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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1ㄴ-16
그때에 1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밭은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궁 곁에 있었다.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
그 대신 그대에게는 더 좋은 포도밭을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그 값을 돈으로 셈하여 줄 수도 있네.”
3 그러자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4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제 조상님들의 상속 재산을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궁전으로 돌아갔다.
아합은 자리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5 그의 아내 이제벨이 들어와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속이 상하시어 음식조차 들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6 임금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실은 내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그대의 포도밭을 돈을 받고 주게.
원한다면 그 포도밭 대신 다른 포도밭을 줄 수도 있네.’ 하였소.
그런데 그자가
‘저는 포도밭을 임금님께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는 것이오.”
7 그러자 그의 아내 이제벨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제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당신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8 그 여자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인장으로 봉인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9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시오.
10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11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
12 그들이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자,
13 불량배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맞은쪽에 앉았다.
불량배들은 나봇을 두고 백성에게,
“나봇은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하고 말하며 그를 고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봇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인 다음,
14 이제벨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15 이제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합 임금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셔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돈을 받고 넘겨주기를 거절하던
그 포도밭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16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합은 일어나,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아합 임금은 아내 이제벨의 간계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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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 임금과 그의 아내 이제벨은 간계를 꾸며 이즈르엘 사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며,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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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직분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에 맞갖은 삶을 산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 온갖 환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진실한 복음의 증인으로서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동태 복수법(반좌법)이라고 불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신다. 그래서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인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추악해질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아합은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모략을 세우거나 직접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이제벨과는 달리 하느님과 율법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였기에, 거짓 증언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에 매우 충실한 사람으로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 불의와 폭력에 내던져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을 감았습니다. 나봇이 무고하게 죽었지만, 아합은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마음속으로 기대하며, 겉으로는 모른 척하였지만 그 결과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무죄한 의인이 희생한 대가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욕망은 아합에게 나봇의 죽음을 가리고, 포도밭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아합과 닮았습니다. 이제벨처럼 직접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그 악행의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때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빈부 격차를 가속화하며 가난한 이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악법과 불의한 구조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만일 그 법으로 어떤 이득을 얻게 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욕심은 고통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고, 지금 곧바로 얻게 될 이익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어려운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희생적 선택이어야 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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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은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옛 법전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도 언급된(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구약의 가르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연하다고, 마땅히 정의롭다고 생각하던 기존의 가치를 넘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과거의 가치관과 편견, 세상의 소리를 초월하여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악에 대해서 그저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도록 하십니다.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당하기나 합니까?” 하고 반문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당신 십자가의 길에서 이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소리에 파묻혀, 당한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때때로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홀로 매달려 계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그분을 조금이라도 더 닮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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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사람이 마술 램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램프를 문지르자 그 안에서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요정은 그를 주인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소원만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주인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의 두 배를 누리게 됩니다.”
램프의 주인은 요정에게 궁전만 한 집 한 채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말 으리으리한 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갑자기 집이 두 채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램프 주인은 요정에게 두 번째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는 저놈과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아. 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게 나에게 100억만 보내다오.” 요정은 이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집에는 200억이 생겼습니다. 배 아픈 주인은 마지막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기 한쪽 눈을 잃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수 같은 이웃이 양쪽 눈을 잃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다소 유치한 예화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유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미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상대방의 불행을 꿈꾸다가 자신마저 불행해져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은 아무리 불의를 저지르는 악인일지라도 그의 불행을 바라지 말고 그를 끝까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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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 임금은 나봇의 포도밭을 탐합니다. 이제벨 왕비는 나봇을 모함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합니다. 나봇의 탄원은 정의로우신 하느님께 도달합니다. 나쁜 짓을 하는 자와 거짓을 말하는 자를 역겨워하시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권력자의 오만함과 불의를 결코 용인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관대한 사람이 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인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불의에 대항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성전의 장사꾼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시며 성전의 거룩함을 수호하시고,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사제 한나스의 심문을 받으실 때, 경비병 하나가 당신의 뺨을 치자 그의 무례함과 불법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를 지적하시고 악에 대항하셨습니다. 그러나 폭력의 악순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평화가 복수와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저주와 모욕은 사랑의 불꽃으로 사라집니다. 악의 힘보다 선한 힘이 세고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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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부모님은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교육을 잘못 시킨 자신의 탓이라 여겨 자식에게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그런 부모님의 엄명에 눈물을 흘리고 잘못을 뉘우치는 산 교육을 몸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교육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쟁과 야합, 이기심과 허영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가 선으로 악을 이기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역설적입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도 당해야 속이 풀릴 것 같은 세상인데, 막상 그렇게 한다고 내 맘이 편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받은 상처와 폐해는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보복하고 원망해도 이미 저질러진 악은 또 다른 악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이 이제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권력을 남용한 사례는, 오늘날에도 권력 남용으로 인권과 사회 정의가 유린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과 불의 앞에서도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역설적 가르침은, 악의 힘은 더 이상 악이 전염시킬 힘이 없는 선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불의 앞에 침묵이나 타협이 아닌, 정의를 외치는 것은 정당한 예언자적 소명입니다. 하지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은 불의한 악의 힘에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 정의의 실현은 하느님께 맡기라는 믿음의 요청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의 용서와 자비에서 드러난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는 역설적인 하느님의 반전 드라마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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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무조건 참아라.’, ‘무조건 용서해라.’, ‘무조건 사랑해라.’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복수의 칼날을 세우지 말라는 면에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음의 성경 대목과 함께 보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 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끌려가시어 대사제 한나스의 심문을 받으십니다. 그때에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께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18,22)며 예수님의 뺨을 쳤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무조건 맞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18,23)
예수님께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왼뺨마저 돌려 대라는 것은 ‘무조건 참고 참아라.’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실제 많은 교우가 상담하면서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며 자신의 화를 털어놓습니다. ‘착한 사람’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착함’은 ‘정의’가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덮어놓고 굴복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은 불의에 무조건 당하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항하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는 불의에 항거하시면서도 왼뺨마저 내놓으시는 용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이 정신에 따라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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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차례로 듣고 난 뒤 우리는 깊은 고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밭에 대한 아합 임금의 탈취’는 구약에서 불의와 폭력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성경은 권력자의 탐욕과, 자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과 자격이 있다는 오만함의 불의를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 그러한 불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법’의 겉모습으로 치장하려고 합니다. 불의한 자의 탐욕은 억울한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나봇의 피가 상징하는 것은 불의로 말미암아 희생된 역사 속의 모든 이의 고통과 탄원입니다.
불의가 있는 사회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겉으로 평온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이미 그 사회는 안에서부터 곪습니다. 많이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폭력을 통해 평화가 깨어지는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합법과 발전이라는 허울 속에 얼마나 집요하게 그들의 욕망이 관철되고 있는지 우리는 답답한 마음으로 목격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의 불의와 폭력은 ‘경제적 살인’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난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불의와 폭력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내일 제1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가 전언해 주듯, 가난한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 똑같이 피를 흘리고 응징되어야 정의가 이루어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과연 이러한 비폭력과 용서가 불의한 자들의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으로 억울한 이들의 마음이 풀릴 수 있을지 의문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결코 현실의 변화를 포기한 무력함도, 불의를 저지른 자들의 행위에 대한 추인도 아닙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이 바로 폭력 대신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의를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이 ‘덮어 두고 조용히 하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정의의 길을 추구하는 이라면 평화의 길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에서 정의를 위하여 애쓰는 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를 주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각자에게도 정의와 용서,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소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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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악의를 품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저항하지 말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말고 오로지 사랑으로 악을 이겨 내라고 하십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산된 생활이 아니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온갖 모욕과 멸시를 참아 내시면서 당신께 다가오는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으신 주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닮아, 그리스도께서 가신 인생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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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4처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어디입니까? 저에게는 12처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한때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는 장면과 ‘용감한 여인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1처’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죄한 분께서 죄인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의롭고 선량하신 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모습이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분께서는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담담히 판결을 받아들이십니다.
‘삶의 억울함’을 인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인생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제1처의 예수님’께서는 억울함과 불공평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살면서 억울함을 당합니다. 때로는 모함도 받고 때로는 이용도 당합니다. 오해 때문에 멍들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였습니까?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습니까? 아니면 악쓰며 반항하였습니까? 결과야 어떻든 남은 것은 상처입니다.
이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억울함의 상처’가 십자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가슴 떨리고 증오가 솟더라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은총이 함께합니다. 누군가 ‘오른뺨을 치더라도’ 눈은 흘길지언정 참아 내게 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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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태 복수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그 이상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입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주며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상대편은 자기가 준 상처보다 더 큰 보복을 당했다고 여겨 또 보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고자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친절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지름길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결책입니다. 이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있지만 감정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면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꼬마 아이와 큰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어른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이가 예의 없이 행동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서 많은 이가 어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요?”
스승이 말했습니다.
“바보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자가 정색하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말에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스승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렇다. 네 말도 맞다.”
