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시의 진정한 원인은 나중에 우리가 보게 되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현실 속으로 응시를 통해 ‘투사되는’ 환상화된 외상적인 과잉이다.”
지젝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이성민 외 (역) (서울: 도서출판 b), 310쪽
- 올해 읽은 소설 중에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진짭니다. ㅈ일보 책 읽어주는 남자, 김** 기자
책 표지에 띠지로 이렇게 광고를 해놓은 것을 보자 설핏 웃음이 나온다. 참으로 ‘문학동네’다운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독자는 이 문구를 보고 ‘낚였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나는 단지 ‘오직 이메일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라는 데에 관심이 쏠릴 뿐이다.
10여 년 전에 이메일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물론, 남녀간에 주고받는 이메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이메일로만 소통하다가 관계가 끝난다. 같은 상황을 남녀 각각의 관점에서 반복하듯이 서술하는 방식도 택했다. 이메일 밖의 서술은 지극히 제한하였다. 이메일 속에 거의 모든 서사가 들어가도록 했다. 가상공간이 주가 되고 현실세계는 부수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호칭이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인사말을 통해 서서히 존재를 드러내는 사랑의 감정을 그리려했다. 결코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라는 말은 하지 않도록 했다. 벼린 칼날 같은 ‘절제’가 그 소설의 정점이자 한계였다. 남녀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메일을 주고받는 남녀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내 감정이 점차 개입되는 난관에 부딪쳤다. 이것을 조절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오직 이메일로만 이루어진 소설은 생각지 못했다. 발상의 전환을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철자 하나를 더 입력함으로써 시작된 이메일이 ‘대신 들어간’ 낯선 철자 하나로 인해 반전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은 소설의 극적인 재미를 유도하려는 작가의 의도대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낯선 철자 하나가 ‘너무 많은 것을 폭로하고, 환멸을 느끼게 하고, 파괴하는 말’이 되게 함으로써 처음의 가벼운 시작과는 달리 무척이나 대비되는 결말을 낳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네트워크는 크게 두개의 범주, 즉 채팅과 같이 동시적인 것과 이메일과 같이 비동시적인 것으로 나뉘어 활용된다. 이 소설이 다소 짧은 이메일로 이루어져 있기에 한 독자는 ‘차라리 대화창을 열어 대화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책을 읽기 전 스르르 책장을 넘겨 본 결과, 몇 초 뒤 도착한 이메일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전적인 연애편지에서 좀 더 현실화 된 것이 이메일이라면, 채팅은 즉흥적인 반응을 즐기는 현대인들의 소통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채팅문화가 변질되어 원조교제나 각종 불륜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점을 경계해서일까, 작가는 채팅의 방식을 띠고 있는 소통이라 하더라도 이메일이라는 범주를 넘지 않는다. 마치 직접 대화하는 것과 같은 아주 짧은 이메일은 남자와 여자의 심리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짧은 이메일을 쓰는 때는 주로 잠들기 직전의 깊은 밤이다. 서로의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짧은 이메일, 즉 곧바로 응답을 요구하는 이메일을 쓴다. 그리고 바로 모니터 너머에 상대가 있기라도 한 듯 초조하게 응답을 기다린다. 상대가 긴 답장을 쓸 정도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간절히 바라는 상태가 짧은 이메일로 표현된 것이다.
이메일들이 오고가며 더욱 빨라지고 강렬해진다. 이것은 아주 끈기 있고 보이지도 않는 전선을 타고 간다. 그 속에는 서로 통하는 일말의 약속이, 때로는 열정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대로부터의 응답이 끊어지기도 한다. 마음으로 수신 받는, 보이지 않는 라인이 끊어진 것이다. 혹은 침묵으로 전해지는 해명의 말이 들려오기도 한다.
네트 주체(the net subject)를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아파한 적이 있을 것이다. 마치 가족 중 누군가가 남은 생애 동안 코마상태(의식불명)에 있게 될 것을 아는 것과 같은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사태, 거기에 대해서 주기적이며 미묘한 균형감각을 취해야 할 순간에 반드시 봉착하게 된다.
단 몇 십초 만에, 단 한마디로 이루어진 이메일에서부터 몇 달 뒤, 혹은 며칠 뒤 서로의 심경을 주고받는 여자와 남자가 있다. 창문이 열려있을 때 북풍이 불면 못 견디는 여자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위스키를 마시고 있고, 침대 위에서까지 노트북을 끼고 있고 메일 도착알림 벨소리를 알람으로 하기도하는 남자는 와인을 마시며 서로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종종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우정 혹은 사랑은 강렬하고 낭만적이며 때로는 도착적이기도 하다. 이메일을 교환함에 있어서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에게 관여하게 되는 것을 전제한다. 바로 이것이 항상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일종의 진실탐구 과정을 결정한다. 그 결과 네트워크에 의한 로맨스는 점차 ‘구체화’되어간다.
