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한바탕 짖어대자 편지함을 채우고 돌아가는 이륜차 소리 소리의 둥근 꼬리가 골목으로 사라져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가을이 침범해오는 철조망에 누워 나는 지금 몹시 아프다
남편이 집을 나갔다
남편이 집을 나갔다 복사꽃 어린 색시 데려다놓고 먹여살리지 못하겠다고 산으로 숨어버렸다 두 번 째 남편이 집을 나갔다 밭 일구러 가자는 아내와 살다간 허리 부러지기 십상이라며 술집 골방에 눌러앉았다. 세 번째 남편이 집을 나갔다. 앞산 바라 눈물짓는 아내 때문에 속병 도져 죽겠다며 황무지에 내팽개치고 달아나버렸다.
이 봄 또 남편이 나가려 한다
꽃들의 손짓, 하염없는 손짓,
나무사람
안현심
식탁에 책이 쌓이기 시작했네 나무 군락에 밀려 끼니는 말없이 웅크려 앉네
화장대에도 나무가 자라네 화장수 두어 가지 나무향기에 빨려 들어가네
나무 말에 귀 기울이다 몸뚱이에 물관부 열리겠구나 수척한 팔다리에 잎이 돋겠구나.
☆★☆★☆★☆★☆★☆★☆★☆★☆★☆★☆★☆★ 《2》 나비잠
안현심
토요일이라고, 딸애가 술 한 잔 하자고 한다. 글발이 터졌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틀이라도 얼른 잡아놓자고, 나분대다 가보니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들어 있다.
옆구리에 붙어서 자자고 조르는 어린아이를 원고와 씨름하다가 혼자 잠들게 하더니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모질기는 매 한 가지
대전역 스산한 포장마차에서 부러진 하이힐처럼 널브러져 소주를 들이붓고 있을 때 쓸쓸히, 쓸쓸히 당신이 들어왔지요. 우린 자연스레 입이 맞았고, 술이 맞았고, 외로움이 맞아 허름한 여인숙으로 들어갔어요.
속옷을 벗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당신, 한 번도 바람을 피워보지 않았군요. 그래요, 노래를 불러줄 테니 편안히 자요. 오늘, 당신은 내 아기예요.
잠속으로 빠져든 얼굴, 고독한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군요. 부디, 당신의 앞날이 쓸쓸하지 않기를, 플라타너스 잎이 뒹구는 뒷골목을 걸었어요.
거리의 여자에게 단비로 온 당신, 그 하얀 꽃잎을 차마 찢을 수 없었어요.
☆★☆★☆★☆★☆★☆★☆★☆★☆★☆★☆★☆★ 《4》 목숨 세우기
안현심
진악산에 올라서 이파리 투명한 아기나무를 보다. 이름도 모르는 살결이 하도 이뻐서 그만 훔치고 말다. 마당가에 다독여 심고 푸른 날갯짓을 기대했지만 하루도 안지나 이파리가 화르르 타 죽고 말다. 날마다 들여다보며 애태우던 중 실바람과 햇빛이 살을 섞던 어느 날, 죽은 팔뚝 겨드랑이에 솟는 바늘 촉
가랑비에도 녹아버릴 살갗, 물갈이만이 살 길이다. 쇠바람 속에서도 잘 살 수 있는 짱짱한 이파리가 필요할 뿐이다.
시대의 방외인 김시습이 산천을 누비다가 터잡은 절집 그대 영정 앞에 서서 길이 아닌 곳엔 들 수 없었던 대쪽 같은 고집을 생각합니다 오백여년 전의 이끼가 살아 가슴에 소용돌이 일으킵니다
밤늦도록 등잔불 심지 돋워 성삼문, 박팽년과 같이 죽지 못한 부끄러운 목숨을 불태우다가 이른 새벽 혼자서 서성였을 절 마당, 숨결 밴 자갈돌 딛고 서서 그 날의 체온을 그리워합니다 꺾을 수 없었던 절개를 찾아 늦가을, 산자락에 서 있습니다. ☆★☆★☆★☆★☆★☆★☆★☆★☆★☆★☆★☆★ 《6》 별
안현심
풀씨 한 낟 떨어뜨리기 위해 아득한 광년을 달려온 별이 있었네
풀잎 한 올 틔우기 위해 천 날을 기도한 별이 있었네
납작하게 쓰러져 우는 동안 비수 꽂힌 채 바라보던 별
》 보시報施 안현심
대전시 오정동, 소 도살장 주변엔 피비린내가 흥건하다. 바람에 설핏설핏 묻어오는 살육의 냄새, 죄 없이 참수된 내 머리통이 눈 부릅뜬 채 내걸려 있고, 맹수들은 게걸스럽게 피를 마신다. 입술이 벌겋게 간을 내어먹고 가슴살을 물어뜯는다. 취하여 달아오른 얼굴, 핏빛 물든 입술, 생살을 뜯지 못하는 놈은 살아남을 수 없다.
소 도살장 옆구리 생고기 전문 식당, 으르렁거리는 맹수들에게 몸을 내어주는 순한 눈망울, 거기에 내가 있다.
*대전시 대덕구 오정동 농수산시장 뒤 소 도살장 주변엔 생고기 전문점이 있다. ☆★☆★☆★☆★☆★☆★☆★☆★☆★☆★☆★☆★ 《8》 부화를 꿈꾸다
안현심
우주에 탯줄을 건 한 마리 애벌레.
뿌리 깊은 말씀을 들을 때면 몸이 굼실굼실 커간다. 아득한 눈빛에 탯줄을 걸고 지식과 지혜가 어울려 파닥이는 자양분 덩어리를 빨아들인다. 조화로운 섭리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핥는다. 전율은 파도로 일렁이고, 생명 겨워 혼절하는 나비.
나는, 부화를 꿈꾸는 향기로운 목숨.
