 남고, 몸은 따로 베네벤토로 옮겨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몇 번을 옮겨졌던 그의 유해는 1947년 나폴리로 이송되어 카라파 추기경은 야누아리오의 머리와 몸통을 다시 붙이고, 나폴리 대성당의 지하묘역에 안치하여 그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야누아리오의 죽음의 현장에서 한 여신 도가 그의 피를 몰래 유리병에 담아 나 폴리로 가져왔는데, 1389년 그가 사망한 9월 19일에, 응고돼있던 피가 액체로 변 하는 기적을 처음 목격되었고, 그 날 이 후 매년 같은 날에 피가 액체로 변했다. 성 야누아리오의 축일인 9월 19일, 그가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된 12월 16일 그리고 야누아리오의 머리와 몸통이 다시 재결합한 5월의 첫 번째 토요일에 개최되는 축제에는 수많은 사람이 피의 기적을 보기 위해 나폴리 대성당으로 몰려든다.
카스텔 델로보와 카스텔 누오보
북구의 노르만족은 프랑스를 침범하여, 10C 초에는 그들이 점령한 노르망디 지역에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으며, 또 11C 중엽에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나폴리 왕국을 세웠다. 1154년에 그들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나폴리 해안에 요새로 세운 카스텔 델로보는 나폴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그 후 수 세기 동안 왕궁과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군사 시설로서도 일익을 담당했다. 이탈리아에서 이런 성채를 만나는 것은 밤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명이 켜지는 이 성에서 바라보는 산타 루치아 항구의 모습이 아름답다.
산타 루치아와 마주보는 작은 섬 에 세워져 다리로 연결되는 이 성 이 달걀성이라 불렸던 것은 성 모 양이 달걀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설 과, 사람이 깨면 재앙이 온다는 달 걀을 항아리에 넣어 묻은 곳 위에 성이 세워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했 다는 설도 있다. 성 내부는 평시에 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지만, 성의 옥상에 올라가면 확 뜨인 전망을 볼 수 있어,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말은 바로 이곳에서 탄생한 것이다.
'새로운 성'이라는 의미의 카스텔 누오보는, 앙주 가문의 샤를 1세가 수도를 팔레르모에서 나폴리로 옮기고, 나폴리의 바다 근처에 강력한 요새를 지으라는 그의 명령에 따라 1282년에 완공된 것이다. 1266년 '시칠리아의 만종'이라는 유혈사태가 팔레르모에서 발생하여 왕가는 1285년 샤를이 죽을 때까지 새로운 궁전으로 옮겨갈 수 없었다. 정면에 있는 3개의 탑 중 오른쪽 2개의 탑 사이의 개선문은 1443년 알폰소 1세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가 개선 행진하는 모습이 대리석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4개의 원통 형 탑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 주위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왕궁과 요새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내부의 사각형의 안뜰을 지나면 팔라티나 소성당이다. 사각의 평면 설계에 십자 모양의 둥근 천장과 높은 창문을 가진 이 경당에는 훼손되었지만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있다. 사변형의 평면에 팔각형의 천정을 가진 남작의 방으로 불리는 살라 데이 바로니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모략으로 죽게 한 왕에 대항해 봉건영주들이 일으킨 모반으로 유명하다. 회랑에는 전투로 인해 대포알이 박혀있는 대형 청동 문이 보존되어 있다.
누오보 성과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거대한 건축물은 왕궁(Palazzo Reale)과 산카를로 극장(Teatro San Carlo)이다. 산 카를로 극장은 왕궁의 옆에 세워진 오페라 극장으로 1737년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 3세에 의해 세워졌다가 19세기에 신고전주의 건 축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로마의 오페라 극장,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과 함께 국내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의 하나로 손꼽히며 우수한 음향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중세 이후로 비잔틴, 노르만,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 면서 그들 문화를 고유의 문화 에 접목시켜 독자적인 나폴리 문화가 형성되었고, 로마와 달 리 그리스 품물의 정취가 풍기 는 곳이다, 미항으로 찬사를 들 어온 나폴리는 지금은 이탈리아 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게으 른 도시로 전락했고, 외국인들이 나폴리사람들을 보고 이탈리아인 전부가 게으르고 엉뚱하다는 불평하는 탓에 이탈리아인들은 나폴리 사람이라면 머리를 돌린다. 북부 도시와 달리 시민 소득이 만 불 이내라는 나폴리는 가난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