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나를 보는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3:2-12]
1912년, 영국 빈민가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빅터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아이였죠.
그러나 빅터는 어린 시절 어눌한 말투에
학교 수업도 쫓아가지 못할 만큼 둔재였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빅터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얘, 너는 어쩜 아무것도 못하니?”
‘바보’로 불리던 그는 15살 때
결국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빅터는 사회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어요.
“너 같은 지적장애인은 공부해도
소용없어 장사나 하는 것이 낫다.”
이 말을 듣고 그는 17년 동안이나
자신이 지적장애인인 줄 알고
지적장애인처럼 살았습니다.
회사에서도 해고돼 떠돌이 막노동꾼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빅터는 끝없이 자신을 바보라고
자책하며 말이죠.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설령 빅터가 진짜 어눌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처럼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야고보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말의 힘을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1) 먼저는 ‘말(horse)’입니다.
예전에 야생마를 길들이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이전까진 말이라고 하면
“이랴!” 소리를 듣고 달리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서부 영화에서
카우보이가 황량한 대지를
멋지게 달리는 것만
떠올랐죠.
그런데 야생마는 달랐어요.
한 번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잡는 것부터 힘들었습니다.
겨우 잡아서 안장을 지우고
사람이 올라탑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이 말이 미쳐 날뜁니다.
로데오 경기를 보는 것처럼
이리저리 난리를 칩니다.
그래서 말을 길들이는 데
특별한 도구가 필요합니다.
바로 재갈입니다.
말의 앞니와 뒷니 중간에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재갈을 물립니다.
재갈은 보통 두 세개의 고리를 연결한 것으로
양쪽 끝이 둥글고 입 안에 들어가는 건
긴 막대 같이 생겼습니다.
말은 혀가 예민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재갈 문 입의 고삐를 당김으로
혀와 잇몸에 신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크고 강한 동물인 말도
입에 물린 작은 재갈로 인해
통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혀도 이와 같습니다.
재갈 물린 말처럼 제어되지 않으면
야생마가 되고 맙니다.
이리 저리 날뛸 수 있는 거죠.
2) 이와 함께 ‘배(ship)’가 등장합니다.
엄청나게 큰 배도 작은 키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면
엄청나게 큰 배가 등장합니다.
물론 그렇게 큰 배를 보며
야고보가 쓴 건 아닙니다.
작은 배라고 하더라도 ‘키’는
방향을 맞추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키가 고장나면 배를 조정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혀(말)는
배의 키와 같습니다.
3) 세 번째로 ‘불(fire)’입니다.
미국에서는 큰 산불이 나서
엄청난 피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7일부터 시작된 불은
아직까지도 꺼지지 않고 있다고 해요.
LA의 부촌(富村)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큰 산이라 하더라도
작은 불씨로 인해 위대한 아름다움이
소실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혀는 이와 같습니다.
작은 불도 다시 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죠.
그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혀를 통해
내뱉은 말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신사가 길을 가는데
노숙인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닥에 연필을 늘여놓고
‘1달러’라고 써놓았답니다.
얼핏 보기엔 연필을 파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구걸 중이었습니다.
대부분은 그 사람이 딱해서
1달러만 주고 그냥 떠났습니다.
이 신사도 그냥 돈만 주고 그를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몸을 돌이켜 그 노숙인에게 왔습니다.
그리곤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1달러를 드렸으니
연필을 주십시오.”
노숙인은 신사를 어의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이제껏 누구도 자신이 늘여놓은 연필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연필은 비도 맞고 먼지도 쌓여서
보잘 것 없었습니다.
머뭇거리는 노숙인을 바라보며
연필을 집은 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제 연필을 받았으니
당신은 이제 사업가입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멋진 남자가
이 신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했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예전에 길에서 1달러짜리 연필을 팔며
구걸하던 저를 기억하십니까?
다들 돈만 주고 갔지만
당신은 달랐습니다.
가던 길을 되돌아 와 연필을 집으며 했던 말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때 그 말 한마디가
저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이전까지는 제가 거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후로
저도 사업가라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성공해서 당신 앞에 섰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는 유명한 심리학자인
지글러 박사였습니다.
지글러 박사의 말 한마디가 실패에 찌든
노숙인을 성공한 사업가로 만든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잠언 16장 24절입니다.
잠언 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선한 말 한마디가 뼈를 고칠 만큼
힘이 있습니다.
뼈가 고쳐지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합니까?