*정효구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부화를 꿈꾸는 애벌레가 되다. ☆★☆★☆★☆★☆★☆★☆★☆★☆★☆★☆★☆★ 《9》 사랑의 두 얼굴
안현심
치마폭에 들어앉아 자는 척 눈감고 허리 늘인 개 꼴 좀 보아. 배냇저고리 안에서 갓난아기가 두 팔을 뻗고 잠든 모습, 어미가 그 모습을 얼마나 사랑스러워하는지, 그렇게 해야만 목숨 걸고 저를 지켜준다는 걸 개는 알고 있지. 주인이 들어오지 않는 밤내 현관문을 지키다가, 취하여 거실에 쓰러져 잠들면 그 곁을 지키며 침대로 가주기만을 기다리는 개. 걸핏하면 등 돌리는 사람보다 낫다면서 햄을 먹이고 소시지를 먹이지. 조금만 아파도 응급실로 데려가 자식이 죽어가는 양 야단을 떨지.
폭신한 침대 대신 눅눅한 요를 깔고 잔다. 다리가 쑤시고 머리가 아파도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어 사시사철 앓으며 산다. 안아서 재워줄 사람도 없고 이뻐서 잘근잘근 물어줄 사람도 없다. 찬밥 한 술에 물 말아 먹으며 질긴 목숨을 원망하며 산다.
사람이면서 사람에게 소외당한 늙어 구부러진 할머니의 허리. ☆★☆★☆★☆★☆★☆★☆★☆★☆★☆★☆★☆★ 《10》 사랑의 상흔 ㅡ안현심
옛날 얘기 들으러 찾아든 충남 논산군 벌곡면 만목리 외길 계곡 따라 풀 냄새 풀꽃 냄새 밤 뻐꾸기 운다 밤 뻐꾸기 미나리 밭 허공에 떠 흐르는 조각난 내 사랑 밤 뻐구기 운다
하늘 맞닿은 바랑산 날망에서 평생을 사신 배두환 할아버지 -부그러워유- 나 이렇게 살어유 이런 집 본적 있어유- 개 짖는 소리에 창호지문의 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보는 할아버지 -여그서 다섯 남매 나서 길렀어 다들 나가서 잘 살고 있지-
쓰러져 가는 흙벽이 얼릴 적 내 집 같아 시렁에도 매달려보고 휘어진 문고리도 잡아보고
벽을 두드려본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 휘영청 달이 뜨고 진달래꽃 무더기진 언덕에 누우면 무논의 개구리 마을을 떠메어 가고 밤 뻐꾸기는 심장 한 가운데서 울었다
- 나 겉은 시상 산 이도 있을라구 소잔등에 여섯 말 콩을 얹고 나는 멜빵 메어 너말을 지고 칠십 리 논산장에 다녀오던 밤 소가 코를 처박으며 뒷걸음질 치잖여 웬일가 했더니 황소 만한 호랭이가 따라오고 있네 주먹을 불끈쥐고 이놈 호랭이야 소가 욕심나거든 놓고 갈 텅께 너하고 싶은 대로 하그라 그랬드니 호랭이는 사라지고 집에 오니 온 몸은 땀에 젖었지 육이오 동란 전엔 호랭이가 우리랑 같이 살었당께 난리 때 총소리에 놀라
지금은 어디로 가고 없지만-
얘기에 취해 돌아 나오는 산길 내내 운다 밤 뻐꾸기 못자리 판 다듬느라 지친 허리 뻣뻣한 손을 불에 비비면 베어진 골에 흐르는 눈물 뻐꾸기 유장한 울음 도랑물 되어 그 골을 흐른다 가슴 깊이 패인 사랑의 상흔 도도하다 날 쓰러뜨리고
☆★☆★☆★☆★☆★☆★☆★☆★☆★☆★☆★☆★ 《11》 쑥대를 뽑고
안현심
생전에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나는 죽어 큰곰뱅이에 묻히고 싶지 않다 깊은 산중에서 농사짓느라 허리 휘어지게 오르내린 길 생각만 해도 어지럼증이 이는 그 곳에 죽어서는 가지 않겠다
그러나 어머닌 마다하던 산중에서 주무시네요 일년에 한번 풀숲 헤집고 찾아오는 자식들 기다리며 사시네요
태풍 ‘에위니아’가 사흘째 우리 땅을 휩쓸어 서울에도 대전에도 비가 오고 있을 때 적막을 깨고 하데스*가 음성을 보내왔다.
거기도 비가 오고 있나요? 서울 하늘은 온통 비에 묻혔어요. 쓸쓸해서, 참으로 쓸쓸해서 혼자 술을 마셨어요. 공자도 장자도 예수도 석가도, 모두 쓸쓸한 사람들이었지요. 지는 해를 붙잡지 않았고, 비가 오는 것을 막지 않았어요. 순리대로 살면서 쓸쓸하여 한마디 던진 것이 세상에 남아 떠돌아다니지요. 각기 다른 목청으로 쓸쓸한 노래를 불렀을 뿐이에요.
나직한 울림으로 또박또박 이어지던 시인의 음성, 쓸쓸함을 말아 쥐고 지금은 그 시인 잠들었을 것이다. 공허한 말장난이 싫어서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시인, 우주의 광막한 시간이 버거워 잠시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창을 흔든다, 시인을 잠재운 빗방울.
