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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14,17ㄴ-22
17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18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9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시온을 지겨워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
20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22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려 줄 수 있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묻자 주인은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29-30)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에페 6,12: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이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드릴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 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밀밭의 가라지'
(마태 13,36)
주님!
이 세상에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판을 쳐도,
내 안에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꿈틀거려도,
비록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오늘도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구별과 차별을 하는 것이 가라지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가라지가 꼭 밀 가운데 섞여 있는데, 그 가라지들을 우리가 뽑으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잘 솎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까 합니다.
지금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밀이라고 생각하는가?
가라지라고 생각하는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를 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지입니다.
자기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밀이고
다른 사람을 가라지라고 생각하고 솎아내려는 사람이 실은 가라지입니다.
이것이 지난 토요일 저의 나눔이었습니다.
오늘의 나눔은 이것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구별과 차별하는 것이 가라지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구별하지 않는 것, 특히 차별하지 않는 것이 밀입니다.
불교에서 구별은 부처가 할 짓이 아니고, 그러니 깨닫지 못한 자가 하는 짓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은 이 구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이라는 것 또는 가라지라는 것은 선에서 시작되지요.
이것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은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이것만이 선이라고 하는 순간 이것이 아닌 것이 악이잖습니까?
양단의 개념이란 것이 다 이렇습니다.
흑백논리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을 백이 아니면 다 흑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고,
그 이전에 흑과 백을 나누고 구별하는 것 자체가 나쁩니다.
구별이 이렇게 나쁘면 차별은 더 나쁩니다.
구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일 뿐인데 악한 것이라고 하고,
오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려 하는 것처럼 악한 것이기에 없애야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나눔에서 악이란 죄의 악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선)를 파괴하는 죄악까지 괜찮다고 하거나 그런 죄악을 우리가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인생의 끝에 서면>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 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이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갈라 6,8-9)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상 여정은 알곡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알곡은 추수 때 곳간에 쌓일 것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는 이것 하나로 결정된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지막 때에 밀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늘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지만, 가라지는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진리입니다.
지옥이 없다느니, 상태를 말한다느니 하며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지옥에 어떻게 가지 않아야 하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힌트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죄짓게 할까요?
그들을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란 소설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평가하는 기준과는 다를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루앙시를 프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 몇 명의 귀족, 정치인, 부자, 종교인이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중에 비곗덩어리로 불리는 창녀 한 명도 끼어 있었는데, 조금 뚱뚱하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자신이 가진 음식을 일행과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도 지녔습니다.
무엇보다 프러시아의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애국자 중 하나였습니다.
일행은 토트 시에 잠깐 머물게 됐는데 그 젊은 창녀에게 눈독을 들인 프러시아군 장교가 그녀와 잠자리하지 않으면 그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가 싫어 탈출한 애국자가 프러시아군 장교와 잠자리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여관방에 갇혀 지내다 보니 일행도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녀 주제에. 한 번 자 주면 되지.’
그래서 그녀가 장교의 말을 들어줄 수 있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심지어 함께 탈출하는 수녀들까지도 그녀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위대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창녀는 장교와 하룻밤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일행은 창녀를 벌레 보듯 합니다.
음식도 챙겨올 시간이 없었던 그녀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애국심에 가득 차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혁명가를 크게 부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밀과 같았던 이들이 가라지로 드러났고, 비곗덩어리로 불리며 쭉정이인 줄 알았던 창녀만이 밀로 드러났습니다.
창녀는 다른 이들을 이용하지 않았고 죄짓게 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죄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창녀를 죄짓게 한 이유는 자기들 이익 때문입니다.
무슨 이익을 얻었을까요?
자신들은 몸 파는 사람이 아니라는 교만함과 육체의 자유와 자신들이 가진 소유를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신이 되려고 하는 것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진짜 신이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죄가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닌, 하느님 없이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
(CCC 398)
하느님께서 주시는 살과 피, 곧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 없이 신이 되는 방법은 타인을 죄에 빠뜨리며 이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돈을 통해서 내가 주님이 되고, 육욕을 통해 내가 창조자가 되며, 교만을 통해 내가 심판자가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새 소설 ‘고양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이 이렇게 나에게 잘 해주니 나는 신이 분명하다.
개와 고양이의 생각은 다릅니다.
개는 주인을 통해 신이 되려 하고 고양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이 되려 합니다.
누구나 신이 되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피조물로서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나를 본래 신으로 여겨 신 없이 신이 되려는 방향,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름도 넣어졌고 액셀러레이터도 밟혔습니다.