부러진 뼈는 깁스를 해도 몇 달이 걸립니다.
우리의 선한 말을 통해 상처 입은
누군가가 변화된 삶을 살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또 생각할 게 있습니다.
본문 6-8절을 읽겠습니다.
야고보서 3:6-8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가 가진 힘이 이렇게 크지만 잘못 사용하면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까지 불사릅니다.
삶의 수레바퀴란 ‘인생의 전(全) 과정’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혀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었다 하더라고
말 한마디에 흔히 말해 ‘훅’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말 한마디가 정말 중요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한번 내뱉은 말로 인해
큰 곤란을 겪곤 합니다.
김창옥 교수님 강의를 듣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자가 이성을 보고 사랑을 느낄 때
뇌하수체에서 도파민이란
환각 물질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성에게 친절하고
감성적인 언어를 씁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
“오빠 나 힘들어”라고 하면
“힘들지 자기야.”
“오빠 우리 차장님 문제있지 않아?”
라고 하면
여자 편을 들어줍니다.
“그때 내가 봤던 그 사람 말하는 거지?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
자기가 너무 힘들겠다.”
그런데 도파민이 떨어지면,
“자기야 우리 차장님 문제 있지?”
“너도 문제는 많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
힘들면 살이 빠져야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실 것 같으신가요?
당연히 기분이 나쁘죠.
부부 사이가 틀어집니다.
가정에 불화가 들이닥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것 같아서
후회하신 적은 없나요?
이처럼 혀는 우리의 힘으로 길들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가 뭘까요?
바로 일구이언(一口二言)입니다.
오늘 본문 9-12절을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3:9-12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예배 시간에 열심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다툼이
시작되진 않습니까?
이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혀를 지킬 수 없도록
끊임없이 유혹 거리를 던집니다.
저는 주일 예배 전이
가장 긴장되는 시간입니다.
꼭 이때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죠.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가는데
설교 전에는 저도 모르게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별일도 아닌데 목소리를
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처음에 출애굽 할 땐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광야의 어려움을 직면하자
불명과 원망을 했어요.
애굽에 있었을 때가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며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어떤 직장인들은 모였다하면 험담하는 게
일상입니다.
버릇처럼 하다보니 험담을 하는지도 모르죠.
남에 대한 비방은 언젠가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입술을 지키십시오.
성공한 사람은 험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혀(말)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을 읽겠습니다.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를 두 개 주시고
입을 하나만 주신 이유가 뭘까요?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에
두 배로 더 힘쓰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즉위하자마자 했던 말이
“의논하자”라고 합니다.
그는 재위 32년 간
총 1898회의 경연(經筵)을 통해
신하들과 토론을 즐겼습니다.
또한 집현전의 전문 학자들과
밤낮으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 MC로 잘 알려진 유재석도
그냥 듣지 않고 진심으로
경청하는 걸 참 잘합니다.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하면서
중간에 재치있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올려줍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speaking보다는
listening이 있어야 합니다.
리더십 전문가로 알려진 데일리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2주 동안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해 2년 동안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는 게 필요합니다.
언어는 습관입니다.
어릴 적부터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배운 것이
우리 입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습관을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고보의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같이 야보고서 4장 7-8절을 읽겠습니다.
야고보서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여기서 세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게 중요하죠.
두 번째는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입술로
죄를 범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반드시 마귀는 떠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주님과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입술은 깨끗해집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변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주님을 닮아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의 혀와 말을 주장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입술에서는
악한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빅터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빅터는 군대에 자원 입대합니다.
입대를 위해 받은 지능검사에서
빅터는 육군이 실시한 검사 중
최고 수치의 IQ를 받습니다.
빅터의 IQ는 178이나 되었습니다.
자신의 IQ를 확인한 빅터는 17년간의 삶과
180도 다른 생활을 시작합니다.
더 이상 그는 지적장애인이 아니라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책을 썼고, 특허를 냈고, 기업가가 되었죠.
그리고 IQ 132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멘사(mensa) 클럽에 가입합니다.
빅터는 멘사에서도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였어요.
그는 상위 2% 두뇌들만 모인다는
멘사의 최고 경영자(CEO)와 명예회장까지 지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말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올바르게 쓰기 위해선 재갈이 필요합니다.
작은 키가 있어야 합니다.
도파민이 없이도 사랑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오직 성령님이 우리를 다스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계속 떠오르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찬양인데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원하네”
이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의 말이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주님께 나아갑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과 혀를 주장하사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