*하데스 : 그리스 신화에서 영계靈界를 다스리던 신. 영혼과 무의식의 세계를 관장하였다. ☆★☆★☆★☆★☆★☆★☆★☆★☆★☆★☆★☆★ 《13》 아름다운 비례
안현심
나를 떼어내 버리는 만큼 달은 토실토실 살이 찬다
버리고 버려서 작아진 만큼 나무는 무럭무럭 키가 큰다
내 외로움 베어먹고 실하게 속이 오르는 아이
나는 마른 꽃대가 된다 가는 대궁 속에 사리 하나 문 ☆★☆★☆★☆★☆★☆★☆★☆★☆★☆★☆★☆★ 《14》 아름다운 죄
안현심
남태평양의 작은 섬 해안, 둔한 몸짓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를 파고, 눈물범벅 모래 범벅이 되어 알을 낳는 바다거북을 보았는가? 어미거북과 알을 노리는 자들이 사방을 에워쌌는데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분만하는 바다거북을 보았는가? 백분의 일의 생존율로 살아남아 단 한번 아름다이 살을 섞은 죄, 태어난 섬으로 다시 돌아와 하늘에 순응하는 바다거북을 보았는가?
나는 날마다 몸을 섞는다. 욕정의 화약을 품고 분만을 살상하는 몸을 섞는다. ☆★☆★☆★☆★☆★☆★☆★☆★☆★☆★☆★☆★ 《15》 엄마의 연애
안현심
헐렁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엄마가 나가네요. 나를 두고 엄마는 연애하러 가요.
저렇게 나갔다가 들어올 때면 주머니 가득 뻐꾹새 울음소리, 떡갈나무 정액 냄새.
바위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불어요. 숲의 요정들과 온몸으로 주고받는 사랑의 노래.
언젠가 업어달라고 떼를 썼더니 이제는 나를 안 데리고 가요. 엄마의 사랑에 방해가 될 뿐.
엄마의 연애가 깊어갈수록 내 심장이 타 들어가요. 슬리퍼나 물어뜯는 안타까운 내 사랑. ☆★☆★☆★☆★☆★☆★☆★☆★☆★☆★☆★☆★ 《16》 오늘도 물구나무서다
안현심
각설이패가 되어 떠나자 했지 염생이 똥 만병통치약을 가지고 오일장 찾아 떠돌자 했지 환쟁이는 초상화를 그려주고 소리쟁이가 각설이 타령을 구성지게 부르면 춤꾼은 곱사춤을 신명나게 추고 그도 저도 재주가 없는 사람은 약이나 나눠주고 돈을 받기로 했지 하루 판을 벌여서 번 돈은 그 날 먹고 잘 수 있으면 족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날은 하룻저녁 몸이라도 팔자고 했지.
그 날 허공에 대고 한 약속, 그러나 거짓말은 아니네 서러운 사람살이 아우른 후에 초연히 구를 수 있는 날을 위하여 오늘도 나는 물구나무서네.
☆★☆★☆★☆★☆★☆★☆★☆★☆★☆★☆★☆★ 《17》 하늘사다리
안현심
우리 집에는 청동 코끼리가 있네
하늘로 오르고 싶은 날에는 치켜든 코를 타고 기어오르네
하늘에 닿는 하늘사다리 만년설 덮인 히말라야 봉우리에서 겨자씨 속에 잠든 우주를 보네
☆★☆★☆★☆★☆★☆★☆★☆★☆★☆★☆★☆★ 《18》 행진
안현심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아홉 살 어린애가 꿈을 꾸었네 남녘 끝자락에서 낙원을 소망했더니 물결 일으키며 용이 솟아올랐지 황금 비늘이 눈부셔 차마 볼 수 없었지 등에 찰싹 기대어 목 휘어 감고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줄 땅으로 미끄러져 갔지.
큰곰뱅이재에 서서 선산 바라 있었네 선산 계곡엔 맑은 물이 흘렀고 검은 바위 사이사이 푸른 잎이 휘늘어져 싱싱한 빛깔을 연주하고 있었지 어디선가 뱀이 나와 바위와 수풀 새를 드나들더니 수채화 물감 칠한 용이 되었지 용틀임할 때마다 푸른 몸뚱이가 굵어지더니 결국은 계곡을 가득 메웠지.
삶의 여울목을 돌 때마다 그 꿈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 그 여운으로 열어가는 삶이라는 행진. ☆★☆★☆★☆★☆★☆★☆★☆★☆★☆★☆★☆★ 《19》 현심이
안현심
넌 참 이상한 아이였어.
풀꽃을 볼 때마다 피고 지는 이치를 꼬치꼬치 캐물어 곤혹스럽게 하더니 커서는 가지 말라는 길만 골라서 들어갔지. 주제도 모른 채 태평양을 넘보고 터무니없는 꿈만 꾸다가 놀림감이 되곤 했지.
무엇이 너를 외롭게 하더냐
겨울강변에 서서 큰고니 날아간 자리 그리던 아이야
무엇이 너로 하여 꿈꾸게 하였느냐. ☆★☆★☆★☆★☆★☆★☆★☆★☆★☆★☆★☆★ 《20》 화신化身
안현심
소요산 날망에 절벽을 기둥삼아 몸 붙인 소요사, 칠성각에 절하고 마음 비운 내 앞에 커다란 장수풍뎅이가 꾸물거린다 탄탄한 등껍질, 가시 돋친 다리, 투구모양 뿔 산중의 깊은 참선이 빚어낸 몸뚱이일까? 귀한 매무새에 욕심이 일어 집어 들었다가 놓아주고선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산신각에 들렀다가 내려오면서 어디로 갔는지 찾아봤더니 놓아준 그 자리 찬란한 등껍질이 눈에 부시다 다시 집어서 주머니에 넣으려다 아니지, 욕심을 버리라 한 부처 앞에서 무슨 몹쓸 짓, 다시는 사람 눈에 띄지 말라고 풀숲 깊이 던진다.
다른 몸 입고 산책 나온 전생의 나, 서러운 애옥살이 시킬 뻔하다.