이제 방향만 잡으면 됩니다.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
내가 신이 되려고 하거나,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착한 뜻’은 결국 나 스스로가 아니라 내가 ‘신을 통하여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울부짖음이 섞인 하소연은 마치 오늘 우리의 고달픈 현실을 대변하는듯 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우리네 인생이 언제나 만사형통하고 가화만사성하며, 하루 온종일 웃음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호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결코 원치 않은 고통이 줄줄이 찾아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혹독한 시련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딸이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멀쩡하던 내가 갑자기 쓰러져 비참한 몰골로 변해갑니다.
우리가 이토록 참혹한 괴로움 속에서 울며 부르짖는데도 그 누구하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주님은 대체 어디 계시냐? 우리를 아주 잊으셨냐?며 외치지만, 그분께서는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현실이요, 오늘 우리가 겪고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간과 우리 인간의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폭과 주님의 보폭은 천지차이입니다.
우리의 천년이 주님께는 하루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지극히 사소한 고통 앞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 희망이 없어 보여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정의 구현도 사랑입니다>
1)
‘가라지의 비유’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자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은 ‘심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구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밭의 주인은 종들에게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합니다. (마태 13,29-30)
여기서 ‘내버려 두어라.’는 “관심 갖지 말고 방치하여라.”가 아니라, 밀로 변화되기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 가라지가 밀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도(죄인이라도) 회개하면 ‘밀 같은 사람’으로(의인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인으로 잘 살고 있다가 타락해서 죄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리시는가?
‘무기한’은 아닙니다.
수확 때가 되기 전까지, 즉 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입니다.
심판이 시작되면, 또는 심판의 날이 닥치면 회개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좀 막연한 느낌이 드는데,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누구나 실감이 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의식이 있다면 회개할 수 있지만,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에서, ‘나중’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고, 우리에게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기회밖에 없습니다.
2)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를 사회 정의 구현의 관점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세상이고, 거의 항상 의인들이 악인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무작정 최후의 심판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그 사랑은 ‘자비’를 통해서 드러날 때가 많지만, 사실 ‘정의 구현’도 하느님의 사랑을 잘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자비이신 분이고, 동시에 정의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기도 하고, 심판 날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바로 벌을 내려서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실 때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헤로데’ 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첫 번째 헤로데는 말년에 끔찍한 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던 두 번째 헤로데는 왕좌에서 쫓겨나서 헤로디아와 함께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세 번째 헤로데는 ‘천벌’을 받아서 죽었습니다(사도 12,23).
그 일들은 하느님의 심판은 종말에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작정하신 때에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3)
하느님의 정의 구현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을 당할 때마다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불의와 악을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악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메시아 시대’를 갈망한 다음 시편이 연상됩니다.
"그가 풀밭 위의 비처럼, 땅을 적시는 소나기처럼 내려오게 하소서.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시편 72,6-7)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이 땅에 하느님의 완전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바로 그 희망의 실현을 위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하고, 온갖 사회악과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 공동체의(교회의) 사명이고 본분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 종말 - “구원이냐 멸망이냐?” - 더불어Together, 귀가歸家의 구원 여정>
"주는 온유한 자 의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당신 도를 배우게 하시나이다."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 친히 하신 설명이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이라 함이 맞지만 예수님 역시 동의하리라 생각됩니다.
우의적 해설이라 더욱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1.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2. 밭은 세상입니다.
3.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입니다.
4.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5.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입니다.
6. 수확 때는 세상 종말입니다.
7. 일꾼들은 천사들입니다.
비유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원래는 하느님의 ‘인내’에서, 우의적 해설에서는 그 초점이 ‘심판’으로 바뀝니다.
저는 세상 종말을 죽음으로 바꿔 이해합니다.
죽음을 통해 인생 모두는 끝나고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세상 종말과 같은 현실이겠기 때문입니다.
세상 종말 시 두 부류로 나뉘는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히 드러납니다.
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첨예하게 대비되는 구원과 멸망의 상태 인간들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하라면 누구든 둘째 번일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둘 중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미사도, 수행도, 회개도, 사랑도, 기도도, 공부도, 감사도, 희망도, 믿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더 기도하라고, 회개하라고, 사랑하라고, 공부하라고, 깨어 살라고, 찬미하라고, 감사하라고, 기뻐하라고, 믿으라고, 희망하라고 연장되는 우리의 생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힘껏 사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의 말씀처럼,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날마다 하루하루의 선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요즘 널리 깊이 회자되는 이름이 김민기입니다.
사후 이처럼 큰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매스컴 모두가 다루고 있으며 일간신문에는 사설에서 칼럼에서 끊임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종교란을 보니 무종교라지만 종교인 이상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고 순수했던 삶이었습니다.
길다싶지만 여러 대목을 나눕니다.