어쩌면 자기를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기분이 안 좋아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진리를 향하는 방법인 바보들과 다투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설득해 봐야 무의미한 논쟁이고 이를 얼른 끝내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 동의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논쟁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보들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당시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것이 가장 공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 맞서게 될 때, 그 안에서 더 큰 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아니 그보다 큰 사랑으로 다가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넓은 마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죽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그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본시 단순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자꾸 복잡하게 만들려고 한다(공자).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음악 프로그램 중에 ‘가요 톱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순위를 정하는 겁니다. 경쟁이 치열하면 매주 순위가 바뀌곤 합니다. 5주 연속 1등 하면 자연스럽게 다음 순위로 1등이 정해집니다. 20위 권 밖에 있지만 사람들이 점차 좋아할 만한 노래도 정해서 들려줍니다. 순위는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노래도 흐름이 있는지 어떤 때는 서정적이고 조용한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강력한 리듬과 춤이 어우러진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K Pop이 사랑받으면서 솔로 가수가 아닌, 그룹이 순위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 HOT, 동방신기 그리고 방탄 소년단이 있습니다. 걸 그룹에는 SES, 핑클, 소녀시대 그리고 뉴진스가 있습니다. 한국의 음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았던 1991년 가요 톱텐 1위 곡은 이렇습니다. ‘태진아의 거울도 안 보는 여자, 김지애의 몰래 한 사랑,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이선희의 추억을 책장을 넘기면, 노사연의 만남, 김완선의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신승훈의 날 울리지 마,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있습니다. 33년 전의 노래인데 지금도 멜로디와 가사가 생각납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가슴 벅찬 이야기와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 중에 ‘노아의 방주’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합니다. 홍수가 지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탈출기’가 있습니다. 앞에는 깊은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홍해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린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정말 기적처럼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죽었던 나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자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나왔습니다. ‘5병 2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원죄는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복된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카인의 죄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 첫 번째 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갔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참하게 죽였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독서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아합왕은 이미 많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욕심 때문에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봇을 억울하게 누명 씌어서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억울한 죽음이 많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런 억울한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는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보여줍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나 스스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아무도 나를
물들이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에게
스미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군림하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빼앗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에게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짓밟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떠받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없이 하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죽이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위해
죽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사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어떤 형태를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둠 속에 계속 머물다보면 무엇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때로는 두려움과 초조함, 나아가 공포감이 밀려오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빛입니다. 곧 빛을 드리워야 우리가 보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마음의 광명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어둠 속에 계속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결코 악이 될 수 없고 오직 선만이 그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빛으로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정 빛이신 주님 안에 머물 때 모든 악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약의 가르침을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구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어떻게 보면 복수를 하라는 말씀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완악한 나머지 용서하려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받은 만큼만 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하지 않고 지나친 복수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 것이지요. 먼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겉옷까지 내주어라,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사실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면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대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판받으면서 죄 없는 분이 뺨을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겉옷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지요. 오늘 복음의 깊은 뜻은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시며 그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선다면 이방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마지막까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연약한 우리가 하기에 힘들겠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가능합니다. 함께 기도하며 성령께 청합시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5,39)
참으로 우리가 문학이나 영화가 아닌 현실로 오늘 복음에 관한 일이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딸을 죽인 유괴범을 찾아내 잔혹하게 살해하는 영화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제가 당사자라면, 아 주님은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자식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를 가한 자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내재 된 복수 심리를 고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딸의 유괴범을 살해한 아버지를 선뜻 판단할 수 없게 하고, 일정 부분 동조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동시대의 일반적 형태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제한된 복수마저 예수님은 폐지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원한도 보복도 없는 새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원수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풀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5,38~42) 이 가르침의 방점은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고 하시며, 새로운 삶의 자세를 제시합니다. 손바닥을 마주친다면 그와 더 나을 게 무엇이냐는 말씀이겠고, 또 그렇게 악인에게 악으로 맞선다고 한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신중하라, 는 말씀 같습니다. 물론 주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원수와 같았던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23,34)라고 기도하시며, 당신 말씀하신 용서를 실제로 실천하셨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뜻은 비겁하게 도망치라는 의미보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폭력으로 맞서 저항하지 말고 보복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2코6,5.7)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또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12,19) 또한 구약의 잠언에 보면 “ ‘내가 악을 되갚겠다.’ 하지 말고 주님께 바라라. 그분께서 너를 도와주신다.”(20,22),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25,21-22) 결국 우리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 그리고 사실 복수는 더 커다란 복수를 가져오기에, 악인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 모릅니다. 어둠을 어둠으로,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게 인간의 일반적인 심정이고 정서이지만 그런 방법은 참된 해결이 아닌 악순환으로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할 수 있기에 공정하신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하는 게 역사의 교훈이고 신앙인의 경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정의는 승리합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보복과 복수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를 기다리면서 정의의 하느님께 복수를 맡겨두고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시27,7)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 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 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오늘의 말·샘 기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살다보면 미운 오리 새끼가 눈에 띕니다. 그럴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반응하는 내 상념들과 감정들을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그럼 악과 악의 포로가 된 이들의 악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제자들이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하자,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9-30) 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오늘 복음의 말씀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참으로 '거룩함으로 불리움을 받았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다져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사람은 보통 자기가 받은 피해나 상처에 대해 누군가에게 앙갚음 할 때,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줘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그런 복수 행위가 민족이나 국가처럼 큰 집단의 차원에서 행해지면, 폭력이 극단으로 치달아 상대방의 목숨까지 빼앗는 ‘전쟁’이 되고 말지요. 그렇기에 모두가 폭력으로 인해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마구잡이식 복수를 방지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정의를 실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그 중에서도 ‘동태 복수법’이라 불리는 탈리온 법이 아주 유명한데,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힌 이를 벌할 때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상처는 상처로, 타박상은 타박상으로 갚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죄보다 가벼운 벌을 내리면 억울함이 생기고, 죄보다 무거운 벌을 내리면 복수심이 싹트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원래의 법 정신을 잊어버리고는, 정해진 선만 넘지 않으면 사적으로 복수를 해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수의 법’을 ‘사랑의 법’으로 바꾸고자 하십니다. 누군가 잘못된 말과 행동으로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더라도, 그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악에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이 세상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악인들로 가득한 ‘지옥’이 되고 말겠지요. 여기서 ‘맞서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래 뜻은 그것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이든 아니면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이든 “일일히 맞대응한다”는 의미입니다. 곧 상대방이 나에게 저지른 것과 똑같은 잘못된 방식으로, 부정과 불의 폭력과 거짓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인 겁니다.
먹을 손에 쥐고 있으면 손가락에 먹물이 들듯이, ‘악’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도 악에 물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에 맞서되 올바른 방식으로, 즉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야 합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악에 악으로 ‘맞불’을 놓는게 아니라, 악을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덮음으로써 그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불을 불로 끄려고 하면 막대한 피해가 생길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그 불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질 수 있으니 반드시 물로 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복수라는 부메랑을 타고 더 큰 악을 되돌아옵니다. 그러니 악을 이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더 큰 사랑과 자비, 선으로 그 악이 초래한 분노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는 것 뿐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정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복수의 정의와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비난과 모욕, 미움과 박해에 대해 분노와 심판의 불꽃으로 단죄하시는 대신, 용서와 자비, 사랑과 희생으로 감싸안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상징인 ‘십자고상’이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매달려 계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상처를 상처로 갚으려고 들면 내 상처만 더 크게 덧날 뿐입니다. 상처에는 사랑이라는 밴드를 붙여야 그 안에서 치유와 화해라는 새 살이 돋아납니다.
악을 악으로 대적하면 평화는 기대하지 못한다.<마태5/38-42>6/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 되는 것은 이 단순한 법을 지키지 않고 조금만 상처를 받으면 배로 갚아주려고 하다가 보면 보복되어 적은 감적적 갈등이 죽음까지 이릅니다. 왜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가? 주님은 때가 이르기 까지 적의 해로운 말이나 행위를 피해가시고 숨기 까지 하셨습니다.
수시로 일어나는 법적 투쟁이나 한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천국을 지옥으로 만드는 일에 협력하여 전쟁이나 투쟁 제거로 큰 불행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악의 원인을 버려두지 못하고 사그러들게 하거나 대적이 아니라 더큰 사랑으로 없어지도록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16살 때 세관을 지키다가 6.25 때 직접 인민군에 의해 어제까지 한 공간에서 이야기하고 놀던 한국 군인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현장을 보있던 일이 75년이 지난지금까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주님 말씀 따라 이쪽 빰을 치면 저쪽 빰을 내주어라 하시고 오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십리를 가주어라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아듣고 살고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시기질투로 살해 했을 때 사람들이 가인을 해치지 못하게 이마에 표를 해주었다는 기록은 서로 원망 북수로 이어지는 삶은 더 많은 악을 만들어 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악을 대하는 근본적 자세는 자비와 지혜입니다. 자비는 용서하는 마음 일급 번에 일흔 번 가지도 용서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악이 자리를 바꾸고 달라지는 모습을 가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지혜중에 지혜는 선을 베푸는 자세입니다. 부정을 긍적으로 바꾸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즉 나쁜 것을 더 나쁘게 하지 않고 나쁜 것을 좋은 것 짜증나는 얼굴에 웃음으로 답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친찬으로 원망과 불만을 감사와 찬미로 바꾸어 돌려주는 것입니다.
요사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것은 잘못하는 일을 대소 풍대 하여 판단하고 벌주려하고 자리를 탐하여 부정이나 강제로 자리를 빼앗으로 하여 협력이나 협치가 없이 독단적으로 자기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죄를 짖고 도 않지은 의인처럼 행세하려고 하고 가짜 뉴으스로 대중을 혼란하게 하는 사람은 더 많은 악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자비와 지혜로움을 나누며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먹을 쥐고 맛 대응 하지 말고 손을 펴고 마주 잡으며 웃음으로 대하고 진실과 사랑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지혜를 따라 살아갑시다.