*소요산 : 전북 고창군에 있는 산. 산 아래엔 서정주 시인의 생가가 있다. ☆★☆★☆★☆★☆★☆★☆★☆★☆★☆★☆★☆★ 《21》
황사바람 ㅡ 안현심
내가 먹고 사는 방법은 몸뚱어리를 파는 일이었다. 조금씩 팔아먹은 시력이 바닥나고 혹사시킨 뇌에 점멸등이 깜빡인다. 수많은 밤이 갉아먹은 몸뚱어리, 나에게 오는 먹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몸을 떼어내는 것과 비례했다. 단 한 톨의 쌀알도 아픈 이름 붙여지지 않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돋보기 없이는 책장을 넘길 수 없는 눈, 흐려진 눈에도 눈물은 고이는가. 꼭꼭 걸어 잠근 창 너머 황사바람이 뒹군다.
나무사람
안현심
식탁에 책이 쌓이기 시작했네 나무 군락에 밀려 끼니는 말없이 웅크려 앉네
화장대에도 나무가 자라네 화장수 두어 가지 나무향기에 빨려 들어가네
나무 말에 귀 기울이다 몸뚱이에 물관부 열리겠구나 수척한 팔다리에 잎이 돋겠구나. ☆★☆★☆★☆★☆★☆★☆★☆★☆★☆★☆★☆★ 목숨 세우기
안현심
진악산에 올라서 이파리 투명한 아기나무를 보다. 이름도 모르는 살결이 하도 이뻐서 그만 훔치고 말다. 마당가에 다독여 심고 푸른 날갯짓을 기대했지만 하루도 안지나 이파리가 화르르 타 죽고 말다. 날마다 들여다보며 애태우던 중 실바람과 햇빛이 살을 섞던 어느 날, 죽은 팔뚝 겨드랑이에 솟는 바늘 촉
가랑비에도 녹아버릴 살갗, 물갈이만이 살 길이다. 쇠바람 속에서도 잘 살 수 있는 짱짱한 이파리가 필요할 뿐이다.
환해진 눈으로 들여다보다. 작은 잎에 일고지는 하늘의 섭리.
진악산 : 충남 금산군에 있는 산. ☆★☆★☆★☆★☆★☆★☆★☆★☆★☆★☆★☆★ 무량사에서
시대의 방외인 김시습이 산천을 누비다가 터잡은 절집 그대 영정 앞에 서서 길이 아닌 곳엔 들 수 없었던 대쪽 같은 고집을 생각합니다 오백여년 전의 이끼가 살아 가슴에 소용돌이 일으킵니다
밤늦도록 등잔불 심지 돋워 성삼문, 박팽년과 같이 죽지 못한 부끄러운 목숨을 불태우다가 이른 새벽 혼자서 서성였을 절 마당, 숨결 밴 자갈돌 딛고 서서 그 날의 체온을 그리워합니다 꺾을 수 없었던 절개를 찾아 늦가을, 산자락에 서 있습니다. ☆★☆★☆★☆★☆★☆★☆★☆★☆★☆★☆★☆★ 보시報施 안현심
대전시 오정동, 소 도살장 주변엔 피비린내가 흥건하다. 바람에 설핏설핏 묻어오는 살육의 냄새, 죄 없이 참수된 내 머리통이 눈 부릅뜬 채 내걸려 있고, 맹수들은 게걸스럽게 피를 마신다. 입술이 벌겋게 간을 내어먹고 가슴살을 물어뜯는다. 취하여 달아오른 얼굴, 핏빛 물든 입술, 생살을 뜯지 못하는 놈은 살아남을 수 없다.
소 도살장 옆구리 생고기 전문 식당, 으르렁거리는 맹수들에게 몸을 내어주는 순한 눈망울, 거기에 내가 있다.
*대전시 대덕구 오정동 농수산시장 뒤 소 도살장 주변엔 생고기 전문점이 있다. ☆★☆★☆★☆★☆★☆★☆★☆★☆★☆★☆★☆★
부화를 꿈꾸다 ㅡ 안현심
우주에 탯줄을 건 한 마리 애벌레.
뿌리 깊은 말씀을 들을 때면 몸이 굼실굼실 커간다. 아득한 눈빛에 탯줄을 걸고 지식과 지혜가 어울려 파닥이는 자양분 덩어리를 빨아들인다. 조화로운 섭리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핥는다. 전율은 파도로 일렁이고, 생명 겨워 혼절하는 나비.
나는, 부화를 꿈꾸는 향기로운 목숨.
*정효구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부화를 꿈꾸는 애벌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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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두 얼굴 ㅡ 안현심
치마폭에 들어앉아 자는 척 눈감고 허리 늘인 개 꼴 좀 보아. 배냇저고리 안에서 갓난아기가 두 팔을 뻗고 잠든 모습, 어미가 그 모습을 얼마나 사랑스러워하는지, 그렇게 해야만 목숨 걸고 저를 지켜준다는 걸 개는 알고 있지. 주인이 들어오지 않는 밤내 현관문을 지키다가, 취하여 거실에 쓰러져 잠들면 그 곁을 지키며 침대로 가주기만을 기다리는 개. 걸핏하면 등 돌리는 사람보다 낫다면서 햄을 먹이고 소시지를 먹이지. 조금만 아파도 응급실로 데려가 자식이 죽어가는 양 야단을 떨지.
폭신한 침대 대신 눅눅한 요를 깔고 잔다. 다리가 쑤시고 머리가 아파도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어 사시사철 앓으며 산다. 안아서 재워줄 사람도 없고 이뻐서 잘근잘근 물어줄 사람도 없다. 찬밥 한 술에 물 말아 먹으며 질긴 목숨을 원망하며 산다.
