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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노옴 웨이크필드 지음)
교회가 증거해야 할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들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목사들은 종종 사랑을 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한 자신이 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그 이유조차 모르는 성도들을 대하게 된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영감을 받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사랑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가 희석되는 경우는 아주 허다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자가용을 사랑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사물을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과 혼동한다. 그렇게 올바르지 않는 방법으로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좌절감을 느끼고 실패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세상적인 사랑은 내게 만족과 유익을 주는 것에 기준을 둔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요일 2:15-16). 그는 세상의 사랑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해 놓았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한다’의 의미는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의 원하는 바를 제공해 준다는 뜻임을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적으로, 한 남자가 그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말은 아내가 언제나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고, 또 그가 원할 때마다 그것을 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어떤 이는 반대로 자신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증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아내는 남편이나 자녀들이, 자신이 원할 때에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증오하기도 한다.
이와는 아주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것과 섬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된 모습에도 불구하고(롬3:10-12), 자신의 순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사랑한다”라고 하시는 의미는, 내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 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참으로 낯선 개념이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또는 심각하게 고집불통인 사람을 만날 수록,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사실들을 계시해 주셨을 때, 나는 세상적인 사랑의 개념으로 파괴시켜 망쳐 놓았던 이전의 관계들을 보여 주시길 간구했고, 이를 통해 철저한 회개에 이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도록 기도했다.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던 이 첫 번째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조명해 주시길 바라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 바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상 숭배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누구든 하나님보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을 우선시하고 모든 만물의 근원으로 여긴다면, 그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것이다. 여기 우상 숭배에 대한 아주 좋은 정의가 있다.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것을 사람이나 사물, 생각을 통해 채움받고자 기대하는 것’. 예를 들어, 한 남편이 그의 아내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는 아내를 우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따라서, 더 이상 삶 속에서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의지하거나 우상화시킬 필요가 없다. 일단 내 자신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 줄만한 힘을 사람에게서 기대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권세까지도 그에게 양도하게 되는 셈이 된다. 누군가가 우리를 비참하게 하고 좌절감을 주며 분노하게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사람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이 우상화한 사람은 결코 사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일까? 나는 이 일에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성령의 도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예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동기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세상적인 사랑을 구별할 수 있게 하시며, 우리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교활한 우상 숭배 영의 실상을 깨닫게 하신 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하신다.
나는 갈라디아서 5장14절을 묵상하면서, 율법 전체를 완성시키는 한 단어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에 나는 즉시 십계명의 각 조항이 어떻게 사랑과 연결되는지 찾아보았다.
첫 번째 특성: 우상 숭배의 영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없으며,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는 근원도 다양하다고 말한다. (창 3:4-5)
우리에게는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를 밝혀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잠언 16장2절을 보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상 숭배의 영은 인생에 대한 우리의 목적과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을 왜곡시킨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궁핍하거나 고통스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에, 다른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될 때,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얼마나 현저한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동기를 명확히 파악하시기 때문에, 어려운 시험이나 불편한 관계의 사람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실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선천적인 우상 숭배의 영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건져 주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 우상 숭배의 영은 사람들과 상황을 조종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구약 시대 당시에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손에 칼을 움켜쥐고 자신이 숭배할 우상을 새겨 만들었듯이, 현재 우리들도 자신의 우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아주 정교한 조각용 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도구에는 긍정적인 조각의 도구와 부정적인 조각의 도구, 이렇게 두 가지의 범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긍정적인 조각의 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죄가 그토록 악하고 교활한 것은 어두움을 빛으로 조작하면서, 분별력 없는 사람들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상 숭배의 영이 긍정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활동할 때면,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까지도 속여 자신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하도록 만든다. 나 스스로도 인정하기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부부 역시 우상 숭배 영의 영향력 아래에서 관계를 시작해 나갔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을 통해 이와 같은 부정적인 도구의 여섯 가지 예를 나열하고 있다. 바로 이 골로새서 3장은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이다. 바울은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했다는 가정 하에(골 3:5~7) 이러한 부정적인 조각의 도구를 내려놓기를 격려하고 있다. 욕설, 분노, 허위, 거짓말, 성냄, 원한 등이 부정적인 조각의 도구다. 왜 사람들은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며, 남의 탓을 하고, 남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파괴적인 말과 거짓말로 상대를 저주하고 깎아내리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다! 이러한 조각 방법은 긍정적인 도구로는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할 수 없을 때 사용하게 된다.