완전한 사랑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기준이나 가치관과는 너무도 다른 당신의 기준을 제시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아 그렇게 되라고 하십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어려운데,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모두 사랑하라는 말씀은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현 가능한 것만을 우리에게 제시하신다면 우리는 완덕의 길을 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왔던 것, 그 이상의 완성을 향해 매진하도록 촉구하십니다. 하지만 지상의 여정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의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 한번에 완성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발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매번 새롭게 결단해야 하고 힘겹게 쏟아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은 우리가 쟁취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마치 태양처럼 우리를 끊임없이 비추며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하시는 원천이 됩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있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며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던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에게도 사랑의 열정은 메마르지 않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일이
악인에 반응하는
우리자신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오랫동안
악인에게
맞서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맞섦과 반응의
연속이었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맞서다 묶이게
되고
맞서다
더 끔찍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악인에게 맞서다
악인을 닮아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맞서는 방법을
버린 후에야
다른 길을
찾게됩니다.
악인이 만들어
놓은 덫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이 상황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입니다.
의탁의 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골몰하고
집중해야 할
대상은 악인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악인을
맡겨드립니다.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악인에게
반응하는
우리의 힘이
멈춰야 평화가
옵니다.
악인은
하느님의 빛 앞에
모두 드러날 것이며
어둠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믿음은 의탁이며
악인에 맞서지 않는
멈춤입니다.
악인은
하느님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맞서지 않을 때
사라지는
악인의 속성입니다.
새롭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의탁의 멋진
새날입니다.
2021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의 인터뷰 기사 내용 중에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작은 역할만 맡고, 대부분 사람이 날 싫어해 고통스러웠다. 관객들이 야유하며 ‘이혼녀는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굉장히 좋아한다. 이상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다.”
이혼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금 역시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정말로 대단했었지요. 더군다나 공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에 대한 공격은 더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윤여정 어록’이라는 글이 회자할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이 아주 뜨겁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이를 틀렸다고,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면서 못 살겠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려니’하면서 나를 변화시키면 그만입니다.
나를 좋아했다가도 금세 싫어하기도 한다는 것, 반대로 싫어했다가도 금세 좋아하는 것이 인간 아닐까요? 따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그러려니…. 싫어하는 것도 그러려니…. 어렵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러려니….’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상대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라는 말로 대신하십니다. 오히려 더 주라고 하시지요.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치기 위해서는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근동지역에서는 이렇게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아주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대로 한다면, 나도 오른뺨을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속옷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속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옷입니다. 밤에 이불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또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똑같이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사랑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에 대해 ‘그러려니’하며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더 멋있는 삶 같지 않습니까?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며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주님께서는 때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부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들어 깜박깜박하는 일이 무척 잦아졌습니다. 더불어 이것저것 잃어버리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나름 귀중한 자료들이 담긴 유에스비도 어디 뒀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 열쇠며 체크카드도 분명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 행방이 묘연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성인이 한 분 계시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이십니다.
잃어버린 물건이 생겼을 때, 안토니오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는 습관의 유래는 볼로냐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안토니오가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시편집이 한 권 있었는데, 그 책 안에는 나름 소중히 여기던 원고들과 메모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토니오는 성당의 자기 자기에 항상 놓여있던 시편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빨리 그 책을 찾게 해달라는 지향을 두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범인은 수련자였습니다. 그 시편집이 너무 탐이 났던 그는 그 책을 챙겨서 수도회 밖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안토니오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던지, 그 수련자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 시편집을 안토니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시편집은 오늘날 볼로냐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1195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해서 대성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4세 되던 1219년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런데 서품된 지 1년이 지난 1220년 안토니오 생애를 크게 뒤흔드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포르투갈 왕은 모로코에서 선교활동 중에 순교한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유해를 포르투갈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토니오가 생활하고 있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된 것입니다.
안토니오는 틈만 나면 순교자들의 유해 앞으로 다가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안토니오는 깊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토니오야! 지금 잘 갖춰진 수도원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지내는 것도 좋지만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수사들처럼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도 중요하단다.”
안토니오는 용기 있게 수도원 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를 보물처럼 아끼던 원장과 다른 형제들은 가슴 아팠지만 그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를 놓아줍니다. 정들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 한 연로한 수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페르디난도! 그럼 부디 성인이 되십시오!”
주체할 수 없는 안토니오의 순교 열정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자신의 영성의 고향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는 송구스런 일이었지만 프란치스코회로 적을 옮기게 되지요. 그리고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북아프리카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페르디난도였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더 크게 쓰시기 위해, 더 충만하게 살도록, 더 큰 물로, 더 위험한 곳, 더 필요한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안토니오 역시 순교자들의 불같은 신앙과 당대 큰 영성의 흐름이었던 프란치스코 영성에 깊이 매료되어 말을 갈아타게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은둔과 기도 속에 살던 안토니오가 어느 날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우연찮게 서품식 미사 강론을 안토니오가 맡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시작하자 청중들은 갑자기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토니오가 누군지도 잘 몰랐기에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강론은 깊이가 있을뿐더러 열정과 논리를 겸비했었습니다. 호소력까지 대단해서 그의 강론은 사람들을 완전히 매료시켰습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을 파악한 장상들은 안토니오를 이태리 북쪽 지방과 프랑스 전역의 순회 설교가로 파견합니다. 특별히 안토니오는 당시 신자들을 현혹시키던 카타리 이단에 맞서 교권을 수호하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의 명성은 자자해져서 가는 곳 마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설교로 이단과 오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지닌 영성의 깊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안토니오 사제의 고해소 앞으로 길게 줄을 섰습니다.
안토니오의 신앙과 교회관이 얼마나 확고했으면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쇠망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강론대에서 선포하는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면 사람들은 ‘전무후무한 설교가’라고 칭했습니다.
안토니오가 파도바에 가서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 도시는 안토니오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특히 안토니오의 1231년 사순절 강론은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킵니다. 때로 한없이 감미로웠지만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로웠던 그의 강론은 고리대금업자들을 강하게 공격했고 가난한 백성들을 따뜻이 감싸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도 당신의 특별한 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도록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안토니오에게 하신 것처럼 더욱 완전히 당신을 따르도록 새로운 가치와 인생관을 선물로 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유튜브를 통해서 ‘미국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축복받은 땅이라고 합니다. 영토를 넓히는데 전쟁을 하지 않고 넓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전쟁 후 영국은 배상금으로 당시 미국 13개주의 영토만큼이나 큰 땅을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의 영토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미국의 영토는 이내 4배로 커졌습니다. 멕시코와 거래를 통해서 많은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동부에서 시작한 미국은 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동부에는 대서양, 서부에는 태평양을 바다로 둔 나라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알라스카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하와이는 미국의 한 주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역사를 보면 짧은 시간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큰 전쟁도 없었습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은 미국을 보호하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미국과 혈맹관계에 있고, 멕시코는 미국 경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미국의 안보에 위험을 주지 않습니다.
축복받은 미국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상식과 이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사냥입니다. 평온한 마을에 아이둘이 아팠습니다. 의사는 마귀에 들린 것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저주한 사람들을 찾아내면서 평온한 마을은 광란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마귀로 지목을 받으면 재판을 받아야 했고, 죽어야 했습니다. 흑인과 유색인종을 아무런 이유 없이 차별하고, 폭력을 가하고 죽였던 ‘KKK'단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를 벌였습니다. 선량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메카시의 열풍도 있었습니다. 반지성주의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나타났습니다. 코로나 초기에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의학과 과학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였고, 백신접종을 거부하였습니다. 첨단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땅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축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는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원하면 하느님께서는 왕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사명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의 곁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셨고,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병자를 고쳐주도록, 마귀를 쫓아내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습니다. 야곱은 부당한 방법으로 형인 에사오의 장자 상속권을 가로챘습니다. 다윗은 부당한 방법으로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의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다윗은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부당한 방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에제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합도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아합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반지성주의의 그물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도 깊게 드리워졌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고, 도망갔습니다.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고발하였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재판하였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땅의 축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반지성주의의는 교만과 오만한 마음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납니다. 반지성주의가 자라나는 곳은 축복받은 땅마저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감사와 겸손에서 드러납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사막에서도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이 땅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당신은 나쁜 짓 하는 자 모두 미워하시고, 거짓을 말하는 자를 없애시나이다. 피에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를, 주님은 역겨워하시나이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윤리를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행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아무도 아프지 않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스로든 그 누구든
아무도 아프지 않게
나를 아프게 한 이를
똑같이 아프게 한다면
나에게든 그에게든
아픔은 있는 것
나를 아프게 한 이마저
아프지 않게 품을 때에
나에게든 그에게든
아픔은 사라지는 것
스스로든 그 누구든
아무도 아프지 않게
무한한 사랑으로의 초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무한경쟁시대는 물질만 보인다. 사람이 수단화 되고 존중과 섬김은 점점 사라져 간다. 서로 비교하고 우위를 점하려 상대를 무시해 쓰러트리고 점점 인간은 인간이길 더 포기한다. 악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어간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5,38)
이는 사람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서로 기대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데 서로를 바쳐주지 못해 송두리채 쓰러지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
예수님은 서로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 주신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상대방이 나의 오른뺨을 칠수 있는 것은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릴 때 가능하다. 내가 손등으로 상대방에게 맞는다 생각해 보라. 피가 꺼꾸로 설 정도로 모멸감이 들 것이다. 나는 한순간 자존심이 구겨지며 상대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닿아 분노는 사람을 죽인다.