사람이면서 사람에게 소외당한 늙어 구부러진 할머니의 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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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상흔
안현자
옛날 얘기 들으러 찾아든 충남 논산군 벌곡면 만목리 외길 계곡 따라
안현심 현대문학가 시인
1957년 전북 진안 생 충북대학교 한남대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
논문 서정주 시의 인물에 대한 원형적 고찰'(2007)과 ' 서정주의 후기시 연구'(2011)로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2004년 '불교문예'지에 나태주와 문정희 추천으로 시인
2010년에는 '유심'지에 최동호 추천으로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하늘소리'외 두 권의 시집과 산문집 '5월의 편지'를 출간
1998년 대전시 한글선양유공자상 2009년 한남대 일반대학원 우수논문상 수상
주요작품
한국 현대시의 형식과 기법(양장본 HardCover) 국학자료원
서정주 후기시의 상상력(서정시학 신서 26)(양장본 HardCover) 서정시학
물푸레나무 주술을 듣다 새미
미당 시의 인물원형 계보(양장본 HardCover)
하늘사다리(서정시학 시인선 61)(양장본 HardCover)
서정시학
모든작품 국내도서
한국 현대시의 형식과 기법(양장본 HardCover) 국학자료원
미당 시의 인물원형 계보(양장본 HardCover) 지식과교양
물푸레나무 주술을 듣다 새미
하늘사다리(서정시학 시인선 61)(양장본 HardCover) 서정시학
서정주 후기시의 상상력(서정시학 신서 26)(양장본 HardCover)
시집 “연꽃무덤”(서정시학) 제2회 풀꽃문학상 “젊은 시인상”수상
2015 10 16일 23일 대전제22회 한성기문학상(운영위원회 회장 한문석)
안현심 시인의 <연꽃무덤> 시집 발간
4부로 구성 ‘용감한 하늘’, ‘순덕이와 이쁜이’, ‘남편이 집을 나갔다’, ‘바람의 내력’, ‘우주나무’, ‘사랑 이미지’, ‘그 겨울의 연서’, ‘봄소식’ 등을 주제로 한 시편들을 수록
연꽃무덤
어머니의 주검을 닦아드리다가 짓무른 생식기에 손이 닿았다
탄탄한 자신감으로 생명을 피워올리던 황금빛 바다
휘파람이 피어나고 풀잎이 피어나고 사슴이 피어나던 연꽃 생식기
생명의 바다를 사모하다, 사모하다 스러진 연꽃무덤이다
잉태
응달에 눈 발자국 선명한 아침
계족산을 헤매다 진달래 여린 봉오리를 만나다
혹한 속에서 생명을 키어온 가지처럼
네 시름 속에도 꽃들의 몸단장이 한창일 게다
아버지 나무
이장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노랗게 육탈된 뼈를 흠숭하셨다
무성한 잎을 버리고 혈흔 한 점 없이 서 있는 겨울나무
단단한 가슴팍에 귀를 대면 내밀하게 들려오는 태초의 바람소리
맑은 뼈를 소망하신 아버지의 화신이다 송두리째 밀물져 오는 아버지 나라의 내력이다
경계 인간
여름이 퇴각하는 모서리에 누워있다 날선 경계가 몹시 아프다
개가 한바탕 짖어대자 편지함을 채우고 돌아가는 이륜차 소리 소리의 둥근 꼬리가 골목으로 사라져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가을이 침범해오는 철조망에 누워 나는 지금 몹시 아프다
남편이 집을 나갔다
남편이 집을 나갔다 복사꽃 어린 색시 데려다놓고 먹여살리지 못하겠다고 산으로 숨어버렸다 두 번 째 남편이 집을 나갔다 밭 일구러 가자는 아내와 살다간 허리 부러지기 십상이라며 술집 골방에 눌러앉았다. 세 번째 남편이 집을 나갔다. 앞산 바라 눈물짓는 아내 때문에 속병 도져 죽겠다며 황무지에 내팽개치고 달아나버렸다.
이 봄 또 남편이 나가려 한다
꽃들의 손짓, 하염없는 손짓,
안현심 시인 : 2004년 불교문예로 등단. <유심>에 최동호 추천으로 문학평론가로 등단.
시집<연꽃무덤> 외 네 권의 시집과 산문집 <오월의 편지> 논저 <서정주 후기 시의 상상력> <미당 시의 인물원형 계보> 평론집 <물푸레나무 주술을 듣다> 있음. 진안문학상(2011년) 한남문인상 젊은 작가상(2012) 수상. 현재 한남대학교 출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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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심 시집 『하늘 사다리』2012. 서정시학작성자걸찬|작성시간12.03.05|조회수37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저자 안현심
1957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다. 충북대학교와 한남대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논문 '서정주 시의 인물에 대한 원형적 고찰'(2007)과 '서정주의 후기시 연구'(2011)로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불교문예'지에 나태주와 문정희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으며, 2010년에는 '유심'지에 최동호 추천으로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하늘소리'외 두 권의 시집과 산문집 '5월의 편지'를 출간하였다. 1998년 대전시 한글선양유공자상과 2009년 한남대 일반대학원 우수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한남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다.
