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모둠살이, 향약·계·두레 이야기
전통 시대 우리 선조들은 생활 반경을 중심으로 지역공동체를 조직하여 서로 간에 생업을 돕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의지하였다. 또한 질서 유지를 위해 도덕규범의 실천과 규정 준수를 장려했는데, 이를 어길 시에는 직간접적으로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두 왕녀의 길쌈 대회(그림: 홍기한, 출처: <초등독서평설> 2020년 9월호)
신라 3대 국왕 유리이사금은 6부의 여성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길쌈을 시킨 뒤, 8월 15일 그 성과를 겨루고 온갖 놀이를 행하는 가배(嘉排)를 행하였다. 흔히 한가위의 기원이라 알려져 있는 가배는 우리나라에서 지역공동체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준다. 고대 이후 불교가 유입되면서 지역공동체 조직은 향도(香徒)라 불리는 신앙 결사로 운영되기도 했다. 향도는 부처에게 번영을 기원하면서도, 지역공동체의 부역(賦役), 상장례 때의 상호부조, 각종 의례를 담당하였다. 지역공동체는 농경사회의 발달에 따라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더욱 밀접해졌으며, 시대의 특성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조선 시대 지방자치, 향약
향약(鄕約)은 조선시대 지배이념이자 생활규범이었던 성리학의 자치 규약이다. 중국 북송 남전현(藍田縣)의 여씨 형제가 처음 향약을 제정했고, 이를 이상적인 사회 규범으로 인식한 남송의 주자(朱子)가 새롭게 정리하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다. 주자의 향약 규정은 선행을 서로 권장하는 덕업상권(德業相勸), 허물을 함께 규율하는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의로 서로 교제하는 예속상교(禮俗相交), 우환과 재난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4대 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후기 성리학이 도입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사대부도 『주자대전』과 『소학(小學)』에 수록된 향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사림 세력은 자신들의 근거지인 지역 사회에서 향약 시행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의 사림파 인사들은 조정에서 전국적인 향약 시행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 시대 각 고을에는 양반 사대부 계층이 주도하는 유향소(留鄕所)가 있었다. 유향소는 보통 고을에서 풍속 교화, 향리 규제, 수령 자문, 인재 추천 등의 기능을 가진 자치 기구였다. 양반들은 고을 단위 자치 기구인 유향소 운영을 통해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16세기 중반 이후 이황(李滉)의 「예안향약(禮安鄕約)」, 이이(李珥)의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을 시작으로 향약은 유향소의 자치 규범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양반 계층에게 향약 시행은 이상적 향촌사회를 구상했던 주자 성리학의 실천이었다. 아울러 향약의 4대 강령은 유향소 운영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부여하였다.
1519년 안동부사 이현보가 본인의 부모부터 사족(士族)에서 천민(賤民)까지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관아로
초청하여 베푼 양로연(養老宴) 그림, <화산양로연도(花山養老燕圖)>(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향약 시행에 앞장 선 것은 양반 세력만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수령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관들도 유향소를 중심으로 향약을 시행함으로써, 이를 교화와 지방 통치의 보조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정조 연간에는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반포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향약 시행을 권장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보수 양반 유림들과 수령들이 향약 조직을 통해 농민군을 방어했으며, 민심을 수습하는 수단으로 향약을 시행하였다.
이처럼 향약은 자치 규범을 표방하고 있지만, 관치행정을 보조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고, 관권에 의해 조직의 권위를 보장받았다. 따라서 양반들은 유향소의 향약 활동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고 지역공동체의 이해를 관철시켜 나갔다. 하지만 향약의 권위를 빌어 사익을 챙기는 병폐도 발생하였다. 때로는 구성원 간의 경쟁이 심해져 치열한 향전(鄕戰)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의 지방자치를 연상시킨다. 현대의 지방자치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천이듯이, 향약 운영은 당대의 통치 이념인 주자 성리학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양반 중심의 향촌 지배질서 확립, 동계·동약
고려 후기 이후 농업 기술의 발전은 양반 사대부 계층을 향촌으로 견인하였다. 이들은 혈연 및 인척 관계로 맺어진 사회적 집단과 함께 반촌(班村)을 형성하였으며, 원활한 촌락 지배를 위하여, 사회·경제적 종속 관계에 있는 민촌(民村)과 반촌의 하층민을 아우르는 동계(洞契)·동약(洞約)을 시행하게 된다. 동계와 같은 촌락 단위의 공동체 조직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농경사회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촌락 단위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계는 기본적으로 구성원의 복리 증진을 위해 공유 재산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조직이었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도 적극 활용되었다.
『동약(洞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동계는 성리학의 자치 규범인 향약과 접목되기도 했는데, 이를 동약이라 부른다. 역시 기존의 촌락 조직에 성리학적 명분을 부여한 것이다. 향약의 4대 강령 중 ‘과실상규’는 하층민을 직접 규제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예속상교’를 통해 양반·서얼·상민·노비 등 촌락 내 다양한 신분 간의 질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환난상휼’은 촌락 조직의 공유 재산을 양반이 주도할 수 있는 근거였다. 따라서 같은 촌락 조직이라도 동계와 동약이 혼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향약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 내용은 동계와 다름없었다. 16세기 경상도 예안현 온계동(溫溪洞)의 진성이씨 일족과 그 인척이 주도하던 온계동계(溫溪洞契)가 어느 시기부터 향약의 외투를 입고 온계동약이라 불린 것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안동 퇴계종택 상여나가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조선의 가례)
일반적인 동계·동약 규정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이 상호부조 조항이다. 조선 시대 동안 상장례(喪葬禮)를 비롯한 각종 의례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거행하는 것은 양반 신분 유지에 필수 요건이었다.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해 의례를 제때 거행하지 못한다면, 양반 지위 유지에 큰 결격 사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동계 조직은 상호 부조를 통해 각종 의례 때 물력 부조, 물품 대여, 상례 시 호상(護喪)과 일꾼 차출 등을 도와주기도 했다.