예수님께서 상대로부터 오른뺨을 맞을 때라도 왼뺨까지 내 주라 이르신 뜻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나는 너에게 왼뺨까지 내어 줌으로 너의 악함까지 다 받아들이니, 이제 악쓰며 나를 때리지 말고 편하게 때리라는 의미라 여겨진다.
악인에게 맞서면 또 내 자신이 악인이 되어 서로 기대고 살 인간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여기에 깊고 심오한 진리를 발견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악인을 망하게 하는 것은 복수동태법이 아닌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직접 가르치고 보여 주신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악의 기본적인 공작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면서 그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악인에게 맞서는 순간 우리는 그 악인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들게 되면서 우리도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악은 우리가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단죄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지금은 그냥 기다리시고 놔두시지만 추수 때가 되면 그 가라지들은 하느님께서 뽑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선으로 대할 때 악은 우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함을 통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우리의 느낌과 달리 동태 복수법은
과도한 복수가 만연한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복수를 막는 사회 보호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이전의 공동체를 뛰어넘는 당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계시는 당신은
새로운 사랑의 방법의 지향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새로운 계명과 완성이었습니다.
그 지향과 계명이 오늘의 시간안에 채워지는 은총을 청해 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But I say to you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우리들이 듣고 있는 마태오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오 사도는 복음서를 쓸 때 그 대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을 위해서 구약의 율법을 먼저 언급을 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구약의 율법 들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이러한 율법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율법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이 율법은 꼭 하라는 뜻으로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복수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워낙 고집이 쎄서 복수를 해야 한다면 받았던 것 이상의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율법을 잘못 받아들이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수를 하지말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가 그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라고 하십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복수가 아닌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을 주라고 하십니다. 또한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를 한다면 이천 걸음을 가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신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에게 겉옷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겉옷은 단순한 옷으로써의 역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달라는 자, 꾸려는 자를 말씀하시는데 이는 다른이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래서 마음으로가 아닌 실질적으로 도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수를 하지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보호하는 겉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이런 사랑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없어도 나에게 비로 가진 것이 없어도 나에게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랑,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 중에서 몇 개만 준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남을 도와주는 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 혹은 재물이 많은 이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것을 실천한다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줄 것임을 잊지 맙시다. 복수,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것, 이 모든 것을 할 때 우리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아멘!
외상 후 성장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지만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심리학에선 이를, 신체적인 손상 또는 생명에 대한 불안 등 정신적 충격을 수반하는 사고를 겪은 후 회복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회복 상태와 긍정적 변형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신앙 여정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당했다고 생각하면 피해자가 되지만 인내를 배운다고 받아들이면 영적 성장이라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삶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선사하거나 우리가 원하던 것을 앗아갈 때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 그리고 뒤따르는 미움, 원망, 복수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물밀듯이 차오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을 바꾼다면 어떨까요. ‘혹시 나를 위해서 이런 일이?’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 관점을 바꾸면 우리들은 삶으로부터 뺨을 맞더라도 굴욕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천 걸음을 가 주면서도 기꺼이 앞장서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당장은 이기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지는 길이 있고, 당장은 지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회개의 생활화生活化.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悔改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벽부터 오랜만에 단비 흠뻑 내리니 새삼 농사는 하느님 농부께서 80% 지으신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이렇듯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은총중의 은총이 회개 은총입니다. 회개하는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얼굴의 성형成形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성형이 이뤄질 때 본래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한 자기를 아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회개하는 순수한 영혼들을 보면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덕聖德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덕은 회심回心과 참회慙悔의 역랑 안에서 자라납니다.”
엊그제 인용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어제 카톡을 통해 어느 자매에세 보낸 격려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죄를 안지어 성인聖人이 아니라, 죄짓더라도 용감하게 회개하고 더욱 열렬히 하느님과 이웃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성인입니다.”
저는 중요한, 마음에 각인하고 싶은 어휘에는 꼭 한자를 병기倂記하니, 한자와 더불어 보면 마음 깊이 각인되는 느낌이 듭니다. 평소 제가 느끼는 가장 아름다운 행렬은 둘입니다. 미사전례시 가난한 빈 손으로 성체를 모시기 위해 줄 서 있는 장면이요, 매월 첫 금요일 여기 수사들의 고백성사시 줄 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겸허하고 순수한 영혼의 모습들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장점은 “I was wrong!(내 잘못이다!)”의 명수였다는 일화를 잊지 못합니다. 수십년전 읽은 대목인데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정작 필요한 것은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보다 잘못했을 때, 즉시 “잘못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라는 말임을 깨닫습니다. 구구한 변명이나 핑계보다는 이런 깨끗한 사과의 한마디 말이 일거에 마음의 앙금을 해소하여 관계를 정상화시킵니다.
“좌우左右나, 진보進步와 보수保守의 문제가 아니라 정상正常과 비정상非正常,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이 문제다!”
작금의 사회 현실을 통해 통절히 깨닫는 사실입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사자성어를 기억할 것입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일컫는다는 뜻으로 고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행위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너무나 비정상, 비상식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이요 정직하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참으로 정상적, 상식적 사고를 지니게 하는 것 역시 회개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연상됐던 이런 묵상들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회개의 생활화-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이다”로 정했습니다. 오늘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만 36세, 짧은 나이에 선종하셨지만 성인의 향기는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좌표가 되면서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성인이 포르투칼의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에 입회했다가 모로코에서 순교한 작은 형제회 수사들에게 큰 감명을 받은 성인은 작은형제회에 전속하여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지니게 됩니다.
이어 모로코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병으로 인해 귀국하는 도중 파선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에 머물게 되었고 급기야 당대의 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교류하게 되었고 갑작스런 병으로 이태리의 파도바에서 36세 나이에 선종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섭리에 따른 파란만장한 회심의 여정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수많은 기적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전설중 하나가 되었고,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강론은 ‘성경의 보물창고’,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는 칭송을 들었고, 그레고리오 교황 9세는 ‘신약의 방주’라 칭찬했습니다.
그는 이례적으로 선종 다음 해 그레고리오 교황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946년에는 비오12세 교황으로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됩니다. 특히 성인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참으로 짧은 인생이었지만 성덕에 빛나는 완성의 삶을 살았던, 참으로 치열한 분투의 삶을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답을 주는 성인입니다. 바로 회심의 여정에 항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성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일화가 참 황당하게 생각됩니다. 어찌 이런 악행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눈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에다 희대의 악녀 이제벨의 악행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죽음, 무죄한 사람, 나봇의 죽음입니다. 어찌 이리 태연하게 살인의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정말 무지의 악의 폐해에 전율하게 됩니다. 다윗 임금에게 죽은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연상케 합니다.
이래서 절박한 회개의 필요성입니다. 무지로부터 정상과 상식의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무지에 답은 단 하나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회개의 생활화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회개한 겸손한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대당명제중 다섯 번째로 보복하지 말라, 폭력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다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참 대단한 내공이요 내적 힘이니 이 또한 회개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인 지혜요 관대한 마음입니다. 악에 대한 겁많고 비겁한 무저항이 아니라 적극적 선행의 실천이요 사랑의 저항입니다. 이렇게 적극적 사랑 실천의 저항으로 악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는, 무력화無力化시키는 이들이 정말 지혜롭고 겸손한, 강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옛 선인들의 지혜도 여기서 연유합니다. 악에 직접적으로 맞서 싸워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악순환惡循環의 반복일뿐이요, 괴물怪物과 싸우다 괴물怪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무지의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끊임없는 절박한 회개와 적극적 사랑 실천의 저항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한 지혜와 겸손이 악을 무장해제 시키고 악의 힘을 무력화합니다. 이래서 수도원처럼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과도 같은 기도와 일이 조화와 균형을 갖춘 일과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 시편전례기도와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생활화,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줍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셨습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습니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셨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하여 성인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흡족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자기에게 해준 것이 얼마인데’ 하는 생각도 들고, 자기만 생각하는 것만 같아 불편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누군가 나를 보면 그도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이렇게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해주면 결국 나를 이용해 먹고, 나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점점 더 달라고만 할 터인데 하며 아쉽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아,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이 듭니다. 주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내 이기적이고 깍쟁이 같은 마음을 보시면서도, 나에게 넘치고 흐르게 베풀어주시고 돌봐주셨구나 하는 마음에 고개가 숙어지며, 좁은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모든 불평과 불만을 잠재워 줍니다.
양보심은 자비와 지혜에서 나온다.< 마태5/38-42>6/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악의 속성은 선을 가로막고 선을 행하는 자를 화나게 약오르게 양보심을 없이 하려고 합니다. 대들거나 저항하면 더 강한 힘으로 미려붙쳐 쓰러트리려 망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 너희는 타인에게 맞서지 말라.” 하십니다. 악게 맞서면 싸음이 생기고 씨우면 t로 해를 받게 됩니다. 우전하다 보면 잘가는 차를 앞질러 운전수를 놀라게 합니다. 보통 욕이 나오고 어떤 경우는 자기도 그차를 앞질러 가고 싶어져 앞지르면 서로 쓸모없는 경쟁하다가 큰 사고가 날 수있습니다. 저는 그런 때 이런 말을 하면서 양보합니다. “ 얼마나 가는 길이 급하면 그렇게 할 까?” 하고 양보하면 나도 안전하게 운저하며 뛰 따라 갑니다. 그러나 다음 교통신호에 갈려 멈추어선 차를 보면서 아무리 서들러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금 억울한 일을 당하면 법에 고소합니다. 그러나 고소당한 사람 고소하는 사람 이유가 있지만 자비와 지혜가 있으면 평화롭게 해결하지만 자비심도 없고 지혜롭지도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집니다.
