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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말씀/ 마태복음 1:1-25 요절/ 마태복음 1:23 | 2024. 12. 15 | |
성 탄 제 2 강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지난 주는 계엄 후폭풍과 탄핵으로 온 나라가 격동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많은 백성이 불안과 염려로 마음에 평화를 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감격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한강 작가는 수상기념 강연에서 창고에서 발견한 8살 때 쓴 시를 소개 했습니다.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팔딱 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 임마누엘 예수님의 성탄의 은혜가 우리에게 새롭고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1-17절은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이고, 18-25절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처음 신약성경을 읽고자 하는 분들에게 예수님의 족보는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구약성서의 주요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족보를 조금만 공부해 보면 구약의 맥을 잡게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긴 이야기가 부담스러워 24부작 드라마도 30분 유투브 요약본으로 먼저 본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구약의 요약본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계보는 족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골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라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자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신다고 예언되고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족보를 좀 아는 유대인이 이 혈통을 한 명 한 명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은 정말 아브라함과 다윗 왕의 혈통을 잊는 왕손이시네” 인정하게 됩니다.
저자는 14대씩 3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입니다. 이 시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믿음의 조상들이 나오는 족장시대가 있고 람과 보아스 등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 왕까지 기록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로써 왕정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탐욕과 불의와 폭력 등의 죄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불순종하던 시대입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남유다도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선왕이 있었지만 결국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망해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은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로 70년 포로생활과 그 후 제국에 의해 지배받던 시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점령되어 주권을 잃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선지자도 없던 암흑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쇠하고 언약은 깨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때가 되어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하신 언약이 드디어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노벨상의 소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마태가 전한 예수님의 족보에는 구속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주권적으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 등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죄와 허물과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또 장자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권적으로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마태 사도는 비천하고 이방인 출신 이지만 믿음의 여인들을 의도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다말은 멸망 받은 가나안 족속 출신으로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두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 믿음으로 시아버지를 속여 자녀를 잉태하고 대를 이었습니다. 라합도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그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을 숨겨주어 여리고가 멸망할 때 구원 받고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은 남편과 아들을 잃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가나안 땅에 거하여 다윗왕의 증조할아버지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함으로 다윗의 살인죄와 간음죄를 드러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인들을 숫자에도 넣지 않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것은 다윗왕에게 치명적인 죄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과 이방인들과 죄인들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아마도 청소년 유해 도서로 분류되어 학교 도서관에 비치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태는 이런 메시아의 족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 의를 깨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라도, 여인이라도, 치명적인 죄를 범한 자라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때 용서하시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축복해 주시는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그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분열과 정변, 암투와 반역 등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특히 저자는 11절, 12절, 17절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처럼 이스라엘 역사의 치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낳고 낳는’ 생명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대로 다윗의 혈통을 따라 그리스도를 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연약하고 죄악 된 인간은 쉽게 약속을 잊어버리고 손바닥 뒤집듯 뒤집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31절에서 죄인의 특징 중에 하나를 ‘배약하는 자’ 곧 약속을 배반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을 배반할 때 많은 혼란과 상처와 아픔이 생기고 불신 사회가 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 내면에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리려면 언약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가져야 합니다.