한편으로 양반은 동계·동약 조직을 통해 촌락의 하층민을 직접적으로 통제하였는데, 이를 상하합계(上下合契)라고 한다. 여기서 하층민은 하계(下契)로 분류되어, 양반이 주축을 이루는 상계(上契)의 통제를 받았다. 상하합계는 명문 벌족이 세거하는 반촌에서 흔히 시행되었는데, 영남에서는 예천 고평동(高坪洞), 예안 계상동(溪上洞), 안동 하회(河回)의 동계, 경주 양좌동(良佐洞), 대구 부인동(夫仁洞)의 동약이 대표적인 상하합계이다.
『역중일기(曆中日記)』(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부인동 동약을 제정한 최흥원(崔興源, 1705~1786)의 『역중일기(曆中日記)』에는 그가 부인 장례에 동약의 일꾼을 동원한 것과 마을의 불효자를 관부에 보고한 후 동약 모임에서 직접 면책(免責) 처벌을 내린 사실이 확인된다. 또한 1750년 1월에는 「동약절목(洞約節目)」에 관인(官印)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다. 부인동 동약처럼 양반층은 관부로부터 하층민을 통제하는 상하합계의 효력을 공인받았으며, 이를 통해 향촌사회 내에서 자신들 주도의 신분질서 체제를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촌락공동체 운영과 공동노동, 촌계와 두레
계로 대표되는 지역공동체 운영은 양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층민이 거주하는 민촌에서도 상호 간의 이익을 도모하는 계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반촌에 거주하는 하층민과 노비들도 계를 운영하였는데, 양반 중심의 동계와 구분하여 이를 촌계(村契)라고 부른다. 촌계는 자연 촌락의 발달과 함께 각 촌락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이며, 양반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 때는 상하합계의 하계에 편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18~19세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양반 주도의 동계는 침체되는 반면, 촌락공동체의 이익을 적극 대변하는 촌계 조직은 오히려 활기를 띄게 된다.
촌계는 성리학적 교화를 명분으로 하층민을 통제했던 동계와 달리 촌락공동체의 실질적인 이익을 위해 운영되었다. 우선 촌계는 촌락의 부세(賦稅) 행정을 주도하였다. 조선 후기 부세는 동리별 총액제로 부과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때 촌계가 각호에 납부할 세액을 배정하고, 공동납(共同納)을 통해 촌락에 부여된 각종 부세에 대응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촌계 조직은 관부에 청원하여 부세 감면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한편으로 촌계는 기본 자금을 마련한 뒤 이자 증식을 통해 촌락의 공공사업을 수행하거나, 대(貸付) 사업을 실시해 촌락민의 복리 증진을 도모하였다. 촌락의 산림천택(山林川澤) 관리와 결속력 강화를 위한 동제(洞祭) 거행도 촌계 조직이 도맡았다. 어촌 촌락의 경우 촌계가 근해어장 및 각종 어구(漁具)를 관리하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농·어촌의 촌락공동체 조직 대부분은 이러한 촌계의 명맥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벼농사 모내기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김홍도필풍속도화첩>_새참(출처: 문화재청)
두레는 촌락민의 생업과 관련된 공동노동 조직이다. 두레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고대 농경이 발달함에 따라 발생한 공동노동 조직을 그 효시로 보고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두레의 형태는 조선 후기 이앙법(移秧法)의 보급과 함께 일반화되었다. 모내기와 김매기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경우 두레 조직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두레는 보통 자연 촌락을 단위로 형성되었기에 촌계에 의해 관리되기도 했으며, 양반이 주도하는 상계의 통제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7세기 초반 예천 고평동과 영주 화천리(花川里) 동계에서는 당대(當隊)의 영수(領首)가 하계를 규찰하였는데, 여기서 당대는 두레 농민들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일정하게 조직된 대열이며, 영수는 그 당대의 대표를 뜻한다.
<서산 운산리 볏가릿대 내리기>_고사상과 농기·삼재기·향약기(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밀양 농악 백중놀이>_자반뒤지기(출처: 문화재청)
두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공동회연(共同會宴)이다. 고된 노동을 마친 후 두레에 참여한 농군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놀이를 즐겼다. 대표적인 놀이로는 풍물놀이가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풋굿·호미씻이 등과 같은 행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두레에 새로 가입하려는 자는 일정한 통과 의례를 거쳐야 하는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 구성원을 접대하는 것이다. 이는 지역에 따라 진서턱·진새 등 다양하게 불렸다. 두레 조직의 공동회연이 열리 때는 양반들도 그들의 놀이 행위를 묵인하였다. 집안 노비가 두레에 가입해 있으면 하루 휴식을 주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 물력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촌락공동체 유지에 있어 공동회연은 노동의 능률을 높이고 단결력을 강화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집필자 소개
이광우
영남대학교에서 조선시대사를 전공하였고, 조선후기 향약 연구를 통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학교·경운대학교에서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옥산서원』(공저), 『문명과 과학의 역사』(공저), 『산림처사 송암 권호문의 삶과 학문』(공저)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첫댓글 좋은 글 제공 감사합니다.
우리 전통사회를 구성하였던 공동체 규범 등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하나 없어져 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