본래 안현심은 시가 본령인 사람이다. 그런데 학문에 뜻을 둔 지 10년 만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내고 거기다 문학평론 추천까지 얻어냈다. 대개 이렇게 되면 먼저였던 시의 밭이 척박해지기 쉽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에게 일단 학문 쪽으로 갔으면 그쪽에서 보다 더 충실하게 일을 하는 게 좋다고 말해줬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 받아 읽어본 그녀의 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학문하는 동안 익힌 타인의 시에 대한 안목을 자기 시에도 적용, 그 이전의 시보다 월등, 그야말로 눈을 찢고 바라볼 만큼 달라졌음을 본다. 이만하면 학문과 시를 아울러도 좋을 듯싶다. 믿음이 간다. 이러다가는 안현심이 또 한 번 일을 낼 것 같다. 독자가 사라진 오늘의 한국 시단. 안현심의 시가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하여 정말로 일을 저질러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태주(시인)
안현심의 시에 담겨 있는 자연의 질서는 그 자체로 하늘의 섭리를 가리킨다. 기본적으로 그의 시는 자연과 함께 하는 드높은 정신경지, 곧 하늘의 섭리를 찾고, 깨닫고, 실천하는 일에 바쳐지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그가 저 자신을 갈고, 닦고, 공부하는 사람, 곧 드높은 정신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청동 코끼리의 “치켜든 코를 타고” “하늘로 오르” (「하늘사다리」)려고 하는 사람, “하늘에 탯줄을 건/한 마리 애벌레”(「하늘에 탯줄 걸고」)이려고 하는 사람이 그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하늘로 오르”려고 하거나, “하늘에 탯줄을” 걸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의 질서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 자연의 “순리대로 살”(「쓸쓸한 시인」)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는 절간의 칠성각 옆에서 만난 “커다란 장수풍뎅이”(「化身」)에서 저 자신을 발견할 줄 알고, 봄날 창가에 피는 백목련에서 “죽어도 보내기 싫었던 사람”(「다시 백목련」)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어찌 이 땅의 어디에서든 “상처에 피운 꽃”이 “더욱 눈에 「科」「동백꽃」)시리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안현심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은 세속과 탈속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수직적 상상력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이 인식하는 세속의 삶이란
과거에 연루된 “허허로운 삶의 구멍”(「황태포를 씹으며」)에 불과하므로 “남은 목숨 별을 보고 살”(「잉카의 아들」)고자 하는 강한 탈속의 욕망을 드러낸다. 시인이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분만하는 바다거북”(「아름다운 죄」)이 되고자 하는 것도 현실을 온 몸으로 뚫고 가려는 비극적 인식의 산물이다. 세속의 공간에서 탈속을 지향하는 이 아름다운 죄의식은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매개항으로 작동한다. 그의 시가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것은 관념적 초월보다는 “하늘에 탯줄을 건/ 한 마리 애벌레”와도 같이 탈속의 공간을 엿보며 세속의 공간을 조율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희안(시인)
<서평> 영원한 술래의 빚 <불교문예> 2011. 겨울호
<시집 서평>
영원한 술래의 빚
― 김세형, 『찬란을 위하여』(황금알, 2011)
― 이홍섭, 『터미널』(문학동네, 2011)
― 임희구, 『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전당, 2011)
안현심
1. 단숨에 읽히는 시
후기산업사회 현실에서 자본의 창출과 거리가 먼 것이 시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인들의 맹목적인 시사랑에는 가슴 찡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척박한 땅에서 순 햇빛의 곡식을 수확하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이 눈물겨울 뿐이다.
다량으로 쏟아지는 시집들 중 어떤 것이 좋은 작품인가에 대한 의견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추론될 수 있다. 한 개인의 경우에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시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곤 한다. 이 계절의 시집들을 섭렵하면서 필자 또한 색다른 견해를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음 장을 기대하도록 하는 시, 단숨에 읽힌 다음 오랫동안 여운을 주는 시라는 관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읽히는 힘을 지닌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하나하나를 분석하면 문학성이 높은데 다음 장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그 시들은 결코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에 텍스트로 선정된 세 시집은 읽히는 힘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김세형의 찬란을 위하여는 발끝의 진액까지도 끌어올리는 듯 절창으로 일관되며, 이홍섭의 터미널은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을 정치하게 형상화한다. 또한 임희구의 소주 한 병이 공짜는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의 시라는 인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2. 연애와 구도求道의 찬란한 합일
젊은 시절 꽃을 피웠다가 일찍 시들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척박한 땅을 딛고 줄기차게 꽃대를 가꾸어가는 사람이 있다. 후자의 경우를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간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대기만성형의 사람은 나이 들어서도 신념을 실현하기 위한 열정이 매우 강하다. 동년배의 사람들이 삶을 내려놓는 시기에 그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점 혹은 절정에 서 있기도 하는 것이다. 김세형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안일한 삶을 지향하는 동년배들이 여가를 즐기는 시간에 그는 견고한 시세계를 구축해왔다.
찬란을 위하여는 모래인어, 사라진 얼굴에 이은 김세형의 세 번째 시집이다. 결코 이르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첫 시집을 낸 이후 일취월장하는 저력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시사랑의 힘일 것이다. 시사랑의 열정이 역동적인 시세계를 견지해나가도록 추동한 것이다.
사람의 등이 절벽일 때가 있다
그 절벽 앞에 절망하여 면벽하고 있을 때가 있다
아주 오래토록 절벽 앞에 면벽하고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그 절벽이 얼마나 눈부신 슬픔의 폭포수로 쏟아지는
짐승의 등인가를……그리고 마침내는 왜?
그 막막한 절벽을 사랑할 수밖에는 없는가를……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이의 등 뒤에 앉아
오래토록 말이 없이 면벽해 본 사람은 안다
난 늘 그렇게 절벽 앞에서 묵언정진 해왔다
내게 등 돌린 사람만을 그렇게 사랑하곤 했다
난 내게 등 돌린 이의 등만을 사랑한 등 신이었다
사랑에 있어서 난 신神의 경지에 오른 등 신이었다
― 김세형의 「등 신」 전문
김세형은 이번 시집에서 기술문명의 폐해를 고발하기도 하고, ‘생태열반론’이라는 연작시를 통해 환경문제를 제기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모심」은 마름모꼴로 시어를 배열하고, 「농담」은 ‘농담’이라는 시어를 각운으로 반복․배치함으로써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실험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번 시집의 거시적인 구도는 시인 자신도 밝혔듯이 연애와 구도求道의 합일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남녀관계의 형이상形而上을 조망한 시들이 다수 등장한다.