구약의 소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을 알고 있는 대로 한 아이를 놓고 두부인이 각자 자기아이라고 주장하니 지혜로운 소로몬은 그렇게 주장 하는 두부인에게 공편하게 반을 나누어 가지라고 했을 때 참 어머니는 죽이는 것 보다 양보하는 것이 낳다 하여 상대에게 주리고 하고 한 부인은 어차피 자기 아이 아니니 죽어도 좋다고 생가하고 그렇게 해서도 반을 찾이 하려고 그렇게 하자고 하니 소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은 양보하는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고 판결했다고 합니다.
어떤 장애에 대적하어 양보 없고 지혜도 없으면 언제나 사람 사이에 평화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대적은 생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아침 저에게 하느님은 실습을 시켜 주셨습니다. 사제 영성체 순서가 있어 제가 먼저 해야 하는데 매일 그렇게 하드니 이상하게 오늘은 먼저 앞에 나가는 사람있어 아니다 내 차례라 하고 싶었지만 조용히 양보하고 뒤따라 영하고 “ 주님 이렇게 양보가 필요하다고 알려주어 감사합니다.” 하고 내일도 먼저 나가면 또 양보하여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양보는 생각에서부터 나오고 말에도 행동에도 양보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앞서 나가고 말이 앞서 나가고 행동이 앞서나가면 시비가 붙고 서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필요에 따라 넘치게 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에 이야기 속에 외투를 입은 사람 웃을 벗기는 시합을 바람과 햇빛이 했는 데 바람은 있는 힘을 다해 강하게 바람을 불어도 옷을 밧지 않고 태양은 따듯한 햇살을 비치이니 옷을 벗었다고 합니다. 햇빛 정책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따듯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며 악이 선을 시기하듯 살지않고 선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진실과 사랑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맞서는 것이
아니라
맡겨드리는
믿음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신앙이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주체도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는
주체도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진정한
실천이다.
악인에게
맞서거나
악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주님과 함께
이 길을
복음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평화는
바라는사람에게
기꺼이 바라는 것을
내어주는 참된
실천이다.
참된 실천이
죽으면
늘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다.
낮아지는
실천이
필요하다.
더 낮아져야
고요할 수 있다.
부여잡는 것이
아닌 내려와
하느님께
돌아서는
우리들의
회개이다.
회개는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천 번을 싸워
천 번을 지는
어리석은
반복이다.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되는
기쁨이며
고요이다.
악인에게
반응하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우리들의
호흡이다.
반응하지 않으면
지나가고
맞서지 않으면
영향력을
더 이상
끼칠 수가
없다.
하느님께
열리는
선(善)한
삶의 기쁨이다.
악에서
구하시고
악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 순간들을
맡겨드리는
봉헌이다.
봉헌이
변화이다.
책을 9권이나 출판했고, 매달 묵상 잡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또 인터넷에 20년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서 글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점점 더 글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부족한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런데 처음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릴 때만 해도 그렇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나에 대해 ‘열심히 살고 있다’라는 특별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0년 전의 글이 훨씬 나은 글이었을까요? 자신감 넘치게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인터넷에 올릴 생각을 했냐며 부끄럽기만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요. 우리 역시 많이 알면 알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겸손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앎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알면 알수록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면 그만큼 겸손해지는 우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은 세상이 보여 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겸손의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복수하는 삶도 아니고, 자신의 것만을 챙기는 삶도 아니고, 오히려 어리숙하고 미련해 보이는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겸손의 모습으로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해 참 행복의 길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의 삶도 사랑의 삶을 외면하면서 철저히 세상의 논리를 통해서만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주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냥 급급하게 지금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보다는 주님의 지혜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참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기쁜 마음으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게 됩니다.
멈추지 말고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라.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안나 파블로바).
시간
지난 3월 말,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고령이신데 고관절 골절이 된 것입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폐렴에 빈혈, 여기에 폐에 물이 차서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소식을 듣고 강화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병원까지 부랴부랴 운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면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면회가 제안되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위험한 순간은 넘겼다고 해서, 얼굴도 뵙지 못하고 다시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병원에 갔는데 허탕 쳤다는 생각에 억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운전하는 동안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쳤던 것, 운전하며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는 화살기도를 계속 바친 것, 어머니와의 좋았던 추억을 생각했던 것 역시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억울해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결과에 이르지 못하면 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소한 일상도 나의 삶이며, 그 소소한 일상과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소중한 것입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시간 외에는 어떤 시간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을 나쁘다고 단정 짓는 순간, 내게 나쁜 시간은 참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 나의 삶을 구성하는 이 시간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집중한다면 얼마나 많은 유익한 시간이 내게 다가오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군인으로서 충실해야 할 국방의 의무는 뒷전이고,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잡으신 분, 만만한 재벌들 등쳐서 천문학적 재산을 축척한 분, 부정축재한 돈 회수하려니 29만원 밖에 없다는 분, 그분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보다 훨씬 멋질뿐 더러, 대한민국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칭찬하는 그 부인!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합 임금과 이세벨 못지 않은 비참하고 가련한 독재자와 부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텐데, 그들 후손들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오 복음 5장 39~42절)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신때 가능합니다.
살아가면서 자주 발끈한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의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계적인 생태학자가 티베트에서 스님들과 회의를 했을 때입니다. 생태학자의 찻잔에 파리가 한 마리 빠졌습니다. 생태학자는 그런 경험이 전에도 있었기에 ‘별일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스님이 생태학자의 얼굴을 보니 생태학자는 다시금 ‘별일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손가락을 넣어서 찻잔에 빠진 파리를 꺼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파리도 별일 없습니다.’ 순간 생태학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은 생태학자로 자연과 환경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님은 생태학자는 아니지만 찻잔 속에 빠진 파리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자연과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몸에 들어왔습니다. 대공황 때보다 더 큰 경제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여행도 할 수 없고, 식당에도 갈 수 없고,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축구도, 야구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치료약을 개발하고, 백신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내 보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유럽도, 미국도 이제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별일 아닌 것’이 아니지만 경제위기가 더 큰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지구가 인류에게 보낸 백신인지도 모릅니다.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과 생물에게 ‘큰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탐욕과 개발은 생태계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봇에게 포도원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유산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포도원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땅은 소유와 매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이었고, 후손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어머니와 같았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아합 왕에게 나봇의 포도원은 그저 가지고 싶은 또 다른 포도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포도원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럼에도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포도원은 조상이 물려준 유산도 아니었습니다. 포도원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는 삶의 터전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또 하나 가지고 싶은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별일 아닌 것처럼 나봇의 포도원을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빼앗았습니다. 아합 왕만 그랬을까요? 지난 세기 인류는 제국주의라는 부당한 힘으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약한 이들의 포도원을 강제로 수탈하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WHO의 회의에 참석해서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은 인류가 함께 개발하고, 백신은 모든 나라에 동등하게 공급되는 공공재로 만들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백신이 공급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단절과 봉쇄만으로는 막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가 안전해질 때 비로소 나도 안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와 연대, 협력과 나눔만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백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고 합니다. 자국민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하고, 백신을 소유하겠다고 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서 가격을 정하겠다고 합니다. 당연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백신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경제논리에 몰입하는 이들에게 찻잔 속의 파리는 별 일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문제가 있어서 사람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은 친교와 나눔 그리고 사랑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상의 질서와 관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문제가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느님께서 특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님이 파리를 사랑해서 찻잔 속의 파리를 꺼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세상이라는 찻잔 속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십시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아주 어릴 적에 장애인인 동생이 놀이터에서 노는 데 다른 아이들이 동생을 놀리면서 모래를 던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장애인인 동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형으로서 정말 울화가 치밀어 올랐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생에게 모래를 던진 아이를 한 대 때려 줄려고 득달같이 달려갔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모래를 던졌던 아이들을 보니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잘 타이른 뒤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악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함께하지 못한 불쌍한 영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직도 회개하지 못하고 그렇게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영혼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은 결코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악을 이기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선’입니다. 마치 진흙탕에서 서로 뒹굴 듯이 내가 악으로 악을 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고 우리는 하느님의 선을 통해서 악을 씻어낼 수 있어야 하고 그 악인들까지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모든 악은 그 하느님 안에서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선을 이루어가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악과 맞서지 마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밖에 비가 내립니다
맹꽁이가 즐겁게 울어댑니다
소리가 커졌다 작아집니다
그놈들 중 지휘자가 있나 봅니다.
밤이 깊어지니 소리를 키웠습니다
여명이 있자 소리를 줄였습니다.
날이 밝자 쉬자합니다.
맹꽁이 심하게 울어댈 때
나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건강해서 자장가 들으며 신경 끈 덕분입니다.
위층 주인은 신경이 예민했습니다
잠을 한 숨도 못자고 뒤척이나 봅니다
나에게는 즐거움이 그에게는 최악인가 봅니다. 제발 잠좀자자 소리쳤습니다.
