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0.연중 제23주 금요일 강론>
<루카6,39-42>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들보는 무엇일까요?
무의식 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칠죄종과 같아서 십계명을 어기게 하는 죄의 뿌리가 됩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은 잘 보이지만,
칠죄종을 어기는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5계명을 어겨 상대편을 죽인 사람에 대한 프로파일러들의 분석은 바로 시기가 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원인에 의해 5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사를 볼 때 십계명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 원인인 칠죄종도 통회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기는 질투와 같이 칠죄종에 속합니다.
그 칠죄종은 “‘나’라는 영spirit”이 자신이 갖지 못한 부재의 고통 중에 그 고통을 봉헌하며 “하느님의 영Spirit 또는 Holy Spirit”을 향하지 않고, “시기 질투” 즉 미움에 떨어지게되면 거침없이 악에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욕구(생존, 사랑 소속, 힘 성취, 자유, 즐거움)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욕구를 가진 자아(에고)에 눈이 가려 자신의 회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합니다.
그냥 내가 “이러한 욕구가 있구나!”, 아니면 “내가 외롭구나!” 라고 이정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나를 인정해주고 알아준 것이니까,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길입니다.
“영spirit”에서 “나”라는 것이 나오고,
“혼soul”과 “육body”은 영에서 발현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혼soul”의 세계에는 ‘본능(이드)과 슈퍼에고(초자아), 에고(자아)”가 았습니다. “혼soul”의 세계에서 나오는 ‘본능(이드)’과 그것을 누르는 ‘초자아(슈퍼에고)’, 이 둘을 중재하는 자아(에고)가 있는데 우리는 흔히 이 자아(에고)를 “나”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 비워내고 무화 시켜야 하는 것들이지요.
방법은?
“영spirit-혼soul”의 기능인 지성 기억 의지가 있습니다.
내 지성이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께 대한 믿음으로,
내 기억을 마음(영spirit)으로 내려놓고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과 일치하려는 소망을 갖고,
내 의지로 모든 기억들을 성모성심을 통해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됩니다.
내 일생에 대한 기억이 한 번 봉헌될 때마다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에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
두 번째로, 무의식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몸의 오장육부를 봉헌해야 합니다.
내 지성이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께 대한 믿음으로,
내 몸을 마음(영spirit)으로 내려놓고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과 일치하려는 소망을 갖고,
내 의지로 내 몸의 오장육부를 성모성심을 통해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됩니다.
내 몸에 대한 기억이 한 번 봉헌될 때마다 성모성심을 통한 예수성심에 30초~1분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
침묵 중에 올라오는 것들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Luke6,39-42>
39 And he told them a parable, "Can a blind person guide a blind person? Will not both fall into a pit?
40 No disciple is superior to the teacher; but when fully trained, every disciple will be like his teacher.
41 Why do you notice the splinter in your brother's eye, but do not perceive the wooden beam in your own?
42 How can you say to your brother, 'Brother, let me remove that splinter in your eye,' when you do not even notice the wooden beam in your own eye? You hypocrite! Remove the wooden beam from your eye first;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remove the splinter in your brother's 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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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공부수록 젊어지는 뇌
‘이 나이에’ 하고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순간, 이러한 부정적인 자기 최면은 실제 뇌 세포의 사멸 속도를 빨라지게 한다. 특히 전두엽의 위축은 눈에 띄게 현저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뇌의 다른 부위는 6% 정도 위축되지만, 전두엽은 관리를 잘하지 못하면 29% 위축된다. 전두엽이 줄어들면 삶의. 의욕이나 생기가 줄어들면서 희로애락의 감정마저 무뎌져 마치 식물인간처럼 퇴화한다. 그때부터 진짜 노인이 되는 것이다.
잊지마라, 소크의학연구소의 발표. 나이와 상관없이 공부를 계속하면 해마의 신경 세포는 증식한다. 젊은이처럼 생기발랄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고령에도 창의적인 공부로 세상을 놀라게 한 전설적 인물이 우리 주변엔 얼마든지 있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에도 취업과 은퇴의 연령 제한이 없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나이 제한 역시 차별이라며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이는 노인을 대접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제 고령자도 필수 노동력이요. 우수한 생산자라는 인식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가진 자산은 나이 들수록 불어 가는데, 자기 한계를 설정하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인생은 끝없이 성장해 가는 먼 여(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55)
정이다. 노인을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다. 과학적 근거에서 나온 결론이다.
딱 한 가지 걸림돌은 ‘이 나이에’ 라는 자기 한계 설정쁜이다. 그래 공부다. 이제 우린 평생 해야만 하는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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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교회가 사제들과 주교들에게 독신 생활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독신 생활을 하셨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당신의 온전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14)/
이러한 생활 방식을 본받아 “하늘나라 때문에”(마태19,12) 결혼하지 않고 정결을 지키며 사는 것은 예수님 시대 이래로 사랑과, 주님에 대해 온전히 헌신하고 봉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 왔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생활 방식을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요구하며, 동방 가톨릭 교회는 이를 주교들에게만 요구합니다.[1579-1580, 1599]
독신 서약(celibacy, ‘혼자 사는’ 이라는 뜻의 라틴어 ‘celebs’ 에서 유래)
독신 서약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고 살겠다는 자발적인 서원을 뜻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이 서약을 지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수도 공동체(수도 서원)나 성직(독신 서원)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독신제 폐지가 어떤 급격한 가치의 전환을 가져오게 될지 알고 있을까요? 복음적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는 사제 독신제는 숨겨진 실재를 보존해 왔습니다. 교회는 사제 독신제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지향해 왔습니다.(로제 슈츠 수사)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독신제가 “사랑 없이 머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독신 생활을 하는 사제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지니신 부성父性을 드러냄으로써 풍부한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성숙하고 남자다우며 정신적인 아버지 역할을 참되게 수행할 수 있는 사제들을 필요로 하신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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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 종신 부제들을 제외하고, 라틴 교회의 모든 서품 성직자는 원칙적으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마태19,12) 독신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독신 남성 신자들 가운데서 선발한다. 온전히 주님과 “주님의 일”에(1코린7,32 참조)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바친다. 독신생활은 교회의 성직자가 봉사하도록 축성된 새로운 삶의 표징이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독신 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찬란하게 선포하는 것이다.(사제 생활 교령, 16항 참조)
->1580 동방 교회들은 오래 전부터 이와는 다른 규칙을 지켜오고 있다. 주교들은 독신자들 중에서만 선발되지만, 기혼 남자들도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관습은 예로부터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사제들은 공동체 안에서 효과적으로 봉사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사제 생활 교령, 16항 참조). 한편 동방 교회에서도 사제들의 독신 생활은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자유로이 독신생활을 선택한 사제들도 많다. 동방 교회에서도 서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미 성품성사를 받(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05)/
은 사람은 혼인할 수 없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06)/
->1599 서방 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려고 자유로이 독신생활을 하겠다는 자세가 갖추어지고, 그 의지를 공적으로 표명하는 후보자들에게만 성품성사를 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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