우상 숭배의 문제에는 통제가 포함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복과 안락을 얻기 위해 환경과 관계를 스스로 통제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관계에 미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조각하기 시작할 때, 오히려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가까운 가족들까지 소원해지는 관계가 되고 만다. 다른 이들이 당신을 조종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당신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당신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 애쓴다든지, 자녀들이 갑자기 착하고 공손한 태도로 돌변하는 때가 언제인지 쉽게 알아챈다.
예수님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예수님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 당신에게 긍정적인 도구나 부정적인 도구를 사용하시는 법이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는 일 없이 얼마나 놀랍게 변화시켜 주셨는지 몹시 놀랄 것이다.
이미 숙련된 당신의 긍정적인 조각 연장은 어떤 것인가? 아첨, 거짓 칭찬, 섬김, 선물 공세인가? 그렇다면 당신 손에 들려진 부정적인 조각 연장은 무엇인가? 성냄, 냉담함, 의기소침, 거친 말들, 비열함, 아니면 거짓말인가? 우상 숭배의 영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특징을 알게 되면 우상 숭배의 실재를 간파할 수 있다. 내 손에 얼마나 많은 연장을 쥐고 있었던지!
조종하거나 조각을 하는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에서도 자행될 수 있다.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기에 받지 못하면 비참함과 비통함을 느끼게 된다.
우상 숭배의 영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동기를 정결하게 하고, 은혜로운 영적 훈련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즉,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금식하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며, 베풀고, 섬기는 일에 유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훈련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움직여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도록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간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세 번째 특징: 우상 숭배의 영은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든다.
우상 숭배의 세 번째 특징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과 이득에 모든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이기심의 우상 숭배는 오늘날의 결혼 관계 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옛 자아를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고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유혹의 욕심'이라는 단어는 우상 숭배의 영을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유혹의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속여서, 우리의 욕구는 반드시 채워질 가치가 있다고 현혹시킨다. 또한 우리는 당연히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안락을 누려야 하고, 존경을 받아야 하며, 섬김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믿게 만든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자아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선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 보세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남을 위해서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요. 어떻게 그런 선행들이 악한 행동일 수 있다는 거죠?”
성경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과 행동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선한'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한 남자가 예수님을 향해 어떻게 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선함'을 정의해 주셨던 부분을 기억할 것이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7). 이 말씀을 통해 비록 우리가 가진 자아 개념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신다.
예수께서는 고소를 당하고 학대를 당하실 때에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고, 자기 방법대로 밀고 나가지도 않으셨으며, 언제나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셨다. 어떻게 그토록 헌신적으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아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예수님의 '자아'는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채워지고 완성되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으셨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2:10). 타인을 향한 사랑은 만족함이 충만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법이다. 우리 자신을 비우고,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행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을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사실 당신은 비어 있는 상태다), 금방이라도 조각을 새길 연장을 챙겨서, 언제든지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네 번째 특징: 우상 숭배의 영은 모든 행복의 근원을 하나님의 아닌 창조물로 대치한다.
남편들은 아내를 보며 기대하고, 아내들은 남편들을, 어머니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바라보고 기대하며, 피고용인은 직장과 고용자를 기대하고, 고용자는 피고용인을, 교인들은 목회자를, 목회자는 교인들을,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이다. 당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의 영으로 조각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평범한 족속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선명하게 새겨 가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게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게 행동하면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보여지기를 바란 적은 없는가? 자신이 가진 자유 의지를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영생을 주실 거라고 기대했는가? 아니면 당신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도 알고 또 선한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피조물을 통해 행복과 능력을 얻으려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다면 우리 스스로는 굳이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극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앞으로는 당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하라.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르짖어 보라.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의지하게 하는 내 안에 있는 우상 숭배의 영을 드러나게 하시고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실 것이다.