자신이 선택한 결혼이었기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노라 자신하는 거침없고 활달한 여자에게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가서 늦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도 있는 그대로 믿어줄 남편이 있다. 그리고 다소 냉소적이고 언어유희를 즐기는 언어심리학자인 남자에게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중인 여자친구가 있다. 즉 여자에게는 4인용 식탁에 어울리는 화목한 가정이 있고, 남자에게는 만남 못지않게 치열한 이별여행을 치르는 여자친구가 있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러나 고전적인 연애편지든 이메일이든 치명적인 약점은 ‘중독’이라는 것에 있다. 여자와 남자는 점점 상대방의 이메일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우편배달부의 자전거 벨소리에 귀를 기울이든, 메일 도착알림 벨소리에 잠자리에 들었다 도로 깨어나든, 누군가에게서 오는 답장을 기다리는 일은 설렘과 고통을 수반한다. 간혹 연락이 끊겼을 때 이들은 때로는 비아냥거림으로, 때로는 속내를 감춘 무관심으로, 때로는 단도직입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드러낸다.
여자와 남자는 자신들의 정체(아이덴티티)를 알리려한다. 네트워크를 매개로 한 젠더문제의 표출은 처음부터 이름을 밝혀야만 하는 상황이 연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됐지만 웹디자이너와 언어심리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결혼생활과 연애사라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까지 침범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조용한 외부세계’가 되고 ‘이메일을 매개로 한 환상의 사랑, 끊임없이 고조되는 감정,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리움, 가라앉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치닫게 된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이 오직 현실적인 만남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라고, 결코 제3자일 수 없는 인물의 이메일을 통해 밝히고 있다.
서로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각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에 매료되고, 목소리만이라도 간절하게 듣고 싶은 것은 오직 이메일만의 소통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실체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환상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이들이 맞게 될 사랑의 파국은 어디까지인가?
남자는 여자가 내부세계는 곱게 남겨두고 가정과는 상관없는 ‘바깥세계’에서만 문제되는 일을 한다고 단정 짓지만 여자는 남자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대꾸한다. ‘그냥 만남’만이 존재할 뿐이지 로맨스든 불륜이든 외도든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던 여자는 자신의 강한 부정만큼이나 애처로운 목소리로 “우리 이제 어떡하죠?”라고 되묻는다.
이 소설을 흥미롭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다름 아닌 ‘엿보기’이다. 독자는 이 책을 펼치는 순간 타인이 주고받는 이메일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두근거림을 감출 수 없다. 마치 자신이 여자의 남편이나 남자의 옛 애인이나 된 듯한 착각을 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디까지 치닫게 되는지를 호기심 혹은 묘한 질투심으로 이메일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어나가게 된다.
이메일을 쓰는 남자와 여자 또한 서로에게 몰입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여자의 남편과 남자의 옛 애인을 자주 끌어들인다. 그것이 곧 자신들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관찰자가 되어 자신들의 이메일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관계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환상화 된 관찰자가 행위의 결과, 즉 자신들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읽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쓰는 것이기에 그 반작용으로 자신들의 환상을 강화시킬 수 있다. 그 관찰자가 다름 아닌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에 금지에 대한 욕망 또한 증폭되는 것이다. 여자는 옛 애인과 완전히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남자를, 남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를 욕망하게 됨으로써 ‘금지’라는 벽이 둘 사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엿보기의 본질인 ‘응시(gaze)’는 타인의 지극히 사적인 은밀한 영역들을 엿봄으로써 만족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한 응시는 비밀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독자는 드러내놓고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엿보기의 미학/쾌락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사이에 이루어지는 긴장이 독자에게로 빠르게 확산되기도 한다. 옛 애인과 여행을 떠난 남자에게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여자의 집착이나 여자가 자신의 남편을 뭐라고 부르는지 궁금해 하는 남자의 무관심을 가장한 지독한 호기심이 독자의 영역까지 넘나들게 되는 것이다. 또한 두 남녀가 어디까지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한 환상도 한 몫 한다. 이메일로 시작된 만남이 자동응답기에 목소리를 녹음시키는 것까지 진행되는 것을 보며 좀 더 나아가고 가속화되기를 바라게 된다. 메일에 쓴 것처럼 키스하고 더 하고 싶은 상황이 발생하면 실제로 더 하냐는 물음이 오가는 메일을 읽으며 두 사람 못지않은 흥분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가상공간을 넘어서 실제적인 만남을 갖게 되기를 더 원하게 되는 상황까지 연출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엿보기의 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요소는 ‘응시’이다. 상황적으로 불편한 외부의 대상이 존재하며 어떤 식으로든 그 외부적 대상의 응시가 그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는 응시를 향한 충동이다. 이 소설 속에서의 실재의 과잉은 이 응시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를 보니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다가 일간지 창간멤버로 문예섹션과 칼럼을 담당했다고 나온다. 역시나 베스트셀러 작가에 어울리는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옮긴이 이름이 눈에 익었다 했더니 <스콧 니어링 자서전>,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와 함께 그녀가 옮긴 동화책들을 꽤나 읽었다. 지금도 두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나라에서 나온 좋은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니, 새삼 고마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