“우리 모두는 김민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
삶과 예술이 합일하는 드문 경지를 보여준 김민기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그의 노래 제목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늘 푸르렀던 사람, 그가 떠난 자리가 너무도 황량해 우린 한동안 몸살을 앓을 것이다.
명복을 빈다.”
“나직한 음성 하나하나가 마음으로 들어오는 ‘봉우리’.
맑고 슬픈 서사가 입에 감기면서 가슴을 감싸는 ‘백구’.
그리고 무던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한발한발 걸어가던 그분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어눌하기는커녕 너무나 아름다운 그 노랫말들을 다시 천천히 되뇌며, 공자가 진정으로 추구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의견이 좋고 내용이 충실하여 잘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함)을 감히 떠올린다.
‘잘 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
제가 볼 때 김민기는 익명의 크리스천이요 세상 속의 누구 못지 않은 구도자이자 수행자였습니다.
김민기님을 위한 전주교구 이병호 퇴임 주교의 장례미사 시 추모 강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미 신화가 전설이 된 김민기입니다.
제가 한 개인을 이렇게 길게 강론에 인용하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혹자는 윤동주와 비교하는데 그 이상일 것이며, 아마 곧 평전도 나오리라 봅니다.
이분의 '아침이슬'과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제가 요즘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1951년 생이니 저보다 두 살 아래로 참 자신을 많이 성찰 분발하게 합니다.
그러니 결국 가라지의 비유가 의도하는 바는 회개와 더불어 현재의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왔던 길을 돌아보는 까닭은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헤매지 않고 바른길로 나아가고자 함이다.”
<다산>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나쁜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억, 감사, 희망의 순서입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감사가 샘솟고 감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꽃피어납니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똥이 싹을 북돋우는 것과 같다.
똥은 더러운 것이지만 싹을 북돋아 좋은 곡식으로 만든다.”
<다산의 여유당 전서>
뉘우침은 기도와 성찰이 포함된 회개로 읽으면 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새롭게 샘솟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입니다.
엊그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한 교황님의 담화문 한 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떻게 노년을 맞이할까에 대해 좋은 도움이 되는,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조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능한한 독립적이고 다른 사람과 분리된 삶 안에서 개인적 성취를 추구합니다.
공동체의식은 위태로워지고 개인주의가 찬양받고 있습니다.
곧 ‘우리’에서 ‘나’로의 전환은 우리시대의 가장 명백한 징표입니다.
우리가 혼자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가장 근본적인 논거가 되는 가정마저 이러한 개인주의 문화의 희생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들고 쇠약해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사회적 유대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개인주의의 환상은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에서 더 이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옆에 없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때에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너무 늦은 시점에서 이를 깨닫습니다.”
교황님이 '더불어'의 공동체 삶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혼자와 더불어가 조화된 삶이요, 우리의 여정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의 여정 중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내 삶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할 때,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래야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선물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요셉수도원 공동체에 부임한 후 36년 동안 정주하고 나니 하루로 하면 정오 12시에서 오후 4:30분쯤 된듯하고, 일년사계로 하면 늦여름에서 초겨울로 진입한 듯 이제 노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 절박한 심정으로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을 찾게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의 고백은 이런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를 대표한 예언자의 고백입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저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하루하루 아버지의 집으로의 더불어, ‘귀가의 구원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일일일생, 일년사계중 어느 시점에 있는지요?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들을 귀있는 사람은 비유의 진리를 깊이 듣고 깨닫고 알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구원의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흐뭇이 즐거워하라.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
(시편 33,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자신과 이웃과 세상 안에서 양편 모두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지혜>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물으십니다.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마태 13,36)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가라지에 더 꽃힌 것 같습니다.
분명 비유는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4)로 시작하는데, 비유 속 종들도, 비유를 듣는 제자들도, 그리고 이 복음 대목을 만나는 우리들도 종종 좋은 품종의 밀보다는 가라지에 더 신경이 쓰곤 하지요.
밀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마음에 머무릅니다.
그분 어조는 치우치지 않는 시각을 담담하게 담아냅니다.
뽑아버려야 한다고 나서는 종들의 호들갑이나 근심스럽게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반응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밀과 가라지, 그 둘의 공존을 인정하고 바라보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마태 13,43).
이것이 결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원한 행복을 보시는 거지요.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마태 13,41)이 가라지라면, 이를 조장하는 악의 실체와 함께 결국 불에 타 사라져 버릴 것이니까요.
아무리 현실이 악에 시달려 고통스럽고 황폐해져도 이 세상 창조의 원리가 사랑이고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사랑이시니 결국 사랑만 남습니다.
의인은 해처럼 빛을 내면서 결국 사랑이 찬연히 남으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다의 처참한 현실이 예언자의 애닯은 목소리로 읊어집니다.