나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고 했습니다
오케스트라 협연 명상음악이라 여기자고 권유했습니다
오늘 복음(마태5,38-42)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자연음도 신경쇠약자에게 최악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꿨습니다. 맹꽁이 입장이 되기로 했답니다. 너희도 한철에 울어야 하니 즐기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모처럼 잘자고 일어났다 했습니다. 그는 불면을 넘었습니다. 악이 지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악과 맞서지 마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8~3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불의와 마주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예수님 말씀이 점점 어렵게 다가옵니다. 불의와 억압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진 것 없고 힘 없는 이들은 제 한 몸 지켜내기도 버거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짓밟히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행여 당하게 되면 되갚아주고 싶어합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 다른 세상 말씀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주 잔인무도한 폭력이 등장합니다. 재산과 권력으로 거칠 것 없는 아합 임금 내외가 포도밭 임자인 나봇에게 저지르는 만행입니다.
아합은 자기 궁 곁에 정원을 꾸미고 싶어 나봇의 상속 재산인 포도밭을 탐합니다. 정상적인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조상 대대로 이어온 상속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지 않지요. 아무리 임금이어도 하느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존중한다면 이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겁니다.
나봇 이야기는 사회 정의와 권선징악의 주제를 숙고하도록 돕는 좋은 텍스트가 됩니다만, 오늘 말씀께서는 저를 다른 길로 이끄십니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1열왕 21,2).
아합 임금의 터무니없는 요구 안에 감추어진 상징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하느님과, 신부인 하느님 백성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에는 "포도밭"과 "정원"의 표상이 풍부히 등장합니다.
"아침 일찍 포도밭에 나가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 우리 보아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겠어요"(아가 7,13).
포도밭은 하느님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되고 성령의 기운이 되는 포도주를 빚는 열매가 맺히는 곳이지요. 그런데 이 포도밭에 이르는 길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아가의 여인 역시 환희와 상실의 굴곡진 여정을 거쳐 포도밭에 도달하지요. 우리가 걷는 신앙 여정, 인생 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포도밭은 오직 나에게만 속한다오"(아가 8,12).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여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녀에게 하느님 외에 다른 주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온전히 소유하고 온전히 속한 관계, 바로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악입니다. 도움이나 호의를 가장하고 들어와 비등한 대가를 제시한다 해도 악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하느님에게서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에게서 인류를 분리시키는 악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결국 나봇은 이제벨의 계략과 음모로 스러집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이에 동조해 무고한 이를 해친 자들은 그것이 충성이라 여길 겁니다. 물론 포도밭도 당장은 아합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시 이 말씀을 마주합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점점 더 구체적이 되어 갑니다. 오른뺨 친 이에게 왼뺨도 대주라고, 속옷 달라는 이에게 겉옷도 주라고, 천 걸음 가자고 강요하면 두 말 않고 그 곱절로 가주라고, 달라면 주라고, 꿔달라면 꿔주라고...
이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질문이 하나가 올라옵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사실 예수님은 그처럼 어려운 요구를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오늘 말씀 안에서 나봇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포도밭인 우리, 사랑하는 신부인 우리를 지키시려다 무참히 희생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장 비참한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은 듯 보였지만, 결국은 부활로써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 차지하십니다! 아합과 이제벨이 피로 약탈한 포도밭을 누리지도 못하고 엘리야 예언자의 전언대로 비참히 생을 마감한 것처럼(1열왕 21,17-26; 22,29-40; 2열왕 9,30-37 참조), 결국 악은 주님 앞에서 패배합니다.
당장에는 무도한 악행과 무죄한 이들의 희생이 전면에 보이지만, 예수님의 희생제사는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고 속삭입니다. 악에 대한 승리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묵묵히 수난과 죽음의 여정을 걸으신 예수님은 그래서 당신이 아시고 친히 가신 길을 우리에게 권고하시지요. 그분은 그러셔도 됩니다. 충분히 자격이 있으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이 답 역시 오늘의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영성체송).
그렇습니다! 억울한 죽음으로 목숨을 잃은 나봇은 하늘 나라에서 비옥한 포도밭을 영원히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맞서지 않고, 내어주고, 가 주고, 양보하고, 물러서 준 양선한 이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지상에서건 천상에서건 양선한 이들이 한 평생 살 주님의 집은, 주님과 나누는 뜨거운 사랑이 포도주로 빚어지는 아름답고 평화스런 포도밭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 사랑에 취해 행복하지요.
이제 예수님의 요구가 강요 아닌 초대로 느껴집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의 포도밭을 지키는 일 말고는 과감히 내려놓고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요. 조금 잃고 조금 손해 보더라도 마음과 영으로 더 큰 부요를 차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하느님을 차지하십시오.
예수님의 인생안내 참 존경합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자신을 관리하는 하늘사랑의 방법에 대해 예수님은 알려 주셨습니다만,
하늘사랑 방법대로 살면 세상은 바보 천치 맹꽁이 라고 하니 속상해요.
세상법이 인류에 먼저 파고들어 하늘사랑법이 파고들 자리가 없습니다.
용서 사랑 봉사 나눔 등을 좋게는 보지만 차후 도덕교육문제로 밀지요.
용서와 보복 사이를 자유가 선택하며 그 기록은 내 블랙박스에 남아요.
내 삶의 블랙박스는 죽은 후 하늘로 자동전송 돼 검사결과 판정받겠죠.
하느님가족 정신으로 세상을 살라는 예수님의 인생안내 참 존경합니다.
세상사는 방법을 제대로 알려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믿도록 합시다.
나봇 이야기의 교훈 - 성체성사의 실천 ⓵ 희년법과 파스카 과업
이기우 신부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이 주간에는 성체성사의 은총을 실천할 수 있는 길에 대하여 매일의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당시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구약의 희년법이 얼마나 유명무실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로마세력이 식민통치를 하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얼마나 폭력과 악이 판을 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해학적 풍자입니다.
희년법은 안식년법의 연장으로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안식년은 안식일법의 연장이고, 안식일법은 육체 노동을 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의무를 부과하는 날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날로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던 엄중한 율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안식일법을 계승한 십계명의 제3계명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원래 취지가 아니라 ‘주일 미사에 빠지지 마라’는 정도로 축소되어 인식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나봇이 살던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 시절은 물론이요, 그 후 8백여 년이 흐른 뒤 예수님 당시에도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과 관련된 십계명의 입법취지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본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의 뜻은, 이들뿐만 아니라 같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던 모든 이들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해 줌으로써 인간다운 품위를 회복하고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회복하고자 하시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파스카 과업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뜻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되었고 왜곡되었으며 급기야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독서의 내용을 보면, 나봇이 경작하던 포도원은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였고, 그 기원은 여호수아 시절에 열두 지파가 토지를 분배받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희년법의 규정은 토지 분배 시점 이후에 여러 가지 개인적 사정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저당을 잡히기도 할 수는 있으나, 안식년을 일곱 번 맞이한 그 이듬해에는 모조리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었습니다. 다행히 나봇의 집안에서는 물려받은 포도원 토지를 저당잡힐 필요도 없었고 팔아치울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나봇은 그저 성실하게 포도원을 경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이 하필 왕궁 옆에 있었기로 아합 왕이 자기 정원으로 쓰고 싶은 욕심이 나서 팔라고 했지만 나봇은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토지를 함부로 팔 수도 없었으려니와, 설사 판다고 해도 희년법 정신과 규정을 지키는 이스라엘 동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라면 희년이 닥쳤을 때 되돌려받을 수라도 있지만, 이방인 출신 왕비 이제벨에 의해 놀아나던 아합 왕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절한 나봇을 이제벨이 악한 꾀를 내서 결국 죽여버리고 나서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해 버렸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 사상과 풍조가 왜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집트 탈출 시에 계시된 하느님의 존재와 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디 나봇 혼자서만 당한 일이었겠습니까? 왕국이 분열되고 다시 멸망하기까지 줄곧 지속된 타락상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시대에는 이민족 로마의 지배까지 받게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로마의 수직 폭력 아래에서 별별 수평 폭력들이 다반사로 저질러지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어쩌다 마주친 로마 병사로부터 무례한 요구를 받아도 순순히 들어주지 않으면 뺨을 맞기 일쑤였고, 속옷 같은 극히 개인적인 사유물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기기도 했으며, 장비와 물건을 날라야 하는 로마 병사들에게 잘못 걸리면 천 걸음씩 징발당하기도 다반사였습니다. 군중 속에 끼어서 구경하던 키레네의 시몬이 기진맥진하시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재수 없게 짊어져야 했던 사정이 여기서 기인한 것입니다.
도처에서 악이 판을 치는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신 진복팔단의 삶을 살아가려는 제자들과 군중이 하느님께서 본래 원하셨던 대로 선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오른뺨을 맞으면 다른 뺨까지 맞을지언정, 그리고 속옷을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겉옷까지 내줄지언정, 심지어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받으면 이천 걸음을 가 줄지언정, 악인들의 사악함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 민요에도 익숙한 해학적 표현이요 풍자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사실은 성체성사의 현실에 있어서도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파스카 정신과 상호 섬김이라는 본래의 취지가 희미해지고, 성사 그 자체의 신비를 강조하고 그 신비에 열광하는 성체신심은 성체성사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만듦으로써, 광범위한 냉담 현상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체성사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실천하도록 이끄는 일이야말로 냉담을 예방하고 기복신앙을 방지하는 특효 처방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은 생명의 빵이요 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네 성체성사의 현실은 이 성사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 현실에서 생명의 기운을 회복하는 거룩한 변화를 이룩함으로써 예수님의 뜻대로 원상복구되어야 합니다.