최근 요동치는 정치 상황으로 많은 백성들이 불안과 분노와 걱정이 많습니다. 저도 메시지를 준비하고자 하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차라리 ‘불안한 크리스마스’, ‘심각한 크리스마스’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언약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과 우울감을 몰아 낼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폭주족의 오토바이 뒷 좌석에 타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트를 탄 사람과 같습니다. 세상나라는 좌충우돌 위험해 보이지만 우리가 믿음의 벨트만 견고히 묶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 언약의 레일을 따라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고 밝게 인사해야 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더 나아가 이 성탄의 복음을 캠퍼스와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피스플(peaceful) 크리스마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한 시골 마을에 마리아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동네에 믿음 좋은 요셉과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법적으로는 부부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알콩달콩 살 것을 생각하며 꿈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부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 핏을 맞추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데 마리아는 오히려 배가 점점 불러왔습니다. 요셉은 처음엔 자기가 사랑의 표현으로 가져다준 간식을 많이 먹어서 마리아의 배가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큰 충격을 받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잔뜩 술을 먹고 마리아 집에 찾아가 “마리아~ 마리아~ 어떻게 니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울분을 터트리고 술주정을 하였을 것입니다. 믿음 없고 의심 많은 사람이었다면 “친척 엘리사벳의 집에 갔다 온다고 하더니 분명 다른 일이 있었던 거야, 이 파혼의 귀책사유는 명백히 너에게 있어. 날이 밝으면 회당장에게 찾아가 이혼소송을 청구할거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나의 감정, 나의 의로움만 앞세워 마리아와 그 안의 생명이 해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리아를 데려와 함께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파혼하고자 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이 문제를 놓고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의 사자는 놀라운 성탄소식을 요셉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말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성령 잉태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는 우리가 주일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내용이지만 너무나 신비합니다. 우리 생각에 신자라면 예수님의 성령 잉태를 역사적 사실로 믿고 받아들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버클리 대학에서 미국교회를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것에 의하면 교회 나오는 사람의 절반 정도가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령 잉태를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근본적으로 죄가 없으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령 잉태를 믿지 못하면 신앙의 첫 단추를 잘못 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천지가 창조될 때 창조주 하나님과 동역하여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이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탄생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음으로 생명력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간절히 기대하던 메시아는 그 백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치적 군사적 혹은 경제적 메시아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로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정치문제나 경제문제 환경문제질병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역사하는 죄문제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과 지혜와 능력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소유가 있어도 큰 업적을 이루었어도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살게 됩니다. 죽고 심판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토록 기뻐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선지자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이사야의 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임마누엘 하셔서 그들을 돌보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인생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임마누엘로 말미암는 역사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 마리아의 몸에 태어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고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공인된 죄인 마태와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짊어지어야 할 죄와 허물을 예수님이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고 참 자유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죄인인 또 다른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과 함께 하면 자주 부딪치고 다투게 됩니다. 연약하고 무책임한 사람과 함께 하면 답답해서 정죄하는 말을 쏟아 냅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적대시하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혼자 있고자 합니다. 한 지붕 아래 있는 가족들도 집에 오면 자기 휴대폰만 봅니다. 예전에 강원대 기숙사는 4인 1실이었습니다. 요즘은 모두 2인 1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와 다른 룸메이트와 함께 할 수 없어서 갈등하고 힘들어 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예전 수양회 때는 서로 잘 몰라도 한 방에 배치하여 사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익숙한 팀끼리 묶어 방 배치를 합니다. 2023년 기준 1인 가족 비율이 56%고, 2030년이면 60%를 넘어간다고 하니 함께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부르심 받은 자들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시공간을 넘어, 문화의 차이를 넘어, 본질의 차이를 넘어 우리와 함께 것처럼 우리도 작은 세대차이, 문화의 차이를 넘어 다른 이들과 함께해 주어야 합니다. 캠퍼스 양들과 함께 하고 잘 보이지 않는 양들도 관심 가지고 함께 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소외된 사람이 없나 살펴야 하고 믿음의 가정의 자녀들도 서로 서로 돌아봐야 합니다. 임엘리야 목자님은 이반석 목동님이 외지에 있을 때 지속적으로 관심가지고 함께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했는데 때가 되어 이반석 목동님이 예배를 회복하고 공동체 안에 조금씩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함께 하는 곳에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아기로 나시기까지 겸손과 온유함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은혜를 덧입어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몇 년간 저희 가정은 자녀 문제로 인해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사히 고3을 끝내고 진학하는 자녀들을 볼 때면 저희에게도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했습니다. 주님은 이때에도 임마누엘하셔서 동역자와 합심하여 기도할 때 마다 새로운 믿음을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말씀을 주시고 인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올해 초 저희 요회는 요회명을 ‘청춘요회’라고 바꾸고 청년학생요회와 적극 동역하고 함께 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청춘’이라는 요회명을 요회원들이 부담스러워하여 이름은 바꾸지 않고 적극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청년학생들과 말씀 펠로우쉽도 나누고 식사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염색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희끗 희끗한 제가 프래시한 청년학생들과 함께 하고자 할 때 쉽지 않았습니다. 외모 뿐 아니라 관심사가 다르고 처한 환경과 문화도 많이 달랐습니다. 저는 마음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또 어떻게 이런 차이를 넘어야 하는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한 아기로 나셔서 임마누엘 하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함과 희생에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그 사람 편에서 함께하기 위해 제가 더욱 예수님을 배워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임마누엘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덧입고 캠퍼스 양들과 2세들의 좋은 목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에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충만하여 한 사람과 함께 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성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