다섯 번째 특징: 우상 숭배의 영은 여러 우상들을 섬긴다.
우상 숭배자들은 유일신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고 있다. 우상 숭배자는 자신이 선택한 피조물에 조각하던 일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더 고분고분하고 조각하기 쉬운 재료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동안 세워 놓았던 우상은 그 자리에서 내동댕이쳐 버리고,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나간 과거로부터 지속시켜 온 관계와 사물을 가지고 소위 '우상의 행렬'을 만들어 놓고 있다.
유아기 때는, 어머니만을 바라보며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다. 우리 자신이 우상 숭배자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울고, 웃고, 짜증 부리고, 애교도 부리는 등 다양한 긍정적, 부정적 도구를 사용해서 우상을 조각해 왔던 것이다.
부모님들이 그것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곧장 친구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초등학생 때와 십대 시절 동안에는 아마 반 전체 친구들을 끌로 새겨가며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관심과 행복을 얻어 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많은 사람들을 조종할 수는 없으므로, 몇 몇의 친한 친구들로 한정시켜 행동을 개시했다. 우정의 관계는 그 사람이 나의 조각 행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여자 아이들의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비전과 똑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그 사실에 무척 행복해한다) 듯이 보이는 남자애들을 보면 마음 가득 그들의 우상을 세워 놓는다. 아마도 이전에 보았던 영화나, 노래들, 텔레비전, 하이틴 소설의 내용에 자극받은 낭만의 우상을 가지고 남자애들을 평가했을 것이다. 남자애들의 경우, 자신을 특출나 보이게 하거나 편안하게 해 줄 것 같은 여자애들에게 구애의 눈짓을 보낸다. 십대 시절에는 자신의 단 위에 세워 놓은 포르노의 우상을 기준으로 여자애들을 평가하곤 했다. 이렇듯 물망에 오른 후보자들을 하나 둘씩 단 위에 올렸다가 내동댕이쳤고, 결국에는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최종적인 승리자와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보통 주부들은 자기 뜻대로 하기 쉬운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을 향해 우상 숭배의 칼날을 휘두른다. 이들을 통해 행복과 대리 만족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을 통해 만족을 얻는 일에 실망하게 되면, 그 대신 직장 생활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남편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직업을 향해 우상을 새기려 한다.
과거에 세워 두었던 우상의 행렬은 그에 따른 처벌을 요구한다. 또한 아무리 새로운 우상을 세워 놓는다고 하더라도, 탐욕적인 생활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과거에 있었던 깨어진 관계의 문제들을 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아무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추수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진정한 본질임을 이해하셨다.
평안하고 풍성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은 단 한 가지뿐이다. 가장 거대한 우상인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았던 삶과 이들을 우상화함으로써 생겨났던 모든 파괴된 관계와 상처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 지나간 모든 일들을 낱낱이 다 찾아내라는 말은 아니고, 구체적인 이름과 사물을 언급하며 그러한 습관의 유형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라는 의미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람들을 치유하며 변화시키셨다. 예수님으로부터 통제 받아 상처를 입어 우상들이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예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의 조종도 받은 적이 없다.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셨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셨다.
여섯 번째 특징: 우상 숭배의 영은 자가 번식을 거듭한다.
우상 숭배는 자신의 삶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시킬 때까지 성장을 거듭하고 끊임없이 번식한다. 우상 숭배는 그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만다. 부모들은 이것이 죄인 줄도 모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더욱 장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것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 사실을 방관하거나 모른 척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질투심을 발하시고, 분노를 쏟아 부으신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하다면,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의 징계가 따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부어 주실 사랑의 은혜를 잠시 보류하신다.