침략과 기근, 질병과 두려움으로 비참한 백성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지요.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레 14,20)
어찌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예언자는 백성을 대신해 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죄악과 어둠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그 결과인 고통과 시련 역시 질기게 들러붙어 있지만, 그 아비규환 한가운데서 힘을 내어 일어나 주님을 향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예레 14,22).
모든 것을 무너뜨린 자기들의 죄악과, 처절히 겪는 결과적 징벌 상황 안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아 희망할 수 없을 때, 희망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희망일 것입니다.
무너진 유다가 예언자의 입을 빌어 희망을 고백합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레 14,22).
이 희망은 창조라는 원천적 축복으로 돌아갑니다.
창조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선하신 하느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만물이 결국 제 본성을 되찾아 사랑으로 회복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과 고통, 평화와 두려움, 창조와 소멸, 밀과 가라지...
이 모든 것이 세상을 두루 채우고 있습니다.
한쪽만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되지요.
자신과 이웃과 세상 안에서 양편 모두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지혜는 영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낳습니다.
벗님!
예수님처럼 봅시다.
예수님은 모두를 아우르십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우리의 선함을 되찾아 주시고자 스스로 죄인이라 불리길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담담하고 선한 시선에 우리 눈길을 실어 우리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바라봅시다.
너른 들녘, 밀과 함께 살랑이는 가라지조차 아름답게 보인다면 사랑은 그만큼 지척인 셈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
뉴욕엘 며칠 다녀왔습니다.
신문사에 있는 계좌를 정리하려면 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계좌는 닫았고, 다른 하나의 계좌는 결재권을 후임 신부님에게 넘겨 드렸습니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은행 업무도 같이 마무리해야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덕분에 뉴욕에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후임 신부님과 호흡을 잘 맞추고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문사 홈페이지의 변화였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돌아오니, 수녀님의 도움으로 청년들이 창고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지난번 창고를 만들면서 어른들이 매주 토요일에 만났습니다.
그렇게 4개월 만나면서 저는 본당 교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고는 단순히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창고는 친교와 나눔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벽화를 그려보라고 하였습니다.
벽화는 청년들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지만, 벽화를 통해서 청년들이 친교와 나눔을 가질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저의 뜻대로 청년들은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 자주 만났고, 재능과 끼를 모아서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어냈습니다.
‘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서양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면서 분석하고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쩌면 ‘통합과 통섭’ 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원리와 기초를 생각하는데 자꾸만 죄가 떠오릅니다.
죄는 부끄럽고, 죄는 멀리해야 하겠지만 우리 삶의 발자국에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병은 우리 몸에 깊은 상처를 주지만 우리 마음은 그 병 때문에 오는 ‘근심, 걱정, 두려움’에 더욱 큰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완전하게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는 음식을 섭취하고 나서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입니다.
배설물은 혐오스럽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배설물은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갖게 됩니다.
굳이 오래 간직할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는 에너지로 사용되고 남은 배설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입니다.
죄란 어쩌면 우리의 몸과 둘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죄라는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죄는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우리 영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식은 2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약함을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죄인은 회개를 만나면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죄인은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주님을 만나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성인도 죄 중에 있었지만 회개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랬습니다.
우리들 역시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육상경기에서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넘어졌습니다.
그 뒤로 오던 선수가 넘어진 선수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둘은 서로 선을 잡고 결승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박수 쳤습니다.
넘어진 1등을 뒤로하고 2등으로 오던 선수가 1등이 되었다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 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모두 기억할까요?
대니엘 카니먼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이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차가운 물 속에 손을 담그고 버티게 했습니다.
이때 A 집단은 1분 동안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있게 했고, B 집단은 1분에 30초 더 얼음물에 손을 담그게 했습니다.
그러나 B 집단은 1분 30초 뒤, 30초 동안 따뜻한 물에 손을 담글 수 있게 했습니다.
정리하면, A 집단은 1분 동안 찬물에, B 집단은 1분 30초 동안 찬물에 그리고 30초를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근 것입니다.
이 중 어느 집단이 더 고통을 호소했을까요?
얼음물에 1분 30초 담근 B 집단이 더 오랫동안 찬물에 있었으니 괴로웠을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A 집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괴로웠는가보다 최후의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B 집단은 따뜻한 물 30초가 괴로움을 한껏 낮춰준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고통과 시련의 무게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무엇인가를 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 나올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서 좋은 기억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이 역시도 지나갈 하나의 과거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안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만나면 힘이 들고 또 큰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라지 같은 저 사람 때문에 도저히 못 살겠어!’라면서 포기하고 좌절해야 할까요?
가라지에 눌려서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세상 종말 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울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의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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