시 「첫날밤에 있었던 일」에는 ‘나’와 ‘그녀’가 등장한다. 극락이 어디 있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그녀의 알몸을 가리켰고, 지옥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도 그녀의 알몸을 가리킨다. 그러나 열반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는 침실 벽만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진노하도록 만든다. 이 시의 주제를 함축하면 “간극 없는 극락,// 그 무간 지옥.”(「사랑 2」)이 될 것이다. 사랑이 주는 간극 없는 황홀은 역설적으로 깊고도 깊은 무간지옥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김세형은 ‘연애’의 실체를 여실하게 인식함으로써 구도의 길에 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사랑은 결국 돌아선 사람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한다. 절벽 같은 그 등이 “눈부신 슬픔의 폭포수로 쏟아지는/ 짐승의 등”임을 깨달았을 때, 그 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늘 등 돌린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묵언 정진해왔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등 돌린 사람의 등만을 사랑해온 시인은 등 신(바보)이지만, 사랑에 있어선 “신의 경지에 오른 등 신登神이 되기도 한다. 황홀한 사랑이 무간지옥으로 변했을 때, 절벽 같은 등을 바라보며 묵언 정진하는 과정이 구도의 길이 아닐까 한다.
2.
어디선가 새벽닭 홰치는 소리 어렴풋이 들려오고
희부윰한 새벽이 내 안에 슬픔처럼 밝아왔다
어미 닭이 알을 품듯 밤새
가부좌 틀고 조용히 한 자리에 앉아 있어도
내 유년의 품속 달걀은 아직 깨어지지 않고 있다
3.
― 새는 알을 까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드려야 한다 ―
그러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난 아직도 캄캄 밤중이다
줄啐한 지가 언제인데,
불혹을 지난 지가 그 언제인데,
난 아직까지도 미혹 속에서 깨쳐나지 못하고 있다
죽비가 내려쳐졌다
탁啄!
― 김세형의 「줄탁동시 2」 일부
‘줄탁동시’란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쫄 때, 어미가 그 소리를 알아듣고 동시에 바깥에서 쪼아줌으로써 병아리를 세상에 나오도록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은 제자가 진리를 깨우치고자 노력할 때 때맞춰 스승이 마중물을 부어줌으로써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는 의미를 함의하기도 한다.
김세형은 새벽이 올 때까지 가부좌 틀고 앉아 수행하여도 유년의 달걀을 깨뜨릴 수가 없다. “줄(啐)한 지가 언제인데,/ 불혹을 지난 지가 그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미혹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죽비가 내리쳐진다. “탁啄!” 드디어 줄啐과 탁啄의 협력이 이루어진 것이다. 줄탁동시의 힘에 기대어 좋은 시를 얻고자 하는 안타까움이 여실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3. 슬픈 이승의 공간, 터미널
이홍섭의 터미널에는 「터미널」 연작시가 아홉 편 실려 있다. 그런데도 시집명으로서 ‘터미널’을 선택한 것은 「터미널」 연작시에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터미널’은 슬픈 삶의 공간으로 상정된다. 터미널은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공간도 되고, 내가 홀연히 떠나는 공간도 되며, 저승으로 향한 문이 열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설사 돌아오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해도 돌아온 후의 삶까지 조망하지 않으며, 돌아올 당시의 모습만을 관망하는 데 그친다. ‘터미널’에 낯모르는 사람들이 오고가듯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시인의 무심한 시선으로 묘사된다.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높거나 수다스럽지 않지만, 거리가 존재하는 담담한 형상화는 소리 내지 않고 우는 강물처럼 유장한 슬픔을 내재한다.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 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 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맘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 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은
저 넘치는 울음을 받아줄 수 없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터미널에서
저기 앳되고 앳된 한 여인이 울고 있다
― 이홍섭의 「터미널 2」 전문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각인되는 인물이 아니라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거리를 두고 관망하기에 파스텔의 슬픈 색채가 덧씌워지기도 한다. 잠든 아기를 안고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 여인이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와 같은 형상화는 여인과 우리가 동일시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이 여인의 울음은 우리 모두의 울음이 되고, 이 여인의 아득함은 우리 모두의 아득함이 되는 것이다.
앳된 여인이 울며 오가지만 품속에 잠든 아기는 그 사실을 기억할 리 없을 것이라는 형상화에는 처연함이 내재한다. 따라서 터미널은 사건이 일어난 공간임과 동시에 세월이 흐른 후에는 사건을 망각하는 구실을 한다. 터미널은 우리의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시공간에 위치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인이 앳되다는 것, 아기를 안고 있다는 것, 울고 있는 장소가 터미널 모퉁이라는 형상화에는 여인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하게 함의된다. 따라서 여인을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죄의식을 지니고 여인을 지켜보는 시적 화자는 기역자 모퉁이가 다 닳는다고 생각하다가 터미널을 함축하는 이미지로서 기역자 모퉁이만 남았다고 상상하기에 이른다. 그만큼 터미널의 기역자 모퉁이는 강렬한 그림으로 내면성의 중심에 각인된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 들리는 곳에 짐을 풀었으나
내 울음만 듣다 한철을 보냈다
아이의 말이 트일 때쯤 짐을 싸려 했으나
이제는 가난한 애비가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아이가 말을 얻고, 애비가 문장을 잃는 사이
짐을 풀고, 짐을 싸기를 반복하는 사이
너가 오고 내가 가는 이 아름다운 이승에
우리가 머물다 갈 소슬한 집 한 채가 다 지어졌다
― 이홍섭의 「터미널 7」 전문
시로써 만나는 이홍섭은 인간사를 포함하여 자연현상을 사랑의 시선으로 인지하는 사람이다. 그가 구현하는 삶의 정황은 나직한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터미널 7」도 예외가 아니다. 한 여인을 떠나보내려 했으나 끝내 보내지 못하였고, 한 여인을 사랑하지도 못한 채(「터미널 5」) 세속살이를 시작했으며, 아이의 탄생을 계기로 방랑의 짐을 내려놓았으나 자신의 울음소리만 들으며 한철을 보냈다는 것이다. “아이의 말이 트일 때쯤” 다시 “짐을 싸려 했으나/ 이제는 가난한 애비가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삶이란 떠나고자 하는 망설임이요, 책임감에 매인 슬픈 현실임을 여실하게 형상화한 시이다. 삶이란 “아이가 말을 얻고, 애비가 문장을 잃는 사이”가 되기도 하며, “짐을 풀고, 짐을 싸기를 반복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문장을 잃은 애비가 짐을 풀고 싸는 사이를 새 생명이 메워가면서 가족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을 버리지 못한 한 사람의 고백이 쓸쓸하게 여울지는 시이다. 그러나 삶을 사랑하는 시인은 그러한 이승살이마저 아름답게 인식하고자 한다.