일곱 번째 특징: 우상 숭배의 영은 애증의 관계를 만든다.
애증의 관계는 우상 숭배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와 안락을 일시적 축복을 주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자기 유익을 위해 사람들로부터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해 줄 수 있겠는가? 제 7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다른 사람을 이용해 나의 필요를 채우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증오를 불러 일으켜 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인간의 안락과 탐욕에 호소하는 메시지와 방법은 결국 하나님과 애증관계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 열매는 율법의 노예, 자만심, 참을성 없음, 공격성, 기만, 위선, 육체에 관한 모든 행위, 혼란, 절망, 황폐함 또는 변절 그리고 분쟁 등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진리는 이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므로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지만 우상 숭배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증오심 역시 이끌어 낸다. 우리가 세상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들로부터 무언가 얻기를 원하게 된다. 말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행복을 만끽할 수 있도록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실망시키는 것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한 셈이 된다.
주 예수께서는 젊은 율법사에게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은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셨다(마 22:35~40).
하나님은 회개와 믿음을 허락하신다.
당신이 우상 숭배 영을 깨달았다면, 이제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우상 숭배의 문제를 분명하게 다르고 있는 신약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볼 것을 권한다. (고전 5:11) (고전 6:9) (고후 10:7) (고후 6:16) (엡 5:5) (골 3:5) (벧전 4:5) (요일 5:21) (계 22:15) D.L. 무디는 회개와 믿음을 이루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고 믿었다. '깨달음과 뉘우침, 죄의 고백, 회심,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와 믿음이 기초작업을 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결정하는 단순한 동작만을 따라 하게 함으로써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누를 범치 않기 바란다.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단지 죄에 대해서만 아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상태와 위치에 대해서 오해하도록 잘못 인도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과 자책감을 느끼기도 전에, 미리부터 구원의 광선을 비춰 버린다면, 자기 죄의 실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는 단순히 개종의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예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처절히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의 개종 후의 단계는 이전 상황보다 더욱 심각하다.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상 숭배를 행하는 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구원의 믿음을 심어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다시금 범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 전반에 걸쳐 행하는 무지한 죄는 아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런 후 사도 바울은 회개 이후에 취해야 할 다음 단계, 즉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에 대해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제 당신은 우상 숭배 영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또한 진정한 회개를 허락받았으므로 사랑으로 옷 입고 완전히 하나 됨의 끈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바울은 사랑으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예수께서 어떻게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 복음서들을 읽어 본다면, 예수께서 얼마나 우상 숭배 영에서 자유로우셨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언제든지 공급해 주신다고 믿었고 신뢰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뢰는 우상 숭배 영과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사랑은 순전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섬김을 받고, 사랑을 받거나, 얻어 낼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무언가 채움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이기적인 야심으로 우리를 조종하시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랑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내용은 우리의 행동 전체를 이루는 근본 동기에 대한 것이다. 예수께서 과거나 지금 현재도 가장 근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부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기도하고 사랑하며 복종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길 바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두 번째로 강조되는 내용은 그의 자녀들 안에 역사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면, 반드시 그러한 사랑의 원천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 원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머물러 살아야 할 그 집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그분 안에 거하며, 살고, 뿌리 내리며 지낼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아주 단순한 가르침을 주셨다.
예수 안에 거하는 그 첫 번째 모습은 기도이다. 우리는 절실함을 느낄 때에라야 기도한다. 자신이 느끼는 절실감과 무력감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시도해야 할 때마다 언제나 기도하도록 하셨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항상 기도로 구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고 또한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요14:1). 우상 숭배 영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원하기 전까지는 결코 아무것도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예수께 말씀드릴 때, 우리 자신이 주님과 한 '집'에서,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과 머무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를 통하여 예수 안에 거하는 두 번째 모습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라고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게’ 된다. 내 마음속에 저장된 말씀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예수님과 거할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모든 말씀을 내 속에 품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가정을 실험장소로 고안하신 것 같다.