<폭력을 포기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2020. 6. 15. 월)(마태 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이 말씀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로마 12,21). 예수님 말씀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에 맞서지 마라.”가 아니라, “악인에게 악으로(폭력으로) 맞서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을 실현시켜야 합니다. 선은 선으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악을 통해서 선이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성경에 복수를 허용하는 율법만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잠언 25,21-22).”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라는 말은, 선으로써 악인을 깨우쳐 주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보상해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것을 주님께서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원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은, 탈출기와 레위기에는 죄와 벌은 상응해야 한다는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고(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기에는 거짓 증인을 처벌하는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신명 19,21).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율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이 율법의 본래 뜻을 잊어버리고, 또는 외면하고, 사적으로 복수를 할 때의 근거 규정으로 악용했습니다. 복음서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 말씀에 “폭력을 포기하여라.” 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 제목은 번역자가 붙인 것이지만 어떻든 이 제목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를 보면 대단히 폭력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나온다. 그것은 당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행동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요한 2,14-16),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서 ‘채찍’은 사람들을 치기 위한 채찍이 아니라, 짐승들을 내보내기 위한 채찍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신 것은 과격하게 보이긴 합니다. (짐승들이 몰려 나가는 과정에서 혼란과 소동이 벌어지고, 그래서 탁자들이 엎어지고 돈이 쏟아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향해서 폭력을 사용하신 일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성전 정화 때의 예수님의 행동을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 설명했습니다(요한 2,17).
악인에게 악한 폭력으로 맞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실 때 경비병이 뺨을 치자 다른 뺨을 돌려 대시지 않고 그 경비병을 꾸짖으셨다. 그것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당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행동이 아닌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재판을 받고 있는 죄수일 뿐입니다. 그래서 경비병을 꾸짖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성경 번역자는 예수님의 말투를 전부 ‘해라체’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한낱 죄수일 뿐인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에게 해라체로 말을 놓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로마제국 총독인 빌라도는 식민지의 죄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투를 존댓말로 바꾼다면, 경비병에게 하신 말씀의 느낌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를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부당한 재판에 대해서 항의하는 힘없는 피고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뺨을 돌려 대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실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 대시기 전에 경비병이 먼저 양쪽 뺨을 모두 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항 자체를 하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말씀은, 뺨을 치는 사람보다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받아 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거나, 더 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힘이 없어서 당하기만 하는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해도 힘이 없어서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속옷과 겉옷에 관한 말씀, 천 걸음과 이천 걸음에 관한 말씀,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라는 말씀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아라.”가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악을 굴복시켜라.(악을 제거하여라.)”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는 정말로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을 때가 많은데, 바로 그럴 때에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정의와 선의 실현은 신앙인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마태 5,13-16).>
우리의 기도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주님의 기도’에서 (Nn. 8-9: CSEL 3,271-272)
평화와 일치의 스승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마치 각자가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하듯이 기도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또는 “오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죄 사함을 청할 때 나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고 나만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또 “나만 악에서 구해 주소서.”라고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한 사람을 위해서만 하지 않고, 우리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온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
일치의 유대를 가르치시고 화목과 평화의 스승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드님 안에 모든 이들을 하나로 모으셨듯이 우리 각자도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불 가마 속에 갇혀 있던 세 젊은이는 입을 모아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을 때 이 기도의 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성서가 이것을 증거해 줍니다. 성서는 그 세 사람이 기도할 때 사용한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그들처럼 되기 위하여 기도할 때 본받아야 할 모범을 제시하였습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그때에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입을 모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그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입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세 젊은이는 순수하고 영적이며 평화로운 기도로 주님의 마음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효과를 드러내어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그 제자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사도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모두 마음을 모아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그 기도의 열성과 그들의 마음의 일치를 통하여 사람들을 당신 집에 화목하게 살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만 당신의 거룩하고 영원한 집에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의 기도에는 참으로 크고도 많은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몇 마디 말로 표현되지만, 영신적 힘에서는 풍요합니다. 천상 교리의 요약인 이 기도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 청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빠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새사람으로 태어나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되돌아온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성서는 말해 줍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름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분께 감사 드리고, 그분의 자녀임을 보여 드리기 위해 기도드릴 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힘없음의 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날카로운 칼도
물을 자를 수 없습니다
칼날에 잠시 자리를 내줄 뿐
물은 다시 흐르기 때문입니다
날선 도끼도
바람을 멈출 수 없습니다
도끼의 거친 몸짓마저
바람은 품어 벗 삼기 때문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는 소식을 들으면, 먼저 내 마음 속에서 그 누군가와의 관계가 떠 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네가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 나도 이렇게 한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뻔히 아시는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9-42)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회적인 관점에서 말씀하시면서, ’도와 줄 때는 그냥 곧이곧대로 다 믿지 말고, 사정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를 잘 확인하고 도와줘라.‘ 라든지, ’한 번 도와주면 다음에 어려울 때 또 기대거나 의지하도록 만들기 쉬우니, 딱 잘라서 거절하던지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내지는 ’동정으로 적선하듯 하지 말고 사랑으로 나누어라.‘ 등의 어려운 이와 함께하는 방법을 조심스레 일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잘 들어보면,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하고자 하신 말씀은 어려운 이와 함께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원수 갚지 말라는 지향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동태복수법 같이, 우리 안에 적대감을 가지고 상대에게 복수하지 말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그저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기억해 내고, 또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를 예상하는 등 나와의 연관 관계에서가 아니라, 당장 오늘 그가 어떤 경우를 겪고 있는가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살아가기로 합시다.
양보와 굴복 <마태 5, 38-4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악에 맞서지 마라” 하시는 말씀은 악의 세력이 무서워서 강한 압박을 받고, 박해를 받아서 더 어려움에 부닥칠까 걱정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악에 굴복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양보심과 굴복은 다른 의미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난폭 운전자를 만나 방해받거나 이리저리 약을 올리고 앞질러 간다고 나도 앞질러 경쟁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누가 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할 때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같이 비난하면 거짓 비난이 생겨 서로의 인격에 손상을 입게 됩니다. 아름다운 양보가 선의의 경쟁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악에 굴복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며 자기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비합리적인 경쟁은 음모, 사기, 억압이 따라옵니다. 그렇다고 자기도 음모나 시기나 억압으로 상대를 이기려고 하면 이겨도 승리가 아닙니다. 누구한테 한 대 맞고 맞대응하여 한 대 때리면 두 대가 날아옵니다. 그러면 또 몇 대, 결국 큰 싸움 되어 살인까지 가게 됩니다.
정치에 참여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전체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악에 저항하지 말고 양보와 타협으로 정치하여야 합니다. 비방, 음모, 사기, 억압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면 다음 또 다른 방법으로 보복을 받게 되어 처음과 같지 못하게 되어 더 나쁜 정치로 국민을 어렵게 합니다.
주님은 적이 멀리 쳐들어오면 화해를 청하고 전쟁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화해나 의견의 일치는 굴복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악에 저항하지 않고 악을 물리칠 수 있을까?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화내는 사람 앞에서 웃으며 대하는 자세는 하나의 덕입니다.
겸손과 온유함의 덕은 가난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열왕기에 나봇이란 땅 부자가 임금이 땅을 넘겨달라고 하니 거절하여 나중에 죽게 되어 땅을 빼앗겼다는 말은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하셨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지갑을 달라고 할 때 주지 않으려고 하면 생명까지 빼앗길 염려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지갑을 달라고 하니 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어서 지갑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지갑 빼앗기고 생명까지 빼앗길 염려가 있어서였다고 합니다.
강도는 돈 빼앗고 생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강도가 우선 돈을 가지려고 뛰어가는 동안 도망가서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객기를 부리고 힘이 없으면서 자랑하다가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이 40일간 사막에서 엄재하신 다음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며 “왜 그래? 나 힘들어 저리 가” 했으면 유혹을 이긴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겠지만, 돌을 내밀어도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하시고 성전 꼭대기에 끌고 가도 저항하지 않고 따라가고, 산 위에 끌고 가도 따라가셨지만, 비굴하게 자기에게 절하라고 하니 주님은 단호히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유혹에 승리하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마음과 양보심으로 적을 덕으로 물리칠 수 있도록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아갑시다.
초 여름날 한 낮 산들바람이 분다.
최민석 신부님
비가 지나가고 난 다음 날, 맑고 청아해진 산들바람이 분다. 비에 깨끗하게 씻긴 바람을 들이마시고는 힘차게 뱉어내는 산 꿩의 울음소리가 산골짝 위에서 길게 빗금을 그으며 내려온다.
아침나절은 피는 꽃 지는 꽃을 보느라 다 보내고 오후에는 텃밭을 일구었다. 산기슭에 저 혼자 피었다 지는 나무의 꽃잎이 눈발처럼 날리는 날은 괜히 가슴이 설렌다. 마당 입구에 있던 진달래는 봄이 지나버린 지금 초여름에서야 화사한 꽃잎 드리우며 미소 짓는다.
담쟁이 넝쿨 힘차게 뻗어 담을 넘어 오르고 넘는다. 마당 정원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포도나무도 넝쿨 손 사이에 아주 작은 앙증맞은 새끼 포도송이다. 바람을 따라 푸른 잎 사이로 붉은 빛 보리수 열매 주렁주렁 열렸다.
올해는 보리수 열매가 유난히 많다. 아침이면 뜨락 밑에 환하게 핀 초롱이 줄지어 꽃을 피운다. 민들레는 뿌리내릴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돌 틈이고 구석진 뒤뜰이고 거름더미 옆에고 가리지 않고 피어 척박하고 그늘진 그곳을 환하게 바꾸어 놓는다.