4. 사람다운 사람의 시
임희구의 『소주 한 병이 공짜』는 『걸레와 찬밥』 이후 두 번째 시집이다. 두 시집명에 등장하는 ‘소주․공짜․걸레․찬밥’ 등의 어휘는 서민적인 이미지를 함의한다. 이들 어휘에서 인지할 수 있듯이 임희구는 사회의 저소득층이 담당하는 직업에 몸을 담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기층부를 튼실하게 받쳐주고 있는 셈이다.
소주는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로서 한 병만 공짜로 얹어준대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물건이다. 물질이 풍족한 사람들에겐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사건이 시집명으로 채택된 사실에서도 임희구의 소박성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어가노라면 원색의 사람냄새가 치장하지 않은 채 밀물져온다.
쌀을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
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ㅅㅅㅏ가지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어!
하신다
… 중략 …
언제 나올지 모르는 똥을 누려고
지금 변기 위에 앉아계시는 어머니는
나이가 여든다섯이다
나는 어머니보다 마흔한 살이 어리다
어려도
어머니와 아들 사인데 사십 년 정도는 친구 아닌가
… 중략 …
엄마가 임마 같다
― 임희구의 「김씨」 일부
시의 내용으로 보아 시인의 어머니는 김씨 성을 지닌 85세의 노인인 듯하다. 어머니보다 마흔한 살 아래인 시인은 늙은 어머니를 위해 밥을 짓고 집안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김씨’라고 부른다. 늘 그렇게 해왔던 듯 어머니 또한 그와 같은 부름에 익숙하게 대답한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귀양살이 중에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집필했던 김만중은 유복자로서 태어났다. 효자였던 그는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어머니의 생신이 돌아오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자식의 재롱을 볼 때 가장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의 일이었다. 임희구의 시를 보면서 김만중의 일화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어머니를 김씨라고 부르는 시적 화자의 행위는 어머니에게 웃음을 만들어주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아들이 일하러 나가면 하루 종일 졸면서 텔레비전만 보는 어머니(「쉬는 시간 2」). 생활비에 보탤까 싶어 빈병을 주워 모으는 어머니(「어머니 병 팔러 가셨다」). 아들과 단둘이 송년회를 하다가 아들의 발뒤꿈치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는 어머니(「송년회」)가 형상화되는 작품들은 가슴을 먹먹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나이 든 아들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은 긴 수염을 지닌 김만중이 색동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서 춤추던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하겠다.
그해 겨울은 암담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으나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눈보라가 쳤다
어머니 뱃살로 느껴지는 쌩쌩한 바람들이
날마다 귓전을 울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대패질을 하면서
다시는 건너오지 못할 먼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암세포처럼
독한 약풀에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싹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할 생을
생살로 터득하면서
죽은 듯이 입 꼭 다물고 눈 꼭 감고
한없는 날들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렇게 나를 지우고 지우며 품었다
― 임희구의 「1964」 일부
이 시는 한 편의 동화를 연상시킨다. 시적 화자는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는, 태어나기 전의 나로서 “어머니 뱃살로 느껴지는” 세상을 감지할 뿐이다. 아버지는 목수였으나 다스릴 수 없는 병에 걸려 이승을 뜰 준비를 하고 있었고,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뱃속에 있는 나는 손을 쓸 수가 없다. 아버지의 임종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나를 배 속에 지닌 어머니의 겨울은 춥고 을씨년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지우기 위해 독한 약초를 복용했으나,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할 생을/ 생살로 터득하면서/ 죽은 듯이 입 꼭 다물고 눈 꼭 감고/ 한없는 날들을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나를 지우고 지우면서 품었던 것이다.
자신의 기막힌 탄생을 냉정한 시선으로 읊은 시이다. 세상의 파고를 극복해나가는 강인한 힘은 이러한 출생적 사실이 근간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어머니와 아들을 끈끈한 정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우리는 화려하지 않은 출생을 자양분 삼아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가는 사람들을 익히 보아왔다. 더구나 그가 시인이라면 누구도 지니지 않은 문학적 자산을 지닌 것이 될 것이다. 시는 적나라한 현실이 미적으로 승화되었을 때 감동을 주고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영원한 술래의 빚
MBC에서 기획한 ‘일밤-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가수 김경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조용필의 「못찾겠다 꾀꼬리」를 편곡해서 불렀는데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정 표현은 오랫동안 전율을 거두어가지 않았다. 꿈을 찾아가는 인간의 행위를 어린 시절의 술래잡기에서 유추한 노랫말 또한 음률 못지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잡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을 찾아 술래가 되어 울먹이는지 모른다. 시인들의 시 쓰기 또한 술래잡기가 아닐까 한다. 밤이 다가와도 포기하지 못한 채 골목을 헤매는 것이 시인들의 술래잡기이다.
이 계절 세 술래가 온몸으로 찾아낸 시를 읽으며 구도의 길에 동행하는 기쁨이 컸다. 김세형은 시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함으로써 노력하는 시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홍섭은 쓸쓸하지만 높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삶을 정치하게 천착하고 있었다. 임희구는 사회의 제반 현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고발하거나 삶의 주변을 담담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사람살이의 한 형상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꿈이 찬연하게 성숙해가기를 마음 모아 비는 바이다.
첫댓글 안현심 시인 해맑은 분
아는 분입니다..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