우리 남성들이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남성의 권위 아래 힘겹게 살아가는 아내와 자녀들의 무거운 마음의 짐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아버지와 남편들이며, 아내와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당신들 자신의 안락과 편안과 만족을 위해 그들을 이용해 왔는가?
아버지가 자기 아내와 딸들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당신의 아들들도 분명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행동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당신이 아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후에 아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이들과 어머니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라. 그들을 어떤 식으로 사랑하는가에 따라 장차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의 기초가 형성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신명기 6장을 보면, 자녀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도록 훈련하는 것은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에베소서 6장에서도 사도 바울이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하려면, 그들 안에 있는 우상 숭배의 죄와 반드시 대면해야 한다.
주부들과 어머니들이며, 여러분이 자녀들을 향해 우상을 새기고자 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자녀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은 바로 어머니이므로, 여러분들이야말로 자녀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인 것이다.
남편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누리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초대의 선물이다. 왜 처음 결혼이 실패했는지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당신의 '자아'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행복과 안락), 옛 배우자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사람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임을 알게 된다.
봄은 좋은 계절이다. 겨울 내내 추위와 회색 빛으로 어둡던 대지에 새 싹이 돋아나고 물오른 가지마다 연둣빛 잎들이 새롭고 각종 꽃이 현란함으로 피어오른다, 온 세상이 새롭게 생명의 정기를 내 뿜어 봄은 부활의 계절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부활절도 입춘 후 첫 번째 만월(Full moon)이 지난 첫 번째 주일에 지킨다.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신자들의 믿음의 근거는 예수의 부활이라 하겠다. 신학자 Gerald 0'Collins는 “엄밀한 의미에서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단지 미완의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Lee Strobel의 예수 사건‘에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의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말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도 다시 살지 못하였을 텐데, 사람들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한 것을 믿느냐고 묻는다. 현재 암으로 투병하는 가족 한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처음 들었을 때 그냥 주저 없이 믿어졌노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속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인간의 지성이나 논리로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불신자들에게 믿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부활! 우리의 저성으로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불 수 없고, 만지고 느낄 수 없으니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무선전화, 인터넷, TV, 라디오 등을 가능케 하는 각종 전파 등은 그 원리를 잘 모르고 보고 느낄 수도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Robert Schuler 목사가 말한 것처럼 캄캄하고 좁은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이 지금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될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속에 안기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빈 무덤 사건은 마가복음에 AD 37년경에 쓰여 졌는데 이때는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이 살았을 때다. 이 빈 무덤 사건이 엉터리 조작이라면 성경의 내용이 그대로 전수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성경은 또한 여러 번에 걸쳐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 출현한 것을 기록했다. 바울은 1세기의 회의론 자 들이 스스로 그 출현의 진실성을 결정하도록 그 목격자들과 직접 얘기해보라고 도전하기까지 했다.
Charles Colson은 닉슨 대통령의 특별 법률고문으로 그 정치적 세력이 굉장했던 사람인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지금까지 교도소 선교를 하는 분이다. 이 분을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이 사건이 불거질 때 이 사건에 관련된 보좌관들은 끝까지 비밀을 지키기로 굳게 약속했는데, 2주도 안되어 엄선된 소수의 충성 분자들이 지도자를 배반하고,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한두 명씩 비밀 음모를 노출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인간들의 본연의 모습인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만약 예수의 부활사건이 제자들이 꾸민 사건이라면, 그 사실이 발각될 때는 감옥행은 고사하고 끔찍한 고문과 죽음을 면치 못할 텐데 끝까지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비밀을 지킬 수가 도저히 없었을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Charles Colson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에서)
신앙은 신비한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내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활의 예수를 영접한 사람의 삶은 극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인생관,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고, 고통, 미움, 원한, 절망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에 신음하던 사람들이 위로와 평강, 기쁨과 감사, 사랑과 소망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부활이 있다면 천국도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믿는 자도 부활 할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사망과 생명 중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고 모든 인간은 가장 중요한 이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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