민들레는 꽃이 지고 난 뒤에 씨앗으로 또 한 번의 아름다운 꽃등을 만든다. 민들레 씨앗이 만든 동그랗고 하얀 꽃씨다발은 모두 하나씩 등불이다. 먼 곳으로 흩어져 날아가기 직전에 동그랗게 스크럼을 짜고 고요 속에 기도하는 모습이다. 햇살도 민들레 꽃씨와 하나가 되어 먼 곳으로 함께 떠날 준비를 하며 침묵의 순간 위에 머물러 있다.
텃밭에도 민들레가 있다. 예기치 않는 순간에 바람이 불어와 멀리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을 바라보다 호미를 들었다. 부디 잘 뿌리내리기를, 아름다운 꽃이 되어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밭고랑의 풀을 뽑아내자 지렁이가 온몸을 뒤틀며 몸부림친다. 몸으로 내리는 따스한 볕도 싫고 환한 세상도 원치 않는다는 몸짓이다.
밭에 있는 지렁이야말로 땅을 기름지게 하는 농군이다. 지렁이는 분변토를 만들어 텃밭에 아주 좋은 거름이 되게 한다. 내가 씨앗을 뿌릴 모든 흙은 지렁이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부드러운 흙이다. 밭일을 하다가 땀을 씻느라 고개를 드니 낮달이 해사한 얼굴로 먼저 나와 있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오 5, 41-42)
마음이 풍성하니 나눔도 섬김도 사귐도 모두 넉넉하다. 텃밭에 심어놓은 오이 호박도 오가는 손님마다 다 따 주어도 넘친다. 밭에 심어놓은 농작물을 누가 따 갈까봐 조바심 내고 경계하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누구든 따다 먹으라고 한다. 모든 것이 넉넉하니 텃밭에 자라는 양배추 토마토 상추 가지 고추 등 그저 보기만 해도 풍성하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으로 보낸 하루는 가슴 뿌듯하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든 모임에서 새로 만나 알게 된 사람이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유익하게 시간을 보낸 날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 내 안의 하느님도 빙그레 웃으신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그런 날은 나 자신을 만나는 날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날 그를 위해 신경을 썼던 것처럼 나 자신을 만나는 날은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낸다. 나를 위해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시도 읽어주고 새로 나온 책도 권한다.
나는 나에게 무엇보다 오솔길 산책을 즐기게 해주고 작은 풀꽃들을 만나고 이름 모를 새들과 맑은 바람을 오래오래 만나게 해준다. 산 벚나무처럼 홀로 고요 속에 가만히 있게 해주거나, 편안하게 누워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듣게 해준다. 그러다 잠이 오면 한 두 시간 낮잠을 자게 해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동안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도 청안하다. 몸에는 풀냄새 나뭇잎냄새가 배고 마음에는 바람소리가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눈은 초록빛 물이 들고 귀에는 새소리 풀벌레소리가 쌓인다. 그런 냄새, 그런 소리들이 내게는 큰 재산이다. 내가 베고 누웠던 구름, 내 귀를 씻은 물소리가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어 살아 있다.
나 자신을 만나는 날은 내 영혼도 맑고 투명해져 푸른 하늘 위를 떠다닐 것 같다. 아니 나 대신 내 안에 하느님이 더 기뻐하시며 좋아하신다. 나는 텅 비어 있는 날이 좋다. 내 안에 나를 돌보고 배려하는 시간이 내게는 또 다른 선물이다.
자비의 마음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내 눈을 다치게 했다면, 나 역시 그 사람의 눈을 다치게 하고, 다른 신체 부위나 재산의 손실 역시 그와 똑같이 되갚아주라는 당시 아주 일반적인 법의 원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이 법이 참 냉정하다 싶기도 하지만, 원래 이 법의 정신은 당한 만큼만 복수하고, 더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복수라는 게, 하다 보면 내가 당한 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을 돌려주고 싶게 되지요. 한 대를 맞으면 먼저 때린 괘씸죄를 보태어 두 대를 때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원칙을 만들어 필요 이상의 복수를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예 복수를 생각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복수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말라는 것이지요. 복수를 할 바에야 차라리 한 대를 더 맞고, 더 손해 보고, 나에게 요청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해주라고 하십니다. 본래 자기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원한이나 복수, 계산적인 자세가 아니라,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차기를, 그래서 그 가득 찬 것이 자연스럽게 겉으로 드러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자비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 찰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자비가 지혜다.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 끊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신부님, 지금쯤 수도원 미사중이겠네요. 피정도 고프고 그곳의 기도소리와 새소리 풀향이 그립습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청초한 사랑, 메꽃들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새롭고 행복하세요!”
“너무 예뻐요. 청초라는 표현과 정말 닮았네요. 감사합니다.”-
힘들지만 힘껏 기도하며 노력하며 살아가는 자매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아침 산책때 마다 만나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거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야생화 메꽃들이지만 참 요즘 장관입니다. 정말 하늘에 떠오른 별들같습니다. 며칠전 나눈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이란 시를 다시 나눕니다.
-“하늘의 별같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땅에 떠오른
무수한 별무리 청초한 메꽃들
하루 폈다지는 ‘하루살이’꽃
하루가 평생이다
환상적이다
공동체의 아름다움이다
주변이 환하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다”-
하나하나가 하늘의 별같은 사람들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고귀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이 만나는 고귀한 이웃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답이요 길입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오전 오후 참 많은 분들의 면담성사를 준 날입니다. 보속 처방전 말씀은 주로 6월 예수성심성월에 맞는 다음 예수님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15,12)
사죄경과 강복을 드린 다음, 집무실에 걸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 서도록 한후 사진도 찍어 드리고 함께 찍기도 했습니다. 또 미사신청차 방문한 어느 모녀母女분의 모습이 너무 정다워 함께 사진을 찍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웃으며 찍을 때의 표정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던지요. 사진을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요즘은 ‘사랑의 사진사寫眞師’가 된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웃으며 사랑할 때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나하나가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들입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의 사랑을 환기시킵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탐욕이, 악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봅니다. 무죄한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는 아합 임금과 이를 사주하는 그의 아내 악녀惡女 이제벨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행위가 공분公憤을 자아 냅니다.
사람이 무지와 탐욕에 눈멀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우리 자신을 보게 합니다. 참으로 쥐도 새도 모르는 완전범죄이지만 하느님의 눈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 어디나 CCTV가 있지만 하느님은 모두를 살펴 보는 진짜 CCTV입니다.
문득 노자도덕경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이 친 그물은 눈이 성기지만 그래도 굉장히 넓어서 악인(惡人)에게 벌(罰)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 다’는 고사성어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에서 보겠지만 이 두 악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철저한 응징이 뒤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물음이 있습니다. 가해자들이야 심판도 받고 벌을 받는다 하지만 나봇같은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어떻게 보상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이들의 죽음이요 지금도 계속되는 현실아닙니까? 죽은 목숨 살려낼 수는 없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한 일인지요.
어제 면담성사를 줄 때 자매의 말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믿음 깊고 담대하고 침착한 분이었습니다. 한 밤중에 분노를 삭히지 못한 남편이 방에 들어와 목에 칼을 대고 “살고 싶으냐 죽고 싶으냐?” 묻길래 “살고 싶다” 말하니 칼을 내 던지고 짐 싸들고 집을 나갔다는 일화입니다. 누구나 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본능입니다. 그러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말로나 행위로 살인하는 것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나봇같은 무죄한 이들을 하느님께서 결국 살리시겠지만 역시 여전히 우리에게는 영원한 화두요 안타까움입니다. 정말 무지와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와 더불어 사랑의 노력이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구체적으로 가까이에서부터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비가 지혜임을 깨닫게 합니다. 보복의 악순환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악을 무력화시키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적극적 자비의 실천뿐입니다. 악에 대한 무저항이 아니라 일일이 악에 맞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유혹입니다. 발본색원 악의 뿌리를 뽑는다 하지만 이 또한 유혹이요 악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경우가 십중 팔구입니다. 요즘 북한의 행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침착한 대책이 절실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도 있지만 답은 거룩한 자비행뿐입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란 말도 있고 사랑에 굶주린 악이란 말도 있습니다. 참 악의 신비입니다. 이런 악에 정면대응하지 말고 적극적 자비의 실천으로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의 지혜가 고스란히 반영됨을 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런 이들이 성인聖人입니다. 제가 피정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성인이 되라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세상에 온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악을 무력화시키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이런 자비행뿐임을 깨닫습니다. 얼핏보면 바보 천치天癡같으나 참으로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대우大愚가 대자大慈의 대지大智라는 역설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나봇이 이런 말씀의 정신대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아합의 요구에 따라 처분했다면 살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나봇에게는 부질없는 가정이겠습니다.
좌우간 우리 믿는 이들의 공적公敵인 무지와 탐욕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또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깨달아 적극적 자비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결코 보복의, 폭력의 악순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우리가 악인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맞서서 이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맞서는 힘이 아닌
주님을 향하는
믿음의 힘에
우리가 성장합니다.
맞서려는
마음대신
복음의 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우리의 행복임을
깨닫게됩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주님의
품이지 악인을
향한 미움과
증오가 아닙니다.
서로를
상(傷)하게 하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악인에 맞서거나
반응하지 않는
믿음뿐입니다.
그 믿음이 서로를
치유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