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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져진 길이기에 편하다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여러분, 혹시 <세상 가장 아름다운 꼴찌>라고 불리는 한 마라토너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때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마라톤 경기장이었습니다. 이미 금메달리스트가 결승선을 통과한 지 한 시간이 훨씬 넘었고, 날은 어두워져서 경기장의 조명도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관중들도 이제 경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소지물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습니다. 멀리 경기장 입구에서 한 선수가 절뚝거리며 나타났습니다.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쿠아리’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습니다. 경기 도중 크게 넘어져 무릎 관절은 탈골되었고, 근육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 묻은 붕대를 무릎에 칭칭 감은 채,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관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자리에 앉아 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금메달리스트가 들어올 때보다 더 뜨거운 박수갈채와 눈물의 환호성을 보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한 기자가 달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쿠아리 선수, 그렇게 크게 다치고도 왜 끝까지 달렸습니까?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자 아쿠아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리 모두의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나의 조국은 나를 이 멀리까지 보내실 때, 그저 경기를 시작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경기를 끝까지 마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마라토너의 고백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신 이유는, 그저 신앙생활을 시작해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쿠아리 선수처럼 예상치 못한 고난에 부딪혀 무릎이 꺾이고, 마음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을 때가 참 많습니다. “인제 그만 달리고 싶다, 여기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앞에 걸어가신 많은 신앙의 사람들 역시 같은 고난을 겪었고, 오직 믿음으로 이 신앙의 길을 경주자의 모습으로 승리하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승리로 마쳐야 하며 이를 이루기 위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히브리서를 기록하게 된 배경에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외부로는 당시의 패권 국가였던 로마제국의 심한 박해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의 배척으로 인해 경제적 손실과 더불어 생명의 위협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내적으로는 이런 고난이 길어지자,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 “차라리 사회적으로 보장되는 유대교의 율법과 제사 제도로 돌아가는 종교 생활이 낫지 않을까?" 하는 신앙의 변절과 퇴보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줌으로써,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성숙에 이르도록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Hebrew)는 히브리어 ‘에베르’에서 유래했으며, ‘강을 건너온 사람’ 혹은 ‘넘어온 자’라는 뜻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온 것에서 시작된 이름으로, 이방 사람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께로 건너온 자라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라는 이름은 본래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멸시하며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즉, ‘근본 없는 떠돌이’, ‘강이나 건너온 뜨내기’라는 비웃음이 담긴 이름이었죠. 오늘에도 우리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하여 하대하는 마음을 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무시하는 마음으로 히브리인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멸시받는 이름을 가져오셔서 ‘세상으로부터 건너와 나에게 속한 자’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마치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예수쟁이’라고 비하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정체성이 된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달리는 이 믿음의 경주도 세상 사람의 눈에는 미련해 보이고 비웃음을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비웃음을 넘어, 더 좋은 것을 향해 강을 건너온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신앙생활을 경주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경주를 하는데 있어 출발점에서 시작되는 스타트가 있고, 결승점을 앞두고 마지막 질주를 하는 스퍼트(spurt)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 스퍼트 시점에 들어서면 이기기를 힘쓰는 경주자는 사력(死力)을 다하여 달려갑니다. 이처럼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앞에 신앙의 길을 걸어간 세대에 대하여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구 숫자를 구름에 비유하며 수많은 사람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증인들’은 헬라어 ‘마르튀론’으로 일차적으로 ‘관람자’를 의미하지만,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증인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외로운 싸움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된 신앙의 선진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며 응원을 하고, 이에 따라 수많은 천군 천사가 이길 힘을 불어 넣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이 달려간 경주의 삶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마지막의 결승점을 달려야 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악한 영은 자기편에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려고 힘을 쏟고, 하나님 나라의 파수꾼인 성령의 수하에 있는 천군 천사들도 온 힘을 다하여 구원받을 백성들을 모으게 되는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영적 나라의 특성은 확장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적 세계는 속성상 영역의 지배권을 넓히려고 하는 끝없는 욕구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옥은 마귀가 다스리는 곳이요,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입니다. 다스림의 대상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축복은 영원한 것으로 사람을 차지하면 당연히 그 나라의 영역도 넓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귀는 그의 졸개를 총동원하여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다가와 유혹을 하여 자기들의 수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무거운 것’은 경기에 임한 선수가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말합니다. 비행기나 선박이 위기에 처했을 때 비행기의 폭발위험을 막기 위해 공중에 연료를 버리는 것과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바다에 짐을 버리는 행위를 '제티슨'(jettison)이라고 합니다. 무게를 줄여야 비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도 무거운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 발목이 잡히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자는 지금 가지고 있는 바를 만족하며 감사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감정의 죄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수없이 보고 듣는 오감(五感)을 통하여 감정의 변화를 겪습니다. 그런 감정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두려움, 근심, 염려, 노여움, 낙담 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내 믿음이 시들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감정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할 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의와 평강이 내 안에 임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당시 유행했던 운동 경기를 연상하며 믿음의 경주를 성실하게 이뤘습니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면해주었습니다. 믿음의 경주의 결국은 하늘에 상급에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구름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영적 세계에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신앙의 길은 이미 예수님께서 앞서가시며 다져 놓으셨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 신앙의 완벽한 결실을 보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 과정을 통과하면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성도들의 찬란한 모습을 보셨고, 이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요?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자기 부인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내게 있는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 받도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의에 이르러 구원을 받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하는 자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담대하게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죄 없으신 하나님 아들이라도 큰 고난과 죽음에 이르렀는데 그 예수를 따르는 성도가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것이 제 십자가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자기 부인과 제 십자가를 지고 감사하므로 묵묵히 예수님이 가신 깃을 가는 성도에게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마 6: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내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을 준비하십니다. 부족함이 없이 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족을 누리는 성도에게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대로 성도를 시냇가의 심은 나무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은혜의 깊이로 그 마음을 뿌리내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우리에 임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곱씹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내 안에서 은혜의 시냇물이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 143: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읊조리다’의 히브리어로는 ‘하가(Hagah, הָגָה)’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마치 비둘기가 구구대며 우는 소리나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뜻합니다. 즉,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움직여 낮은 목소리로 계속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어 성경(개역개정 등)에서 과거에 ‘묵상하다’라고 번역되었던 많은 구절이 현재는 원어의 생동감을 살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되풀이하여 고백해 보십시오.
소는 보통 풀을 뜯을 때는 대충 씹어 삼키고, 나중에 편안히 쉴 때 본격적으로 되새김질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풀 속의 에너지를 100% 활용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내게 주신 셀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을 곱씹어 읊조려 보십시오! 은혜의 샘물이 내게 흐르도록 할 때 지치지 않고 시절을 좇아 베푸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는 말씀이 이뤄지게 됩니다.
히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은 죄를 주님의 피로 씻음 받지 못했다면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무한하신 사랑과 오래 참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깨서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의 선진들이 터를 닦아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기에 우리 마음이 낙심하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가질 때 승리하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